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보물 + 뒷간

맨발, 발끝, 무용, 시인남편, 그리고 혼(魂)...
2016년 12월 08일 23시 07분  조회:7483  추천:0  작성자: 죽림

“발끝으로 서보라고요? 왜 그래야 되죠?”

이사도라 던컨의 춤과 사랑 (1) 고전발레를 혐오했던 현대무용의 '어머니'

/이채훈 한국PD교육원 전문위원·
 

 

==============================================

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 1877.5.26 ~ 1927.9.14)

1905.1.5 러시아 노동자 장례행렬 속에서 그녀의 춤이 시작되다

“내가 멀리에서 본 광경은 기다란 행렬이었다. 음울하고 비탄에 잠긴 그들이 관을 메고서 줄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나를 태운 마부는 속력을 늦추고는 몸을 구부려 성호를 그었다. 나는 어슴푸레한 새벽에 공포에 가득 차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운명의 1905년 1월 5일, 무장을 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처자식을 먹여 살릴 빵을 요구하러 겨울궁전에 왔다가 학살당한 노동자들이었다. 이 슬프고도 끝없는 행렬이 내 앞을 지나는 동안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고, 다시 뺨에서 얼어붙었다. 내가 이 광경을 보지 않았더라면 내 전 생애는 지금과 달라졌을 것이다.” 이 글을 쓴 이는 우리가 화려한 스캔들과 ‘스카프 죽음’으로만 알고 있던 이사도라 던컨이다.

파산한 은행가의 딸

이사도라 던컨(이사도라 덩컨)은 1877년 5월 26일 달콤한 탐욕의 자본주의가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별이 빛날 때’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이사도라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덩컨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덩컨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대단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던컨 씨는 그저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기엔 아쉬울만큼 드라마틱한인생을 살았다.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매력을 지녔다. 이사도라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한 궁핍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빨간 망토와 모자를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편물을 팔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때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즐겨 말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던컨 가족(어머니와 네 명의 형제. 이사도라가 막내다)의 가장 큰 특징은 생계를 위해 끝없이 돈벌이에 매달리면서도 언제나 시와 음악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쓰레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해변으로 뛰어가 나체로 춤을 추었는데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당대의 천재적 남자들과의 뜨거운 사랑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셀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어서 이사도라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이사도라는 이런 글을 썼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만만치 않은 무관심과 몰이해,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이사도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리스 말고도 그녀가 찬양한 것은 니체, 베토벤, 쇼팽, 로댕이었다. 그녀는 사람을 춤추게 하는 것은 영혼과 정신이지 기교가 아니라고 했다.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로 논란을 일으켰지만 그녀는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 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녀의 인생은 당대의 천재적인 남자들과의 뜨겁고도 짧은, 기이할 정도로 평생을 가는 질긴 사랑으로 점철되었는데, 중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녀가 1000명의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 던지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녀는 푸른 눈의 아름다운 남자 에드워드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서 딸 데어도르를 낳았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Paris Singer)와의 사이에서 아들 패트릭을 낳았다. 이 아이들이 이사도라 인생의 가장 큰 비극으로 자리 잡는다. 꽃이 만발한 4월의 비 내리는 봄날, 이사도라는 두 아이 데어도르와 패트릭, 그리고 보모와 함께 모베랑이라는 운전사가 운전하는 르노 자동차를 타고 거처인 베르사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춤 연습 때문에 지루해할 아이들을 집으로 먼저 돌려보냈는데, 그때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들이 탄 자동차는 센 강을 따라가다 엔진이 꺼졌고 운전사가 차 밖으로 나와 다시 엔진을 걸었을 때 차는 강둑의 경사면 아래로 질주해 물속으로 곤두박질쳐버렸다. 차를 강에서 꺼냈을 땐 사고가 난 지 한 시간 반이나 지난 뒤였고, 아이들은 보모에게 매달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 뒤로 파리 시민들은 미친 듯이 아이들 이름을 울부짖으며 센 강변을 뛰어다니는 이사도라를 몇 번이고 볼 수 있었다.

금빛 머리칼의 천재시인 예세닌과의 결혼

아이들이 죽은 뒤 1914년 이사도라는 러시아로 떠났다. 그곳에는 그녀의 비범한 생애 동안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운명처럼 따라다니던 ‘고독’이 가공할 만한 존재로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예세닌이란 천재 시인의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만난 이후 단 하루도 평화로운 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고, 그가 대단한 천재일뿐 아니라 대단한 미치광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때까지 엄청난 고통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사도라는 예세닌을 처음 보고 이렇게 느꼈다. “나는 그의 금빛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상처받는 것을 견딜 수 없었어. 아마 너는 그 공통점을 모르겠지? 그는 어린 패트릭의 모습이었어. 패트릭이 성장했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거라는 확신이 있는데 어떻게 그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겠어?”

