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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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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네루다 시모음
2016년 11월 01일 22시 14분  조회:6272  추천:0  작성자: 죽림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당신은 
해질 무렵 
붉은 석양에 걸려 있는 
그리움입니다 
빛과 모양 그대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름입니다.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부드러운 입술을 가진 그대여 
그대의 생명 속에는 
나의 꿈이 살아 있습니다 
그대를 향한 
변치 않는 꿈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사랑에 물든 
내 영혼의 빛은 
그대의 발 밑을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입니다 

오, 내 황혼의 노래를 거두는 사람이여 
내 외로운 꿈속 깊이 사무쳐 있는 
그리운 사람이여 
그대는 나의 전부입니다. 
그대는 나의 모든 것입니다 

석양이 지는 저녁 
고요히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나는 소리 높여 노래하며 
길을 걸어갑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내 영혼은 
그대의 슬픈 눈가에서 다시 태어나고 
그대의 슬픈 눈빛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슾른 시를 쓸 수 있네.

 

 


예를 들면 밤하늘을 가득 채운

파랗고 멀리서 반짝이는 별들에 대하여

하늘을 휘감고 노래하는 밤바람에 대해서.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네. 
그녀를 사랑했고 그녀도 나를 사랑한 때 있었네. 

이런 밤에, 나는 그녀를 내 팔에 안았네. 
무한한 밤하늘 아래 그녀에게 무수히 키스했었네.

 


그녀는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녀를 사랑한 때 있었네. 
그녀의 크고 조용한 눈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밤새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쓸 수 있네. 
더이상 그녀가 곁에 있지 않은 것을 생각하며

내가 그녀를 잃은 것을 느끼며

 


거대한 밤을 들으며

그녀 없이 더욱 거대한 
그리고 시는 풀잎에 떨어지는 이슬처럼

영혼으로 떨어지네.

 


내 사랑을 지키지 못했는데 무엇이 중요할까. 
밤하늘은 별로 가득 찼어도

그녀는 나와 함께 있지 못한데.

 


그게 다야.

멀리 누군가 노래하는

멀리 내 영혼은 그녀 없이는 없어. 
그녀를 내 곁에 데리고 올 것처럼

내 눈은 그녀를 찾아 헤매지.

 


내 심장도 그녀를 찾아 헤매지만 그녀는 내 곁에 없지. 
똑같은 나무를 더욱 희게 만드는 그날 같은 밤

 


우리

예전의 우리

우리는 더이상 같지 않지. 
나 역시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예전에 그녀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내 목소리는 바람 속을 헤매다가

녀의 귀를 매만질 수 있겠지. 
누군가 다른 사람을

그녀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사랑이겠지. 

예전에 그녀가 나의 사랑이였던 것처럼.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가벼운 육체

그녀의 무한한 눈동자

 


나는 그녀를 더이상 사랑하지 않지만

어쩌면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해. 
사랑은 짧게 지속되고

망각은 먼 것이니. 

이런 밤에 내가 그녀를 내 팔에 안았던 것처럼. 
내 영혼은 그녀 없이는 더 이상 없네.

 


어쩌면 이것이 그녀가 내게 주는 마지막 고통일지라도 
어쩌면 이것이 내가 그녀를 위해 쓰는 마지막 시일지라도...

 

 

 

 

 

 

충만한 힘

 

 

나는 쓴다 밝은 햇빛 속에서, 사람들 넘치는 거리에서,

만조 때, 내가 노래할 수 있는 곳에서;

제멋대로인 밤만이 나를 억누르지만,

허나 그것의 방해로 나는 공간을 되찾고,

오래가는 그늘들을 모은다

 

밤의 검은 작물은 자란다

내 눈이 평야를 측량하는 동안.

그리하여, 태양으로만, 나는 열쇠들을 버린다.

불충분한 빛 속에서는 자물쇠를 찾으며

바다로 가는 부서진 문들을 열어놓는다

찬장을 거품으로 채울 때까지,

 

나는 가고 돌아오는 데 지치는 법이 없고,

돌 모양의 죽음은 나를 막지 못하며,

존재에도 비존재에도 싫증나지 않는다.

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내 모든 광물성의 의무를 어디에서 물려받았을까

아버지나 어머니일까 아니면 산들일까,

 

생명줄들이 불타는 바다로부터 펼쳐진다;

그리고 나는 안다 내가 계속 가니까 나는 가고 또 간다는 것

또 내가 노래를 하고 또 하니까 나는 노래한다는 걸.

