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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일본 "김삿갓 방랑 시인" - 마쓰오 바쇼
2016년 11월 29일 22시 25분  조회:8286  추천:1  작성자: 죽림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松尾芭蕉
 
 
출생일 1644년
사망일 1694년
본명 마쓰오 무네후사(松尾宗房)
국적 일본
대표작 《노자라시 기행(野晒紀行)》,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

목차

마쓰오 바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번개를 보면서도 삶이 한순간인 걸 모르다니." 촌철살인의 명구로 오늘날까지 일본인의 가슴을 울리며 많은 사랑을 받는 하이쿠 시인.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평생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자연과 인생을 노래한 음유시인. 하늘을 지붕 삼아 살고 싶었고, 그저 그날 밤 잘 곳을 찾을 수 있기만을 바랐던 방랑 시인 마쓰오 바쇼.
하이쿠는 에도 시대에 발달한 전통시의 형태로, 5-7-5의 음수율을 지닌 17자로 된 정형시이다. 근세에는 하이카이로 불렸으나 메이지 시대각주1) 에 하이쿠라는 명칭으로 정착했다. 하이쿠는 상류층의 와카나 렌가와 대조적으로 골계성을 강조한 말장난의 일종으로, 서민층에서 크게 유행했다. 하이쿠를 놀이가 아닌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인물이 바로 마쓰오 바쇼다. 바쇼는 말장난 유희에 불과했던 하이쿠를 풍류와 풍자가 담긴 자연시로 끌어올렸다.
바쇼는 1644년 이가국(미에 현 이가 시)에서 마쓰오 요자에몬의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본명은 마쓰오 무네후사이다. 농민 집안이어서 생활이 어려웠던 그는 청년 시절 무사인 도도 요시타다 아래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이때 요시타다를 따라 이름난 가인이었던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을 만나면서 하이쿠에 눈을 떴다.
바쇼는 23세 무렵 요시타다가 죽으면서 의지할 곳이 없어지자 형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앞으로 먹고살 일을 궁리하면서 바쇼는 무사가 될지 승려가 될지 고민하다 결국 자신에게는 오직 하이쿠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9세가 되던 해 바쇼는 고향을 떠나 에도로 떠났다. 그는 '도세이(桃靑)'라는 호로 활동하며 일약 촉망받는 신인 하이쿠 작가로 떠올랐다. 35세 무렵에는 그의 문하생이 되기를 자처하는 시인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러나 바쇼는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은거와 방랑의 길을 택했다. 유망한 하이쿠 시인으로서 앞날이 창창했던 바쇼는 37세 무렵의 어느 날 돌연 후카가와에 파초암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어 은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선종 수행법을 배워 참선하고, 《장자》를 비롯해 두보, 이백, 소동파 등 중국 고전을 탐독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잦은 방랑길에 올랐다.
마흔 살 무렵 가을 바쇼는 총 9개월간의 긴 여행을 시작했다. 방랑 인생의 시작이었다. 바쇼는 에도를 출발해 도카이도, 사요나카야마, 이세, 야마토, 요시노 산, 비와 호, 나고야, 우에노, 나라, 교토, 오쓰 등을 기행했고, 이 경험은 《노자라시 기행(野晒紀行)》이라는 작품으로 탄생했다. '노자라시(野晒)'란 '비바람을 맞으며 백골이 되었다'는 의미로, 제목답게 목숨을 건 힘든 여행이었다고 회상했다. 이 여행은 그의 작풍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때까지 다른 시인들과 마찬가지로 재치 있는 언어유희적 하이쿠를 지었던 바쇼는 보다 느긋하게 자연을 즐기고, 솔직하게 생과 자연의 진실을 포착해 내는 작품을 읊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문하생과 하이쿠 추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바쇼는 하이쿠의 일인자로 부상했다. 그의 작품들은 교토와 에도는 물론, 일본 전역에 퍼져 나갔다. 그러나 바쇼는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암자에서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생활을 하고 참선 수행을 했다.
받아서 먹고, 청해서 먹고, 굶주려 죽지도 않은 채 한 해가 저무니 행복한 사람 축에도 들겠구나, 늙음의 끝자락.

달이여, 눈이여, 흥에 겨워 지내니 연말이구나.
이 무렵 바쇼의 하이쿠들에는 소박하게, 그저 일이 이루어지는 대로 살아가고, 풍류를 즐기며 자족하는 삶의 철학이 잘 드러나 있다.
2년 후 바쇼는 추종자들을 물리치고 두 번째 방랑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그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높아져서 가는 곳마다 떠들썩한 환대를 받았다. 탈세속적인 작풍과 풍류를 즐긴 바쇼로서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바쇼의 암자도 고독을 즐기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지는 추종자들의 방문을 받는 곳이 되어 있었다. 이는 그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바쇼는 곧 암자를 팔고 홀로 낯선 곳을 떠돌아다니기로 결심했다.
1689년 3월 제자와 함께 방랑길에 오른 바쇼는 고전에 등장하는 명승고적을 둘러보았다. 중국 고전을 비롯해 일본의 전통시에 심취했던 그는 사이교, 노인 법사 등의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선인들의 시혼(詩魂)을 배우고자 했다. 존경했던 노인 법사가 지났던, 이제는 사라져 버린 오우 지방의 입구인 시라카와 관문을 지나면서는 "내 살던 고향, 봄 안개 피어날 때 떠나왔는데, 가을 바람 스산한, 시리카와의 관문"이라며 감동을 표현했다. 일세기를 풍미했던 후지와라씨의 근거지 히라이즈미에서는 "장맛비도 비껴간 듯하구나, 금박 입힌 금당"이라며 공명과 부귀영화도 한낱 허무한 꿈일 뿐이라고 노래했다. 약 150여 일간의 이 기행은 《오쿠노 호소미치(奧の細道)》로 탄생했다.
이 방랑을 통해 그는 유한한 역사와 변화무쌍한 자연 속에서 인간의 존재와 삶은 일시적이고 나약할 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절감하고, 노장적인 자연 사상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의 예술적 경지는 한 차원 더 끌어올려졌다.
소나무에 대한 것은 소나무에게 배우고, 대나무에 관한 것은 대나무에게 배워라.

