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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상상으로 그린다? 그림은 고통속의 기억으로 그린다!
2017년 01월 02일 02시 40분  조회:4471  추천:0  작성자: 죽림

후원자인 동생 테오의 약혼 소식이 ‘방아쇠’였다는 주장 나와

빈센트 반 고흐의 자화상(사진=BBC 동영상 캡처)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도시 아를르의 추운 겨울날 저녁, 빈센트 반 고흐가 작은 책상위에 놓아뒀던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기, 음주문제, 폴 고갱과의 다툼 그리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고 싶은 욕망 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가 ‘결혼식의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고 CNN이 1일 보도했다.

반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정신 분열 상태에 빠져 귀를 잘랐다고 미술전문가 마틴 베일리씨가 그의 책 “남쪽의 화실 : 프로방스의 반 고흐(Studio of the South: Van Gogh in Provence)”에서 주장했다. 

“정신분열로 빠져들게 한 방아쇠(trigger)는 공포였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버려진다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 저자인 베일리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반 고흐가 ‘귀 사건’이 벌어진 후에 동생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것으로 보고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CNN은 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결혼 소식이 그 날 확실하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단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 고흐가 다음해 1월에 보낸 편지에서 (1888년) 12월 23일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일리씨는 돈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미술상인 조안나 본거와 약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반 고흐 학자들이 놓친 것이 약혼녀가 12월 23일에 그녀의 오빠 헨리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며 테오가 그 이틀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형에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듣지 않도록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테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 부양의 압력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절망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더 깊이는, 아마도 질투의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 테오는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 반면 빈센트는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베일리씨는 책에 썼다. 

이 책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를르에서 자신이 ‘노란 집’이라고 부른 곳에 살면서 ‘밝은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귀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포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 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이를 신문지로 싸서 들고 베레모를 쓴 채 근처의 사창가로 갔다. 거기에서 최근에 ‘가브리엘르 베를라티에’로 밝혀진 젊은 여성을 만나서 잘린 귀를 건넸다. 

베를라티에가 잘린 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반 고흐는 달아났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베일리씨는 반 고흐 자신은 이 사건을 “예술가의 단순한 광란”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며 귀를 자르면서 동맥이 상해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열도 앓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동생의 결혼 소식이 반 고흐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갔지만 유일한 촉매제는 아니었다고 CNN에 말했다. “반 고흐의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결혼은 방아쇠였을 뿐이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를 당시 치료했던 의사는 이 예술가가 간질을 앓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근 전문가들은 압쌍트(프랑스 술) 중독, 정신 분열, 일사병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되지는 않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또 자해행위는 이 예술가가 보낸 구조요청이었을 수도 있다고 CNN는 추정했다.

반 고흐의 치료기록들을 논의하는 1893년의 한 편지에는 이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가 “환청의 희생자”라는 언급이 있다고 베일리씨는 말했다. 그가 귀를 자른 것은 이 소음들을 꺼보려는 헛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CNN는 덧붙였다.  

반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만나러 갔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은 당시 10후반의 소녀로 개에게 물려 광견병 치료를 받았으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 카페의 청소부로 일했던 것으로 영국 BBC가 지난 7월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혔다. 

이런 사실을 추적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 씨는 불우한 여성들과 이웃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됐던 반 고흐가 아마도 이 소녀를 돕기 위해 "종교적 희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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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오애리 기자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동료 화가 폴 고갱으로부터 작품에 대한 비판을 들은 후 분노해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 지금까지 미술계에서 전해내려오는 정설이다. 

하지만 고흐가 귀를 자른 것은 고갱 때문이 아니라 동생 테오 때문이란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테오는 고흐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이자, 가장 충실한 지지자였고, 재정적 지원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테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접한 고흐가 상실감과 소외감, 그리고 재정적 지원을 못받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 등으로 인해 자해를 했다는 것이다. 