 

두 개의 수로 사이에서 그러듯

내가 눈을 감고 비틀거릴 때

일어난 일을 설명할 길이 없다

한쪽은 죽음으로 향하는 그 지맥속에서 나를 들어올리고

다른 쪽은 내가 노래하게 하기 위해 노래한다.

 

그리하여 나는 비존재로부터 만들어지고,

바다가 짜고 흰 물마루의 파도로

암초를 연타하고

썰물 때 돌들을 다시 끌고 가듯이

나를 둘러싼 죽음으로 된 것이

내 속에서 삶을 향한 창을 열며,

그리고, 존재의 경련 속에서, 나는 잠든다.

낮의 환한 빛 속에서, 나는 그늘 속을 걷는다.

 

 

 

건축가

 

나는 나 자신의 환상을 선택했고,

얼어붙은 소금에서 그것과 닮은 걸 만들었다

나는 큰비에다 내 시간의 기초를 만들었고 

그리고,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

 

내 오랜 숙련이

꿈들을 분할한 게 사실이고

내가 알지 못하는 채

벽들, 분리된 장소들이 끝없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나서 나는 바닷가로 갔다.

 

나는 조선의 처음을 보았고,

신성한 물고기처럼 매끄러운 그걸 만져보았다-

그건 천상의 하프처럼 떨었고,

목공작업은 깨끗했으며,

 

꿀 향기를 갖고 있었다.

그 향기가 돌아오지 않을 때는

그 배가 돌아오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눈물 속에 익사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별처럼 벌거벗은 도끼를 가지고

숲으로 돌아갔고.

 

내 믿음은 그 배들 속에 있다.

 

나는 사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이 없다.

 

 

 

작별들

 

 

안녕, 안녕, 한 곳에게 또는 다른 곳에게,

모든 입에게, 모든 슬픔에게,

무례한 달에게, 날들로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사라지는 주週들에게,

이 목소리와 적자색으로 물든

저 목소리에 안녕, 늘 쓰는

침대와 접시에게 안녕,

모든 작별들의 어슴푸레한 무대에게,

그 희미함의 일부인 의자에게,

내 구두가 만든 길에게.

 

나는 나를 펼친다, 의문의 여지 없이;

나는 전 생애를 숙고한다,

달라진 피부, 램프들, 그리고 증오들을,

그건 내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규칙이나 변덕에 의해서가 아니고

일련의 반작용하고도 다르다;

새로운 여행은 매번 나를 사로잡았다;

나는 장소를, 모든 장소들을 즐겼다.

 

그리고, 도착하자 또 즉시

새로 생긴 다감함으로 작별을 고했다

마치 빵이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날개를 펴 갑자기

식탁의 세계에서 달아나듯이.

그리하여 나는 모든 언어들을 뒤에 남겼고,

오래된 문처럼 작별을 되풀이했으며,

영화관과 이유들과 무덤들을 바꾸었고,

어떤 다른 곳으로 가려고 모든 곳을 떠났다;

나는 존재하기를 계속했고, 그리고 항상

기쁨으로 반쯤 황폐해 있었다,

슬픔들 속의 신랑,

어떻게 언제인지도 모르는 채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고, 돌아가지 않은.

 

돌아가는 사람은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러니 나는 내 삶을 밟고 되밟았으며,

옷과 행성을 바꾸고,

점점 동행에 익숙해지고,

유배의 큰 회오리바람에,

종소리의 크나큰 고독에 익숙해졌다.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
알파벳도 이불도 
구운 고기도 없었으며, 
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
옮겨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다행히도(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음이 똑같았다,
주교에서부터 판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 나무랄 데 없이 죽었다, 우리의 가나한 사람, 
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그 많은 하늘을 갖고 뭘 할지 모를 것이다.
그는 그걸 일굴 수 있을까, 씨 뿌리고 거둘 수 있을까?

 

그는 항상 그걸 했다; 잔혹하게 
그는 미개지와 싸웠다, 
그리고 이제 하늘이 그가 일구도록 완만히 놓여 있다, 
나중에, 하늘의 수확 중에 
그는 자기 몫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높은 데서 
그의 식탁에는, 하늘에서 배부르기 위해 
모든 게 차려진다, 
우리의 가난한 사람은, 아래 세상에서의 
운명으로, 약 60년의 굶주림을 갖고 왔다, 
마침내, 당연하게도, 
삶으로부터 더 이상 두들겨맞지 않고 
먹기 위해 제물이 되지 않은 채 만족스럽기 위하여, 
땅 밑 상자 속에서 집처럼 안전해 
이제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임금 투쟁을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정의를 바라지 못했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그들은 그의 컵을 채워주었고 그게 그는 좋았다;
이제 그는 행복에 겨워 벙어리가 되었다.