이사도라가 예세닌을 통해 본 것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금발의 아들 패트릭이었다. 이사도라의 예세닌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의 모습을 띤다. 작은 키에 가냘픈 체구, 눈부신 금발, 마치 1월의 딸기처럼 보이는 예세닌과 춤을 추기엔 너무나 살이 쪄버린 깊고 슬픈 눈빛의 이사도라는 무려 열여덟 살 차이가 났다.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50세 가까운 나이를 38세로 속였다. 그들의 15개월에 걸친 신혼여행은 악몽 그 자체였다. 예세닌은 술에 취하면 이사도라를 더러운 늙은 암캐라고 불렀고, 뛰쳐나갈 때까지 폭행했으며, 호텔 기물이 산산조각 날 정도로 파괴했다. 그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이사도라가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콘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예세닌은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는데, 이사도라는 푸른색 정장에 심홍색 넥타이, 흰색 부츠를 신은 예세닌을 옆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이 금발의 천사가 바로 제 남편이랍니다” 평생에 걸쳐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추한 것을 추방해야 한다고 했던 그녀에게 예세닌과의 삶은 추함 그 자체였다.

나의 몸은 나의 예술의 성전입니다

예세닌과 함께 떠난 미국 순회 공연은 술과 연습 부족으로 내리막길에 들어선 그녀의 종말을 더욱 재촉했다. 게다가 공연 도중에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그때 이사도라는 이렇게 반박했다. “왜 내 몸의 일부가 노출되는 것을 조심해야 하지요? 그것이 무엇인가를 상징한다면 그것은 여성의 자유를 상징하는 것이며 청교도주의의 속박과 편협한 관습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신체를 숨기는 것이 외설적인 것입니다. 내 몸은 내 예술의 성전입니다.”

‘잘 있거라, 벗이여’란 시를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에 손목을 그어버린 예세닌의 자살 이후 이사도라는 니스로 거처를 옮기고 좌우명을 ‘무한하게’로 바꿨다. 이 말은 한때 전 세계적으로 유명했으나 이제는 술 한 병 살 수 없는 가난뱅이 전직 무용수로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만은 혐오한다는 그녀 식의 선언이었을 것이다.

젊은 날에는 리허설 때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들고 나타나고, 위선적인 자본주의의 돈이라면 극심한 가난이 예상되어도 거부했으며, 자연스러운 신체 동작을 숭배했고, 예술 세계가 잃어버린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 거침없이 관습에 도전했으며, 소리와 빛처럼 만질 수 없는 자유스러운 춤을 추었던 이사도라의 명예는 추문과 비극에도 결코 손상될 수 없었다. 그녀의 장례식장에서 타오르는 양초 사이에 누운 시신 옆에는 두 아이를 안고 있는 이사도라의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사도라가 늘 했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장례식장을 찾은 사람들은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사랑스러운 어떤 존재를 느꼈다.


======================================

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 1878년 5월 27일 ~ 1927년 9월 1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의 무용수. 
현대 무용(모던 댄스)의 어머니(개척자)로 여겨져서 '던커니즘(Duncanism)'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던컨이 제창하고 실천한 현대 무용의 새로운 무용정신은 발레의 전통이 빚어내는 속박이 적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하나밖에 방법이 없었던 발레를 습득했다. 태어나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던컨은 이윽고 고도로 세련되기는 했으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 본위의 무용에 의문을 품고, 더욱더 자연과 자유에의 동경이 강렬해졌다. 

그 결과 던컨이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는 토우 슈즈(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추었다. 그것이 기교본위의 발레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다.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갔다.

던컨은 그 해 파리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무용을 발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많은 공명자를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지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선전했으며, 그러는 가운데 독일에서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은 '발레가 없는 나라'라고 불려, 육체문화운동이 활발했는데, 던컨은 그 운동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던컨이 그러한 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한 것은 1904년이었다. 그녀는 그 뒤 프랑스, 미국, 소련 등에도 학교를 만들었다. 던컨이 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한 것은 1905년이었다. 

그 곳에서 디아길레프나 포킨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것이 원동력이 되어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던컨은 현대 무용의 융성을 촉구하고, 특히 독일의 현대 무용에 힘찬 목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무용를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무용계에 준 영향은 큰 것이었다.

 

 

 

 

이와 같이 던컨에 의한 '자유댄스'는 현대 무용의 선구가 되었으며, 그녀의 예술은 
첫째로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로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셋째로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1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이며, 자유 정신의 찬가(讚歌)였다. 그 결과는 그녀의 로맨틱한 정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건강미에 대한 강렬한 사모(思慕)로서 나타났다. 
그녀는 또한 기성의 음악곡을, 악보를 분석하거나 음표를 더듬거나 하는 일 없이 그 음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감정적으로 정서깊게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쇼팽이나 브람스, 베토벤의 교향곡조차 자기 멋대로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성적인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으며, 기법(技法) 그 자체, 표현 그 자체에도 창의를 주장하여, 그 결과로 무용예술을 한정된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개방하여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길을 개척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의 전부에 영향을 미치어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렸으며 1927년에 프랑스의 니스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기까지 던컨은 정열을 다하여 새로운 무용 미학의 실천에 힘썼다.