가디언과 텔레그래프는 영국 미술사가 마틴 베일리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고흐 미술관 기록 보관서에 있는 고흐 및 주변 가족들의 서신들을 조사한 결과,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날인 1888년 12월 23일에 동생의 약혼 통지 편지를 받은 것이 확실하다는 주장을 새 책에서 밝혔다고 31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지금까지 미술사학계에서는 고흐가 귀를 자르는 자해를 한 이후에 동생 테오의 편지를 받았다는 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앞서 올해 초에는 고흐가 잘라낸 귀를 종이에 싸서 가져다 준 여성이 창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여성이었다는 사실이 연구 결과 새로 확인되기도 했다. 

베일리는 오는 11월 3일 출간될 저서 '남쪽의 화실: 프로방스의 반 고흐'에서 "고흐가 귀를 자르기 몇시간 전 파리에서 편지가 왔다. 편지는 테오가 보낸 것으로 요하나 (조) 봉제르라는 여성과 만난 지 며칠 만에 결혼하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이었다. 빈센트는 가장 가까운 동료인 테오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그러면서 "테오의 약혼 소식이 근본적인 이유는 아닐지 모르지만, 파괴적인 행동을 유발했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편지 자체는 현재 사라지고 없다. 다만 테오의 약혼자 봉제르의 오빠 앙리가 12월 23일 여동생의 약혼 뉴스 편지를 받았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이틀 전인 12월 21일 테오가 어머니에게 보낸 결혼 허락 요청 편지도 남아 있다. 베일리는 봉제르가 오빠에게 약혼 사실을 알리는 편지를 쓴 날 테오 역시 형 빈센트에게 자신의 약혼을 편지로 알렸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베일리는 지난 2009년에도 고흐가 귀를 자른 이유가 테오의 결혼때문이었다는 주장을 제기한 바있다. 특히 고흐가 귀를 자른지 약 한 달 뒤에 그린 '양파가 있는 정물'을 보면 편지봉투 한 개가 그려져 있는데, 이 봉투를 자세히 보면 숫자 67이 적혀져 있고, 이는 테오가 살던 파리 아파트 근처의 우체국 번호라는 것이다. 또 봉투에는 새해표식 인장도 그려져 있는데, 당시에는 대부분 12월달에 이런 인장을 찍곤 했다. 따라서 고흐가 이 그림에서 귀를 자르기 전에 동생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그려 넣었으며, 그만큼 고흐에게 동생의 편지가 큰 의미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있다고 주장했다. 

테오는 1889년 4월 18일 봉제르와 결혼했으며, 형 빈센트가 자살한 1890년 7월 29일로부터 약 반년 뒤인 1891년 1월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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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마틴 베일리 주장…
"테오 결혼편지 받은 날이 귀 자른 날"

(서울=연합뉴스) 김보경 기자 =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다.

이번에는 반 고흐가 동생 테오의 결혼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에 빠진 게 자해를 저지른 이유라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됐다.

3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작가인 마틴 베일리는 '스튜디오 오브 더 사우스'란 새로운 저서에서 반 고흐가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친구였던 동생 테오가 조 봉어르와 결혼하겠다고 알린 편지를 받은 후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동생의 결혼으로 자신과의 관계가 틀어지고, 후원이 중단될 수 있다고 우려한 반 고흐가 스스로 귀에 칼을 댔다는 해석이다.

반 고흐가 동생의 결혼 소식에 괴로워했다는 내용은 이미 알려졌으나 그가 결혼 소식을 전달받은 시점은 귀를 자른 이후라는 것이 이전까지의 정설이었다.

 

하지만 베일리는 테오의 편지가 반 고흐가 폴 고갱과 함께 기거했던 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 배송된 날짜가 반 고흐가 귀를 자른 1888년 12월 23일이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테오의 편지에는 돈 100프랑과 함께 오랜 친구였던 조 봉어르를 2주 전 만났고, 이번에는 그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베일리는 테오가 그의 어머니에게 미리 편지를 써 결혼 허락을 구했다는 점과 조의 오빠가 보낸 결혼 축하 전보가 1888년 12월 23일에 도착했다는 점을 들어 자신의 주장에 힘을 보탰다.

