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슨 폴록 & 리 크레이스너
현대 미술에서 매우 중요하게 논의되는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추상화다. 그럼 이 추상화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누구일까? ‘액션 페인팅’으로 유명한 잭슨 폴록이라면 충분히 첫손에 꼽힐 수 있을 것이다. 물감을 마구 흩뿌려 만든 자신의 작품처럼 불안정하고 복잡했던 그의 삶 속에서 리 크레이스너는 잭슨 폴록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리고 사회부적응자에 가까웠던 잭슨 폴록과 세상을 연결해준 유일한 통로이자, 안식처였다.
글_ 최진주 기자
---LA의 거리에 그려진 잭슨 폴록 벽화
충격적인 만남으로도 사랑은 시작된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 주의 농장에서 태어난 잭슨 폴록. 그의 집안은 그리 풍요롭지 않았다. 아버지는 일거리를 찾아 떠났으며, 남은 어머니는 다섯 아들을 제멋대로 내버려두며 제대로 교육시키지 않았다. 그다지 좋지 않은 집안 환경 속에서 폴록은 책임감도 없고 예의도 없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폴록은 두 형을 따라 어떤 계획도 대책도 없는 채 뉴욕으로 온다. 그러나 세계 경제 공황기가 도래하면서, 폴록은 어린 시절보다도 더 극심한 가난을 견뎌야 했다.
그는 화가 지망생이었던 두 형 덕분에 자연스레 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뉴욕으로 옮겨온 후 벽화에 관심을 갖게 되고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품을 그리지만, 안타깝게도 데생 실력이 다른 미술학도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졌다. 게다가 인간관계를 맺고 사람들 사이에서 행동할 때 미숙하거나 과도한 면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폴록의 성공가능성에 대해 아무도 긍정적으로 점치지 않았다. 폴록의 미술학교 동창인 루벤 카디시의 말에 따르면, 말과 행동에서 끊임없이 실수를 범했다. 그는 취하지 않아야할 때 취해있었고 그를 만나는 여자들은 그에게 계속 실망했다.
자격지심과 반항심, 사회에 대한 불만은 결국 우울증과 겹쳐져 그를 알코올 중독으로 몰아넣었다. 거리에서 개를 발로 차기도 하고, 아무에게나 욕설을 내뱉기도 하는 등 공격적인 행동을 자주 해 경찰서와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번은 파티에서 노래를 부르던 음악가와 사랑에 빠져 프러포즈를 한 적이 있었다. 그녀가 그의 고백을 거절하고 뉴욕을 떠나자 그는 만취 상태로 몇날 며칠을 보냈고 부엌의 식탁보를 칼로 난도질하는 등 정신분열 증세를 보였다. 이때부터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등 본격적인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고통에 빠져 있던 잭슨 폴록이 리 크레이스너를 만난 것은 1936년 12월 예술가 연합에서 주최한 크리스마스 파티에서였다. 폴록은 이 파티에서도 여느 때처럼 술을 마셔댔다. 취기가 오른 그는 댄스 홀로 걸어가 춤을 추고 있던 남녀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여인을 빼앗듯이 팔로 휘감았다. 여자는 그리 아름답진 않았지만,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육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폴록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여자에게 “너 나랑 잘래?”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공공장소에서 할 수 없는 성추행에 가까운 행동을 했다. 여인은 그를 밀어내고 곧장 따귀를 때렸다. 바로 그녀가 잭슨 폴록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리 크레이스너다. 뺨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든 폴록은 그녀에게 용서를 빌었다. 웬일인지 그녀는 그런 그가 좋아졌고, 그날 밤 폴록과 함께 밤을 보냈다. 다음날 둘은 헤어졌고 그 후로는 서로 연락하지 않았다.
4년 후, 리 크레이스너는 잭슨 폴록의 화실을 방문하게 된다. 다시 만난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리 크레이스너는 무법자 같지만 재능 있는 잭슨 폴록에게서 매력을 느꼈으며 폴록의 천재적인 재능에 매혹되었다. 폴록 역시 그녀의 헌신적인 보살핌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동거에 들어간다.
한 사람을 위해 헌신한 여인
사실 리 크레이스너 역시 잭슨 폴록과 같은 그룹의 동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하는 화가였다. 아티스트들은 상업성에 관심이 없거나 방법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크레이스너는 달랐다. 그녀는 ‘아티스트도 돈이 필요하며, 성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할 줄 알았다. 그저 작업실에 처박혀 그림만 그려서는 결코 미술계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크레이스너는 그 현실적인 판단력을 자신이 아닌 폴록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다.
