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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136 : 136 , "축구 기록 사냥꾼"
2017년 01월 14일 15시 42분  조회:3501  추천:0  작성자: 죽림

[동아일보] = 

 한국 축구에서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를 가장 많이 뛴 선수는 홍명보(48)다. 대한축구협회 기록에 따르면 136경기를 뛰었다. 그 다음은 차범근(64)이다. 홍명보보다 딱 한 경기가 적은 135번의 A매치에 출전했다. 두 달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 차범근은 A매치 출전 수가 한 경기 더 늘어 136경기가 되면서 홍명보와 나란히 A매치를 가장 많이 뛴 한국 선수가 됐다.

 그러면 최근 두 달 사이에 차범근이 A매치를 뛰었다는 얘긴가. 환갑이 지난 차범근이? 그럴 리가 있나…. 그동안 몰랐던 차범근의 A매치 출전 기록이 지난해 11월 새로 확인된 것이다. 1975년 3월 24일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예선 태국전에 차범근이 뛰었던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지금까지 차범근은 같은 대회에서 말레이시아(3월 16일), 베트남(3월 19일), 인도네시아전(3월 22일) 출전 기록만 남아 있었다. 축구협회는 새로 알게 된 차범근의 출전 내용을 곧 홈페이지 ‘선수별 A매치 기록’ 코너에 추가할 예정이다.

학원을 운영하는 수학 강사 윤형진 씨(위쪽 사진)는 한국 축구대표팀의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관련 기록을 찾는 ‘기록 사냥꾼’이다. 윤 씨는 한국의 첫 국제경기였던 1948년 7월 6일 홍콩과의 경기에서 첫 골을 넣은 선수가 고 정남식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는 기록을 찾아냈다. 아래 사진은 1954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스위스 월드컵 예선 일본과의 경기에 출전한 정남식(가운데). /김경제 기자 ·축구자료 수집가 이재형 씨 제공
 42년 전 아시안컵에서 차범근이 태국과의 경기에 출전했었다는 기록을 찾아낸 주인공은 윤형진 씨(38)다. 윤 씨는 축구협회 직원이 아니다. 축구 선수 출신도 아니고, 축구와 관련된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는 학원을 운영하는 수학 강사다. 대학에서는 사학을 전공했다. 30대 수학 강사가 축구협회도 몰랐던 A매치 기록을 어떻게 찾았을까.

 17년 전으로 돌아간다. 윤 씨는 대학생이던 2000년 ‘축구스포츠기록통계재단(RSSSF)’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RSSSF 사이트는 축구 관련 기록과 통계, 자료를 다루는데 전 세계 축구 기록 마니아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이때만 해도 윤 씨는 “한국 축구 기록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주로 축구 선수, 그중에서도 특히 유럽 선수들에 관한 정보에 관심이 많았다. 이런 이유로 당시 윤 씨는 RSSSF 회원이던 프랑스의 한 대학교수에게 이메일을 한 통 보낸다.

 얼추 이런 내용이다. “1984년 프랑스에서 열린 유럽축구선수권대회에서 프랑스가 우승한 것 아시죠? 그때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의 프로필과 개인 기록을 갖고 있으면 나한테 좀 주실래요?” 답장이 왔다. 내용이 대략 이랬다. “줄 수 있지. 그런데 나도 부탁이 있어. 한국 대표팀 A매치 관련 기록을 주면 네가 얘기한 자료를 줄게. 내가 일본 대표팀 A매치 기록은 웬만큼 갖고 있는데 한국 기록은 찾기가 어렵네….”

 한국 대표팀 A매치 기록이라…. 이걸 어디서 구하나…. 이때 윤 씨는 한 사람을 떠올린다. 윤 씨는 중학생이던 1994년 PC통신 하이텔의 축구동호회 회원이었다. 이 해에 열린 미국 월드컵 때 축구 생중계를 처음 본 뒤로 축구에 대한 관심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하이텔 축구동호회 회원 중 나중에 축구협회 직원이 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1996년 축구협회에 입사한 송기룡 씨(53)다. 지금은 축구협회 홍보실장이다. 윤 씨는 프랑스 교수에게 보내 줄 한국 대표팀 A매치 관련 기록을 얻기 위해 축구협회를 찾아가 송 실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이때 축구협회를 방문한 인연이 결국 두 달 전 차범근의 A매치 기록 발견으로까지 연결된다.