경력 : 1900년 유럽으로 건너감 
1904년 독일 그뤼네발트에 무용학교 설립 
1905년 러시아 방문공연 
특이사항 : 모던댄스의 선구자 
작품 : 작품 '슬라브행진곡', '마르세이즈', '아베마리아' 
 

 

파산한 은행가의 딸
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5월 26일 달콤한 탐욕의 자본주의가 정녕 화려하게 타오르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별이 빛날 때’ 태어났다. 그녀의 어린 시절 최초의 기억은 불길에 휩싸인 어느 건물 창문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꺼낸 일이었다. 이사도라가 태어나던 해 아버지가 운영하던 덩컨 은행이 파산했고, 고객 중 다수였던 노동자와 하녀들은 시위를 벌이며 그녀의 집을 향해 행진했다. 덩컨 은행의 파산은 수많은 남녀 노동자의 꿈을 앗아간 대단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신문은 이 사건을 가리켜 ‘금주령을 모범적으로 지킨 사람들을 주정뱅이로 만들고, 도덕적인 사람들을 반사회적인 위법자로 만든 일’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던컨 씨는 간단히 실패한 은행가로 묘사하는 데 그치고 말 삶을 살지는 않았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을 산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의 거부할 수 없는 연인으로서 매력을 지녔다. 이사도라는 이런 아버지를 성가신 짐인 동시에 자부심의 원천으로 여겼다. 파산과 이혼으로 인한 궁핍 때문에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손수 짠 빨간 망토와 모자를 입고 이 집 저 집 다니며 편물을 팔아야 했다. 그런 와중에도 이사도라의 어머니는 밤마다 자녀들에게 큰 소리로 글을 읽어주었는데, 그때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휘트먼의 시 ‘나 자신의 노래’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즐겨 말했다.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를 노래하리라. 그리고 내가 취한 것에 그대도 취하리라.’ 

 

 

        

 

맨발의 댄서 
던컨 가족(어머니와 네 명의 형제. 이사도라가 막내다)의 가장 큰 특징은 생계를 위해 없이 돈벌이에 매달리면서도 언제나 시와 음악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학교 교육은 쓰레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 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으로, 해변으로 뛰어가 나체로 춤을 추었는데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

당대의 천재적 남자들과의 뜨거운 사랑, 바다와 바람, 어머니가 피아노로 들려주던 음악, 셀리의 미모사, 꽃의 개화, 벌들의 비행, 오렌지와 캘리포니아, 양귀비의 자유분방하고 찬란한 금빛. 이것이 그녀가 진정으로 찬양한 것들이어서 이사도라는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 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시카고로 일자리를 구하러 갈 때 이사도라는 이런 글을 썼다. 
“내가 태어난 이 다정다감한 땅을 떠나 어린 순례자가 되었고 기차는 동쪽으로 속력을 내어 달렸다. 거대한 로키 산맥을 지나고 광활한 대평원을 지나는 참으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나는 빈손으로 떠났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내게는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황금 덩어리 같은 재능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기까지 그녀는 만만치 않은 무관심과 몰이해, 궁핍을 견뎌내야 했다. 

미국을 떠나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 이사도라는 열렬한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 도자기 전시관에 매료되었고, 박물관에 있는 그림 속의 춤추는 동작을 따라 했다. 당시 사람들은 루브르 박물관까지 춤을 추며 길을 가는 그녀를 쉽게 볼 수 있었고, 이사도라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달나라에서 왔지요!”라고 말하곤 했다.

 

20세기 초 유럽의 예술계는 혜성같이 등장한 한 여인으로 인해 술렁거렸다. 
아름다운 무대 장치도 없이, 몸에 딱 붙는 무용복도 없이, 결정적으로 이제까지 춤을 춘다면 반드시 신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토슈즈도 없이, 맨발에 헐렁하고 속이 비치는 드레스를 걸친 무용수는 처음 보는 춤을 사람들에게 선보였다. 아름답고 기교가 뛰어난 전통 발레와는 전혀 다른 춤이었다. 하지만 그 춤을 보고 있노라면 춤을 추는 무용수의 절절한 마음이그대로 다가왔다. 

신대륙 미국에서 건너온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은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유럽 예술계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는 영국과 독일, 러시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녀의 춤으로 인해 무용에 대한 인식은 180도전환되었으며 토슈즈의 발레를 떠나 자유롭게 인간의 몸과 마음을 표현하는 현대 무용이 등장하였다. 
이사도라 던컨, 그녀는 맨발로 고전적 무용세계에 혁명을 일으켰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슬하에서자란 그녀는 한번도 제대로 된 무용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마음으로 생각한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10세가 되기 전에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마음속의 생각과 느낌을 몸으로 표현하는 법을 가르쳤다. 15세가 되자 시카고로 간 이사도라 던컨은 프로 무용수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고 살기 위해 술집에서 캉캉과 비슷한 것을 추면서 돈을 벌었다. 돈벌이는 괜찮았지만 이사도라 던컨은 이 일을 1주일만에 그만두었다.
그것은 춤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뉴욕으로 건너간 이사도라 던컨은 2년 간을 더 삼류 무용수로 보낸다. 아무도 그녀의 춤을 제대로 바라봐 주지 않았다. 마침내 20세기를 1년앞둔 1899년, 이사도라는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간다. 

