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자: 박석준 / 담당교수: 이은봉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던 예언자의 목소리
윌리엄 블레이크
위대한 시인이 쓴 위대한 시
시 <순수의 전조>는 존재의 신비를 탐색하면서 시작된다. 아름다움과 거룩함, 무한성과 영원성의 세계를 추구하는가 싶더니, 블레이크는 금방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든다. 낭만주의자에서 한순간에 사실주의자로 둔갑하는 것이다. 감동의 세계에서 충격의 세계로의 극적 전환이다. 19세기 초 영국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던 시인은 “학대받은 양은 전쟁을 낳지만, / 그러나 그는 백정의 칼을 용서한다”고 하며 예언자의 목소리를 낸다. 광야에서 외치던 세례자 요한의 목소리처럼 우렁차게, 블레이크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한편 노동의 기치를 찬양한다.
낭만주의의 효시로 일컬어져 온 워즈워스와 콜리지의 합동 시집 ≪서정민요집≫이 나온 것이 1798년임을 감안한다면 1789년 작 <순수의 전조>는 그야말로 예언자적인 작품이다. 영국에서 낭만주의가 하나의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은 ≪서정민요집≫의 발간에서부터이다. 시기적으로는 분명히, 낭만주의의 선구자는 블레이크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사회사와 개인사
1760년경부터 영국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는데, <순수의 서정>에 잘 표현되어 있듯이 블레이크가 살았던 시대는 이른바 격동의 시대였다. 한편 자유의 물결이 전 유럽과 북미대륙을 휩쓸게 된다. 자유․평등․박애는 프랑스 인권선언(1789)의 기본 정신인 동시에 프랑스대혁명의 3대 정신이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선언을 하였고, 영국․프랑스와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전쟁을 하여 결국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러한 시대의 기류를 블레이크는 결코 간과하지 않았고, 그래서 우리는 그를 ‘예언자적 시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는 20대 중반이 되자 요지프 존슨의 집에 모인 진보적인 사상가들 틈에 끼어 혁명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곤 했다. 산업혁명과 프랑스대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그는 ≪순수의 노래≫(1789), ≪천국과 지옥의 결혼≫(1793), ≪앨비언의 딸들이 본 환상≫(1793), ≪순수와 경험의 노래≫(1794) 등을 연이어 내놓는다. 이후 여러 해에 걸쳐 서사시 ≪밀턴≫과 ≪예루살렘≫을 완성한 후 그의 시적 활동은 마감된다.
어린양아, 누가 너를 만들었나?
시 <파리>의 앞부분에서 얼마 동안 파리를 노래하다가 “나도 / 춤추고 마시고 노래 부르리”에 가서는 화자가 파리가 된다. <보모의 노래>에서 ‘어린양’은 성경상의 비유이므로 죄를 짓지 않은 상태, 즉 순결함과 결백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서문>에서도 어린아이의 천진성에 어른이 동화되고 어른이 어린이로부터 감화를 받는다. 학교라는 조직(혹은 제도)은 어린양을 억압하고 사회라는 집단(혹은 체제)은 어린양을 착취한다. 순수의 노래를 부를 수 없게 하는 학교와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블레이크의 목소리는, 그가 시기적으로는 낭만주의의 시대를 살았지만 생래적인 리얼리스트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
<굴뚝 청소를 하는 아이>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에게 학교는 ‘새장’에 지나지 않았다. 다소 과장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제도교육의 획일성에 대한 시인의 비판의식은 지금까지 유효하다. <굴둑…>은 어린아이의 노동력에 의존했던 영국사회에서의 굴뚝청소를 맹렬히 비난한 작품이다. 블레이크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고 질정하는 데 앞장선 진정한 참여문학인이었다.
<런던>에서, 그 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였을 런던을 블레이크는 암담하게 그렸다. 블레이크가 이 시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사법제도, 교회, 궁정, 성의 타락 등이다. 시인은 교회의 타락을 다른 시를 통해서도 여러 차례 비판하였다.
블레이크는 인류의 낙원을 회복하려는 꿈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가 신앙했던 기독교는 그 당시 사람들이 믿던 전통적인 종교와는 달랐다. 블레이크는 종래의 그리스도교 교리를 뒤집어서, 선을 이성이나 억압과 동등한 것으로 보고 악을 인간에 내재하는 정신적인 에너지의 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보았다. 일종의 성악설을 신봉했던 것이다. 그는 법제화된 종교, 권위주의에 사로잡힌 종교인, 지배자의 위치에 있는 교회를 비판했을 따름이었다. 블레이크는 자기 작품의 수많은 모티프를 성경에서 가져왔다.
