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입고 뛰였던 길림축구팀
그 후방엔 2번-박광순도 있었다
1958년,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길림축구팀에
구쏘련 중앙아시아지역 방문하여 원정 친선경기를 치를 기회를 준다.
뿐더러 전용기를 제공하고
“중국”을 입고 중국을 대표하여 뛸수 있는 “영광”를 준다.
1958년 구쏘련 우즈베끼스딴가맹공화국 체육장에서 경기에 앞서
박광순-앞줄 왼쪽 두번째
1958년 구쏘련 방문시 경기를 마치고 기념 촬영
박광순-두번째 줄 첫번째
결과 “중국”은 예상외로 잘 싸웠다.
우즈베끼스딴,타지크스탄등 8개 구쏘련 가맹공화국팀들과의 경기에서
6승1패1무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특별히 전문을 보내
축하와 함께 모스크바 유람을 장려 한다.
1958년 모스크바 붉은 광장앞에서 리광수와 함께
1958년 중국에서 온 미남 축구선수 박광순에게 미녀들이 다투어 싸인을 요청
이어서 1959년에는 구쏘련 극동지역을 방문,
1960년에는 조선을 방문하여 친선경기를 치르도록 한다.
련속 3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외국 원정 경기 기회를 부여 받는 다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적인 우대였다.
1959년 구쏘련 방문시 당지 신문에 실렸던 기념사진과 주전 선수들
박광순-기념사진 맨 앞
1960년 함경북도 방문시 당지신문에 실린 길림팀 소개
박광순-아래줄 왼쪽 두번째
1959년 구쏘련 신시베리아체육장에서 경기를 앞두고
박광순-오른쪽 다선번째
1960년 조선 청진시 체육장에서 경기를 앞두고
박광순-앞줄 오른쪽 세번째
1959년 구쏘련 방문시 환영 꽃다발을 들고 팀 동료와 함께
팀설립 불과 3년,
문지기를 제외하곤 조선족이 주력을 이룬 팀을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무슨 연유로 이토록 신임하였을까?
당시 12개 갑급리그팀중에 길림팀이 최강팀은 아니였다.
중국축구갑급리그가 개시된 1956년부터 1960년,팀이 장춘에서 연길로 홈장을 옮기고 연변주에서 팀을 대리관리하기전까지
5년 동안 길림팀이 우승을 한적은 없었다.하지만
1960년 갑급리그 4등을 비롯하여 번마다 5등안에 드는 강팀이였고
중국에 온 구쏘련 국가팀,조선국가팀을 비롯하여
외국팀과의 경기에 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곧잘 길림팀을 출전시키는 터였다.
최강팀은 아니였지만
풍격이 용맹하고 강팀에 강하고
선수들이 기률을 잘 지키고 신사답기로 자타공인하는 팀이였다.
1957년 구쏘련국가팀과 함께 광주 경기장에 입장하는 모습
박광순-흰옷 뒤로부터 여섯번째
1957년 광주경기장에서 구쏘련국가팀과 경기를 마치고 함께
박광순-앞줄 오른쪽 네번째
1956년 장춘체육장에서 조선국가팀과 경기를 앞두고 함께
박광순-뒷줄 오른쪽으로부터 여덟번째
1955년 7월,연변 각 지역 학교 학생과 교원중에서 선발된 조선족 열혈남아들로 구성된 길림축구팀(한족 2명).모이고 보니 나름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였다.
말하자면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다수였다.
1955년7월 연길 연변대학 기숙사 앞에서 갓 선발된 초창기 멤베들과 함께
박광순-뒷줄 오른쪽 두번째
1957년 지운봉 선수와 함께 김사종 감독을 모시고
1958년 각별했던 친구 지운봉 선수와 함께
1956년,국가체육운동위원회는 웽그리아의 축구 전문가를 모셔온다.
그리고 그를 다른팀이 아닌 길림팀을 지도하도록 한다.
