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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후 서정시를 쓰는것 야만!, 시를 읽지 않는 자, 모두 야만인!...
2016년 12월 07일 23시 40분  조회:3280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를 읽지 않는 자, 모두 야만인!

 

 
 
김용규의 <철학 카페에서 시 읽기>
 
테오도르 아도르노는 말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아우슈비츠! 1940년 폴란드 남부에 나치가 설치한 대략 10만 명가량을 감금할 수 있었던 강제 수용소였다. 이곳에서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대략 400만 명의 인간들이 무참하게 학살된다. 그렇다. 인간은 이토록 잔인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 인간이 어떻게 자신의 감정을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보다 역겨운 허영이 또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인간의 잔혹성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러니 시를 쓴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아름다운 찬가라기보다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유럽 대륙의 반대편 한반도에서도 동일한 비극이 발생한다. 400만 명의 이상의 애꿎은 생명을 앗아간 한국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때 사용되었던 동일한 양의 폭탄들이 이 작은 반도에 모두 쏟아 부어졌으니 그 피해는 미루어 짐작이 가는 일이다.

잊지 말자.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2차 세계 대전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한반도의 전쟁은 아직도 계속 중이다. 단지 휴전일 뿐, 냉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 결과일까. ...양측 모두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이적 행위로 간주되어 엄청난 탄압을 감내해야만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냉전 중에 또 희생되었는가. 그렇다. 나는 말하고 싶다.
"6·25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너무나도 남루하다. 아니 비루하기까지 하다. 한국 전쟁 이후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서정시가 쓰였기 때문이다. 마치 전쟁이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냉전도 없었다는 듯이, 정치는 나와는 무관하다는 듯이, 서정시는 오늘도 계속 쏟아져 나오고 있다. 1966년 시인 김수영이 우리 시단을 비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고통이 모자란다고! '언어'에 대한 고통이 아닌 그 이전의 고통이 모자란다"고 말이다.






분단과 독재 그리고 이어지는 삶의 피폐함을 응시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어찌 하겠는가. 직면하고 부딪힐 수밖에. 그래서 온 몸으로 고통을 겪고 그것을 노래할 수밖에. 그럴 때에만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흉내 내지 않은 글, 즉 진정한 시가 탄생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6·25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김수영의 입장에 나는 동감한다. 하지만 어느 시인으로부터 배운 가르침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수영을 언급하며 시단을 비판했던 적이 있다. 그때 동석했던 시인 한 분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하지만 강 선생님. 그게 무슨 시였든 간에 시를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타인을 해치지 않습니다."