하이쿠를 행하는 사람은 조화를 따라서 사계를 친구로 삼는다. 조화를 따라서 조화로 돌아가라.
에도로 돌아온 후 바쇼는 제자들에게 인위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천지 만물의 조화에 따라 살 것을 설파했다. 그리고 하이쿠에 있어서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영속적으로 변화하고 재생산되는 자연의 법칙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제자들과의 만남도 잠시, 그는 다시 방랑길에 올랐다. 바쇼는 오랜 방랑을 통해 자연과 인생의 의미를 찾고, 종래 관념적·논리적·유미주의적 관점에서 정형화되어 있던 하이쿠를 보다 자연스럽게 인생의 애환을 담는 그릇으로 발전시켰다.
마쓰오 바쇼는 1694년 오사카에서 객사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하이쿠를 읊었다.
방랑에 병들어 꿈은 마른 들판을 헤매고 돈다.
· 1682년 : 이하라 사이카쿠가 《호색일대남》을 발표하다.
· 1703년 : 최초의 세와모노 작품인 《소네자키 신주》가 발표되다.
· 1689년 : 마쓰오 바쇼가 《오쿠노 호소미치》의 배경이 되는 방랑길에 나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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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오 바쇼
松尾 芭蕉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에 있는 바쇼의 동상
이와테 현 히라이즈미에 있는 바쇼의 동상
출생 1644년
일본 일본 이가노쿠니
사망 1694년 11월 28일 (50세)
일본 일본 오사카
국적 일본 일본
장르 하이쿠
대표작 오쿠노 호소미치
영향 받은 분야·인물
영향을 준 분야·인물
마쓰오 바쇼(일본어: 松尾芭蕉 (まつお ばしょう) 마츠오 바쇼[*], 1644년 ~ 1694년 11월 28일)는, 일본 에도 시대(江戶時代) 전기의 하이쿠 시인으로 에도 시대 전기 하이카이(俳諧)[1]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긴자쿠(金作)이며, 통칭은 진시치로(甚七郎) 또는 진시로(甚四郎)이다. 본명은 주고에몬 무네후사(忠右衛門宗房)로 처음에는 이 「무네후사」를 필명으로 사용하다가 그 뒤에 도세이(桃青), 마지막으로 바쇼라는 필명을 썼다.[2]
에도 전기의 가인(歌人)이자 학자였던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의 문하에서 하이쿠를 배웠다. 「쇼후(蕉風)」라 불리는 예술성 높은 문장 경향을 확립하여 후세에 「하이쿠의 성인(俳聖)」으로서 세계적으로 그 이름이 알려진 일본 역사상 최고의 하이쿠 시인의 한 사람이다.
제자 가와이 소라(河合曾良)와 함께 겐로쿠(元禄) 2년 3월 27일(1689년 5월 16일)에 에도(江戶)를 비롯한 도호쿠(東北), 호쿠리쿠(北陸) 지방을 돌며 기후(岐阜)의 오가키(大垣)까지 여행한 기행문 『오쿠노 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를 남겼다.


생애[편집]

1644년 이가 국(지금의 미에 현(三重県) 이가 시(伊賀市)) 농민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무네후사(宗房)이다. 처음에는 무네후사를 배호로 사용하다가 그 후 모모아오, 마지막으로 바쇼라고 고쳤다. 1662년 쓰 번의 번주 도도 다카쓰구의 조카 요시타다에게 봉사했고, 요시타다가 세상을 떠난 1666년까지 섬기는 한편 하이쿠를 배웠다.
쇼후로 불리는 예술성 높은 문장 경향을 확립하여 하이쿠의 명인으로 불린다.

작품[편집]

바쇼가 제자인 가와이 소라를 동반해 겐로쿠 2년 3월 27일(1689년 5월 16일)에 에도를 출발하여 도호쿠, 호쿠리쿠를 돌아 다녀 기후 현 오카이까지 여행하면서 쓴 기행문 『오쿠노 호소미치』가 있다.

대표작[편집]

  • 命二つの中に生きたる櫻哉//いのちふたつのなかにいきたるさくらかな//두사람의 운명이여 그 사이에 핀 벚꽃이런가 = 1685년작.
  • 雲折々 人をやすむる 月見哉//くもおりおり ひとをやすむる つきみかな//구름이 잠시 달구경 하는 사람 쉴 틈을 주네 = 1685년작.
  • 古池や蛙飛込む水の音//ふるいけやかわずとびこむみずのおと//오랜 못이여 개구리 뛰어들어 물치는 소리 = 1686년작.

관련 서적[편집]

  • 《일본 하이쿠 선집》/마쓰오 바쇼 등 지음/오석윤 옮김/책세상/2006년
  • 《바쇼의 하이쿠 기행 1~3》/마쓰오 바쇼 지음/김정례 옮김/244, 164, 160쪽/바다출판사/2008년

각주[편집]

  1. 일본 특유의 짧은 시.
  2. 바쇼는 파초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은 파초와 비슷한 열대식물인 바나나에서 착안했다. 매일신문, 야고부 바나나///@@@
    일본의 하이쿠와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 일본의 하이쿠

    우리나라에 전통 정형시로 시조가 있다면, 일본에는 와카(和歌)라고 하는 문예장르가 있다. 와카는 5-7-5-7-7로 된 일본의 전통시로, 이것은 중세 전란기에 지방을 떠돌던 문인들에 의해 5-7-5와 7-7로 나누어져 번갈아 읊는 렌가(連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렌가가 근세에 들어 대중성을 얻기 시작하면서 5-7-5형식이 단독으로 읊어 지게 되는데, 그 형식이 문예형식의 하나로서 위치를 확립하고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한편, 이 시대 문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데에 절대적인 역할을 한 것이 하이카이 시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였다. 그는 모든 문물이 도시로 향하고 일찍이 자본주의적 성향을 띠기 시작한 17세기 에도 시대에 저 변방으로의 고된 여행을 통하여 하이카이 문예를 완성해 갔다. 따라서 일본인에게 있어 바쇼의 이미지는 오로지 하이카이와 여행으로 평생을 일관한 속세를 초월한 여행 시인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모습은 현대 일본인들이 가장 동경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 하이쿠는 일본이라는 고향을 떠나 전 세계를 무대로 지어지며 읊어지고 있다. 단지 작가들만이 창작을 독점하는 시문학이 아닌 일반인들의 생활 속에서 창작되고 애송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시로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일생