크레이스너는 폴록을 성공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다. 우선 자신의 작업을 중단하고 폴록에게 올인했다. 그가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다녔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그를 위해 젊은 화가들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그리고 미술계의 큰손들을 만나 그들에게 폴락의 그림을 소개하며 다녔다.
그 중 폴락에게 관심을 보인 이가 있었으니 바로 페기 구겐하임이다. 그녀는 20세기 초 가장 유명했던 미술 수집가로, 막대한 부를 지닌 구겐하임 가문의 자손이다. 재능 있는 신진 화가들을 많이 후원했는데, 마르셀 뒤캉,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 등 ‘거장’으로 불리는 20세기 유명화가들이 모두 그녀의 도움을 받았다. 단순히 물질적인 후원만이 아니라 젊고 유능한 화가들을 미술계 인사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다.
1943년, 크레이스너의 끈질긴 노력 끝에 페기 구겐하임은 폴락의 첫 개인전을 주선해준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고, 그는 뉴욕 미술시장에서 스타 화가로 떠오른다. 당시 몬드리안은 “가장 신선하고 가장 독창적인 화면”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그는 미술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1944년 두 사람은 오랜 동거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결혼 후, 크레이스너는 폴락이 안정적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었고, 폴락은 크레이스너의 보살핌 속에서 혁신적인 작품을 계속 창조해낸다. 그는 이 시기에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액션 페인팅’ 기법을 착안했다.
고통 속에서 사랑을 위해 노력하다
화가로서 잭슨 폴록은 탄탄대로를 걸었다. 내놓는 작품마다 찬사를 받았고, 비싼 값에 팔렸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그다지 순탄하지 못했다. 잭슨 폴록의 커리어는 성공한 남자의 그것과 같았으나 그의 인성은 여전히 기이하고 반사회적이었다.
비루한 화가 지망생이었던 시절, 잭슨 폴록을 주목하는 여자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일약 스타화가로 떠오르자 그의 주위에는 여자들이 들끓었다. 폴록을 흠모하며 달려드는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폴록 역시 이들을 똑 부러지게 끊어내는 남자도 아니었기에 크레이스너는 한시도 평온한 나날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폴록은 양성애적인 성향도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크레이스너는 그가 남자와 만나러 나갈 때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폴록의 성공적인 데뷔에 큰 도움을 준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도 크레이스너를 고통스럽게 한 문제 중 하나였다. 사실 페기 구겐하임은 주로 남자 작가들에게 관심을 보였고, 이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는 것으로 악명 높은 인물이었다. 크레이스너 역시 이를 알고 있었지만, 폴록을 유명하게 만들기 위해 견뎌냈다. 그만큼 페기 구겐하임이 미술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녀는 폴록에게도 눈독을 들였고 폴락은 그녀와 육체관계를 맺었다. 크레이스너는 이 사실을 알지만 눈감아주었다.
여기에 폴록의 성격적인 문제는 크레이스너를 더욱 고통스럽게 했는데, 폴록을 진단했던 정신과 의사가 그녀에게도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할 정도였다. 폴록의 알코올 중독 증상은 쉽사리 고쳐지지 않았고 과음 후 행패를 부리거나 신경증적인 증세를 보이는 것을 견뎌야 했다. 아무리 남편을 보살피는 역할에 익숙해졌다고 해도 정신적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화를 내며 의사의 권고를 무시했다.