편지를 받은 반 고흐는 결국 귀를 잘랐고, 크리스마스를 약혼자와 함께하려 했던 테오는 크리스마스 당일 형을 만나러 병원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가디언은 이번 주장에 비춰볼 때 반 고흐와 싸운 고갱이 이별을 통보하자 반 고흐가 절망에 빠져 귀를 잘랐다는 해석이 의문스러워진다고 보도했다.

앞서 올해 7월에는 반 고흐가 매음굴에서 일하는 젊은 여성이 개에 물려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의 귀를 떼어 줬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는 반 고흐 미술관이 공개한 사료를 토대로 정신건강이 온전하지 않던 반 고흐가 '살을 잃은 이에게 살을 선물한다'는 다소 신비주의적인 생각으로 귀를 잘랐다고 주장했다.

베일리는 반 고흐의 유명작품 '침실'의 그려진 침대가 이후 어떻게 됐는지도 추적해 공개했다.

그림에 그려진 더블 침대는 반 고흐가 노란 집에 오는 고갱을 환영하기 위해 산 것이었다.

베일리는 침대에 베개가 2개가 놓여있다는 것은 반 고흐가 여성과 함께 침대를 쓸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전했다.

반 고흐에 의해 파리로 옮겨진 침대는 1890년 반 고흐가 자살하고, 이듬해 테오까지 세상을 뜨자 봉어르가 네덜란드에서 운영하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보관됐다.

게스트하우스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무너졌고, 침대는 그의 조카에 의해 집을 잃은 주민에게 기부됐다고 베일리는 전했다.

귀를 자른 반반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진 벽 [연합뉴스 자료사진]
귀를 자른 반 고흐의 자화상이 그려진 벽 [연합뉴스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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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BS노컷뉴스 정병일 기자]


1888년 12월 23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 도시 아를르의 추운 겨울날 저녁, 빈센트 반 고흐가 작은 책상위에 놓아뒀던 면도칼을 들고 왼쪽 귀를 잘라냈다. 그가 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기, 음주문제, 폴 고갱과의 다툼 그리고 어머니에게 응석부리고 싶은 욕망 등 여러 가설들이 있지만 그가 ‘결혼식의 종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새롭게 나왔다고 CNN이 1일 보도했다.

반 고흐는 그의 동생 테오가 결혼하게 된다는 소식이 담긴 편지를 받은 뒤 정신 분열 상태에 빠져 귀를 잘랐다고 미술전문가 마틴 베일리씨가 그의 책 “남쪽의 화실 : 프로방스의 반 고흐(Studio of the South: Van Gogh in Provence)”에서 주장했다.

“정신분열로 빠져들게 한 방아쇠(trigger)는 공포였다. 감정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버려진다는 데 대한 공포였다”고 저자인 베일리씨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반 고흐가 ‘귀 사건’이 벌어진 후에 동생의 약혼소식을 알게된 것으로 보고 이 가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CNN은 전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결혼 소식이 그 날 확실하게 전달됐다”고 말했다.

“단서들을 함께 고려해야 할 문제다. 우리는 그 편지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반 고흐가 다음해 1월에 보낸 편지에서 (1888년) 12월 23일에 그의 동생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언급했다”고 그는 말했다. 베일리씨는 돈이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미술상인 조안나 본거와 약혼했다는 소식과 함께 전달됐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반 고흐 학자들이 놓친 것이 약혼녀가 12월 23일에 그녀의 오빠 헨리로부터 축하 전보를 받았다는 사실”이라며 테오가 그 이틀전에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고 그의 형에게도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듣지 않도록 소식을 전하려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 고흐는 테오가 결혼하면 자신과 사이가 벌어지고 가족 부양의 압력때문에 자신에게 돈을 덜 보내게 될 것이라고 절망했을 것이라고 그는 추측했다. “더 깊이는, 아마도 질투의 요인이 있었을 수 있다 ; 테오는 사랑을 찾는데 성공한 반면 빈센트는 오래 지속되는 인간관계를 갖지 못했다”고 베일리씨는 책에 썼다.