대표작 <병든 장미>와 <호랑이> 감상
장은명 같은 연구자의 논문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상상력을 인간 존재의 영원한 본질, 인간에 내재한 신성으로 본 사람이다. 연구자는 또 블레이크가 예수를 역사적 인물이라기보다는 항상 인간의 내면에서 인간을 사랑하는 신으로 보았다고 했다. 연구자에 따르면, 블레이크는 당시의 ‘교단’보다는 ‘진리’에, ‘의식(儀式)’보다는 ‘본질’에, ‘교리’보다는 ‘성경’에 더욱 가까이 가려고 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병든 장미>에서 병든 장미나 어두운 은밀한 사랑이 세속세계에서 다반사로 행해지는 불륜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병든 장미’란 타락한 인간이 죄악으로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밤에 날아다니는 보이지 않는 벌레는 경험 세계에서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개념, 예컨대 유물주의, 이기심, 자기 본위 등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유물주의, 이기심 및 자기 본위에서 다시 위선, 기만, 질투, 잔인성 등의 개념이 파생되어 나온다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벌레는 장미를 병들게 했으므로 우리의 인간성을 마멸시키는 악한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물질주의에 대척하는 뜻으로서의 정신주의를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주장했고, 그런 뜻에서도 그는 예언자적 시인이었다. 블레이크 하면 떠오르는 또 한 편의 시는 <호랑이>이다.
시인은 “어린양을 만든 신이 너를 만들었던가?” 하고 묻는다. 이 지상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선린우호라기보다는 약육강식이다. 삼라만상과 뭇 생명체를 창조한 신은 사슴과 양과 함께 호랑이를 만들었다. 포스터 데이먼은 블레이크가 이 시를 통해 거대한 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았다. 블레이크는 악을 추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으며, 그가 생각하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사람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은 하나님의 분노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어린양’은 이 시에서는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천진스러운 사람, 선한 사람 등을 상징한다. 이 시의 우수성은 호랑이의 “파괴적이며 본능적인 충동은 억압의 현실을 타파하는 건강한 에너지를 의미”하는 데 있기도 하지만 불의 이미지로 나타낸 데 있다. 밤의 숲 속에서 활활 불타는 두 눈을 번뜩이며 호랑이는 ‘역사’ 한다. 호랑이의 ”무서운 균형 잡힌 몸“은 바로 이 세상의 균형을 뜻하기도 한다. 호랑이는 신의 질서를 끊임없이 거부해온, 낙원에서 추방된 인간의 실존적 모습이 아닐까. 시집 제목 ‘천국과 지옥의 결혼’은 이러한 이항대립적인 세계를 한 손에 넣고 다루고자 했던 시인의 예언자적 세계관의 산물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불러야 할 노래
프리드리히 횔덜린
한 여인을 사랑했기에 미쳐버린 시인
횔덜린은 너무나 참담한 사랑을 했고, 그것이 그의 시 세계 형성에 무척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으며, 특히 36년 동안을 광기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했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활동한 독일의 서정시인이자 소설가인 횔덜린의 생애는 극적이다. 비극의 제1막은 세 살 때 아버지가, 열 살 때 양아버지가 죽은 데서 시작된다. 제2막은 수도원학교를 거쳐 튀링겐 대학교 신학부를 졸업한 뒤 석사학위까지 받았음에도 사제 서품을 받지 않은 데서 시작된다.
대학시절에 그리스 신들에게 매료된 그가 어느새 신들을 하늘과 대지, 바다 속에서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를 현시하는 실제적인 생명체로 보게 되었으니, 신화와 신학, 인간과 유일신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긴장감은 횔덜린에게 존재의 조건으로 남게 되었다.
그가 성직을 포기하고, 가정교사로 두 번째로 들어가게 된 곳은 곤타르트의 집이었다. 그의 운명은 이 집에 들어간 첫날 뒤바뀐다. 26세의 횔덜린보다 한 살이 많은 주제테 부인은 그때 결혼 10년째로, 네 아이의 어머니였음에도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횔덜린은 부인의 아름다움에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그의 여러 시편 속에서, 특히 불후의 명작 소설 <히페리온>에 디오티마라는 이름으로 그려진다.
비극의 제3막은 부인이 횔덜린의 사랑을 받아들인 데서 시작된다. 1796년 7월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침공해 오자 두 사람과 횔덜린의 친구 하인제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카셀을 거쳐 베스트팔렌의 휴양지 드라부르크로 가서 10월까지 체류하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의 사랑은 결정적으로 무르익는다.