 

이제 그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는 뼈 자루였다, 검은 눈을 가진,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안다, 그의 무게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걸 갖지 못했었다는 걸, 
만일 이 힘이 계속 쓰여서 
미개지를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밀을 거두고, 땅에 물을 주고, 
유황을 갈아 가루로 만들고, 땔나무를 운반했다면,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사람이 구두가 없었다면, 
아, 비참하다, 이 힘줄과 근육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사는 동안 정의를 
누린 적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때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넘어뜨리며, 그런데도 
노동을 계속했고, 이제, 관에 든 그를 
우리 어깨로 들어올리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적어도 안다 그가 얼마나 갖지 못했는지를, 
그가 지상에 살 때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에게 주지 않은 모든 걸
우리가 짊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때가 늦었음을; 
그는 우리한테 무게를 달고, 우리는 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무게를 달까?

그는 이 세상이 하는 만큼 많이 무게를 단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이 죽은 사람을 어깨에 메고 간다. 분명히 
하늘은 빵을 풍부하게 구우시리라. 
 

 

 

 

 

지상의 모든 건 빽빽하게 서 있었다, 가시나무는

찔렀고 초록 줄기는

갉아먹혔으며, 잎은 떨어졌다,

낙하 자체가 유일한 꽃일 때까지,

물은 또다른 일이다,

그건 그 자신의 빛나는 아름다움 외에 방향이 없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색깔 속을 흐르며,

돌에서 명쾌한 교훈을 얻고,

그런 노릇들 속에서

거품의 실현되지 않은 야망을 이루어낸다.

 

 

 

그건 태어난다

 

여기 바로 끝에 나는 왔다

그 무엇도 도대체 말할 필요가 없는 곳,

모든 게 날씨와 바다를 익혔고

달은 다시 돌아왔으며,

그 빛은 온통 은빛,

그리고 어둠은 부서지는 파도에

되풀이하여 부서지고,

바다의 발코니의 나날,

날개는 열리고, 불은 태어나고,

그리고 모든 게 아침처럼 또 푸르르다.

 

 

 

 

탑에서

 

 

이 장엄한 탑에는

투쟁이 없다.

안개, 공기, 날이

그걸 둘러쌌고 떠났으며

나는 하늘과 종이와 더불어 머물렀다,

고독한 기쁨과 부채와 함께.

증오가 있는 지상의 투명한 탑 그리고

하늘의 파동으로

움직이는

먼 바다.

그 구절에는 얼마나 많은 음절이 있는가,

그 단어에는? 내가 말했던가?

 

이슬의 불안은 아름다워라-

그건 아침에 떨어진다

새벽에서 밤을

분리하며

그리고 그 차가운 선물은

불확실하게 매달려 있다

강렬한 태양이

그걸 죽게 하기를 기다리며,

말하기 어렵다

우리가 눈을 감는 건지 아니면 밤이

우리 속에서 별 박힌 눈을 뜨는 건지,

어떤 문이 열릴 때까지

그게 우리 꿈의 벽에 구멍을 파는 건지.

그러나 꿈은

한순간의 휙 지나가는 의복일 뿐,

어둠의

한 번의 고동 속에 소모되고,

우리 발 앞에 떨어져, 벗어던진다

날이 움직여 우리와 함께 출범할 때.

이게 거기서 내가 내려다보는 탑이다,

빛과 말수가 적은 물 사이,

칼을 지닌 시간,

그러고 나서 나는 살기 위해 서두른다,

나는 온 공기를 마시고

도시에 들어찬 불모의

빌딩들에 간담이 서늘하며,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채 혼잣말을 한다,

높은 곳들의

침묵에서 한 잎씩 떼어내며.

 

 

 

 

 

 

 시인의 의무

 

이 금요일 아침, 바다를 듣지 못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집이나 사무실에 갇혀 있거나

공장이나 여자, 거리나 광산 또는 메마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간에 나는

그에게 왔다, 그리고 말하거나 보지 않고

도착해서 그의 감옥문을 연다,

희미하나 뚜렷한 동요가 시작되고,

천둥의 긴 우르릉 소리가 이 행성의 무게와

거품에 스스로를 더하며,

바다의 신음하는 물흐름은 물결을 일으키고,

별은 그 광관光冠 속에서 급속히 진동하며,

바다는 파도치고, 꺼지고 또 파도치기를 계속한다.