이 책은 반 고흐가 프랑스 남부지방에 있는 아를르에서 자신이 ‘노란 집’이라고 부른 곳에 살면서 ‘밝은 색깔’에 매료되기 시작한 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모든 사람들이 ‘귀 사건’에 대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책의 내용에 포함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는 1888년 12월 23일 밤 자신의 귀를 자른 뒤 이를 신문지로 싸서 들고 베레모를 쓴 채 근처의 사창가로 갔다. 거기에서 최근에 ‘가브리엘르 베를라티에’로 밝혀진 젊은 여성을 만나서 잘린 귀를 건넸다.

베를라티에가 잘린 귀를 보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자 반 고흐는 달아났고 뒤이어 벌어진 혼란이 지역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베일리씨는 반 고흐 자신은 이 사건을 “예술가의 단순한 광란”으로 묘사했을 것이라며 귀를 자르면서 동맥이 상해 피를 많이 흘렸을 것이고 고열도 앓았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동생의 결혼 소식이 반 고흐를 극단적 행동으로 몰고갔지만 유일한 촉매제는 아니었다고 CNN에 말했다. “반 고흐의 의학적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논쟁이 있다. 결혼은 방아쇠였을 뿐이다”고 저자는 말했다.

반 고흐를 당시 치료했던 의사는 이 예술가가 간질을 앓고 있다고 믿었으며 최근 전문가들은 압쌍트(프랑스 술) 중독, 정신 분열, 일사병 등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합의되지는 않고 있다고 CNN은 전했다. 또 자해행위는 이 예술가가 보낸 구조요청이었을 수도 있다고 CNN는 추정했다.

반 고흐의 치료기록들을 논의하는 1893년의 한 편지에는 이 네덜란드 인상파 화가가 “환청의 희생자”라는 언급이 있다고 베일리씨는 말했다. 그가 귀를 자른 것은 이 소음들을 꺼보려는 헛된 시도였을 수도 있다고 CNN는 덧붙였다. 

반 고흐가 잘린 귀를 들고 만나러 갔던 '베를라티에'라는 여성은 당시 10후반의 소녀로 개에게 물려 광견병 치료를 받았으며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사창가 카페의 청소부로 일했던 것으로 영국 BBC가 지난 7월 방영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밝혔다.

이런 사실을 추적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 씨는 불우한 여성들과 이웃들에게 감정적으로 동화됐던 반 고흐가 아마도 이 소녀를 돕기 위해 '종교적 희생'으로 생각하고 그런 일을 벌이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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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투데이 김은서 기자]=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태어난 반 고흐는 성직자의 길을 열망하여 매일 성경을 탐독하고 설교활동을 하였으나 암스테르담 신학대학에 낙방하였다. 이어 복음 전도사가 되고자 했지만 격정적인 성격 때문에 교회로부터 전도사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1880년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이 자신을 구원할 것이라 믿으며 파리에 가서 5살 아래의 미술학도에게서 드로잉을 배우고 외사촌이자 화가였던 안톤 모베의 화실에서 유화를 그리며 미술공부를 시작했다.


이후 그는 브뤼셀·헤이그·앙베르 등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노동자와 농민, 하층민의 생활과 풍경을 그렸다. 이어 걸작이라 평가되며 현대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감자 먹는 사람들’, ‘해바라기’, ‘아를의 집’ 등을 그리며 가난 속에서도 활발한 화가 활동을 펼쳤다.

그러던 중 그는 화가이자 친구인 장 폴 고갱과 공동생활을 하였는데 둘은 성격차이가 심하여 자주 다퉜다. 이에 1888년 12월 23일 반 고흐는 고갱과 다툰 끝에 발작을 일으켜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


그 후로 반 고흐는 발작과 입원을 연속하며 ‘고갱의 의자’, ‘별이 빛나는 밤’, ‘까마귀가 나는 밀밭’ 등의 그림들을 그렸고, 1890년 끝내 권총 자살을 하며 생을 마감했다.


살아생전 그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지만 1903년 그의 유작전 이후 사람들은 그를 위대한 화가로 인정하였고 현재까지 그는 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편 올해 4월 한 방송에서 고흐가 귀를 자른 원인이 질병과 관련되었다는 의견을 제기했다.

