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보물 + 뒷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vs 입센의 노벨문학상
해마다 10월이면 노벨문학상 소식이 들린다. 몇 해 전부터 ‘한국문학에도 노벨문학상을’이란 분위기가 떠도는 까닭인지 주변의 관심이 더 높아진 듯도 하다. 물리학상이며 의학상이며 화학상 같은 다른 분야에서 가능성이 낮은 데 반비례해 문학에의 관심이 자라난 건지, 노벨상으로써 점점 시들어가는 한국문학에 물 한번 듬뿍 주고 싶은 건지. ‘나라 없고 가난할지언정 문화만은 빛난다’던 식민지시기부터의 자부심이 세계적 공인을 받지 못한 듯해 우리 스스로 불안한 건지. 노벨상만 문제라면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이 있었지만 그건 지금으로선 누구에게나 불편한 기억에 가깝고 말이다.
노벨상이 제정되던 1901년은 유럽에서 ‘문학의 시대’가 다 끝나지 않은 때였다. 에밀 졸라와 레프 톨스토이가 아직 살아 있었고 토마스 하디가 활동 중이었다. 그런데도 스웨덴 한림원은 제 1회 노벨문학상을 프랑스 고답파 시인 쉴리-프리돔에 안겨주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로도 한동안 노벨문학상의 ‘보수적’ 행보는 이어졌다. 제2회 문학상은 <로마사>를 쓴 역사학자 몸젠에게 안겼지만 제 3회째는 입센을 제쳐두고 같은 노르웨이의 극작가 뵈른손을 수상자로 지명했고 이후로도 키플링이나 라게를뢰프처럼 애국적이거나 종교적인 색채가 짙은 작가를 편애했다.
‘숭고하고 건전한 이상주의’. 초기 노벨문학상의 심사 기준이었다는 이 문구는 인생의 추악상에서 눈 돌리고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데 동원되곤 했다.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유럽 문학에 지각변동을 일으킨 입센을 끝내 외면한 것이 그 증거로 대표적일 것이다. 하긴 입센은 무지막지하게 이상을 조롱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스스로 고결한 이상주의자입네 하면서 생활에선 무능력하고 권위적인 가부장을 그려낸 <들오리>에서 입센은 독설가인 조연을 내세워 “그 ‘이상’인지 뭔지 하는 잘난 말은 쓰지 않기로 합시다.”라며 일갈한다. “‘거짓’이라는 편리한 말이 있으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않소?”
<들오리>의 결말은 가식적 가부장 때문에 그 선량한 딸이 자살을 택하는 파국이다. 아버지는 당연히 울부짖고, 그 옆에서 누군가는 “슬픔이 저 남자가 품고 있던 숭고함을 얼마나 일으켰”는지 보라며 희망을 품기도 한다. 그러나 독설가는 여전히 냉정하다. “죽은 사람을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 대개는 숭고한 마음이 드는 법이지. 하지만(…) 언제까지?” 1년도 지나지 않아 딸의 죽음을 파티의 감상용 여흥으로나 쓰게 될 거라며 빈정거리는 독설가는, 그러니 ‘이상’의 강요를 그만두라고, “상대를 가리지 않고 그 이상의 요군지 뭔지를 강요하러 오는 오지랖쟁이가 우리 가난뱅이들을 가만히 내버려둬”야 한다며 연극의 종막을 고한다.
입센이라면 나부터 <인형의 집>을 연상하지만, <인형의 집>은 그렇듯 ‘이상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삶과 세계의 추악상을 똑바로 보는 데서 다시 모든 걸 시작해야 하는 입센의 일관된 생각이 낳은 작품 중 하나일 뿐이다. 자연주의의 파란을 겪었음에도 보수적 이상주의가 득세하고 있던 유럽 문단에서 그런 입센의 목소리는 위험한 것이었다. 종교의 위선과 결혼의 허위를 공격하고 성병 문제까지 들먹인 <유령>은 공연하는 곳마다 상연 금지며 관객의 분노에 찬 항의 같은 스캔들을 일으켰다. 입센 자신의 전반기에는 이상주의적 관습에 충실한 희곡을 창작한 바 있지만, 변방 노르웨이 출신이요 변변한 교육도 받지 못했던 입센으로선 낡은 ‘이상’을 끝끝내 믿을 수는 없었나 보다.
그리고 한 세기가 넘어 노벨문학상은 백 명이 훌쩍 넘는 긴 수상자 목록을 갖게 됐다. 역대 수상자 중 무려 여덟 명이 스웨덴 작가라는 노골적인 편파성을 논의로 하더라도 노벨문학상 주변은 늘 시끄럽다. 역대 수상자 중 적잖은 수는 문학적 선택이라기보다 정치적 선택이기도 했다. 중일전쟁 직후 중국에 대한 관심이 고양됐을 때는 펄벅을, 제 2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패전국 독일의 반전 작가였던 헤세를, 몇 년 후에는 영국 수상 처칠을, 알제리전쟁이 한창일 때는 알제리를 사랑하면서도 독립에는 반대했던 카뮈를. 어쨌거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으로서 노벨문학상은 그때마다 논란을 불러 일으켰고 어쩌면 그 논란으로써 문학의 역사에 기여해 왔다.
밥 딜런을 수상자로 발표한 올해의 결정도 그렇듯 논란으로써 문학에, 문화에, 세계에 기여하는 바 있으리라 믿는다. 통쾌하면서 살짝 씁쓸한, 지레 웃어넘겼으나 머리가 복잡해지기도 하는, 그런 마음인데, 하긴 ‘노벨문학상’이란 부문의 제정 자체가 19세기 말~20세기 초 상황의 반영이기도 하다. 노벨음악상, 노벨미술상, 노벨예술상이나 노벨문화상이면 더 나으려나. 문학이 고립될 대로 고립된 지금, 문학이 감당해 왔던 몫은 어떻게 이어지고 찢기고 재생산되려나. 그렇지만 스웨덴 한림원, 기왕 용감하려면 더 용감한 선택은 없었을까? 아니, 밥 딜런이 상을 받겠다고 나서긴 할는지 원.
/권보드래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