 

그리하여, 내 운명에 이끌려,

나는 바다의 비탄을 듣고 그걸

내 의식에 간직해야 하며,

거친 물의 굉음을 느끼고

그걸 영원한 잔에 모아,

그들이 수감되어 있는 데가 어디이든,

그들이 가을의 선고로 고통받는 데가 어디이든

나는 유랑하는 파도와 함께 있고,

창문으로 드나들며,

내가 "어떻게 그 바다에 닿을 수 있지?" 하고

두 눈은 치켜뜬 채, 묻는 소리를 스스로 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말없이,

파도의 별빛 밝은 메아리를 건넬 것이다,

거품과 유사의 부서짐을,

움츠러드는 소금의 바삭거림,

해변 바닷새들의 음울한 울음을,

 

그리하여, 나를 통해, 자유와 바다는

어두운 가슴에 대답해줄 것이다.

 

 

 

 

말은

피 속에서 태어났고,

어두운 몸속에서 자랐으며, 날개 치면서,

입술과 입을 통해 비상했다.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여전히, 여전히 그건 왔다

죽은 아버지들과 유랑하는 종족들에서,

돌이 된 땅들에서,

그 가난한 부족들로 지친 땅,

슬픔이 길이 되었을 때

그 사람들은 떠나서 새로운

땅과 물에 도착하고 결혼하여

그들의 말을 다시 키웠느니.

그리하여 이것이 유산이다;

이것이 우리를 죽은 사람과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새로운 존재들을

연결하는 대기大氣

 

대기는 아직

공포와 한숨을

차려입은

처음 말해진 말로 떨린다.

그건 어둠에서 솟아났고

지금까지 어떤 천둥도

그 말,

처음 말해진

그 말의 철鐵 같은 목소리

와 함께 우르렁거리지 못했다-

그건 다만 하나의 잔물결, 한 방울의 물이었을지 모르나

그 큰 폭포는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그러다가, 말은 의미로 채워진다.

언제나 아이와 함께, 그건 생명으로 채워진다.

모든 게 탄생이고 소리이다-

긍정, 명확성, 힘,

부정, 파괴, 죽음-

동사는 모든 힘을 얻어

그 우아함의 강렬한 긴장 속에서

실존을 본질과 혼합한다.

 

인간의 말, 음절, 퍼지는

빛의 측면과 순은세공,

피의 전언을 받아들이는

물려받은 술잔-

여기서 침묵은 인간의 말의

온전함과 함께한다,

인간에게, 말하지 않는 건 죽는 것이니-

언어는 머리카락에까지 미치며,

입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하고,

문득, 눈은 말이다.

 

나는 말을 취해서 그걸 내 감각들을 통해 보낸다

마치 그게 인간의 형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듯이;

그것의 배열은 경외감을 느끼게 하고 나는

말해진 말의 울림을 통해 나의 길을 찾는다-

나는 말하고 그리고 나는 존재하며 또한, 말없이,

말들의 침묵 자체의 가장자리를 가로지르며 접근한다.

 

나는 한마디 말이나 빛나는 잔을 들어올리며

말과 건배한다;

나는 거기 들어 있는

언어의 순수한 포도주나

마르지 않는 물을 마신다,

말의 모성적 원천을,

그리고 컵과 물과 와인은

내 노래를 솟아오르게 한다

왜냐하면 동사는 원천이며

생생한 생명이므로-그건 피이다

그 참뜻을 표현하는 피,

그리하여 스스로 뻗어나가는.

말은 잔에 잔다움을, 피에 피다움을,

그리고 생명에 생명다움을 준다.

 

 

 

파블로 네루다/ 1904년 남칠레 국경 지방에서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아홉 살 때 '스무 편의 사랑과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를 출간하여 남미 전역에서 사랑을 받았고, 스물세 살 때 극동 주재 영사를 맡은 이후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지의 영사를 지냈다. 프랑코의 파시스트 반란이 일어나자 파리에서 스페인인들의 망명을 적극적으로 돕는 등 정치활동을 했으며, 칠레 공산당 상원의원으로도 활동했다. 곤살레스 비델라 독재 정권의 탄압을 받자 망명길에 올랐다가, 귀국 후 아옌데정권이 들어서면서 프랑스 주재 칠레 대사에 임명되었다. 1973년 피노체트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칠레)

 

 

 

 

 

 Inner Link

 

 


아르튀르 랭보

살바도르 아옌데

빅토르 하라

뽈 엘뤼아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파블로 네루다 - 절망의 노래

 