 이날 방송에서 변재용 교수는 "메니에르병은 난청과 이명을 동반한 병"이라며 "고흐는 생전에 메니에르병을 앓았고 '별이 빛나는 밤에' 속에서 고흐가 겪은 고통을 유추할 수 있다.  그림을 보면 고흐는 별빛이 마치 소용돌이 치듯이 밤하늘에 빛나는 모습을 멋있게 표현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고흐가 실제 회전하는 어지럼증을 겪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고흐는 난청과 이명 때문에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귀가 윙윙 거리니까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이다"라고 밝혔다.

반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변재용 교수/ 사진출처: MBC
반 고흐가 스스로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변재용 교수/ 사진출처: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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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귓불 아닌 귀 전체 잘린 의사의 스케치 발견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프랑스에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의 귓불을 잘라내 매춘부에게 줘버렸다는 이야기는 광기에 스러진 천재 예술가의 말년을 보여주는 일화로 종종 거론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은 반 고흐가 이제까지 알려진 대로 귓불 일부가 아닌 왼쪽 귀 전체를 잘라냈음을 보여주는 기록을 새로 공개했다고 영국 BBC 방송, 일간 가디언 등이 12일(현지시간) 전했다.
 

공개된 기록은 사건이 일어난 1988년 당시 반 고흐를 치료한 의사 펠릭스 레의 편지 내용이다. 1930년대까지 레 박사와 연락하고 지냈던 작가 어빙 스톤이 소유했던 것으로,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뱅크로프트 도서관에서 발견된 것.

레 박사는 편지에 반 고흐가 잘라내기 전후의 귀 모습을 그려놓았다. 이 그림을 보면 고흐는 귀 일부만 잘라낸 것이 아니라 귓불의 작은 일부분만 남긴 채 대부분을 잘라낸 것.

또한 반 고흐가 잘라낸 귀를 건넨 여성인 ‘라셸’은 그간 알려진 것처럼 매춘부가 아니라 사창가에서 청소 일을 하던 하녀였다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박사의 편지를 발견한 전직 미술사 교사 버나뎃 머피는 본명이 가브리엘인 이 여성의 유족을 추적해 반 고흐가 이 여성을 도우려는 생각으로 잘라낸 귀를 건넨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이 여성은 당시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린 상처로 고생하고 있었으며 치료비 마련을 위해 사창가에서 청소부로 일하고 있던 여성이다.

머피는 “반 고흐는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보면 대단히 감정적이 됐던 인물”이라며 “그 여성에게 선물로 살을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반 고흐 미술관은 이 편지와 반 고흐가 그린 레 박사의 초상화, 반 고흐가 자살할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되는 권총 등을 오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전시될 예정이다.

[출처=캘리포니아대학교 홈페이지]

/김상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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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빈센트, 빈센트 반 고흐』-어빙스톤-최승자 옮김-까치

 

 

p-20 고통이 그를 괴상하게 만들어놓았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그는 타인의 고통에도 민감해졌다. 자신의 고통으로 인해 그는 주위의 값싸고 보잘것없는 것, 그리고 떠들썩한 속세의 성공을 견딜 수가 없게 되었다.

그가 진실성과 깊은 감정을 발견할 수 있는 그림은, 그것을 그린 그 예술가의 거통이 표현된 그림밖에 없었다.


p-22 “훌륭한 행동을 하려면,” 그는 읽었다. “인간은 반드시 자기 내부에서 정신적으로 죽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이승에서 존재함은 행복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그저 정직하기 위해서도 아니요, 인간이 이승에서 존재함은, 인류를 위한 위대한 행동을 실현하여 고귀함을 얻고 거의 모든 개개인의 삶이 질질 끌려가고 있는 비속함을 뛰어넘기 위해서이다.”


p-28 우르술라는 그 사내의 두 팔에 단단히 끌어 안긴 채 입술을 그의 입술에 꼭 포갰다. 마차가 앞으로 나아갔다. 무언가 가느다란 것이 그의 내부에서 툭 끊어졌다. 산뜻하고 깨끗하게 끊어졌다. 마술은 풀렸다. 그토록 쉬울 줄은 몰랐었다.