유럽에서의 열광 
편협한 청교도 사상에 사로잡혀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국과는 달리 세련되고 폭이 넓은 유럽의 예술계는 그녀의 춤을 단번에 받아 들였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춤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찬사를 보냈다. 
이사도라 던컨의 성공은 특히 독일과 러시아에서 눈부셨다. 특히 정통 발레의 본고장이었던 러시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새로운 무용에 대한 전폭적인 관심으로 그녀는 무용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자유로운 사상과 영혼에 깊이 감명받은 그녀는 그것을 춤으로 표현하기위해 그리스에서 자신의 춤을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열정적인 무용가였던 만큼 이사도라 던컨의 사랑도 열정적이었다. 
그러나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보며 자란 그녀는 결혼 제도를 믿지 않았다. 그녀는 독일에서 무대 감독 고든 크레이그와의 사이에 딸 디어드리를 얻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 패트릭을 얻었지만 결코 그들과 결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추며 두 자녀를 둔 어머니의 행복을 느끼던 그녀에게 닥친 첫 번째 불행은 너무나 끔찍한 것이었다. 보모와 함께 나들이 나갔던 아이들을 차 사고로 인해 모두 잃은 것이다. 
이사도라 덩컨에게 이제남은 것은 춤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전 유럽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자유롭고 강인했던 그녀는 춤을 통해 실의로부터 점차빠져 나올 수 있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이사도라 던컨은 파리에서새빨간 튜닉을 입고 ‘마르세예즈’를 무대에 올린다. 그녀는 이 공연 마지막에 “시민이여! 무기를”이라고 외치며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프랑스인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1922년 러시아를 다시 방문한 이사도라는 그곳에서 17년 연하의 천재 시인 세르게이 에세닌을 만나 전격적으로 결혼을한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재능과 사랑을 질투한에세닌이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해버리고 만 것이다.

인생에 닥친 고통을 춤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던 이사도라 덩컨은 1927년 프랑스 니스에 있었다. 최근에 사귄 젊은 벗이 그녀에게 스포츠 카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빨간색의 길고 긴 머플러를 두른 그녀는 가볍게 차에 오르며친구들에게 “안녕, 나는 영광을 위해 떠나!”라고 외쳤다. 그리고 머플러자락을 뒤로 넘기고 차가 출발했다. 그 순간, 유럽 무용사의 혁명가이자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았던 이사도라 덩컨에게 죽음이 왔다.빨간색 머플러가 자동차 바퀴에 끼면서 그녀의 목이 부러진 것이다. 

그녀의 춤은 그 춤이 너무나 자유로워 후대까지 춤사위 하나 하나가 전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20세기 초반 발레 위주의 무용계에던진 자유로운 정신만은 길이 남아 현대 무용의 효시가 되었다. 여성에게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순종적인 삶을 기대하던 20세기 초반,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의 온몸으로 참다운 여성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던컨의 철학과 목적 
그녀는 아주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무용이 육체의 동작을 매개로 한 인간 정신의 신성한 표현이라고 한다. 

이사도라는 영혼의 춤을 추었고 춤을 종교와 동격으로 두면서 춤을 통한 종교의 무용을 주장했다. 그녀는 모든 속박을 깨뜨리는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화려한 실례로서 대중의 상상력을 끊임없이 뒤흔들어 놓았다. 
그녀를 미국에서 발생한 이 예술의 창시자로 평가하는 것은 그녀의 뒤를 이어 그녀의 독창적인 움직임의 양식을 흉내내거나 발전시킨 루스, 세인트,, 데니스, 도리스, 헌프리, 마사 그라함 등의 거물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클래식 발레의 규범과 인공적인 양식에 반대해서 무용을 인간의 강렬한 표현형태로 발전시킨데 있는 것이다. 

던컨은 그가 무용의 정수라고 믿은 자연스럽고 열정적인 단순성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녀의 창작 방법은 창조적인 선구자라면 누구나 취했어야 할 기본적인 것이었다. 
그녀는 진실로 인간의 영혼을 육체의 움직임이라는 수단으로 성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무용을 추구한 것이다. 

던컨의 표현은 때로는 너무 천진스러운 것이었지만 1930년대와 1960년대의 자유주의 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녀는 활동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여성이고, 여성임을 영광되고 한 인물이며 그러면서도 그녀의 일을 수행해 나가는 데에 타협을 몰랐던 여성의 표본으로 평가되고 있다. 

 

 

 
 

 

  

< 左, 中, 고전 무용의 틀을 깨고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거리와 무대 위를 나비 같이 날

아다니는 던컨의 아름다운 시절. 右: 정렬에 불타는 그녀의 춤사위 >


❋ 덩컨의 발레

   덩컨이 제창하고 실천한 현대 무용의 새로운 무용 정신은 발레의 전통이 빚어내는 속박

이 적은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녀도 젊은 시절에는 당시 하나 밖에 방법이 없었던 발레를

습득하였으나, 태어나서부터 자연을 사랑하는 반항아였던 덩컨은 이윽고 고도로 세련되기

는 했으나 제약이 많은 고전 발레의 인공적인 기법 본위의 무용에 의문을 품고, 더욱 더 자

연과 자유에의 동경이 강렬해졌다.