 윤 씨는 송 실장의 도움을 받아 축구협회 자료실에서 몇 차례에 걸쳐 기록을 찾아 봤다. 하지만 1990년 이전의 자료는 부실했다. 원래부터 기록이 없었던 것인지, 있던 기록이 관리 부실로 사라진 것인지는 축구협회도 모른다고 한다. 이때부터 윤 씨는 한국 축구 A매치 기록을 찾기 위해 국회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을 자주 드나들었다. 1990년 이전의 신문을 뒤졌다. RSSSF의 이란인 회원과도 정보를 공유했다. “내가 한국의 A매치 기록을 찾다가 이란 관련 기록이 나오면 알려주고, 이란인 회원도 자기 나라 대표팀 기록을 찾다가 한국 관련 기록을 보게 되면 알려주고 그런 식이었죠. 같은 아시아권이라 한국과 이란이 함께 출전한 대회가 꽤 있으니까요.”

 이렇게 해서 차곡차곡 쌓은 자료를 바탕으로 윤 씨는 2005년 11월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라는 책을 내게 된다. 1948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이 치른 경기 중 확인된 654경기의 날짜와 장소, 스코어, 득점자, 출전 선수 명단 등을 각각 한글과 영어로 깨알같이 정리한 책이다. 판매 목적은 아니었다. 100권을 찍어 주변에 나눠줬다고 한다. “700경기 가까이 정리를 하다 보니 이제는 스코어와 득점 시간대, 양 팀이 골을 주고받은 순서 등의 기록만 봐도 경기 내용이 어떻게 흘러가다 마무리가 됐을지 머릿속에 대략 그려질 정도입니다.”

 시간이 흘러 2007년. 이번엔 송 실장이 윤 씨를 떠올린다. 이 무렵 축구협회는 대표팀의 누락된 A매치 기록 발굴 작업을 추진한다. 송 실장은 축구협회 직원이 아닌 윤 씨를 적임자로 추천한다. 그리고 이 해 8월 윤 씨는 축구협회의 지원을 받아 대표팀 A매치 기록 발굴을 위해 약 3주간의 일정으로 홍콩, 말레이시아, 태국, 싱가포르, 인도, 인도네시아를 차례로 찾는다. “누락된 A매치 기록이 많을 것으로 짐작되는 시기인 1960, 70년대에는 대표팀이 동남아시아에서 경기를 많이 했어요. 메르데카컵(말레이시아)이나 킹스컵(태국) 같은 대회가 대표적이죠. 그래서 이 지역 도서관들을 집중적으로 훑기로 한 거죠.” 

 윤 씨는 첫 방문지였던 홍콩에서 큰 수확을 얻었다. 한국이 치른 최초의 국제경기에서 첫 득점자가 누구인지를 찾아낸 것이다. 축구협회는 1948년 7월 6일 있었던 홍콩과의 경기를 첫 국제경기로 본다. 이 경기를 첫 국제경기로 보는 것은 국제축구연맹(FIFA)에 가입한 1948년 5월 21일 이후 처음 치른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이 경기는 한국의 5-1 승리로 끝났다는 기록만 남아 있었다. 누가 골을 넣었는지는 몰랐다. 그런데 윤 씨가 득점 선수와 득점 시간대를 찾아낸 것이다. “홍콩의 공립도서관에서 당시 경기 내용을 전한 신문 기사를 찾았습니다.”

 첫 득점자는 선제골을 넣은 고 정남식 전 국가대표팀 감독(1917∼2005)이었다. “이 경기는 홍콩 팀을 중국연합(combined-Chinese)으로 묘사한 표현도 있어 국제경기인 건 맞지만 A매치로 볼 수 있을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윤 씨는 당시 기록 찾기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홍콩의 또 다른 3개 매체에서 정남식 의 첫 득점 기록을 전한 보도를 확인했다고 한다. “요즘은 홈페이지를 통해 오래된 예전 신문 기사를 볼 수 있게 해 주는 외국 도서관들이 꽤 있어 2000년대 초반에 비해서는 기록 찾는 일이 조금 수월해지기는 했습니다.”