"여명이 밝아올 때 불타는 인내로 무장한 우리는 찬란한 도시로 입성할 것이다." 
-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파블로 네루다가 인용하며 말한 랭보의 시구

  블로 네루다는 2004년이면 탄생 100주년을 맞는 시인이다. 그가 우리 곁을 떠난 것이 지난 1973년이었으므로 오래되었다면 약간 오래되었고, 최근의 시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주 최근에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시와 그의 생애를 알게 된다면 그가 영원한 청춘의 시인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의 본명은 리카르도 네프탈리 레예스 바소알토(Neftali Ricardo Reyes Basoalto)였다. 그의 아버지인 호세 델 카르멘 레예스가 네루다의 시 창작을 좋아했다면 우리는 위의 기다란 그의 이름을 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참고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자식의 이름에 아버지의 성과 어머니의 성을 함께 쓴다. 그렇기 때문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의 경우에도 가르시아 마르께스나 가브리엘 마르께스로 표기하기 보다는 그냥 마르께스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파블로 네루다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시를 쓰기 위해 아버지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한 이름을 찾다가 우연히 한 잡지에서 체코 이름을 발견했고, 그 이름의 주인공이 체코의 서민 시인 얀 네루다였다. 물론 그는 여러가지 필명을 사용했으나 최종적으로 네루다를 선택했던 것은 "그가 체코의 서민 시인이었기 때문에 계급적 동질성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에서)이라고 말한다.
 

 

- 파블로 네루다, 영원한 청춘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생애

  1904년 칠레 중부의 전형적인 서민 가정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는 가난한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네루다가 태어난지 한 달도 되기 전에 죽고 만다. 2년 뒤 가족은 남부의 '새로운 땅'으로 이주해 테무코에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재혼했으며, 네루다는 계모를 친어머니처럼 사랑하였다. 뒤에 그는 그 당시를 회고하여 "조국의 개척지인 '머나먼 서부'에서 나는 삶과 대지, 시, 비 속에서 태어났다"고 썼다.

  그는 1910년 테무코 남자국민학교에 들어가 1920년 중등과정을 마쳤다. 10세에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 일부는 나중에 학생잡지에 실렸으며 처음에는 아버지의 노여움을 사지 않으려고 가명을 썼다. 1920년부터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으며, 1946년에는 법적으로 이름을 바꿨다. 12세 때 칠레의 저명한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남미 시인 중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미스트랄 역시 이탈리아 시인 가브리엘 다눈치오의 이름을 따 필명으로 삼았다.)을 만나 위대한 고전작가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다. 이들은 그가 진로를 선택하고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테무코를 떠나 수도인 산티아고로 갔다. 그의 목표는 사범대학에서 불문학 학위를 받는 것이었지만, 불문학 공부보다는 창작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네루다는 어깨에 시인의 망토(아버지가 쓰던 철도노동자 망토)를 두르고 챙 넓은 솜브레로 모자를 쓴 차림으로 칠레의 문학계를 뒤흔들어놓았다. 그의 첫 시집은 <황혼의 일기Crepusculario>인데, 이 시집을 통해 그는 앞으로 자신이 앞으로 해 나갈 수많은 시작(詩作)의 세계를 가늠해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참여적 경향의 시, 사랑의 시, 자연을 노래한 시, 도시적 분위기의 시 등이 그것이다. 그는 두번째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1924)를 발표하며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칠레 시단의 주목받는 신성이 되었다.

 

- 15세 무렵의 네루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시에 재능을 보였고, 그가 칠레 전역에 시인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것은 불과 20세 무렵의 일이었다.

  그는 이 시집을 통해 평생동안 그의 시와 삶을 관통하게 될 하나의 주제를 노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다. 그의 사랑은 때로 도발적이었고, 관능적이었으며 고독과 죽음의 주제와 함께 쓸쓸한 애조를 띠고 있다. 네루다는 자신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쓴 시들이 새 시대의 연인들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기적에 의해서, 이 고통스럽게 씌어진 책은 수많은 사람들을 행복에 이르는 길로 안내했다"고 말했다. 20세에 단 두 권의 시집을 발표한 그는 칠레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고, 그는 이후에도 불타는 창작열을 멈추지 않았다.

파블로 네루다의 공직 생활

  는 예술가가 공직에 나서는 경우를 그다지 좋게 생각할 수 없는 불유쾌한(이 말은 솟아오르는 불쾌한 기억들을 상당히 억누르며 하는 말이다.) 경험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간혹 외국의 작가나 시인들이 공직에 나서는 경우 그것을 의아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앙드레 말로를 비롯해서 파블로 네루다에 이르기까지 훌륭하게 공직 생활을 해낸 예술가들도 물론 많이 있었다.