   덩컨은 처음으로 시카고의 무대에 올랐을 때 토우 슈즈(발레 슈즈)도 던지고 타이즈도

입지 않은 채, 맨발에 거의 반나체의 모습으로 발레를 했고, 기교 본위의 발레 밖에 보지

못했던 관객의 조소를 받았다. 그녀는 몰이해한 조국에 실망하여 1900년에 유럽으로 건너

갔다.

   덩컨은 그 해 파리에서 그녀 나름의 독특한 새로운 무용을 발표, 그곳에서 처음으로 많

은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유럽의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고, 각

지에서 그녀가 주장하는 ‘자유댄스’를 발표·선전했으며, 독일에서는 가장 강력한 지지를

획득했다. 독일은 ‘발레가 없는 나라’로 불려 육체 문화 운동이 활발했는데, 덩컨은 그 운

동에 큰 영향을 주고 독일 신무용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덩컨은 1904년베를린에 무용학교를 설립하였고, 그 뒤 프랑스, 미국, 소련 등에도 학교

를 만들었다. 덩컨은 1905년러시아를 처음으로 방문하여 디아길레프나 포킨에게 강한 자

극을 주었으며, 그러한 원동력으로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가 결성되었다.

   이리하여 덩컨은 현대 무용의 융성을 촉구하고, 특히 독일의 현대 무용에 힘찬 목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현대 무용을 탄생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무용계에 큰 영향을 주었

다.

 

❋ 평가

   덩컨에 의한 ‘자유댄스’는 현대 무용의 선구가 되었다.

   그녀의 예술은 첫째로 자연스럽다는 것, 둘째로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부활시켰다는 것,

째로 음악을 무용에 종속시켰다는 것 등 세 가지로 요약된다. 그녀의 무용에서의 자연주

의란 인공적인 기교 제1주의의 고전 발레에 대한 반발이며, 자유정신의 찬가(讚歌)였다.

  그 결과는 그녀의 로맨틱한 정신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건강미에 대한 강렬한 사모(思慕)

로서 나타났다.

   그녀는 또한 기성의 음악곡을, 악보를 분석하거나 음표를 더듬거나 하는 일 없이 그 음

악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감정적으로 정서 깊게 무용으로 표현했다. 그러기 위해서 그녀는

쇼팽이나 브람스, 베토벤의 교향곡조차 자기 멋대로 표현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기성적

인 표현 기교를 답습하지 않았으며, 기법(技法) 그 자체, 표현 그 자체에도 창의를 주장하

여, 그 결과로 무용예술을 개방하여 한정된 소수의 전문가로부터 대중의 손으로 옮기는 길

을 개척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후에 일어난 신무용 운동의 전부에 영향을 미치어 ‘현대

무용의 어머니’라고까지 불렸다.



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 1878.5~1927.9)

 

 

 

현대무용의 선구자라 불리며 무용에 대한 통념을 통째로 흔들어놓은 이사도라 던컨.

발레리나가 짜여지고 정형화된 동작을 고통스럽게 표현하던- 정형화된 패턴의 발레 동작에서 벗어나 춤추는 사람 스스로의 내면을 표현하고 관객과 공감하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형식의 창작 무용을 예술의 영역까지 끌어올린 인물입니다. 다시 말해 '무용의 역사'를 새로 쓴위대한 인물이지요. 오늘은 현대무용의 시초가 된 이사도라 던컨에 대해 알아볼까합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꼬마 무용가

1978년 5월, 미국 센프란시스코에서 4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이사도라 던컨. 그녀의 아버지는 은행을 운영하던 은행가였는데, 이사도라가 태어날 당시 불경기로 인해 은행이 파산하자 돈을 벌기 위해 가족을 버리고 다른 도시로 떠났다. 하지만 이사도라 던컨은 그런 아버지를 마냥 미워하기보다는 자부심의 원천으로 느끼기도 했다. 파산과 스캔들로 얼룩진 삶이었지만 그의 내면은 멋쟁이 시인이자 예술 옹호자였고 수많은 당대 여성들이 거부할 수 없는 연인드로서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그녀는 음악가이자 고전 시와 문학을 매우 좋아했던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또래에 비해 좀 더 일찍 문학적 교양과 예술적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훗날 이사도라 또한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루어졌고 학교 교육은 쓰레기였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녀는 어릴적 부터 제대로 된 무용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 생각한 것을 몸으로 표현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6살 때부터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춤을 가르쳤다. 신기하게도

소꿉놀이 같던 무용 학교는 그 뒤로 10년이 넘도록 이어졌다.

 

 

또한 그녀는 매우 자유분방한 성격이었는데, 이런 성격은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컸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거 해','이건 하지마'같은 식의 요구를 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도록 했다. 이러한 교육의 영향을 받은 이사도라 던컨의 자유로운 성격은 기존의 경직된 교육이나 예술계에서는 거부당하는 원인이 되었지만, 한편 기존의 교육이나 예술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식을 만드는 원천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현대무용의 선구자'라는 단어가 붙지 않았는가.