    마츠오 바쇼는 1644년 지금의 미엔 현 우에노 시(市)인 이가우에노에서 2남 4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원래 마츠오 가는 12세기를 전후해 권세를 떨쳤던 무사 가문인 헤이케의 말류에 해당하는 토호의 한 지족이었으나, 그의 아버지의 신분은 하급 무사에 해당하는 농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이 호(俳號)는 처음에 무네후사(宗房), 도세이(桃靑)로 하다가 나중에 바쇼라고 부르게 되었다. 13살 되던 해인 1656년 아버지를 여의고, 19살에 도도 번 이가부(藤堂蕃 伊賀府)의 사무라이 대장 도도 신시치로 가(藤堂新七郞家)에 출사(出士)했다. 또한 그는 자신보다 2살 위이며 도도 가의 상속자였던 도도 요시타다(藤堂 良忠)의 총애를 받으며, 그와 하이카이를 통한 교분을 두텁게 했다. 요시타다가 데이몬 하이카이 시인이었던 관계로, 당시 크게 유행하고 있던 데이몬 하이카이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바쇼가 23살 되던 해, 요시타다가 향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함으로써, 바쇼는 무사로서의 길이 막히게 되고, 인생 또한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이후 고향 이가 우에노를 떠나 교토로 가, 교토의 사원에 머물면서 와카학(和歌學), 의술, 신도, 불교 등에 대해 배웠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29살 되던 해(1672년), 이가 우에노의 신사 덴만 궁에 자신이 편집한 홋쿠아와세(發句合: 2수의 하이쿠를 비교하여 평한 다음 우열을 가린 것)『가이오호이』를 봉납했다. 이로써 하이카이 시인으로서 출발하는 스스로의 결의와 성공을 신사에 기원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봄, 에도에서 『가이오호이』를 출판했다.
    30세부터 37세까지는 주로 에도에서 생활하면서 당시에 유행하던 단린 하이카이(교토를 중심으로 한 언어 유희적인 경향의 하이카이)에 탐닉해 있었다. 31세 때, 교토의 하이카이 종장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으로부터 렌가 하이카이 작법의 비전서(秘傳書) 『우모레기』를 전수 받았다. 이 비전서를 전수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이카이 시인으로서, 그리고 그것을 업으로 하는 하이카이 지도자로서 독립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33세 때 하이카이 친구 소도와 함께 출판한 『에도양음집(江戶陰陽集)』에 수록된 작품들은 바쇼가 당시에 유행하던 단린 하이카이에 탐닉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37살이 되던 해인 1680년, 시정을 벗어나 후카가와에서 은둔 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해 제자인 리카(李下)가 그가 머물던 오두막의 정원에 파초를 심었던 것에서 후카가와의 오두막을 '바쇼 암(庵)'이라고 불렀으며, 그의 호가 바쇼인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 바쇼 암 근처에 임재종 묘심사 파의 숙박소인 임제암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시마 곤폰 사(鹿島 根本寺)의 주지승 붓초가 머물렀던 인연으로, 이 즈음 그로부터 참선을 배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후 4년여 동안 이곳에서 생활하면서 특히 노자와 장자, 이백, 두보, 한산, 백낙천, 소동파 등의 중국 시인의 시와 사이교 등 일본의 전통 시가에 심취해 있었으며, 이 시기의 그의 하이카이의 특징은 노장(老莊)취미와 한시조를 도입한 격조 높은 새로움에 있었다.
    41살이 되던 1684년, 바쇼는 <들판의 해골로/뒹굴리라 다짐코 떠나가자니/바람은 살을 에이는도다> 라는 하이쿠를 읊으며, 이제까지의 은둔 생활을 박차고 『노자라시 여행』의 길을 떠났다. 이 후 1687년 8월 『가시마 모데(鹿島詣)』 여행, 10월 『오이노 고부미(おいの小文)』, 1688년 『사라시나 기행(更科紀行)』, 1689년 『오쿠노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활은 거의 여행과 은둔의 연속이었다. 이들 여행 속에서 그는 각지의 하이카이 시인들과의 만남의 장을 열어, 자신의 하이카이를 전파해 갔다.
    5개월이 더 걸려 6000여리의 『오쿠노호소미치(おくのほそ道)』의 긴 여행을 끝낸 바쇼는, 이 여행이 끝나고 나서 2년도 더 지난 다음 에도로 돌아왔다. 이 동안 쇠약해진 몸으로 교토와 오사카 등지를 전전하면서 많은 문하생들을 맞아들이는 한편, 그들과의 교류를 활발히 함과 동시에 여행을 통해 체득한 자신의 하이카이를 작품화했다. 그러던 1694년 10월14일, <여행길에 병드니/황량한 들녘 저편을/꿈은 헤메는도다>라는 하이카이를 세상에 남기고, 여행지였던 오사카에서 51세의 나이로 임종을 맞았다.

    ///@@@
    동양의 고전을 읽는다

    마츠오 바쇼의 하이쿠

    나의 시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목차

     

    '꿈'은 황야를 달리고

    한 해 저무네
    머리에는 삿갓 쓰고
    짚신을 신으면서
     
    삿갓 하나, 봇짐 하나,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여 길을 걷다가 마음에 들면 어느 오두막에서건 잠시 숙소를 빌려 머무는 방랑 시인. 이것은 일본인이 가장 쉽게 떠올리는 마츠오 바쇼(松尾芭蕉)의 모습이다. "여기서 짚신을 벗어 쉬고 저기서 지팡이를 버리고 머물면서 나그네 잠을 자다가 한 해가 저무니"라고 시의 배경에 대해 쓴 전서(前書)가 붙어 있는 위의 하이쿠(俳句)1)는 1684년 12월 말, 바쇼가 여행 중에 고향인 이가 우에노에 들러서 새해를 맞이하게 되었을 때 읊은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41세. 그에게 고향은 더 이상 돌아가 머물 안식처가 아니었다. 누군가 이 세상 모든 곳을 타향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성숙한 인간이라고 했던가. 이 하이쿠 작품에서는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이라도 설을 맞기 위해 고향을 찾는 세밑, 또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는 바쇼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694년 음력 10월 12일, 여행 중에 들렀던 오사카에서 많은 제자들에 둘러싸여 숨을 거두기까지, 바쇼는 은둔과 여행을 반복하며 오로지 하이쿠 외길의 삶을 살았다. 향년 51세로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읊었던 하이쿠는 이렇다.
     