- 네루다의 파리 생활 무렵

 

네루다는 칠레를 떠나보고 싶어했고, 칠레 외무성은 네루다의 그런 소망을 들어주어 1927년 버마 랭군의 명예영사로 임명받게 된다. 그는 이후 5년 동안 아시아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이때 랭군, 콜롬보, 실론, 바타비아, 지금의 자카르타),자바, 싱가포르로 옮겨다녔다.

  그가 아시아에서 영사직을 맡고 있었다고 해서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화려한 외교관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명예영사였기 때문에 본국 칠레로부터 지원을 거의 받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생활은 가난하고 힘든 것이었다. 자바에서 네덜란드 출신의 마리아 하게나르와 첫 결혼을 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출신의 아내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에 그의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캘커타에서 열린 '범힌두인 회의'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여행들을 회고하는 책들은 감동적이지만 때로는 가슴아픈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당시 그의 생활은 외로웠으며, 버마 처녀 조시 블리스와의 연애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네루다가 랭군을 선택한 것은 스스로 자신을 유배시킨 것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철저한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그동안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는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찾고자 했다. 그가 민중 지향의 시인이면서 동시에 지극히 난해한 시를 쓰는 시인, 초현실주의 시인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이런 자기 파괴 과정을 거치며 자신만의 언어를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93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재 칠레 영사로 발령받으며, 그는 다시 라틴 아메리카로 돌아오게 된다. 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당시 이 곳을 방문중이던 스페인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와 친구가 되었다. 이듬해에는 바르셀로나로, 그뒤에는 마드리드로 전출되어 그곳에서 델리아 델 카릴과 재혼했다.

파블로 네루다. 투사가 되다.

  가 스페인 마드리드 영사로 임명되었을 무렵 스페인은 내전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절친한 친구이자 스페인의 대표적 시인이었던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가 파시스트들에 의해 재판도 없이 처형되고, 또 다른 동료 시인 미겔 에르난데스가 내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옥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1936년 내전의 비극과 파시즘의 광기는 파블로 네루다로 하여금 그간의 나르시시즘적이고 낭만적 정서에 기반한 이기적 시인의 탈을 벗어버리게 만든다. 그는 "세계는 변했고 나의 시도 변했다. 시구 위에 떨어지는 피 한 방울은 그 속에서 숨쉬고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내 가슴 속의 스페인 Espana en el corazon〉은 내전 중 공화군 전선에서 출판되었다.

 

 

 

 

 

- 파블로 네루다가 칠레의 압정을 피해 이탈리아에 망명해있던 시절을 다룬 영화 <일 포스티노>, 실제로 그가 이탈리아에 망명해 있을 무렵 이탈리아 당국은 칠레와의 외교 관게를 고려해 네루다를 추방하려 했지만 이탈리아 민중들의 열렬한 반대에 부딪쳐 추방을 포기했고, 네루다는 계속해서 이탈리아에 머무를 수 있었다.

 

 

 

 

- 파블로 네루다 <사랑의 시편>

 

참고도서 & 참고사이트

마추피추의 산정/ 파블로 네루다/ 민용태 옮김/ 열음사/ 1985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추원훈 옮김/ 청하/ 1992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파블로 네루다/ 정현종 옮김/ 민음사/ 1994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 서성철, 김창민 편/ 까치/ 2001
- 라틴 아메리카에 대해 까치 출판사에서 출판한 여러 좋은 책들 중 물을 많이 내고 있다.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국내의 라틴 아메리카 학회 소속 학자들이 각자 논문을 만들어 라틴 아메리카의 시인, 작가들에 대해 글을 상재하고 있다. 이번 파블로 네루다에 대한 글은 그 중에서 김세훈 선생의 글을 그 근간으로 삼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를 찾아서/ 곽재성, 우석균 지음/ 민음사/ 2000년
 
- 위의 책이 약간의 사전 지식을 필요로 하는 책이라면 이 책은 라틴 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입문서 구실을 할 수 있는 책이다.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간략한 통사와 더불어 문화, 예술, 환경 등에 대해서 곽재성, 우석균 두 명의 필자가 재미있게 잘 다루고 있다. 게다가 이 책의 한 가지 장점을 더 추가하자면 인터넷 시대답게 관련된 사이트들을 두루 소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을 꼽으라면 적은 분량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만큼 대충대충이 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옥에 티인 셈이고, 라틴 아메리카 읽기를 시작하는 분들은 이 책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무난하리란 생각이다.