그는 종횡으로 휘갈기는 빗줄기 속에 타박타박 아일워드로 되돌아와 짐을 챙기고서 영원히 영국을 떠났다.


p-81 그는 목이 타는 듯 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침묵의 공간을 가득 채웠다. 굶주림과 좌절감으로 야위고 쇠약하게 무참히 꺾여버린 광부들은 마치 신을 바라보듯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신을 그들에게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p-86 그는 신을 잃었고 자신을 잃었다.

한 죽은 혼이 왜 자신이 아직도 여기 있는가 의아해 하면서 아무도 없는 버림받은 세계 속을 헤매고 있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었다. 얼마 안 되는 초목이 시들어죽으면서부터 무엇인가 그이 내부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은 그자신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의 삶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다시 독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독서는 언제나 가장 큰, 그리고 변함없는 즐거움이었는데 이제 다시 다른 사람들의 성공과 실패, 괴로움과 기쁨의 이야기를 통해 늘상 머릿속에 출몰하는 자신의 대실패라는 유령으로부터 그는 도피할 수 있었다.


p-92 그는 야수 같은 마음의 고통을 눌렀고, 이젠 더 이상 자신의 불행을 생각지 않았으므로 행복함을 느꼈다. 아버지와 동생의 돈을 계속 받기만 하고 조금치도 자립할 노력을 하지 않는 자신을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리 중대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는 그저 그림만 계속 그릴 뿐이었다.


p-97 “자네 말이 맞는 것 같군. 저 여잔 얼굴도 없어. 딱히 정해진 어떤 사람도 아니야. 어쩌면 저 여잔 그저 보리나쥬에 사는 광부의 아내들 모두가 한 데로 합쳐진 거야. 뭐랄까 자네가 포착해 놓은 그것은, 광부 아내의 영혼이야. 그리고 그거야말로 정확하게 그려진 그 어느 그림보다도 천 배나 귀중한 것일세. 그래 난 자네가 그린 저 여인이 좋네. 내게 무엇인가를 직접 말해주고 있거든.”


p-207 “불평 없이 고통을 견디는 법을 배워라. 그것이 위대한 앎이요, 깨우쳐야할 교훈이며, 인생 문제의 해결법이다.”

그는 새로운 기운을 얻었고 또한 아이러니칼하게도, 갖가지 타격 중에서 가장 혹독한 타격을 안겨주었던 사람이 바로, 그 타격을 체념으로써 참는 법을 가르쳐준 장본인이라는 사실이 즐거웠다.


p-208 “고통이 크면 클수록 자넨 그 고통에 대해 더욱 감사해야 돼. 바로 그런 것들로부터 일급의 화가들이 만들어지는 걸세. 텅빈 뱃속이 꽈 찬 뱃속보다 낫고, 상심하는 가슴이 행복보다 훌륭한 걸세. 반 고흐, 그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구.”


p-209 “ 자네가 고금을 통해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생각된다 할지라도 난 도와주지 않겠네. 굶주림과 고통에 의해 죽음을 당할 만한 인간이라면 애초에 구해줄 가치도 없겠지.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화가들이란 오직, 자기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마칠 때까지는 신도 귀신도 죽일 수 없는 사람들뿐일걸세.”


p-211 “그림을 판다는 게? 나는 화가란 언제나 무엇인가를 찾으면서도 끝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을 뜻한다고 생각했었죠. 나는 그건 알고 있다, 나는 찾아냈다 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화가이다라고 말할 때, 그건 단지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 있고 노력하고 있으며 심혈을 기울여 몰두하고 있다는 의미일 따름이죠.”


p-231 인물을 그리든 풍경을 그리든간에 그는 감상적인 우수가 아니라 진지한 슬픔을 표현하고 싶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작품을 보고 “이 사람은 참 깊은 감정과 예민한 감수성을 갖고 있군”이라고 말하게 되는 높은 경지까지 도달하고 싶었다.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그 외의 다른 활동들은 점점 더 그의 관심 밖으로 사라졌다. 그런 다른 일들을 제거하면 제거할수록 그의 눈은 점점 더 쉽사리 삶의 회화적 특질을 포착할 수 있었다. 예술은 끈질긴 작업,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감행하는 작업, 그리고 끊임없는 관찰을 필요로 하였다.