    여행길에 병드니
    꿈은 저 황야를
    헤매고 다니네
     
    1694년 10월 8일 한밤중, 열흘 전부터 심한 설사로 자리에 눕게 된 바쇼는 자신을 간호하던 이에게 먹을 갈게 하여 이 하이쿠를 종이에 적는다. 그리고는 병상을 지키던 제자 시코에게 이 작품을 보이며, "꿈은 저 황야를 / 헤매고 다니네"와 "더욱 헤매고 다니는구나 / 꿈속에서는" 중에서 어느 쪽이 좋은지 묻기도 한다. "여행을 하다가 병이 들어 눕게 되니, 저 황량한 들판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꿈을 꾸게 되는구만.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정신없이 헤매고 다니는 거야." 바쇼는 여행 중에 앓아누운 자신을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 주는 제자에게 이렇게 자신의 심경을 말했던 것일까. 원문을 직역하면 꿈을 좇아 "헤매고 뛰어다닌다"고 해석될 만큼 절실함이 베어 있는 이 작품은 그러나 그의 마지막 시가 되고 말았다. 이후 그는 하이쿠의 성인(聖人)으로 신격화될 만큼 일본의 전 문학사를 통틀어서 일본의 대중과 지식인 모두에게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이 되었다. 나아가서 일본인이 세계를 향해 자기 나라의 문학을 말할 때, 가장 먼저 입에 올리는 시인이 되었다.

    옛날에 일본에는 죽음에 임박한 시인이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하는 '사세(辭世)의 시'를 읊는 전통이 있었다. 그러나 위의 하이쿠는 바쇼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읊은 '사세의 시'라고 하기에는 이 세상과 시에 대한 집착, 그 '꿈'이 너무 집요하지 않은가. 세속을 초월하여 무소유의 삶으로 일관하면서 하이쿠를 위해 정진했던 시인의 삶의 마지막 순간에 보이는 이 집착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런데 바쇼는 이 시에 '병 중에 읊음'이라는 전서(前書)를 달아서 사세의 시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평소 사는 것 그 자체가 사세"라고 말했던 그의 말대로 이 대시인에겐 사세의 시가 없다.

    시인 자신이 결코 사세의 시로 읽히기를 거부했던 시. 그러나 일본의 사세의 시를 말할 때는 위와 같은 에피소드와 더불어 언제나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시. 사세의 시든 아니든, 생애 마지막에서조차 자신이 평생 찾고자 했던 그 무엇을 찾아 겨울의 황야를 헤매는 이 시인의 '꿈'의 간절함과 절박함, 비통함은 하루하루 일상에 쫓기는 '나'의 발걸음을 문득 멈추게 한다. 언젠가 올 삶의 마지막날, '나'는 어떤 꿈을 꾸게 될까, 아니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싶은가 하고.
     

    하이쿠는 '풍아(風雅)'2)이다

    1680년 겨울, 근세 일본의 정치 중심지였던 에도 시내에 정착해 살던 바쇼는 갑자기 시내를 벗어나 변두리 후카가와의 작은 오두막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다. 다음 해 봄, 친구 리카(李下)가 어린 파초 한 그루를 보내오자 그는 이 파초를 오두막 한 켠에 심었는데, 파초가 있는 이 오두막은 어느새 '바쇼암(芭蕉庵)'이라 불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파초가 있는 오두막에 사는 이 은둔 시인은 '바쇼(芭蕉)'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로써 '바쇼'는 이 시인의 대표적인 별호가 되었다. 바쇼암은 자칫 암자로 착각하기 쉽지만, 이처럼 파초가 심어진 조그만 오두막, 바쇼의 은둔처였다.

    파초가 있는 오두막에서의 은둔 생활 첫해, 가을 태풍이 세차게 불던 어느 날 밤, 바쇼는 커다란 파초 이파리를 거세게 헤집으며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이런 하이쿠를 읊는다.
     
    파초 태풍에 날리고
    대야의 빗방울 소리를
    듣는 밤이로다
     
    일본은 기후 풍토상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많은 태풍이 온다. 지난 2004년에는 무려 13번이나 왔다고 한다. 이 하이쿠를 보면, 바쇼는 태풍 속에 찢겨지는 파초의 이파리 소리를 들으며 그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며 고독한 밤을 보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비바람에 쉬이 찢기는 연약함' 때문에 파초를 사랑한다고 말하곤 했던 그는 자신의 별호를 '후라보(風羅坊)'라고 지었다.
     
    그 사람 후라보(風羅坊)는 교쿠(狂句)를 즐기게 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은 그의 일생을 건 일이 되었다. 어떤 때는 싫증이 나서 던져버릴까 생각하기도 했고, 또 어느 때는 열심히 노력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자랑하려 하기도 했지만, 어느 쪽으로도 결정하지 못한 채 가슴앓이만 하다가 그 때문에 심신이 더러 편치 못했다. 한 번은 남들처럼 출세하기 위해 뜻을 세운 적도 있었으나 그것이 방해가 되어 안 되었고, 또 언젠가는 불교를 배워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깨달으려 한 적도 있지만 그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는 무능무예(無能無藝)의 오로지 이 길 하나로 살게 되었다.

    사이교3)의 와카, 소기의 렌가4), 셋슈5)의 그림, 리큐6)의 다도(茶道), 이들의 근저를 관통하여 흐르는 정신은 하나이다. 풍아(風雅)라는 것은 천지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사계절의 변화를 친구로 삼는 것이다. 보는 것 모두 꽃이 아닌 것이 없으며, 생각하는 것 모두가 달이 아닌 것이 없다. 그 아름다움을 볼 줄 모르는 사람은 미개인과 다를 바 없으며, 그것을 보고 마음속에 아름다움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은 새나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야만인이나 새, 짐승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연의 조화에 순응하고 그 조화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리라.
    - 『오이노 고부미 기행』
     
    1687년 음력 10월 초, 나라와 교토 등지로 떠났던 여행에 대해서 쓴 이 기행문의 서문에서 바쇼는 자신의 인생역정과 예술에 대해서 매우 고조된 어조로 말하고 있다. "하이쿠는 풍아이다." 그는 이 선언을 하기까지 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하이쿠에 걸었던 것이다. 말장난으로서의 하이쿠가 아니라 풍아로서의 하이쿠를 창작하고 향유하는 사람으로서의 자긍심에 차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해서 '풍아'라는 말을 즐겨 썼다. 그렇다면 도대체 풍아란 무엇인가.

    풍아(風雅)의 어원은 중국의 『시경』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풍(風)'은 민간에서 행해지는 가요, '아(雅)'는 조정에서 불려지는 우아한 시가를 말하다가, 나중에는 『시경(詩經)』의 시 전체를 일컫는 말로 '시가 문장의 도(道)'나 예술 전반을 나타내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풍아는 같은 의미로 쓰였다. 특히 품위가 있고 귀족적인 것을 나타낼 때, 즉 정통적인 예술 일반에 대해서 이 말이 쓰여졌다. 따라서 전쟁으로 얼룩져 있던 일본의 중세 시대, 그 하극상의 시대에 일본의 정통 시가인 렌가를 패러디하면서 전통을 뛰어넘고 기성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생겨났던 하이쿠는 결코 '풍아'일 수가 없었다.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바쇼도 말하고 있듯이 '보잘것없고 장난스러운 시', '교쿠(狂句)'였다.
     