예측 불가능한 사랑의 끝
결혼생활이 계속되면서 크레이스너의 모성애는 더욱 커졌다. 성공한 화가였지만 사회부적응자였던 잭슨 폴록에게 크레이스너는 매우 중요한 여자였다. 작품 활동 외의 생활 일체를 크레이스너가 도맡아 했기에 그녀는 어느 순간 폴록의 배우자가 아니라 유모이자 어시스트, 스태프처럼 행동했다. 또한 폴록이 끊임없이 아이를 갖자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툼이 일어날 때마다 폴록은 다시금 알코올 중독에 빠져들었다. 또한 다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이 사실을 크레이스너에게 숨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폴록의 한 여성팬이 두 사람 사이를 틀어지게 하고 만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크레이스너는 폴록의 곁을 떠나 유럽으로 건너간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크레이스너는 폴록의 사회생활과 경제적인 문제를 책임지는 사람이었다. 아내가 사라지자 폴락은 사회적인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또 아내가 얼마나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였는지 깨닫지만 상황은 이미 엎질러진 물. 폴록은 서서히 폐인이 된다. 여기에 자신의 알코올 중독 증세를 치료해주던 친구인 주치의가 죽으면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고 만다. 결국 잭슨 폴록은 만취한 채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고를 내고,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때마침 뉴욕 현대 미술관은 잭슨 폴록의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었다. 현대 미술관은 전시회 제목을 폴록展이 아닌 회고전으로 바꿔 유럽 순회까지 한다. 한창 왕성한 작품활동을 할 나이인 44세에 세상을 떠난 화가의 작품들은 천정부지로 가격이 치솟았다. 그가 죽기 직전 6천 달러였던 작품은 이듬해 3만 달러로 거래되었고, 마지막 작품인 <푸른 기둥들>은 15년 후 200만 달러가 되었다. 이는 현대 회화 작품으로서 최고가였기에 세계 미술계에서도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잭슨 폴록에게 크레이스너는 첫 여자이자 공식적인 아내였다. 밖에서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우긴 했어도 아이를 낳아오지는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서도 자식이 없었기에 폴락의 작품은 모두 크레이스너에게 돌아왔다. 폴락의 많은 작품들이 비싼 값에 거래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작품들은 시장으로 나오지 않고 고스란히 그녀에게 있다고 한다.
잭슨 폴록과 리 크레이스너의 사랑은 마치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처럼 얼룩진 작품이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했던 남자와 그가 성공의 발판을 착실히 올라갈 수 있도록 보듬고 격려하면서 행복을 느꼈던 여자의 사랑. 애정결핍 증상을 겪고 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빈틈을 메워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랑이 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기이하면서도 격정적이었다. 폴록이 바닥의 캔버스에 물감을 들이붓고 붓에 물감을 묻혀 미친 듯이 뿌리는 과정을 거쳐 황홀한 작품을 탄생시켰듯이.
미국의 대표적 여성화가, 폴락과 크레이즈너 재단 만들어 젊은 작가 지원
글/ 정준모(미술비평, 문화정책)
세계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 또는 힘이 세다고 스스로 믿는 미국이지만 항상 미국은 문화적인 콤플렉스에 시달려왔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에서 피난해 온 일군의 예술가들에 의해 미국 문화계는 점령당한 형국이었다.
문화후진국으로서의 미국에게 그 콤플렉스를 벗게 해 준 화가가 있었으니 그이는 다름 아닌 추상표현주의 화가 잭슨 폴락(Paul Jackson Pollock, 1912~1956)이다. 와이오밍에서 태어난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미술공부를 하면서 미국원주민 미술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후 뉴욕 스튜던트 리그에서 토마스 벤튼(1889~1975)을 사사했고 1930년경부터 표현주의적 화풍을 버리고 추상화가로 전향했다. 그 후 페기 구겐하임(1898~1979)과 모더니즘 미술의 옹호자 그린버그(1909~1994)의 후원아래 격렬한 필치의 추상표현주의 회화를 시도했으며 1947년부터 바닥에 화폭을 깔고 그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뿌리는 드리핑(Dripping) 기법을 통해 미국적 미술의 선구가 되었다.
그 후 미국미술의 부동의 선봉에 섰고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창조적 고민과 세상과 교감하지 못하는 성격으로 인해 술에 취해 차를 몰고 과속으로 질주하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이런 천재적인 폴락의 뒤에 우리에게 익숙하지는 않지만 추상표현주의의 또 다른 주요한 작가이자 폴락의 반려로 그의 천재성에 불을 지폈던 여성화가 리 크레이스너(Lee Krasner, 1908~1984) 가 있다.
폴락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폴락’(Pollock,2000)에 등장하는 그의 아내 리 크레이스너는 마치 고흐가 세상에 존재하기위해 그의 동생 테오(Theodorus van Gogh, 1857~1890)가 있었던 것처럼 폴락에게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후원자인 동시에 반려이며 동시에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마샤 가이 하든이 분한 리 크레이즈너는 1908년 러시아에서 이주해 온 유태인 2세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1926년 쿠퍼 유니온의 여자미술대학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해서 2년 후 미술대학생 연맹, 그 다음엔 국립디자인미술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33년 사범대학 과정에 들어갔다.