p-263 “그 여자는 창녀가 아니야. 당신의 아내였어. 그 여자를 구하는데 실패 한 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야, 보리나쥬 사람들을 구하려다 실패한 것과 마찬 가지로, 한 인간이 한 문명 전체에 대항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거의 아무 것도 없으니까.”


p-279 인간이 뭔가 신성한 것을 창조하였다면 그 신성함에 가장 가까운 것이 빈센트에게 있어서는 밀레의 만종이었다. 꾸밈없는 농부의 생활 속에서 그는 진실하고 영원한, 단 하나의 현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는 야외에 나가서 현장 그 자체에서 그리고 싶었다. 거기서 그는 수많은 날벌레들을 처치하고 먼지와 모래와 싸워야 했다. 히드 들판과 히드 울타리를 넘어 몇 시간이나 걸어 돌아올 때면 캔바스가 여기저기 긁히곤 했다.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서 보면, 자신이 현실을 똑바로 직시했음을, 그리고 그 현실의 근본적인 단순함 속에서 뭔가를 사로잡았음을 알게 되는 것이었다. 자신이 그린 농부들의 그림 속에서 베이콘과 연기와 감자 찌는 냄새가 풍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건전한 게 아니었다. 마구간은 말똥 냄새를 풍겨야 제격인 것이다. 들판에서 잘 익은 보리나 비료나 거름 냄새가 난다면 그것 또한 좋은 것이다. 더욱이 도시에서 온 사람에게는.


p-283 “나는 결코 고통이 진정되길 원치 않는다. 흔히 바로 그 고통을 통해 예술가는 가장 힘찬 자기표현을 얻을 수 있는 까닭에”


p-289 네덜란드의 옛 대가들에게서 그는 소묘와 색채는 하나이다라는 사실을 배웠었다. 데 그로트 가족은 살아오면서 언제나 변하지 않는 똑같은 위치에서 밥상머리에 둘러앉았다. 빈센트는 등불 아래 감자를 먹고 있는 이 사람들이 접시로 가져가는 바로 그 손으로 대지를 일구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싶었고, 그것을 통해 “손”의 노동에 대해,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정직하게 일해서 먹고 살아가는가를 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p-290 “사람들은 내가 상상으로 그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_나는 기억으로 그린다.”


p-290 사라져 가는 것들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은 것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브라방트의 농부들은 이제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p-299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나한테 물었지? 내가 말해주지. 형은 인상파들한테서 빛과 색채를 배워야 해. 그것만큼은 그들한테서 빚을 질 수밖에 없어. 그러나 그 이상은 안 돼. 그 사람들을 모방해서는 안 돼. 휩쓸려 처박히지 말아야해. 파리의 아가리에 삼켜지지 않도록 해야 해.


p-319 “ 좋아요, 그렇다면 하 화가가 묘사를 하기 위해 배워야 하는 건 한 사물이 아니라 그 사물의 본질입니다. 화가가 어떤 말 [馬]을 그릴 때, 그 말이 거리에서 알아볼 수 있는 특정한 어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죠. 사진은 카메라가 찍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 화가는 그 이상으로 넘어서야 해요. 우리가 어떤 말을 글릴 때 반드시 포착해야 하는 것은, 반 고흐씨, 플라톤이 말하는 소위 ‘말이라는 것’ 즉 한 말의 외형에 나타난 정신입니다. 또한 한 인간을 그릴 때, 그것은 코끝에 난 사마귀까지 있는 대로 그린 문지기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 즉 모든 인간의 그 정신과 본질이어야 합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p-342 “로트렉 자네의 그림을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것과 똑같은 이유에서 말이야. 대중은 예술에 있어서 도덕적 판단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사실을 납득하지 못한단 말일세. 예술은 도덕을 초월한 것이거든. 인생도 마찬가지야. 적어도 내게 있어서 외설적인 그림이나 책이란 것은 없네. 단지 보잘것없는 착상으로 보잘것없이 만들어진 것들이 있다 뿐이지. 뚤루즈-로트렉이 그린 창부는, 그가 그 창부의 겉모습 밑에 숨겨진 아름다움을 표출했기 때문에 도덕적인 것이 된단 말일세. 그러나 부퀘로가 그린 청순한 시골 처녀는, 감상적으로, 그리고 쳐다보기만 해도 토하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하게 달작지근하게 그렸기 때문에 부도덕한 것일세.”