칠레의 모든 기록/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지음/ 조구호 옮김/ 크레파스/ 1989
- 미겔 리틴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산티아고 알바레스와 함께 잊을 수 없는 이름일 것이다. 미겔 리틴은 칠레의 피노체트 쿠데타 때 해외로 망명했다. 칠레 당국은 그의 귀국을 영구히 허가하지 않을 사람 명단에 올려 특별 관리했지만 그는 목숨을 걸고 귀국해서 독재정권 하의 칠레를 촬영해 전세계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책은 그런 미겔 리틴의 영화 제작기를 마르께스가 인터뷰하여 기록한 것이다.

노동하는 기타, 천일의 노래/ 배윤경 지음/ 이후/ 2000
- 누에바 깐시온의 대표적인 가수이자 칠레의 저항가수였던 빅토르 하라의 일대기와 살바도르 아옌데 그밖에 많은 라틴 아메리카 가수들의 이야기들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게다가 부록으로 빅토르 하라의 노래가 담긴 음반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반드시 사 볼만 한 책이다. 놓치면 아쉬워 할 것이다.

 

 


  시대적 아픔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문학을 위한 문학,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허울을 벗어던지고 문학보다 더 절박한 현실에 뛰어든다. 그는 1938년 스페인 망명객들을 이끌고 칠레로 돌아왔으나, 정부는 그를 또다시 멕시코로 보낸다. 이 곳에서 왕성한 창작활동을 시작했으며, 이때 쓴 시의 대부분은 유럽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과 특히 독일군의 맹공격에 맞서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려는 영웅적 활약상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이 당시 멕시코의 벽화도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 그는 1943년 태평양 연안의 모든 나라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배를 타고 칠레로 돌아왔다.

  그는 귀국 즉시(1945년) 칠레공산당에 입당하고 빈민이 대다수였던 광산촌에서 출마하여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이후 3년 동안 조국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문학에 바쳤던 것만큼이나 많은 열정을 바쳤다. 그의 공산당 입당은 유년시절부터 자신을 계급적 존재로 인식했던 그인만큼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정치에 입문하게 된 것은 정치꾼의 욕망때문이거나 권력욕 때문이 아니라 낭만적 유토피아에 대한 시인의 추구 탓이었다. 당시 칠레의 경제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폭력적인 이윤 추구와 초석, 동 등 지하자원에만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빈곤을 벗어날 수 없었다. 네루다는 이때 대통령 후보로 나선 가브리엘 곤살레스 비델라가 내세운 공약을 믿었고, 그를 위해 선거운동에 열렬하게 나섰다. 그러나 대통령에 당선된 비델라는 그를 지원해준 민중의 의지와는 상반된 정책들을 시행했다. 미국의 의지를 거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네루다는 1947년 비델라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나는 고발한다(Yo acuso)>를 발표한다. 칠레 정부는 공산당을 탄압했고, 당시 5만에 이르는 공산당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망명하고 지하로 잠입한다. 이 무렵 그는 아메리카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새로 각인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를 다룬 대서사시라고 할 수 있는 <총가요집>을 발표한다. 1949년부터 시작된 그의 망명 생활은 1952년까지 계속된다. 영화 <일 포스티노>는 그가 이탈리아 나폴리에 망명해 있던 1952년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가 참여적이고 민중지향적인 시를 썼다고 해서 그가 발표한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가 발표하는 시들은 하나하나가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열렬한 환호를 받는 것들이었다.

 

 

현실주의자가 아닌 시인은 죽은 시인이다. 그리고 오직 현실주의적이기만 한 시인도 죽은 시인이다. 단지 비현실주의적인 시인은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것은 슬픈 일이다.

모든 것이 현실적인 시인은 모든 얼간이들까지 다 이해할 수 있지만, 이것 또한 지독히 슬픈 일이다.