 

그녀는 다섯살 때 공립학교에 입학했으나, 경직된 학교 교육은 자유분방한 이사도라 던컨에게 맞지 않았다. 좋고 싫음이 뚜렷한 그녀는 좋아하는 과목에 있어서는 총명하다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싫어하는 과목에 있어서는 멍청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극과 극인 아이였다. 또한 지독한 가난 탓에 현실에 일찍 눈을 뜬 조숙한 아이여서 다른 평범한 아이들과는 확실히 달랐는데 꽉 막힌 기존 사회에 답답함을 느낀 이사도라 던컨은 학교를 그만 두고 인적이 없는 숲이나 해변을 거닐며 맨발로 자신만의 춤을 즐겼다. 그녀는 이미 어린 무용가이자 혁명가였다.

 

 

꿈의 무대 뉴옥으로

 

 

 

이사도라 던컨은 먹고 살기 위해 당분간은 여섯살 때 열었던 무용 교습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며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습소를 처음 접하게 된다. 하지만 몸을 망가뜨리며 발끝으로 서야 하고, 정해진 옷을 입어야 하는 발레의 지나친 형식미는 그녀에게 맞지 않았고, 이때부터 이사도라 던컨은 춤의 원형과 본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프로무용수의 꿈을 안고 시카고로 건너간 이사도라 던컨은 프로무용수가 되고 싶었지만 아무도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먹고 살기 위해 술집에서 캉캉 비슷한 것을 추며 돈을 벌었지만 그것은 춤이 아니라고 생각한 그녀는 곧 극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극단 '오거스틴 데일리' 에 합격하여 들어간다.

 

 

 

 

오거스틴 데일리 극단의 주 무대인 뉴옥으로 건너간 그녀는 그곳에서 작곡가 에설버트 네빈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공연에서 춤을 춰달라는 네빈의 요청은 이사도라 던컨의 인생에서도 손가락게 꼽을 만큼 큰 사건이 된다. 카네기홀은 예술가라면 누구나 한번쯤 서 보고 싶은 꿈의 공연장이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녀는 네빈의 대표곡인 <수선화>,<오필리아>,<물의 요정>에 맞춰 그녀만의 자유로운 무용을 선보였고, 그 공연으로 인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당시 그녀의 공연은 언론의 주목을 받을 만큼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여자가 맨다리를 드러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 그런 시대에 허벅지의 맨살이 들여다 보일 정도로 얇은 옷을 펄럭이며 춤을 추는 이사도라 던컨의 등장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 새로운 상황에 그녀의 춤은 기존 예술에 창조적 영감을 준다며 호평했다. 그리고 20세기를 1년 앞둔 1899년, 이사도라 던컨은 가축수송선을 타고 유럽으로 건너갔다.

                                                                                                                                    ▲작곡가 에설버트 네빈(Ethelbert Nevin)

                                                                                                                                           

유럽 예술계의 유명인사

 

 

 

 

런던에 정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뉴옥생활의 마지막, 그녀의 가족이 묶고 있던 호텔에 불이 나는 바람에 모았던 재산을 모두 잃은 그녀의 가족은 남의집 외양간에 몰래 들어가 건초를 이불삼아 자기도 하며 노숙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보냈지만, 우연히 주운 신문에서 상류층의 파티 소식을 알게 된 이사도라 던컨은 과감하게 파티 주최자를 찾아가 공연을 약속하고 선물로 돈을 받기도 한다. 유럽에서의 첫 돈벌이이자 공연이었던 것이다. 또한 런던과 파리에 머물 무렵에는 박물관 애호가가 되었다. 특히 고대 그리스 관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그곳에서 박물관에 있는 그림의 춤동작을 따라하고, 복장등을 연구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이사도라 던컨의 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편협한 청교도 사상에 사로잡혀 그녀의 춤을 이해하지 못했던 미국과는 달리 세련되고 폭이 넓은 유럽의 예술계는 그녀의 춤을 단번에 받아 들였다. 길거리에서 춤을 추던 도중 우연히 만난, 영국 최고의 여배우이자 상류층에서도 인정 받는 대스타 패트릭 캠벨의 눈에 띄어 그녀의 클럽에서 춤을 추게 되고, 많은 예술가들이 그녀의 춤을 보고 감명을 받았으며, 찬사를 보냈다. 영국의 황태자 앞에서 2번 이상의 춤을 춰 화제가 되기도 하고 파리로 건너간 후에도 성공을 거둔다.

 

이사도라 던컨의 성공은 특히 독일과 러시아에서 눈부셨는데 특히 정통 발레의 본고장이었던 러시아에 던진 충격은 대단했다. 새로운 무용에 대한 전폭적인 관심으로 그녀는 1904년 베를린에 무용 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자유로운 사상과 영혼에 깊이 감명받은 그녀는 그것을 춤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에서 자신의 춤을 더욱 발전시키기도 했다.