이렇게 그는 중국축구갑급리그사상 첫 외국인 감독이 된다.
길림축구팀에 대한 국가체육운동위원회의
또 한번의 특별 “배려”였다.
1957년,특별 지도를 맡은 웽그리아인 보스까스(가운데 줄 왼쪽 세번째)를 모시고
박광순-뒷줄 오른쪽 네번째
이렇게 화려했던 길림축구팀 후방에는
창립멤버 2번 선수-박광순도 있었다.
길림팀 창립초기 5년간 치른 30여차례 외국팀과의 모든 경기를
주전으로 뛴 선수,
1955년 화룡현중학교 체육부 부장으로 약관의 19세에
어려운 가정 형편과 외국에 나가 보겠다는 일념으로
잘 하던 공부를 덮고
축구를 선택했던 박광순은
그 전해인 1954년 화룡현을 대표하여
길림성 중등학교 륙상,체조경기에 참가하여
허들항목 우승을 따낼 정도로 발이 빨랐던 선수다.
1957년 박광순
하지만 1960년말 간염 판정을 받아 축구장을 떠나고
1963년 팀을 떠나 주운수공사에 배치를 받고,1970년 주교통국에 전근,
연변 도로건설에 큰 키여를 하고 巡视员으로 계시다
1996년 정년퇴직 한다.
올해(2015년) 우리 나이로 80세
병원 건강검진 나이로 50세인
박광순옹은 오늘도 날렵하게
모아산에 오른다.
당년의 길림축구팀 창립멤버중 지금도 건재해 계시는 분은
박광순옹외 지청룡옹,허명룡옹 세명뿐이다.
2015년11월11일 연길에서
비고:
1.1960년 조선방문시 길림팀을 소개한 조선신문에 의하면
그해 중국갑급리그에서 길림팀이 4등이었다고 함
2.자료에 의하면
1956년 중국축구갑급,을급리그 개시,12개팀
1959년,제1회전국운동회가 있어 갑급리그 치르지 않음
3.이상 글과 자료는 박광순 원로의 기억과 인터넷 검색에 의거함.
기억과 인터넷 자료에 틀린 부분이 있을수 있으니
잘 아시는 분들께서 수정하여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특별히 1956년,1957년,1958년 길림팀의 갑급리그 성적을 알려 주시면
소중한 사료로 남을 것입니다.
제공: 방홍국
조글로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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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연길시민팀(1933년)
만주국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5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장동축구팀(1935년)
만주국도시축구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6년)
동만4성체육대회 축구종목에서 우승한 간도성 축구팀(1939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용정 대성, 동흥 학우회(1940년)
만주국 제3차중등전문학교축구경기에서 우승한 용정광명중학교(1940년)
간도성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용정 제2국민학교(1940년)
대동아축구대회에 참가한 만주국팀 조선족 선수들(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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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에 위치한 연변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러나 중국축구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연변축구의 명성을 들어본적이 있을것이다. 프로축구의 원년 멤버인 연변축구는 중국축구의 발전력사에 굵직한 한획을 그었다.
연변축구는 여러번의 시련을 이겨내고 흑마로 부상해 모두들 앞에 또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느날부터인지 모두들 슈퍼리그로 승격한 연변팀을 궁금해하고 그들의 전며 공격, 전면수비의 위력이 과연 날카롭다 감탄하기 시작했다. 보충명액으로 갑급리그에 출전한 연변팀이 신기하게도 중국식 “카이저”신화를 창조했다. 아래 우리는 이 서민축구팀—연변부덕축구팀에 대해 말하려 한다.
축구는 연변에서 백년의 력사를 가지고있으며 연변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축구운동을 시작한 지역중의 하나이다. 유구한 력사때문에 축구는 이미 연변의 정치, 경제와 문화 생활에 깊이있게 융합되였고 그 저력이 막강하다. 연변팀은 용맹한 작풍, 강경한 발놀림, 뛰여난 집단플레이, 전면 공격, 전면 수비라는 독특한 수법으로 유명하며 국내 축구계의 전통 강팀이다.
