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의섭의 포에티카 4
시를 쓰고 읽고 사랑하는 방식
1. 쓰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아우슈비츠에 대해서는 리오타르, 라바르트, 아렌트 등이 철학적 책임을 거론하고 있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는 왜 철학이 아우슈비츠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하는가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판단은 그것이 역사이므로 정치에 맡겨야 한다는 말이다. 주지하듯 알랭 바디우는 정치와 봉합된 철학의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도르노는 왜 아우슈비츠를 서정시의 종언을 선언하면서까지 시와 관련짓고 있는 것일까. 아도르노의 발언은 서정시를 쓰지 않는 행위를 통해 시가 아우슈비츠를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도르노의 계몽적 의도는 서정시의 종언에 있지 않다. 아도르노는 그 끔찍한 역사 이후에 인류가 행해야 할 반성적 사유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시를 쓴다는 것과 관련하여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혹시 아도르노는 서정시를 아름다움이라는 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우슈비츠라는 공분의 사건을 겪은 이후의 인류로서는 더 이상 서정시-아름다움을 거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본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나 서정시는 아름다움과 동일어가 아니다. 이 점은 서구에서 말하는 ‘lyric’의 의미를 고려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 잘못된 대전제로 인해 아도르노의 발언은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되었다. 오히려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는 더 쓰여야 할 것이었다. 서정시는 아름다움을 포함하여 아름답지 않은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힘도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서정시는 시의 한 장르로 인식된다. 그런데 시는 그 자체가 서정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서정시가 있어서 서정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정이 있어서 서정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서정으로 우리는 많은 시를 써왔다. 서정이란 한자 그대로 보면 감정을 풀어낸다는 뜻이지만 우리는 이 말에 보다 더 많은 의미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정’이 다양하다는 것에서만이 아니라 ‘서’라는 행위에 의해 그러하다.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느냐에 따라 서정은 무궁무진하게 나타난다. 결국 감정을 어떻게 풀어내는가 하는 문제는 감정을 어떻게 써내는가 하는 문제이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각양각색의 양태로 감정을 펼치는 것이고, 따라서 서정은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를 ‘쓴다’는 행위는 시가 제작이라는 전통적 인식을 염두에 둔다면, 감정이 보다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해 표현을 만들어 가는 행위인 것이다. 잘 만들려면 대상을 명확히 꿰뚫고 있어야 하며,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통어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영역을 벗어나면 통제할 수 없는 감정만이 난무할 것이다. 그러므로 시를 쓴다는 것은 감정이라는 대상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 안에서 그것을 주무르고 마음 가는대로 조각해 나가야 한다. 시는 ‘쓴다’는 행위가 즐거운 고통일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그것을 갖고 창조해 내는 과정은 즐거운 것인 동시에 마냥 쉽지 많은 않기에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쓴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 다만 우리는 서정을 드러낼 뿐이다. 이 행위가 어떠한 이유로든 ‘불가능’하다면 다른 ‘가능’은 무엇인가.
2. 읽다
시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읽는다는 것은 수직으로 펼쳐진 바다의 절벽을 미끄러지듯 떨어지다 갑자기 대지 위에 부딪치고 마는 과정이다.
그것은 황홀한 추락이지만 추락의 그 순간마저 비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면, 시 읽기라는 것은 행복이다. 그런 시를 읽게 된다면 행운이다. 행복과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우리는 시를 찾아 읽는다. 저버리기 위해 읽지는 않는다. 한 번 보고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읽기를 저어한다. 그러므로 시 읽기는 노력이다.
시를 읽을 때 절벽을 타고 떨어지기를 거부하거나, 혹은 무서워서, 혹은 위에서 내려다만 보고 그 깊이를 짐작만 하고 마는, 겉핥기의 행위를 하는 부류도 있다. 단지 바다 위로 드문드문 솟은 섬이나 튀어 오르는 고래의 등만을 보고 다 맛보았다는, 아니면 뛰어내리긴 했으나 전혀 엉뚱한 경로로 무사착륙만을 시도하는 읽기는 어떤 결과의 매도를 가져오는가. 시는 매도될 대상이 아니다. 시는 주마관산하듯 스쳐 볼 대상이 아니다. 시는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고자 애쓰는 자에게만 자신의 품을 연다.