    꽃(하나) 보다도
    코(하나)에 있었구나
    벚꽃 향기는
     
    초창기 하이쿠 시인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가 읊은 이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초기 하이쿠 문학은 이처럼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거나 재미난 비유를 통해 우아하고 고상한 정통 문학의 세계를 패러디했다. "봄 안개마저 / 얼룩얼룩 피어나네 / 호랑이해에는", "알 수 없는 세상이로고 / 석가모니의 죽음 뒤에 / 금전이 있네" 이 작품들은 바쇼와 동시대를 살았던 작가들의 것이지만, 이처럼 '풍아'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바쇼는 이처럼 언어유희적인 하이쿠를 배우고 성장한 사람이었지만, 언어유희적인 하이쿠의 안티테제로서 자신의 하이쿠를 일구어 나갔다. 그가 하이쿠의 예술적 완성을 위해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은둔, 그리고 여행이었다. 말하자면 생활의 실천을 통한 예술적 완성을 시도한 것이다.
     

    나의 풍아(하이쿠)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오랜 전란이 이어졌던 일본의 중세 시대7) 사람들은 내일의 목숨을 알 수 없었기에 이 세상을 쓰라리고 근심 많은 난세(亂世), 이른바 '우키요(憂世)'로 보고, 그 덧없음을 '무상(無常)의 미학'이라는 이름 아래 문학으로 형상화시켰다. 그러나 전란의 시대가 끝나고 태평성대를 구가한 근세에 이르자, 이 세상은 즐길 만한 것, 잠깐 머물다 갈 현세라면 조금 들뜬 기분으로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뜬 세상'의 '우키요(浮世)'라 생각하고 현실에 매우 충실한 문학을 시도했다. 우리나라와의 관련에서 보자면 임진왜란 직후에 해당하는 일본의 근세의 '우키요'는 중세 시대의 그것과는 이토록 달랐다.

    일본의 근세 시대, 현실적 쾌락 지향형의 문학과 문화를 만들어내고 향유하는 사람들은 무사로서 할 일이 없어진 하급의 무사 계급 출신과 이 시대에 새롭게 대두된 도시 상인 그룹인 조닌(町人)이었다. 그들이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성적 쾌락과 돈 버는 일. 이 두 가지 소재는 다양하게 소설로 쓰여지고 가부키 연극으로 상연됨으로써 근세라는 공간을 향락주의로 넘치는 '뜬 세상'으로 만들고 있었다. 이 시기 문화의 내용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세속적이었다는 것, 그리고 조닌 문화의 감각적 쾌락주의와 무사 문화의 금욕적 윤리 가치의 이중구조가 같은 틀 안에서 발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뜬 세상'의 시대, '감각적'이면서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했던 시대, 바쇼는 이 같은 세상의 흐름의 어느 것과도 다른 삶을 지향했다.
     
    나의 풍아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일반 사람들의 취향과는 달라서 아무데도 쓸데가 없다오.
    -「교리쿠(許六)와의 이별사」
     
    무사 출신의 제자로 공직에 있으면서 그림을 잘 그렸고 하이쿠도 잘했던 모리카와 교리쿠(森川許六)가 에도 근무를 끝내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스승 바쇼는 제자를 보내는 아쉬움을 담아 긴 이별사를 썼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의 풍아는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 바쇼가 자신의 전 생애를 걸고 이룩한 풍아, "보는 것 모두, 생각하는 것 모두가 꽃과 달이 아닌 것이 없다"고 그토록 고조된 어조로 말하던 그 '풍아'가 아무데도 쓸 데가 없다니. 그러나 바쇼는 이 말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요약했다.

    이른바 '하로동선(夏爐冬扇)'이다. 1997년엔가, 나는 예기치 않은 데서 이 말을 듣고 흥미로워했던 적이 있다. 개혁을 부르짖던 젊은 정치인 몇 명이 선거에 패배하자 여의도에 '하로동선'이라는 식당을 냈던 것이다. 당시 그것은 꽤 화제가 되었는데, 바쇼의 '하로동선'적인 삶과 문학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 식당 이름 때문에 그들의 활동을 주의 깊게 보게 되었다. 그들의 대부분은 70~80년대엔 민주투사로 활약하다가 90년대 초반엔 일선 정치에서 뛰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세상을 개혁하겠다고 온몸으로 부르짖던 사람들이 현실정치에서 패배하자 느닷없이 '여름날의 난로, 겨울의 부채'라는 이름의 식당이라니···.

    신문에 실린 음식 나르는 그들의 모습에선 '와신상담(臥薪嘗膽)'과 같은 치열함과는 다른, 아웃사이더를 선언하고 생활전선으로 들어간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담박함 같은 것이 전해져 왔다. 그 '하로동선'을 꿈꾸었던 정치가들은 지금 21세기 초반 대한민국의 정치적 실세가 되어 '참여'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지향점을 말하고 있다. '하로동선'과 '참여', 가장 먼 개념의 말을 시간적 간격을 두고 자신들의 지향점으로 삼은 사람들의 행로는 어떻게 될까? 어쩌면 극과 극은 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지켜보고 있는 중이다. 또 그들이 도모하는 일이 위태위태해 보일 때, 나는 '하로동선'을 표방했던 수년 전의 그들의 담박했던 표정과 실천적 삶을 떠올리며 생각한다. 부디 나의 기대가 저버려지는 일이 없기를···.

    그렇다면 바쇼가 말하는 '하로동선'은 어떤 것일까? 바쇼의 태생 자체가 아웃사이더였고 하이쿠라는 문학 자체가 당대의 주류이기보다는 아웃사이더인 서민 중심의 문학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바쇼의 행보와 지금의 하이쿠 존재 양상, 그리고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일본 문화의 독특한 일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철저하게 '참여'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의 철저한 '불참'이야말로 하이쿠라는 시를 문학적으로 독립하게 한 원동력이었다.

    그의 여정을 좇아가 보자. 1684년 음력 8월, 바쇼는 4년간의 은둔생활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며 읊는다.
     
    들판의 해골로
    뒹구리라 마음에 찬 바람
    살 에이는 몸이로다
    - 『노자라시 기행』
     
    '노자라시'는 '해골'이란 뜻이다. 이른바 '들판에 나뒹구는 해골'이 되리라는 비장한 각오에 차서 떠나온 여행 도중에 강가에서 울고 있는 '버려진 아이'를 보게 되었을 때, 바쇼는 묻는다.
     