옳은 말이다. 시는 자신이니까 쓸 수 있는 글이다. 당연히 시를 읽는다는 것은 나와는 다른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타인의 속내와 그 삶을 읽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내면을 읽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해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군가의 목을 조르려면 우리는 그의 고통을 느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그렇다. 이제 아도르노의 명제는 수정될 필요가 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다. 그렇지만 시를 읽지 않는 것도 야만이다"라고. 전쟁과 갈등 그리고 경쟁은 우리에게 사랑과 신뢰의 힘을 앗아간다. 제2의 아우슈비츠 그리고 제2의 6·25를 막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의 힘을 되찾아야만 한다. 여기에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시대에 시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 물론 시를 읽는 것은 소설이나 산문을 읽는 것보다도 힘든 일이다. 한 사람의 속내를 완전히 안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혹은 신뢰한다는 것은 그를 알려는 의지에 다름 아니다. 사랑과 신뢰는 원하는 것을 해주고, 그렇지 않은 것을 꺼리는 감정이니까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떻게 사랑한다고 자임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아무래도 시는 어려운 법이다. 너무나 추상적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나 구체적인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바로 저 사람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바로 그 사람이다. 1000년 전에도 없었고, 1000년 뒤에도 없을 바로 그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이 자기니까 쓸 수 있는 글, 즉 시를 쓸 때, 그는 시인이 된다. 그러니 시는 소설이나 산문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금 우리를 시의 세계로 친절하게 안내할 수 있는 좋은 가이드가 있으니까. 전작 <철학 카페에서 문학 읽기>(웅진지식하우스 펴냄)에서 철학자 김용규는 문학에 대한 섬세한 감성과 냉철한 이성을 동시에 보여준 적이 있다. 애독자 중의 한 사람으로 나는 그가 언젠가 시에 대한 글을 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마침내 내 손에 그토록 바라던 책이 한 권 들려 있다. <철학 카페에서 시 읽기>(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철학 카페에서 시 읽기>(김용규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웅진지식하우스
나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첫 장에서부터 시인이란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마지막 장까지 한 달음에 읽어 내려갔다. 책을 읽는 내내 너무 기분 좋았다. 시와 시인의 존재 자체에 사랑의 논리가 깔려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용규의 책에서 사랑과 관련된 테마가 다채롭게 그리고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탄복했다. 우리 시대에 저자만큼 인문학적으로 박식하고 성숙한 사람이 또 있을까. '한국의 움베르토 에코'라는 출판사의 약간의 낯 뜨거운 홍보도 결코 허언은 아닌 셈이다. 덤으로 확인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다. 김용규는 나만큼이나 김수영을 좋아하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저자와 그의 글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지막 쪽을 넘길 때쯤 내게는 약간 아쉬운 마음이 남았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김수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통이 부족하다"는 인상이 들었던 탓이리라. 우리가 겪는 고통은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 사이의 잘못된 만남으로부터 발생하는 법이다. 그래서 고통을 없애는 방법은 아주 단순하다. 환경을 바꾸거나 아니면 삶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전자는 힘들고 후자는 쉽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면서 고통을 우회하려고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나만 바뀌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물론 김용규는 7장과 8장에서 환경이 주는 고통, 즉 소비 사회와 위험 사회를 응시하려고 노력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조금은 절정에서 비껴나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숨길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김용규의 책이 시의 세계로 우리를 제대로 안내해줄 수 있는 최상의 책이라는 사실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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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을 헤아리는 시인에게 일제강점기의 세상은 수용소나 다름없었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서정시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의 내면과 고통을 외면화시키는 것이 시다.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 수백만 명을 몰아놓고 학살하는 것 역시 인간이라면, 그 참혹한 내면을 대체 어떻게 시어로 표현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이에 시인의 선택은 두 가지로 나뉜다. 엄혹한 세상과 무력한 시를 부끄러워하며 펜을 꺾거나, 그 부끄러움마저 시의 재료로 삼아 어찌됐건 시를 쓰거나.

몽규의 세상과 동주의 세상

영화 <동주>는 시인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의 관계를 통해 윤동주의 선택을 재구성한다. 두 사람은 사촌이자 가장 친한 친구로서 서로 관계하며 정체성을 만들어간다. 영화가 소개하는 윤동주와 그의 선택에는 언제나 송몽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도 '시인 윤동주'나 '윤동주'가 아니라 <동주>다. 누구보다 애정을 담아 그를 '동주'라고 부르는 몽규를 이해하지 않으면 동주도 이해할 수 없다.

몽규는 동주에게 부끄러움이다. 영화 속에서 동주는 세상이 시로 바꿀 수 없을 만큼 참담하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럼에도 행동하지 않고 시를 써야만 한다는 사실에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발표하지도 않은 시 속에 은밀히 적었을 그 부끄러움이 영화에서는 몽규와의 대조를 통해 외면화한다.

몽규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매사에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행동한다. 그 또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문예지를 만들고 산문을 쓰지만, '인민의 의식을 고취'시키지 못할 시는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생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영화는 이 때 몽규가 이중스파이 이웅을 암살했다는 픽션을 덧대는데, 영화가 그의 손에 쥐여준 권총은 생각을 행동에 옮기지 못하고 시만 쓰는 동주의 부끄러움을 형상화한다.