 

 

삶의 

 

 

                                                                       이사도라 던컨의 두 딸

 

성공의 길로 쭉쭉 뻗어가며 그녀의 인생은 나름 잘나가는듯 싶었지만, 사생활 면에서 이런저런 굴곡이 많았다. 그녀는 독일에서 만난 무대 감독 고든 크레이그와 사랑에 빠져 그 사이에서 첫째 딸 디어드리를 얻었고, 미국의 재력가 패리스 싱어와의 사이에서도 패트릭을 얻었지만 결코 그들과 결혼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를 보며 자란 그녀는 결혼 제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유롭게 춤을 추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닥친 불행은 너무 끔찍했다. 자신이 추고 싶은 춤을 추며 두 자녀를 둔 어머니의 행복을 느끼던 그녀.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보모와 함께 나들이 나갔던 아이들을 차 사고로 인해 모두 잃게 된다. 이사도라 던컨에게 이제 남은 것은 춤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추며 전 유럽을 돌아다녔고, 춤을 통해 실의로부터 점차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영원한 맨발의 이사도라

 

1차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이사도라 던컨은 파리에서 새빨간 튜닉을 입고 ‘마르세예즈’를 무대에 올린다. 그녀는 이 공연 마지막에 “시민이여! 무기를”이라고 외치며 전쟁에서 밀리고 있던 프랑스인들의 용기를 북돋우었다. 1922년 러시아를 다시 방문한 이사도라는 그곳에서 17년 연하의 천재 시인 세르게이 에세닌을 만나 전격적으로 결혼을 한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의 재능과 사랑을 질투한 에세닌이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자살해버리고 만 것이다.

                                                                                                                                                                                                                                                    

 

                                                           ▶ 이사도라와 그의 남편 세르게이 에세닌

 

인생에 닥친 고통을 춤으로 극복하며 살아가던 이사도라 덩컨은 1927년 프랑스 니스에 있었다. 최근에 사귄 젊은 벗이 그녀에게 스포츠 카 드라이브를 제안했다. 빨간색의 길고 긴 머플러를 두른 그녀는 가볍게 차에 오르며 친구들에게 “안녕, 나는 영광을 위해 떠나!”라고 외쳤다. 그리고 머플러 자락을 뒤로 넘기고 차가 출발했다. 그 순간, 유럽 무용사의 혁명가이자 자유로운 여성의 삶을 온 몸으로 살았던 이사도라 덩컨에게 죽음이 왔다. 빨간색 머플러가 자동차 바퀴에 끼면서 그녀의 목이 졸린 것이다.

 

 

 

 

 

그녀의 춤은 그 춤이 너무나 자유로워 후대까지 춤사위 하나 하나가 전해지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20세기 초반 발레 위주의 무용계에 던진 자유로운 정신만은 길이 남아 현대 무용의 효시가 되었다. 여성에게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요구하고 순종적인 삶을 기대하던 20세기 초반, 이사도라 던컨은 자신의 온몸으로 참다운 여성을 살아낸 사람이었다.

 

                                            

고전 무용의 틀을 깨고 맨발의 자유로운 춤으로 거리와 무대 위를 나비 같이 날아다니는 던컨의 아름다운 시절

 
 

맨발의 이사도라

 

(사진=픽스베이)

[한국정경신문=박은정 칼럼니스트]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나와 결혼하면 나의 출중한 외모와 당신의 명석한 두뇌가 합쳐져서 멋진 2세를 낳지 않겠어요?”
그 농담에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단다.
“하지만 당신의 두뇌와 나의 외모를 타고 난다면 너무나 끔찍하지 않겠소?”

자주 회자되는 이 이야기는 아일랜드 태생의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와 미국 태생의 무용가 이사도라 던컨(1877-1927)이 한 사교 모임에서 만나 나눈 대화다.

버나드 쇼가 머리 빈 여자로 폄하한 이사도라 던컨은 소위 맨발로 춤만 추는 그런 ‘골빈당’은 아니었다. 휘트먼의 시를 음미했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을 들고 다녔으며 니체, 베토벤, 쇼팽, 로댕을 찬양했다. 그녀의 춤은 그녀 자신이 말한 대로 기교가 아닌 영혼과 정신의 표현이었다. (‘나의 생애’-이사도라 던컨)

이사도라 던컨은 1877년 부유한 은행가의 딸로 태어났지만 아버지 은행의 파산으로 궁핍한 어린시절을 보낸다. 하지만 예술 옹호자였던 부모의 영향으로 시와 음악을 가까이 하며 자라났다.
 

1899년 스물 한 살의 가난한 3류 무용수 이사도라 던컨은 발레슈즈를 벗어던진 자신을 알아주지 않은 미국을 떠나 자신의 재능에 의지한 채 유럽으로 건너간다. 런던과 파리에서 그녀는 박물관을 드나들며 그리스 문화에 심취한다. 걸으면서도 춤을 추었던 그녀는 그리스 의상과 같은 ‘덜 입고 나온 듯한 옷차림’과 맨발의 무용수로 짧은 시간 안에 유럽 예술무대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주목을 받는다. 그녀는 당대 천재적인 남자들과 뜨거운 사랑을 하고 두 자녀를 얻지만 이 들은 샌 강의 자동차 사고로 사망한다.