    잔나비 울음 듣는 이여
    버려진 아이에게 가을 바람 부네
    어떤가
    - 『노자라시 기행』
     
    "예로부터 시인들은 잔나비 우는 슬픈 소리에 소매를 적시며 여행을 했다지만, 나는 이 가을 여행길에서 하필 버려진 아이까지 서럽게 울어대는 모습과 맞닥뜨렸습니다. 옛 사람이여, 가을바람 속에서 우는 저 아이를 그냥 보고 지나칠 수밖에 없으니, 저는 어찌하면 좋을까요." 바쇼는 이 하이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버려진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현실. 이러한 때, 그는 옛 시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끝없이 묻는다. 그리고 이 여행의 끝자락에서는 여행 출발 당시 '들판의 해골' 운운하며 비장한 포즈를 취했던 자신을 야유한다.
     
    죽지도 않은
    나그네 길의 끝이여
    가을 저물녘
    - 『노자라시 기행』
     
    "여행을 떠나올 때는 결국 이 여행 중 어느 들판에선가 죽게 될지도 모르리라 싶어 각오를 단단히 했건만, 이렇게 죽지도 않고 여정을 풀었네. 때마침 계절은 늦은 가을, 한숨을 돌리고 나니 오히려 여행의 쓸쓸함이 가슴에 파고드네." 바쇼는 자신의 여행 끝에서 이렇게 자조 섞인 쓸쓸함에 휩싸여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문학적으로 성공했고 많은 제자와 문하생을 두게 된 그는 여전히 자기 야유 속에 자신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다. 임종을 맞이하기 2주일 전, 바쇼는 1694년 9월 26일 오사카에서 열린 하이쿠 모임에서 이렇게 읊었다.
     
    이번 가을에는
    왜 이리 늙는 것일까
    구름 속의 새

    이 길이여
    가는 사람도 없이
    가을 저무네
     
    이 하이쿠들을 읊고 난 이틀 뒤, 9월 28부터 그는 앓아누웠고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져가는 새, 자신이 50평생을 통해 그토록 갈망해 온 하이쿠의 길에는 가는 사람도 없는데, 가을은 저물어 가고 있다는 담담한 토로. 이처럼 그의 야유는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향해 있다. 결코 세상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그 자신을 목적으로 삼고 그 자신을 가치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동시대의 사회가치로부터 도피를 위해 은둔을 하고, 나아가서 여행을 떠남으로써 특정한 도시(에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던 바쇼. 그는 은둔과 여행을 통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를 시도하고 스스로 자기 소외를 도모했다. 그는 끝내 '시대'에도 '계급'에도 '참여'하지 않은 채, "나의 풍아는 하로동선, 즉 여름의 난로 겨울의 부채와 같아라"고 말하며, '무용(無用)의 미학'의 삶을 실천함으로써 예술적 순수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지금 여기'의 시, 하이쿠

    1980년대 중반, 일본 유학 중에 하이쿠를 처음 접했을 때 그 생소했던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오로지 '지금 여기'에 피어있는 꽃과 지저귀는 새들과 저 산을 넘어가는 구름을 그토록 섬세하게 묘사하는 시가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그러한 시의 창작과 감상에 열중하는 일본인의 열정, 나아가서 하이쿠에 심취한 서양 사람들의 하이쿠 예찬이 더욱 놀라웠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다 만 것 같은 시, 이렇게 단순한 시, 이렇게 시대와 무관한 시가 이토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단 말인가. 일본이란 나라는 도대체 어떤 나라란 말인가.

    시인은 잠수함의 새와 같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잠수함에 산소가 모자라면 가장 먼저 알아채고 우는 새, 그 새의 울음이 배 안의 사람들을 일깨워야 하는 것처럼 시대의 공기 속에 산소가 모자랄 때 그 상황을 시로 읊어야 하는 것이 시인과 시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을 굳게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이쿠 속의 꽃과 나무는 너무나 생소할 것이다. 이데올로기 지향적이며 시와 시인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는 우리나라 시의 저 먼 대극점, 그곳에 하이쿠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지금 눈앞의 자연에 눈을 돌리게 하고, 일상의 한순간을 사진 찍듯이 언어로 읊어내서 다른 사람들과 그 순간을 공유하며 옆 사람과 대화하게 하는 시가 곧 하이쿠다. 17음절의 그 사소함과 섬세함이 빚어내는 자연 친화적인 시 세계 속에 거대한 시대 담론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현세적인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바쇼와 같은 삶을 지향하고 싶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까. 평생 동안 시대와 계급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고 철저하게 아웃사이더로서 '무용자(無用者)'의 삶을 살았던 바쇼의 문학은 뜻하지 않은 데서 빛을 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고전 교육은 여러 가지로 수난을 받았는데, 바쇼의 하이쿠와 기행문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문예적 교재'로 분류되어 그러한 시대적 수난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래서 패전 후 많은 고전 작품이 천황 이데올로기와의 관련 때문에 경원시 되었던 시기에도 여전히 바쇼의 하이쿠와 기행문은 교과서에 실렸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바쇼는 명실공히 근대 이후 시대와 상황을 초월하여 일본의 '국민 공유의 문학'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지금도 일본의 지식인과 대중으로부터 동시에 사랑받는 가장 대표적인 시인인 것이다. 그리고 일본을 연구하는 외국인이 가장 먼저 주목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하이쿠 역사 500년, 지금 일본에서 하이쿠를 읊는 사람은 500만명 이상이라고 한다. 정통을 패러디하던 장난스러웠던 시 하이쿠는 이제 일본인의 시심(詩心)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형식으로 통한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의 담론에는 '참여'하지 않고, 일상의 사소한 순간을 포착하고 표현함으로써 서로의 일상을 공감하는 장으로서의 시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일본인의 일상을 노래하는 17음절의 시 하이쿠, 그 짧고 사소한 시가 '풍아'로 되기까지 그리고 21세기에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는 시로 남아있기까지, 그 이면에는 일본어의 시적 가능성을 극한까지 추구하며 스스로 '무용자(無用者)'의 삶을 실천했던 바쇼가 있었다.