시라는 원천에서부터, 시라는 바다에 대한 한없는 밀착에서부터 제대로 된 읽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겉핥기식 읽기는 다시 겉핥기식 읽기에 대한 겉핥기식 읽기로 이어지고, 이 과정은 되풀이 되며, 결국 시라는 원천은 어딘가로 사라지고 원천과 전혀 관계없는, 겉만 핥은 읽기가 퍼트린 지독한 바이러스만이 남는다. 이 바이러스는 곳곳에 전염되어 알 수 없는 아성을 쌓아가고 그리하여 시가 아니라 시를 읽은 자의 생각만 복제된다. 이 원본 없는 복제 공화국에서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시를 읽는 행위는 정말로 고투다. 이 행위에 돌이 날아든다. 이 행위에 비난이 쏟아진다. 그것은 틀렸다고. 그것은 구구절절하다고. 그것은 과거의 것이라고. 그러나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상투적인 요구에서가 아니라, 진정 시는 시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문자로 기록된 현대의 시는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는 방식을 취한다. 이는 문자의 배열과 구성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는 전반적으로 지그재그의 방향으로 의미를 전달한다. 우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읽어가는 과정을 거치며 시의 의미를 누적시켜 나간다. 그러나 이 방향성은 일차원적인 것이다. 시를 읽는 과정에서 우리는 행과 연을 사이에 두고 서로 동떨어진 왼쪽과 오른쪽이, 위와 아래가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교류를 통해 형성되는 교직으로 인해 의미의 그물망은 세포 크기만큼이나 촘촘해진다. 그뿐이 아니다. 그물망은 이제 의미의 저층위까지 내려가 입체로 변한다. 실타래가 연상된다. 종횡무진 교류하는 의미망으로, 그 현란한 춤사위로 정신이 아뜩해진다. 우리는 시를 읽으며 춤을 추다 읽기를 멈추고서도 계속 춤을 춘다. 이것이 시 읽기의 방식이다. 시는 우리를 춤추게 한다.
3. 사랑하다
학생들에게 시에 대한 얘기를 한다. 다 그렇듯이 시를 가르치고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선 보다 많이 시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동시에 시를 진정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 아무리 좋게 평가하기 어려운 시가 있다 하더라도, 그조차도 시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좋지 않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시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무궁무진해야 한다.
어떤 시간엔 그것을 음독하다가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시인의 시가 새롭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내가 편식을 하고 있었구나 하는 점이었다. 물론 깊이 없는 강요, 표피만 있고 살은 없는 번지르르함, 식상한 어투, 모방적 표현 등등으로 일부 저평가할 수밖에 없는 시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시를 쓰는 시인이 늘 그렇게만 쓰리라는 보장도 없고, 또 내가 보는 방식이 나만의 방식일 수도 있으며, 일부러 그렇게 쓰진 않았을진대, 그러한 시 안에 들어 있는 시인의 마음은 감히 뭐라고 할 수는 없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애정을 갖고 다시 들여다본다. 잘잘못이 있다면, 그것이 나아가야 할 방향쯤 지적할 수 있는 자유가 허락된다면, 학생들에게 타산지석의 지표로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시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시를 쓰는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부족하므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므로, 나는 시를 , 그리고 시를 쓰는 나를 사랑하기로 결심한다. 이미 그래왔었겠지만 다시 한 번 결심한다. 처음 시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시를 쓸 때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로써 세상을 담아내고자 할 때의 자신감과 설렘이다. 이것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믿는다. 시인이라면 무릇 그래야 할 것이다.
올 한 해에도 수많은 시가 발표되었다. 한 문예지를 통해 재수록 시에 대한 작품평을 다달이 하고 있는 중이다. 그 많은 시 중에서 한 편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 많은 시 중에서 한 편만을 얘기해야 한다는 것은 타당한 방식이기도 하다. 시는 부단한 자기발전을 통해 진화해야 한다. 새롭지 않으면 시가 아니다. 시라는 장르가 규정될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은 이전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 조건으로 시는 수 천 년을 넘게 꾸준히 창조되어 오고 있다. 시가 어제와 같다면, 어제의 시를 그대로 복사해 놓으면 그만인 것 아닌가. 동시에 이 새로움이라는 전통이 있기에 시는 수 천 년을 이어오며 전통적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연속과 불연속의 과정 속에서 우리의 시는 진화하고 있다. 자신에게서 가장 진화한 시가 나오기를, 그리하여 다른 시들도 그 길을 눈여겨보게 되기를
바란다. 이 땅에 어제를 능가하는 훌륭한 시편이 가득 차오르고 더 많은, 더 좋은 시가 끊임없이 탄생하여 시의 화엄이 펼쳐지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말은 이렇게 바뀌어야 할 것이다. 좋으면 좋을수록 많아진다. 무엇이?
시에 대한 사랑과 시의 사랑과 시에 의한 사랑이.
윤의섭∙1968년 경기도 시흥 생, 1994년 ≪문학과 사회≫로 시 등단, 21세기 전망 동인.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창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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