아이들이 죽은 후 1914년 러시아로 간 그녀는 천재 시인 예세닌을 만나 열 여덟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감행한다. 이사도라의 생각에 예세닌은 금발의 죽은 아들이 살아서 성인이 되었다면 꼭 닮았을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신경쇠약, 간질환, 알코올 중독, 폭력, 허영심 등의 안 좋은 모든 것을 가지고 그녀를 괴롭히던 예세닌은 던컨에게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서른 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 후 프랑스 니스로 돌아와 쓸쓸한 말년을 지내던 이사도라는 자신을 숭배하던 한 청년과 드라이버에 나선 직후 자신의 붉은 색 긴 스카프가 자동차 뒷바퀴에 감기면서 질식사로 49년의 삶을 끝낸다.
 
그녀의 너무나 극적인 일명 ‘스카프 죽음’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공연한 ‘비극적 춤사위’가 되고 말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차에 타기 전 배웅 나온 친구들에게 ‘안녕, 친구들, 난 영광을 향해 간다’ 란 인사였다.

전통 발레와 같은 엄격한 형식과 현란한 기술에 의존하는 무용에 반발하며 자유롭고 개성적인 표현력을 강조한 현대 무용(Modern Dance)의 어머니 이사도라 던컨. 20세기 100년 동안 세계 무용계는 ‘어떻게 이사도라 던컨을 계승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이사도라 던컨을 극복할 것인가’의 두 가지 화두가 지배하고 있었을 만큼 그녀의 영향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녀의 ‘맨발무용’은 오늘날 우리가 열광하며 보는 프랑스 뮤지컬에서 감동을 주는 댄서들의 예술적이고 자유로운 몸동작을 통해 볼 수 있다.

 “내 무용의 원천을 이루는 세 가지는 그리스 예술, 우아한 고전음악, 그리고 니체의 철학 사상입니다”라고 말한 이사도라는 시대를 앞서긴 했지만 지금은 현대 무용의 선구자로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3117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3077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영화 황제 김염과 제주도 2021-05-08 0 2446
3076 [별의별] - 국경과 농부 2021-05-07 0 2623
307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고구마혁명", 남의 일이 아니다. 2021-04-28 0 2392
307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문화유산모으기", 남의 일이 아니다. 2021-04-28 0 2603
3073 [그것이 알고싶다] - 오스카상... 2021-04-27 0 2625
3072 [그것이 알고싶다] - 윤여정과 "선물가방" 2021-04-27 0 4338
3071 [그것이 알고싶다] - "팔도 김치" 2021-04-16 0 2914
3070 [고향소식] - 화룡 길지 "돌"로 뜨다... 2021-04-01 0 2820
306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바다환경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1-03-30 0 2700
3068 [그것이 알고싶다] - 수에즈 운하 2021-03-30 0 3447
3067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치마 시위" 2021-03-30 0 2977
306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다 잘 될거야"... 2021-03-30 0 2884
306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차라리 날 쏴라"... 2021-03-30 0 2535
3064 [세상만사] - 눈사람과 환경미화원 2021-01-30 0 2466
306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폐의약품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1-01-28 0 2512
306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철조망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1-01-28 0 2842
3061 "시는 그림자도 춤추게 하는 메아리" 2021-01-26 0 2285
3060 [세상만사] - 하면 된다... 2021-01-26 0 2449
3059 [그것이 알고싶다] - 색... 2021-01-21 0 2515
3058 [그것이 알고싶다] - 22... 계관시인... 2021-01-21 0 2807
3057 [그것이 알고싶다] - 그림자... 2021-01-21 0 2626
3056 [그것이 알고싶다] - 4... 8... 2021-01-19 0 2276
3055 [타산지석] - 본받을만한 훌륭한 아버지... 2021-01-17 0 2416
3054 [회초리] - 표절, 도용, 저작권, 량심... 2021-01-17 0 2778
3053 [그것이 알고싶다] - "김"씨냐, "금"씨냐... 2021-01-15 0 2580
3052 가장 진실되고 독창적인 목소리를 내야... 2021-01-15 0 2529
3051 [그것이 알고싶다] - 돌잔치와 돌잡이 2021-01-14 0 3956
3050 [세상만사] - "아리랑과 외국인" 2021-01-14 0 2440
3049 [그것이 알고싶다] - 지방 쓰는 법, 명정 쓰는 법 2021-01-11 0 4036
3048 [세상만사] - "꽁꽁" 2021-01-11 0 2391
3047 [세상만사] - "영화와 경계선" 2021-01-09 0 2690
3046 [세상만사] - "기부자와 기부금" 2021-01-08 0 2477
3045 [그것이 알고싶다] - "민주와 민주" 2021-01-07 0 2752
304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두산 호랑이 "두만"이... 2020-12-29 0 3216
304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백두범"아, 어서 어서 돌아오라... 2020-12-26 0 3500
3042 [세상만사] - "지문" 있다?... 없다!... 2020-12-26 0 3079
3041 [록색문학평화주의者]-백두산 호랑이 = "두만"아, 잘 가거라... 2020-12-20 0 2774
3040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비닐쓰레기문제", 남의 일이 아니다. 2020-12-20 0 2922
3039 [세상만사] - "유산 싸움과 월드컵 축구경기..." 2020-12-18 0 2640
3038 [세상만사] - "연등 = 인류무형유산" 2020-12-16 0 2841
‹처음  이전 1 2 3 4 5 6 7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