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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터] - 그림자 이끌고 떠나가야겠네...
2017년 01월 15일 11시 27분  조회:2501  추천:0  작성자: 죽림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


"그림자 이끌고/ 떠나가야겠네/ 이 비를 몰고 온/ 구름을 따라" ―장필순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중

영원히 그 자리에 머무를 것만 같은 날들이 있었다. 태양은 중천으로 향하고 시간은 미지의 설렘을 담아 반짝이던 그때, 웃음과 노랫소리는 높았다. 막 벙그는 꽃처럼 마음은 붉게 흐드러졌다. 그 뜨겁고 화려한 날이 모두 지난 뒤엔 무엇이 남는가. 가수 장필순은 '그 이후'를 담담하게 들려준다. 퇴락의 긴 그늘을 조용히 걸어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사실을. 가슴이 생기를 잃고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어 삶이 하찮게 느껴질 때, 불 꺼진 방에서 홀로 이 노래를 들어보라. 애써 밀쳐뒀던 쓸쓸함이 살아와, 볼에 눈물 한 방울이 떨어질지 모른다.

28년 전, 시간에 대한 관조적 시선을 담은 '어느새'로 화려하게 데뷔한 장필순은 이제 인생의 늦은 오후 어디쯤에 서 있다. 목소리엔 그녀의 오래된 거처, 제주도의 고적한 풍경이 스며 있다. 잠결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몽환적 키보드 사운드 위로 나직하게 시작하는 노래는, 이렇게 어깨를 툭 치며 말을 건다. "외롭지 않니?/ 귓가를 스쳐가는/ 젖은 바람이 물어온다."

제주의 어느 철 지난 포구와 인적 없는 한라산 자락을 돌아왔을 젖은 바람이, 문득 외롭지 않으냐고 묻는다. 관계의 타성과 아늑함에 빠져 잠시 잊고 있었을 뿐, 외로움은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장필순은 삶을 조용히 응시하며, 스스로 맞아들인 외로움이 견딜만한 것인지 묻는다. 그 물음은 쓸쓸하면서도 애틋하다. "외로워도 괜찮지 않니?"라고 마음을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질문은 이어진다. "슬프지 않니?/ 우산을 두드리며/ 빗방울들이 물어온다." 외로움을 숙명으로 감당해야 하는 인간에겐, 우산을 써도 가릴 수 없는 슬픔이 있다. 바람과 빗방울은 외로움과 슬픔이라는 저 오래된 가계(家系)의 자손들이리라. 노래는 달빛, 새벽, 안개, 침묵과 같은 고즈넉한 단어들을 불러내며 침잠한다. 가수는 그 단어들이 달아날까 봐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가만가만 노래한다.

그리고 존재는 정처 없이 흐르는 것이므로 "그림자 이끌고"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그곳은 "이 비를 몰고 온 구름을 따라" 가는 길이거나 "안개가 씻어낸 길"이다. 구름이 가는 길은 덧없고, 안개가 씻어낸 길은 아스라하다. 곁엔 낡고 해진 구두처럼 오래 묵은 그림자가 하나 있을 뿐이다.

 
[이주엽의 이 노래를 듣다가]
장필순은 윤기가 빠져나간 가슴에 희망을 다시 채우듯, 봄의 기억들을 호출한다. "우리 가슴 속에/ 씨가 퍼져 날리길/ 꽃이 피기를/ 새들이 날아들기를" 낮은 음성으로 간절하게 노래한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인생의 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해가 이미 기울기 시작했으므로.

노래의 마지막 당부에 이르면 눈이 아려온다. "우리 가슴속에 강물 흐르길/ 늘 살아있기를/ 늘 깨어있기를." 부디 모두 그럴 수 있길 바란다. 그리고 노래는 그 모든 소망마저 버리고 마침내 무욕의 바다로 흘러들으려 한다. 제목이자 노래를 맺는 가사는 이렇다. "그리고 그 가슴 텅 비울 수 있기를." 삶의 뜻 없음과 덧없음을 서정적 언어로 교직해낸 노래는 아름답고도 슬프다. 노래가 끝나면 가수의 바람과 달리 가슴엔 아릿한 무언가가 가득 차온다.

노래가 실린 장필순 7집 앨범은 2013년에 나온 비교적 근작이다. 6집 발표 후 11년 공백을 깨고 발표한 이 앨범은 충분히 오래 걸어온 사람의 향기가 곳곳에 스며 있다. 외로운 방랑의 길마다 그 향기가 퍼져나갈 것이다. 노래가 마지막에 이른, 외로움도 슬픔도 희망도 없는 저 먼 무욕의 바다에서 삶은 마침내 자유를 얻을 것이다.
                                                                                    ⓒ 조선일보/이주엽 작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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