그들의 행복은 2년 반을 넘기고는 끝나고 만다. 두 사람에 관한 소문은 온 도시에 퍼졌고, 결국 횔덜린은 프랑크푸르트를 타의에 의해 떠난 이후 신경쇠약이 심해진다. 횔덜린은 부인과 헤어진 지 불과 4년 뒤에 친구한테서 온 편지를 통해 부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진다. 그 뒤로 광기의 나날이 계속된다.
비극의 절정인 제5막은 장장 36년 동안이나 계속된다. 마흔도 되기 전인 1806년에 정신이상자가 된 횔덜린은 36년을 절필한 채 그 상태로 지낸다.
주제테 곤타르트 혹은 디오티마
<디오티마>는 시인이 그리스의 시대정신을 구현한 인물로 디오티마란 인물을 설정하여 시를 쓰고 있지만 사실은 곤타르트 부인에게 바치는 연시를 쓴 것이다. 이 시에서 디오티마는 “고귀한 생명”, “신적인 여인”, “사랑스런 뮤즈”, “그대의 천국의 음성” 등으로 신격화된다. 특히 예술의 신 뮤즈로 부른 이유는 디오티마 혹은 곤타르트 부인이 자신의 예술혼을 자극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사랑을 고백할 수 없는 애절한 마음이 이 시를 쓰게 한 동인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시인은 “이 미개한 자들”이 아닌, 신들과 영웅들과 인간이 아옹다옹하며 다투던 신화의 시대를 동경하고 있다. 신화의 시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사랑이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 것이 안타까워 이 시를 썼다고 볼 수 있다.
그리스 정신의 부활을 꿈꾸다
횔덜린의 위대함은 그가 일생 동안 고대 그리스 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익히고, 그리스 정신과 독일 이상주의를 결합시키려 했다는 데에 있다.
횔덜린의 사상을 통칭하여 ‘공동체적 신성’이라고 표현한다. 횔덜린은 그리스 시대를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았던 시대,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어 대립을 일삼지 않았던 시대로 보았다.
<자연에 부쳐>라는 시에서는, 이 시대가 청춘의 꿈과 다정한 자연이 죽고, 사랑이 실현되지 않고, 고향을 상실한 시대임을 말해주고 있다.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는 고향을 노래한 이런 시에서도 시인은 현실에서의 고뇌와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신과 인간이 분리되기 전인 신화의 시대를 꿈꾸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김재혁은 횔덜린이 그리스에 어떤 식으로 경도되었는지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와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혁명이 그의 문학적 삶과 ‘역사적 긴장의 장’을 이루게 된다. 이로써 횔덜린은 현재의 시기의 현대성과 정당성을 위한 투쟁에 하나의 새로운 역사철학적, 미학적 관점을 부여하는 것이다.
궁핍한 시대의 시인
횔덜린의 시 가운데 가장 널리 읽히고 있는 것은 비가 <빵과 포도주>다. 이 시야말로 서양의 역사가 밝은 그리스 세계로부터 중세 시대인 밤의 세계를 거쳐 두 차례의 혁명 이후 도래할 미래의 아침으로 이어진다고 여긴 자신의 역사관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킨 작품이다. 시인은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 신들이 남긴 표시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러한 표시 때문에 찬란한 미래가 개벽할 수 있다고 본다. 즉, 횔덜린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한 ‘빵’과 ‘포도주’의 의미를 이렇게 달리 해석한다. 오늘날 ‘빵과 포두주의 기적’을 행할 사람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 시인이라고.
그리스도를 지상에 찾아온 마지막 신으로 부각시킨 것은 횔덜린의 독창적인 기독교관(혹은 신관)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그리스의 이상을 그리스도의 정신과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빵과 포도주>에서 ‘궁핍한 시대’란 신성이 약화된 시대이다. 이런 시대에 밤은 더욱 어둡다. 하지만 궁핍과 밤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런데 횔덜린은 자신을 신들의 포고자로 생각하고 신들의 강림을 예견하고 있다. 그 신이란 시인이다. 따라서 시인은 신 없는 시대의 예언자인 것이다. 그리스도 죽음의 의미가 점차 상실되고 있는 이 시대에 시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시인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들려준 시로는 이것 외에도 <젊은 시인들에게>, <시인의 사명> 등이 있다. <시인의 사명>에서 횔덜린은 스스로 궁핍한 시대의 시인임을 인지하고 외롭게 이 운명을 짐 지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횔덜린은 1798년 9월 곤타르트 가를 떠났는데, 심한 정신적 갈등 속에서 소설 <엠페도클레스의 죽음>을 쓰기 시작했다. 광기의 세월로 접어들기 직전에 쓴 시들로 <평화의 축제>, <유일자>, <파트모스> 같은 것이 있다. 그리스 신화의 제신과 유일신 여호와 하느님 사이에서 방황했던 시인의 일생이 요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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