p-344 “우선, 우리는 모든 진실이란 그 겉모습이 아무리 끔직스러워 보인다 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자연의 모든 것을, 아무 것도 거부하지 않고 다 받아들인다. 우리는 아름다운 허위보다 가혹한 현실 속에 더 많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으며, 파리의 그 모든 살롱보다는 세속스러움에 더 많은 시(時)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고통이야말로 인간 감정 중에서 가장 심원한 것이기에 우리는 고통이 훌륭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창녀나 뚜장이가 연출한 것이라 할지라도 섹스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추악함보다는 인간성을, 예쁨보다는 고통을, 프랑스의 모든 부보다는 딱딱하고 거친 현실을 상위에 둔다. 우리는 창녀가 공작부인과 똑같이, 문지기가 장군과 똑같이, 농부가 장군과 똑같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들 모두가 자연의 틀에 맞추어 인생이라는 구도에 짜여져 들어가는 것이다.”


p-369 “난 다른 화가들을 보기만 해도 이젠 정말로 구역질이 난다. 그들의 얘기와 그들의 이론과 그들의 넌더리나는 입씨름이 지긋지긋해졌어. 아, 웃을 필요없어. 나도 나 자신이 그런 싸움에 함께 끼어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게 바로 문제야. 마우베가 자주 하곤 했던 말이 무언 줄 아니? 그림을 그리던가, 아니면 그림에 관한 얘기를 할 수 있지만,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래, 테오야, 넌 내가 갖가지 생각들을 씨부렁대는 걸 들으려고 칠 년 동안이나 날 먹여살렸단 말이냐?”

“그래, 하지만 우리가 그곳으로 옮겨갈 준비가 다 된 이 순간에 와서 난 내 자신이 그리로 가길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야. 난 거기서 살수도, 그림을 그릴수도 없을 거야. 내 말에 이해가 갈른지 의문이다만......아냐 넌 물론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브랑방트와 헤이그에서 혼자 있었을 때는 난 내 자신을 중요한 인물로 생각했었다. 나라는 인간이 혈혈단신으로 온 세상과 맞서 싸웠었지. 나는 화가, 살아 있는 유일한 화가였다. 내가 그리는 것은 뭐든 가치 있는 것이었어. 내게 위대한 능력이 있는 걸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결국엔 ‘빛나는 화가야’라고 말할 걸로 알고 있었다.”


p-482 “내가 이런 그림을 단 한 점만 그렸더라도 난 내 인생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을 걸세. 난 사람들의 고통을 치료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냈지......하지만 그 사람들은 어째거나 결국엔 죽고 말았거든......그러니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하지만 당신ㅇ의 이 해바라기 그림들은......사람 마음의 고통을 치료해줄 거야......세기가 지나고 또 지나는 동안 ......사람들에게 기쁨을 갖다 줄 걸세. 그 때문에 당신의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그리고 그 때문에 당신은 행복한 인간인 거야.”


p-495 사랑하지 않는 사람,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상처받지 않고 고통 받지 않는다. 아마도 사랑과 고통이라는 기름 없이는 고호의 삶은 위대한 한순간의 불꽃으로 타오르지 못했으리라. 고호, 그는 천재가 아니라 오히려 둔재였으며, 그의 생애는 우뚝 솟은 고상한 정신의 최고 극점이 아니라 가장 낮고 더러운 땅에 입맞춤하며 흐르는 물로서 우리에게 남겨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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