연변축구는 줄곧 중국축구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왔다. 1955년 길림성축구팀이 성립되였다. 연변지역의 축구실력이 길림성의 다른 지역보다 뛰여났기때문에 오랜 시간동안 길림팀은 바로 연변팀이였다. 그해 길림팀은 대항전에서 2대1로 헝가리에서 류학을 마치고 귀국한 중국국가팀을 이겼다. 하룡원수는 용맹하고 완강한 길림팀을 극찬했다. 그는 길림팀은 국가팀의 기술을 배우고 국가팀은 길림팀의 량호한 풍격을 배우라고 지시했다. 20세기 50년대부터 지금까지 연변은 중국국가팀을 위해 고종훈, 김광주, 리홍군 등 40여명의 선수들을 육성해냈고 기타 성급도시에 400여명의 축구인재들을 수송했으며 전국에서 유명한 축구선수 배출 지역이다.
연변팀이 중국프로축구의 길에서 창조한 량호한 성적을 말하려면 두명의 한국감독을 빼놓을수 없다. 한 사람은 연변축구의 대부로 불리는 최은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연변팀을 이끌고 슈퍼리그로 돌아온 박태하이다. 언어적인 우세때문에 연변팀은 한국감독에 각별한 애정을 보였고 그 효과도 톡톡히 보았다. 1997년 연변팀에서 최은택교수를 감독으로 초빙했다. 최은택은 한국의 선진적인 축구지식과 관리방법, 기술과 전술, 완강한 투지를 연변팀에 융합시켜 그해 갑A리그에서 4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이는 연변팀이 중국 최고 수준 축구리그에서 창조한 최고의 성적이였다. 그러나 1997년 휘황한 성적을 거둔후 경제, 체제 등 여러방면 요소의 제약과 영향으로 연변팀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2015년, 연변팀은 또 다른 한국인 감독 박태하를 영입했다. 박태하감독의 인솔하에 연변축구 스타일을 이어받은 이 팀은 놀라운 전투력을 보였다. 하태균, 스티브 등 외적선수들의 멋진 발휘와 최민 등 본토선수들의 든든한 뒤받침속에 이 이름없는 축구팀이 결국 2라운드를 앞당겨 슈퍼리그에 진출하게 되였다. 을급리그에서 슈퍼리그, 연변팀은 1년 사이에 거의 완성할수 없는 임무를 완성했다. 많은 사람들이 박태하에게서 그의 선배 최은택의 모습을 보아냈다.
연변축구의 휘황찬란한 성적은 연변인민들의 지지와 갈라놓을수 없다. 연변인민은 특히 축구를 좋아하며 수많은 팬을 보유하고있다. 연변의 축구팬은 어린이부터 로인까지 다양한 년령층에 분산되여있으며 이들에게 축구는 생활의 한부분이다. 통계에 따르면 연변의 홈장은 경기마다 관중이 평균 3만명이상에 달한다. 매번 연변팀 홈경기때면 축구팬들은 모두 장보러 가듯 경기장으로 몰려들어 경기를 관람한다. 축구는 이미 연변인민의 생활속 없어서는 안될 부분으로 되였다. 나무에 매달려 경기를 관람하던 “상고대 팬”들까지 포함해 말이다. 연변 축구팬들의 이런 애틋한 팬심은 아마 국내 그 어느 지역 팬들도 따라잡을수 없을것이다.
천시, 지리, 인화를 모두 갖춘 연변팀, 그래서인가 온갖 시련을 겪었지만 오늘날까지 전승되고있다. 연변팀은 중국 축구의 전체적환경이 어떻든 항상 변함없이 존재할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이 점점 더 단단하고 굳세여질것을 축복한다!
/대중체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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