    그가 생애 마지막 순간의 '꿈'속에서까지 황량한 벌판을 헤매면서 찾고자 했던 진정한 시의 세계에 대한 절실한 갈구 그리고 거기에 화답하려고 애썼던 많은 제자와 문하생과 대중이 이루어 낸 하이쿠의 역사를 보며, '무용(無用)의 용(用)'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하이쿠라는 정형시(5ㆍ7ㆍ5의 음수율)가 500년이나 지속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문화는 전반적으로 형식을 존중하고 그 형식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동호인층을 형성하는 성격이 있다. 하이쿠의 발전과 계승, 현재 하이쿠 향유 양상의 이면에는 이러한 일본 문화적 특성이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 바쇼는 제자가 많았다고 하는데, 그의 문학에서 보이는 고독한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 아닐까?
    바쇼에게는 무사와 도시 상인 등 신분을 뛰어넘은 제자들이 많았는데, 바쇼가 이렇게 유명해지기까지는 그들의 역할이 컸다. 평생 개인 시집이나 시론집을 낸 적이 없는 바쇼이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기록하여 후세에 남겼다. 그는 인간을 싫어해서라기보다 세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은둔을 했고, 속세에서 살았던 제자들은 바쇼와의 하이쿠 모임을 통해서 문예공동체로서의 집단을 형성했다.

    3. 일본 천황이 읊은 하이쿠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이쿠는 정통을 패러디하던 시, 서민의 시였다. 일본은 전통적으로 시의 형식에 따라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이 달랐는데, 원래 천황이나 귀족이 읊던 시는 5ㆍ7ㆍ5ㆍ7ㆍ7의 음수율에 의한 시 '와카(和歌)'였다. 근대에 들어서 이러한 전통은 많이 퇴색되었지만, 지금도 천황은 와카만을 창작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시조를 왕부터 서민까지 모든 계층이 향유했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천할 만한 텍스트

    『바쇼의 하이쿠 기행』, 마츠오 바쇼 지음ㆍ김정례 역주, 바다출판사, 1998.
     
     

    각주

    • 1) 5ㆍ7ㆍ5의 음수율에 의한 정형시. 시 속에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인 기고(季語)가 들어 있어야 한다. 바쇼의 시대에는 하이쿠를 하이카이 또는 홋쿠라고 했지만, 근대 이후에는 하이쿠로 통용된다.
    • 2) 원래는 시를 뜻하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품격 있는 예술을 뜻하게 되었다. 바쇼는 자신의 시를 이야기할 때 특히 이 말을 즐겨 썼다.
    • 3) 무사계급 출신의 승려이며 일본 전국을 여행했던 시인으로 바쇼가 가장 존경했던 시인이기도 했다. 바쇼의 동북 지방 여행기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는 사이교와 관련된 장소가 많이 나오는데, 이 여행이 사이교 500주기(1689)를 추모해서 기획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 4) 여러 사람이 함께 읊는 렌가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각 지방 영주들의 초대를 받아 일본 전국을 여행했다.
    • 5) 화가이며 승려로 명나라에 유학하여 일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 6) 일본 다도를 완성한 사람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다도를 가르치기도 했으나 나중에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할복자살했다. 바쇼는 당시 여러 사람이 모여서 함께 읊던 하이쿠 모임이 추구하는 세계를 강구함에 있어 다도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 7) 1192년에서 1603년까지의 기간이다.
     
    ///@@=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마츠오 바쇼 | 바다출판사 |

      김삿갓[김병연(金炳淵)]마츠오 바쇼[松尾芭蕉]

        이 책을 통해 마츠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의 작품세계라든지, 그의 생애라든지 하는 것은 잘 모른다. 하지만 그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한국의 방랑시인인 김삿갓[김병연(金炳淵); 1807~1863]이 떠오른다.
         우선 두 사람을 상징하는 매개체가 우연하게도 “삿갓”으로 일치한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민중/서민 시인이며, 길 위를 돌아다니다가 길 위에서 죽었다는 점에서도 “평행이론”이 떠오를 만큼 유사성이 나타난다.
         비록 내가 두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해 잘 모르기에 그들의 작품세계에서 유사성을 밝혀내지는 못하지만, 이만하면 마츠오 바쇼[松尾芭蕉]를 일본의 김삿갓이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쿠[奧], 여행의 끝나는 곳이자 동시에 또 다른 여행의 출발하는 곳
         <쿠로 가는 작은 길>은 일본을 대표하는 하이쿠[俳句]1) 시인인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남긴 걸작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마츠오 바쇼[松尾芭蕉]가 자신의 형인 한자에몬[半左衛門]을 위로하기 위해 남긴 글이기에, 그의 생전에 제자들에게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2)
         이런 저자의 창작 목적에도 불구하고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고전작품으로 꼽힌다. 또한 외국어로 가장 많이 번역되어 있는 일본 고전 작품으로도 유명3)하다는 사실은 인생의 아이러니함을 보여주는 증거로도 보인다.
         책은 기행문이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기행문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우선 이 책이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귀착점으로 끝나는 일반 기행문과는 (달리) 그 전의 여행에서 돌아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땅인 오가키[大垣]에서 다음 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는 것이다.4)즉, 스미다가와 강[隅田川]에서 귀환하여 오가키[大垣]를 향해 떠났다가 다시 이세[伊勢] 신궁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종의 순환적 기행이라는 특이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정철(鄭澈; 1536~1593)의 <관동별곡(關東別曲)>처럼 하나의 과정으로서 여행이 아니라 여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무런 목적 없이 발길 닫는 대로 돌아다닌 것은 아니다. “사이교 법사가 머물렀던 버드나무 아래에서”라는 소제목의 글에 실린
         논배미 하나 [田一杖]
         모 심고 떠나가는 [植て立去る]
         버드나무로다 [柳かな]5)라는 하이쿠[俳句]에서 볼 수 있듯이 옛 시인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도 하고,
         흙으로 돌아간 옛 영웅의 흔적에서 무상함을 느끼기도 하는, 일종의 테마여행을 기행문의 형식으로 쓰면서 그의 하이쿠[俳句]를 곁들인 그런 글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열광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이쿠[俳句], 인생의 압축
         이쿠[俳句] 한 구절만 놓고 보면, 마치 야구경기에서 첫 타자가 들어서서 투수의 첫 공을 노려보다가 미쳐 치지 못하고 스트라이크가 선언되면서 동시에 경기가 끝나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이 허무함을 이어짓기를 통해 극복한다. 즉,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각자 하이쿠[俳句]를 지어 다르면서도 같은 그런 미묘한 완성품을 만드는 셈이다. 여기에서 흔히 말하는 일본인들의 “화(和)”가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깝고도 먼 나라인 일본에 대해 일본 서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하이쿠[俳句]를 통해, 그들의 내면에 흐르는 사유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다만, 약 400개의 주석을 모두 책 뒤편에 몰아버리는 편집방식은 누구를 위한 발상이었는지가 궁금할 정도로 읽는 이에게 불편함을 안겨주었다. 페이지마다 아래에 주석을 달 수 없다면, 차라리 초/중/고 문제집에 끼어진 답지처럼 별도 분리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책에 대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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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이쿠[俳句]는 5.7.5의 3구 17자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로 계절을 나타내는 단어인 키고[季語]와 구의 매듭을 짓는 말인 키레지[切れ字]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엄밀히 말하면 마사오카 시키[正岡子規; 1867~1902]의 하이카이 혁신운동 이후를 하이쿠[俳句]로, 그 이전은 하이카이 렌가[俳諧連歌]로 각각 구분해야 하나 하이카이 렌가[俳諧連歌]의 첫 구를 하이쿠[俳句]로 칭하기도 한다.
    또한 하이쿠[俳句]는 귀족들이나 승려들이 즐겼던 렌카[連歌]와는 달리 평민들이 즐긴 운문 문학이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사설시조와 통하는 측면도 있다.
    2) 마치오 바쇼[松尾芭蕉], <바쇼의 하이쿠 기행 1 – 오쿠로 가는 작은 길 - >, 김정례 옮김, (바다출판사, 2008), p. 224
    3) 마치오 바쇼, 앞의 책, p. 228
    4) 마치오 바쇼, 앞의 책, pp. 225~226
    5) 마치오 바쇼, 앞의 책, p. 40                                    ///@@@