단순명료한 규칙이나 신이나 악마가 처방한 성분도 없지만, 이 두 중요한 신사들은 시의 영역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한 번은 첫번째 신사가 이기고, 다음에는 두번째 신사가 이기지만 시 자체는 결코 지지 않는다. - 파블로 네루다 <추억> 중에서

  그는 1948년 2월 칠레를 떠나 말을 타고 안데스 산맥 남부를 가로질러 4월에 파리에서 열린 평화지지자회의에 참가했다. 또 1949년에는 알렉산드르 푸슈킨 탄생 150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처음으로 소련을 방문했다. 그 뒤 유럽의 다른 지역을 돌아보고 다시 멕시코를 방문했다. 1952년 좌익작가와 정치인에 대한 검거령이 철회되자 칠레로 돌아왔으며 칠레 출신의 마틸데 우루티아와 3번째로 결혼했다. 그는 계속 태평양 연안의 이슬라 네그라에서 살았지만, 1960년 쿠바, 1966년 미국 방문을 비롯해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여행했다. 그의 시는 거의 모든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 산티아고의 산크리스토발 언덕 기슭에 '라차스코나'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발파라이소에도 '라세바스티아나'라는 집을 지었다. 이 집들은 그가 여행하면서 모은 배의 선수상(船首像)과 그밖의 갖가지 기념물을 진열한 심미적 분위기로 이름난 명소가 되었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민중의 불꽃

  1969년 12월 칠레의 진보 세력들은 대중운동연합인 MAPU를 비롯해 사회당, 공산당, 진보당, 사민당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1970년 선거에 대비하기로 했다. 이때 공산당 후보가 바로 파블로 네루다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곧 이를 철회하고, 살바도르 아옌데를 인민연합의 대통령 후보로 후보 단일화를 이룩한다.(네루다가 대통령이 되었다면 그후 칠레가 어떻게 변해갔을지 또한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미국의 사주를 받은 칠레의 우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으므로.)

  이전까지 노선 대립과 이념 갈등으로 통합되지 않던 진보세력은 인민연합의 기치 아래 하나로 뭉쳤고 결과적으로 선거에 의해 선출된 세계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었다. 나중에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사회주의 정권 수립 이후 미국의 경제 압박으로 인해 칠레 경제는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극우반동세력은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아옌데 정권은 이에 굴하지 않았다.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칠레 군부는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궁을 공중 폭격하는 등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전복시키고 만다.

  파블로 네루다가 노벨 문학상(1971년)을 받은지 불과 2년 뒤의 일이었다.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 이른 아침, 파블로 네루다의 주치의는 시인의 부인 마띨데에게 전화를 걸어 혹시 시인의 병이 악화도면 안되니 쿠데타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그러나 네루다는 이미 라디오를 귀에 끼고 사태의 추이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까지만 해도 사태의 추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네루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아옌데 대통령이 끝까지 대통령궁을 사수하다 결국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낙담하여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고 말았다.


노벨문학상을 받는 파블로 네루다

  며칠 후 침대에 누운 채 쿠데타를 비판하는 글을 구술하던 중 창너머로 무장한 군인들이 자신의 바닷가 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이 가택을 수색하기 위해 오는 것이었다. 부인이 받아 적던 것을 급히 감추자마자 장교 하나가 침실로 들어와 집안 수색하겠다고 통고했다. 네루다는 불쑥 장교에게 말을 건넨다. "당신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는 이 방에 단 하나밖에 없네." 장교는 깜짝 놀라며 권총에 손을 댔다. "그게 뭡니까?" 네루다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시()라네."

파블로 네루다 - 영원한 청춘의 시인

  취당하는 노동자와 농민의 낙원을 꿈꾸었고, 그런 낙원을 일구기 위해 노력했던 시인. 그러면서도 시의 품격을 잃지 않았던 위대한 시인은 칠흑같은 암흑의 세게에 갇혀버렸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 어둠을 밝히는 불꽃이 되었고, 피노체트의 철권 통치 아래서도 그 빛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 하나둘 모여들어 수많은 군중을 이루었고, 그의 장례식은 쿠데타 이후 최초의 군중 집회가 되었다. 누군가 앞장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고, 처음의 작은 합창은 커다란 메아리가 되어서 울려 퍼졌다. 지금도 그가 말년에 머물던 이슬라 네그라(Isla Negra)의 바닷가 집(네루다는 이 집에 자신과 절친했지만 먼저 떠난 시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고 한다. 그 중에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뽈 엘뤼아르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물론이다.) 에는 추모 행렬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그들은 손에 손을 잡고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낭송하고,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것을 맹세하곤 한다.

  그는 죽었지만 그가 남긴 시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타올랐고, 칠레 국민들은 결국 군부 독재를 마감시킬 수 있었다. 피노체트는 권력의 정상에서 내려갔고 이 시간 현재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할 것인지 여부를 놓고 칠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그들 피노체트 일당에게 숨져간 살바도르 아옌데와 빅토르 하라 그리고 파블로 네루다는 지금까지 칠레 국민들을 포함해서 전세계 사람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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