공황이 닥치자 미국공공사업촉진국에서 주는 보조금을 받으며 미술공부를 다시 해 1940년까지 독일에서 이민 온 화가 한스 호프만(1880~1966)을 사사했으며 미국 추상화가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2년에는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과 함께 뉴욕 맥밀란 화랑에서 열린 ‘프랑스와 미국미술’전에 참여하면서 4살 연하의 잭슨 폴락을 알게 되어 곧 동거에 들어갔고 그후 리 크라이스너는 폴락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리 크라이스너가 폴락에게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그림을 접고 폴락을 통해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대신 성취하려는 영화의 도입부가 그것이다. 무명의 화가 폴락은 피카소의 전시회를 다녀온 후 술에 취한 몸을 이끌고 집 계단을 오르며 소리친다. “빌어먹을 피카소! 그 자식이 다 해먹었어.”그 후에도 몇 차례 더 피카소에 대한 열등감을 내뱉는 데 그것은 자신만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탓 때문이었다.
형님 집에 얹혀살던 그가 고민과 방황을 거듭하던 시기, 함께 전시를 열기로 한 여성화가 리 크레이즈너를 만나면서 자신의 길을 정하게 된다. 폴락을 만난 그녀는 묻는다. “스승이 있었어요?”, “아니요.”, “과거에는?”, “톰 벤튼.”, “벤튼? 설마. 전혀 다른 스타일인데.” 여기에 폴락은 답한다. “칼 영과 존 그레햄 한 테 벤튼 스타일을 극복했죠.” 이렇게 그는 스승의 영향권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 후 폴락과 리 크라이스너는 1945년 결혼식을 올렸고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있는 더 스프링으로 이사해서 그림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 후 폴락은 안정을 찾으면서 자신의 작업에 몰입하게 되고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 와중에도 리 크리이스너는 마음의 상처를 입어야만 했다. 폴락의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은 기쁨보다는 괴로움 때문에 내는 신음소리와 같았다.
그는 그림에 미친 사람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항상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다. 1955년에는 맨해튼의 스테이블 화랑에서 연 개인전은 부와 명예를 주었다. 그러나 스타가 된 폴락을 세상은 그냥두지 않았다. 여기저기에 불려 다니고 때론 거들먹거리기도 해야 했다. 거기다가 폴락과 자신의 작업을 위해 아이 갖기를 거부했던 리 크라이스너의 행동은 심약했던 그를 더욱 더 자학하게 했다.
그는 유명해진 후 가식적인 자신이 싫어졌고 그래서 다시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다. 아내와 그림을 위해 끊었던 술을 다시 입에 대면서 그는 이내 무너져내린다. 그래서 여기서 벗어나고자 수많은 여성들과 잠자리를 같이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후원자였던 페기와도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작가로서 그리고 그의 명성을 위해서 리 크라이스너는 조용히, 묵묵하게 모든 것으로 가슴 속에 묻고 다시 옛날로 돌아간 그를 위해 유럽행을 권한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권유를 뿌리치고, 그녀 혼자 쓸쓸하게 유럽으로 떠나고 그는 1956년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폴락을 통해 못다 이룬 자신의 꿈을 스스로 이루기로 작정하고 작업에 몰두한다. 폴락의 아내와 여성으로서 대해주기 보다는 화가로서 대해주기를 원했던 그녀는 성별을 알 수 없도록 자신의 작품에 “L.K.”라고 서명하는 등 자신의 작업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다.
물론 폴락과 크라이스너의 작업에는 많은 공통점과 유사성이 눈에 띄지만 이것은 피카소와 브라크가 함께 작업했던 당시의 그림을 구분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폴락의 죽음은 유일한 가족이었던 크라이스너에게 엄청난 부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과 폴락이 어려웠던 시절을 상기하면서 1985년 ‘폴락과 크라이스너 재단’(Pollock-Krasner Foundation)을 세워 젊은 작가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작업을 발전시켜 1946~51년 사이의 ‘작은 이미지’(Little Image) 시리즈와 1957~59년 연간의 ‘초록시리즈’(Earth Green) 그리고 이후 ‘밤의 여로’(Night Journey)시리즈를 통해 미국의 대표적인 여성화가로 자리를 확고히 한다.
그녀는 뉴욕에서 1984년 6월19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폴락의 옆에 묻혔다. 그녀가 세상을 떠난 6개월 후 MoMA에서 회고전이 열렸고 그녀가 죽은 지 사반세기반인 작년에 다시 회고전이 열렸는데 이는 MoMA 80년 역사상 여성작가 회고전으로는 4번째 것으로 이것만으로도 리 크라이스너의 작가로서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