대한축구협회가 발간한 ‘한국축구 100년사’. 1940, 50년대 국가대표팀의 경기 결과를 정리해 놓은 페이지(오른쪽)를 보면 경기 장소와 상대 팀, 스코어는 나와 있지만 득점자는 절반 이상이 비어 있다. /이종석 기자 
 두 달 전 윤 씨는 A매치 기록을 찾기 위해 동남아 국가를 두 번째로 찾았다. 이번에는 일주일 일정으로 태국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 세 나라를 방문했다. 2007년 첫 방문 때만큼의 성과는 내지 못했다. 하지만 차범근의 기록을 포함해 대표팀의 A매치 27경기와 관련된 정보들을 일부 찾았다. “A매치 기록을 찾다 보면 완전하지 못한 기록도 있고, 아예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기록도 있습니다.” 완전하지 못한 기록이란 경기 시간과 장소, 스코어, 득점자, 득점 시간, 출전 선수 명단 중 하나라도 비어 있는 것을 말한다. 윤 씨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보는 기록은 출전 선수 명단이 3명 이하로만 나와 있는 경우다.

 윤 씨가 두 차례의 동남아 방문에서 얻은 성과 중 또 하나는 몇몇 축구인에게 ‘센추리 클럽’ 가입 자격을 선물했다는 것이다. 센추리 클럽은 FIFA가 인정하는 A매치를 100경기 이상 뛴 선수 그룹을 가리키는 말이다. 김호곤(66), 조영증(63), 박성화(62), 허정무(62)가 수혜자들이다.

 윤 씨가 동남아를 찾기 전까지 이들 넷의 확인된 A매치 출전 횟수는 70경기 안팎이었다. “김호곤 축구협회 부회장의 경우 그동안 알지 못했던 A매치 출전 기록을 40경기 이상 찾았습니다. 나머지 분들도 30∼40경기 찾았고요.” 윤 씨의 기록 사냥으로 김호곤의 A매치 출전은 120회, 조영증 111회, 박성화 105회, 허정무는 102회로 늘면서 모두 센추리 클러버의 자격을 갖췄다.

 축구협회는 윤 씨가 올해 한 차례 더 동남아 국가(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를 방문해 찾게 되는 내용까지 반영해 이들 넷의 A매치 출전 기록을 FIFA에 보낼 예정이다.

 윤 씨는 A매치 관련 기록을 새로 찾아내기가 갈수록 더 힘들어질 것으로 본다. “그동안 웬만큼 찾았는데 지금까지 확인되지 않은 것은 앞으로도 찾기가 쉽지 않겠죠.” 윤 씨는 아직까지 대표팀의 A매치 60경기가량은 기록이 완전하지 않다고 했다. 1960, 70년대 태국과 치른 방문 A매치 관련 기록을 새로 발굴하기는 특히 어렵다고 한다. “홍콩이나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유럽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어 그런지 영자 신문도 꽤 있고 양 팀 출전 선수의 라인업도 유럽 언론들처럼 꽤 충실하게 기록해 놓은 편이에요. 그런데 태국은 영어 매체도 적은 데다 자국 선수 위주로 득점 장면만을 전하는 경우가 많아 태국과 경기를 한 상대 팀 정보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윤 씨는 차범근의 A매치 기록도 태국의 국립도서관에서 태국어로 된 신문에서 찾았는데 통역이 없었더라면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윤 씨는 한국 축구가 첫 국제경기를 치른 지 70주년이 되는 2018년에 ‘붉은 악마―그 60년의 역사’ 증보판을 낼 계획이다. 그간 새로 찾아낸 A매치 관련 기록과 대표팀이 2005년 이후 치른 A매치 정보를 추가로 담을 예정이다. “어떻게 보면 A매치 기록이 한국 축구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으니까요. 쉽지는 않겠지만 채울 수 있는 데까지는 한번 해 보는 거죠.”

/ 동아일보 이종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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