그러나 몽규는 동주에게 권총을 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독립운동에 좌절하고 지쳐서 돌아올 때마다 창밖에서 동주를 찾는다. 세파에 지친 몸은 집 안에 들여놓지 않은 채 "동주야" 하고 밖에서 부른다. 나아가 동주가 "너는 왜 나한테는 (독립 운동 하러) 같이 가자고 하지 않느냐" 물어도 끝내 동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이 대비는 몽규가 조선인유학생들을 규합해 무장봉기를 계획하던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몽규는 함께 가겠다는 동주를 떼어놓고 조선인유학생들의 회합 장소로 떠나지만 곧 일본 경찰들의 습격을 받는다. 가까스로 몸만 빼낸 그가 하숙방 창문 앞에서 다시 동주를 불렀을 때, 동주는 "너 먼저 (고향으로) 가라"고 말한다. 그는 일본인 친구 쿠미(최희서)가 영어로 번역해준 자신의 시집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께 도망칠 수 없다. 국가가 국가를 수탈하고 민족이 민족을 핍박하는 몽규의 세상과 동주가 시를 쓰는 세상은 이처럼 끝내 다르다.

시는 전체를 해체한다
 
 
▲  동주와 몽규는 평생 바로 옆에서 살아가지만, 그만큼 경계도 뚜렷하다
 

동주의 시는 정말 틀린 것이었을까. 영화 <동주>는 동주의 짙은 부끄러움과 회한으로 영화를 끝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시를 긍정하고 있기도 하다.

동주는 개인주의를 억누르는 전체주의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이는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과 조선 민족을 억누르는 세상과는 조금 다른 것이다. 동주는 개인을 억누르는 모든 폭력과 제도에 저항하려는 마음이 더 크다. 몽규가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신윤주)과의 인연을 독립운동 자금줄로 이용하려 하자 동주는 반감을 드러낸다. '민족을 위해' 개인의 감정을 이용하고 매몰시키는 것 역시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주가 부끄러움을 고백하면서도 끝끝내 시를 쓰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시는 산문처럼 '인민의 의식을 고취'시키지는 못하지만, 개개인을 제 안으로 침잠케 함으로써 전체를 해체한다. 전체주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 <이퀄리브리엄>에서 전체주의에 저항하는 에롤 페트리지(숀 빈)가 예이츠의 시집을 읽다가 죽어가는 모습은, 시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개인을 구원하는지를 알게 한다. 동주의 시 역시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전체'라는 망령을 몰아내고 개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독립을 부르짖는 과정에서 각 진영이 강조했던 '민족'과 '이념'은 독립 후 분단의 단초가 됐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던 유대감은 온데간데 없고 오히려 일본인들에게도 하지 않은 잔인한 학살을 민족 간에 일삼았다. 일껏 일본의 전체주의를 해체했더니 '둘 이상의 전체'가 생겨나 상반된 이상향을 제시하며 도처에서 개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그 때 이 땅은 어디 하나 가릴 곳 없이 아우슈비츠였다.

너는 시를 쓰라

결국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는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앞서 동주는 '시가 가능한 세상이라야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막을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그는 시로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야심찬 시인이었다. 동주가 연희전문 시절 펴낸 시고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제도 <병원>이었다. 영화 <동주>가 묘사한 시인 윤동주의 마지막이 일제강점기를 다룬 그 어떤 이야기보다 처참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바닷물 주사로 추정되는 주사를 맞는다. 정신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에게 일본인 의사가 산수 문제가 적힌 종이를 던져준다. 임상실험의 경과를 확인하기 위함이다.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듯 전체주의의 어둠 속에서 빛나는 개인을 찾아내려던 문재(文才)는, 일제의 알량한 실험을 위해 정신이 마비된 가운데 숫자를 헤아리면서 죽어갔다. 식민지 조선의 에필로그이자 분단 조국의 프롤로그로 기록된 뼈아픈 야만이었다.

그 야만에서 헤쳐나왔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오늘, 동주의 마음을 제 마음처럼 헤아렸던 몽규처럼 담담하게 한 마디 전하고 싶어진다.

동주, 너는 시를 쓰라.
 
 
▲  서로의 그림자였던 두 사람의 인연은 사물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흑백 영화 속에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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