    마츠오 바쇼(松尾 芭蕉, まつお ばしょう)

     
    이름 松尾 芭蕉(まつお ばしょう)
    생몰 칸에이 21년 ~ 겐로쿠 7년 10월 12일(1644년 ~ 1694년 11월 28일)
     

    “방랑에 병들어
    꿈은 시든 들판을
    헤매고 돈다.”

    - 바쇼가 사망 사흘 전에 쓴 하이쿠[1]

    에도시대하이쿠 시인.
    시성(俳聖)이라고까지 불리는 대단히 고명한 일본역사 최고의 하이쿠 시인의 한 사람이다.


    1. 개요2. 바쇼 닌자설3.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의 바쇼4. 검용전설 야이바의 등장인물


    바쇼는 배호(하이쿠 시인의 필명)이며 이름은 무네후사(宗房).[2]

    1. 개요[편집]

    이가우에노 출신으로 농업 집안(이라지만 사실 재야무사 집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세 때에 아버지가 사망, 생활이 어려워져 지역 유지인 토도 가에 시종으로 들어간다.무네후사가 모시던 사람은 두 살 위인 토도 요시타다였는데 이 둘은 함께 하이쿠를 배웠다. 요시타다를 모시던 마츠오는 따르던 주군이 25살로 요절하자 갈 곳이 없어졌는데 무사를 그만두고 하이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젊은 나이에 키타무라 키긴에게 사사하고 하이쿠의 길에 들어섰다.

    자주 여행을 다니며 노자라시 기행, 카시마 기행 등의 기행문을 남겼다. 제자 중의 한 사람인 카와이 소라와 함께 겐로쿠 2년(1689년)부터 반년간 토호쿠, 호쿠리쿠 지방을 돌며 기후현 오오가키까지 여행하고 남긴 '오쿠로 가는 작은 길(奥のほそ道, 오쿠노호소미치)'[3]이라는 기행문이 가장 유명하다.

    최후도 여행 도중의 객사였다. 향년 51세.

    쇼몬짓테츠(蕉門十哲)라고 불리는 타카라이 키카쿠, 핫토리 란세츠, 모리카와 쿄리쿠, 무카이 쿄라이, 카가미 시코우, 나이토 죠소우, 스기야마 산푸, 타치바나 호쿠시, 시다 야바, 오치 에츠진 등 특히 뛰어난 수제자 10명을 포함한 많은 제자를 두었다.

    유명한 구절(중에 번역이 있는 것)
    • 古池や蛙飛びこむ水の音(고요한 연못/개구리 뛰어드는/물소리 첨벙)
    • 五月雨をあつめて早し最上川(오월 오란비/거두어모아 거센/모가미가와)
    • 夏草や兵どもが夢の跡(여름 나절 풀/수많은 병사들이/꿈꾸던 자취)[4]
    • 名月や池をめぐりて夜もすがら(밝은 달이여/정원을 산책하며/밤을 새누나)
    • 閑さや岩にしみ入る蝉の声 (고요함이여/바위에 스며드는/매미의 울음)

    2. 바쇼 닌자설[편집]

    출신지가 닌자로 유명한 이가우에노[5]이고, 전문 하이쿠 시인들은 여러 곳을 여행하곤 해서 첩보활동을 맡게 되곤 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또한 바쇼 자신도 여행 중에 여러 의문점을 남겨 실은 닌자가 아니었느냐는 설이 있다.
    특히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의 기술이 여행 중 동행한 카와이 소라가 쓴 '소라 여행일기'와 80가지 이상에 달하는 차이가 있다는 것도 근거가 되곤 한다.

    • 여행출발일자가 '오쿠로 가는 작은 길'에서는 5월 16일인데 '소라 여행일기'에서는 5월 9일로 기록되어 있다.
    • 쿠로바네마치에서 14박, 스카가와에서 7박을 하며 수많은 시구를 남겼지만 출발 시에 절찬했던 센다이번 내의 마츠시마에서는 단 1구도 남기지 않고 하루만 묵고 통과해버렸다.(이것은 센다이번의 내부를 조사할 기회를 찾기 위해서라는 설이 있다.)
    • '소라 여행일기'에선 바쇼가 센다이한의 군사요새라고 하는 즈이간지(瑞巌寺), 상업항구인 이시노마키 항을 집요하게 구경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소라는 막부에서 임무를 받고 그 위장으로 바쇼의 여행에 동행했다는 설도 있다)
    • 하루 400km를 이동했다는 등 상식을 벗어난 여행속도

    이런 설로부터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은 기행문이 아니라 센다이 다테번의 내부에 대한 보고서라는 견해도 있다.[6]

    또 다른 이야기로는 핫토리 한조의 가명이 바로 마츠오 바쇼이고 그가 동요로 유명한 카고메카고메를 지었으며 그 노래가 말하는 속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숨은 진실(혹은 그가 숨긴 보물)이라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물론 후대의 설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어땠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탓에 마츠오 바쇼는 현대의 창작물에서 닌자로 그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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