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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카소가 남긴 명언 >
"예술은 우리의 영혼을 일상의 먼지로부터 씻어 준다."
"작품은 그것을 보는 사람을 위해서만 살아 있다."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
피카소는 창작과 혁신의 일생을 살았으며 90세가 넘어서까지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 위대한 예술가였다. 그는 56세에 기념비적인 대작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당시 서구는 산업사회로 그 나이는 은퇴할 나이였다. 그는 66세 도자기 제작에도 도전하였고 87세에 347장으로 된 동판화 <화가와 모델> 시리즈를 완성하였다.
90세에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하였다. 피카소의 일생은 새로운 화풍을 창조해 내는 일생이었는데 불멸의 명작을 그릴 때마다 여인이 옆에 있었고 그 여인을 통해서 그림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그리고 피카소의 작품 중 여인을 그린 인물화가 많은데 그 인물화는 거의 그의 애인들을 모델로 한 것이다. 피카소의 예술은 연인에게서 영감을 얻고 연인을 통해서 승화하였다.
피카소는 10명의 여인과 평균 7년씩 동거를 하였으며 그중 결혼은 두 번 뿐이었고 한 번은 비밀 결혼을 하였다. 그 10명의 여인 중 적어도 7명이 피카소의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 그들 여인들은 서로 간의 질투로 인해 상처를 받기도 하였다. 도라 마르라는 여인이 나타나 피카소의 부인 마리테레사 월터를 슬픈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고 그 부인은 피카소에 의해 상처를 많이 받았다. 1943년 또 다른 여인 프랑수아즈 질로와 사랑에 빠지자 도라 마르는 질투의 화신이 되어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다. 그녀는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쓸쓸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는데 피카소의 초상화를 간직하고 죽었다. 질로는 피카소와 62세 때 만난 여인으로 당시에 22세였으며 피카소는 그녀를 태양의 여자라고 불렀다.
17세 때인 마리테레즈라는 여인은 피카소로부터 6개월 동안의 구애를 받고 피카소의 여인이 된다. 그러나 마리테레즈는 20세 때 딸을 낳자마자 피카소가 또 다른 여자를 만나는 바람에 버림을 받고 만다. 마리테레즈는 1973년 피카소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저승에서라도 피카소를 보살펴야겠다고 목을 매었다.
피카소의 마지막 여인 자클린 노크는 33세에 73세의 피카소를 만나 비밀 결혼을 하였다. 사람들은 그녀를 비웃었다. “그 늙은 사람과 결혼하다니, 너! 정신이 나갔느냐?”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과 결혼했어요. 오히려 늙은 사람은 저였지요.”
자클린은 피카소 사후 1986년 마드리드 전시를 앞두고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10명의 여인 중 스스로 피카소 곁을 떠난 여자는 두 아들을 가진 프랑수아즈 질로 한 여인 뿐이었다. 피카소는 평생 동안 무려 45,000점의 작품을 남기고 떠났다.
피카소와 여인들! 그 여인들은 위대한 창작의 소재가 되었고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상처도 많이 받았다. 피카소에게서 본받을 것은 여인의 정복자가 아니라 90이 넘도록 꾸준히 새로운 화풍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늙었다고 인생을 포기할 것인가? 많은 건강한 노인들이 일하고 싶어하지만 적당한 일자리가 없는 것이 현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노년은 페기 처분된 인생의 낙엽이 아니다. 아데나워는 85세에 독일의 총리가 되었고 90세에 기독교 민주당 당수가 되었다. 폰 볼트는 88세에 그의 5권짜리 저작(우주)를 탈고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의 작가 파울 하이제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라. “짧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항상 잘 여문 과일을 갖고 싶다면 젊을 적에는 나이 든 이를 따르고 늙어가면서는 젊은이들을 따르라.”
김종재 / ‘예방경영의 인생을 위하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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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의 〈울고 있는 여인〉을 테이트 모던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워낙 유명한 작품이라서인지, 내가 테이트 모던에 갈 때마다 이 작품은 다른 테이트 갤러리에 가 있거나 순회 전시 중이었다. 그런데 별생각 없이 3층 전시실을 돌다가 늘 교과서에서 보아 오던 〈울고 있는 여인〉과 딱 마주쳤다. 테이트 모던은 독특한 전시 원칙만큼이나 그림을 거는 방식도 특이해서 전시실 벽의 아래위로 작품들을 빽빽하게 걸어 놓는다. 그래서 전시된 작품뿐 아니라 전시실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뜻하지 않은 피카소와의 조우에 조금 놀랐다. 〈울고 있는 여인〉은 내 예상보다 훨씬 작은 크기의 그림이었다. 피카소의 현란한 색채와 해체된 형태들이 넘치는 이 작은 캔버스를 나는 가만히 들여다보고 서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피카소의 삶과, 그리고 이 그림 뒤에 숨겨진 여러 배경들, 역사적 비극과 한 여자의 개인적 비극들이 차례로 머릿속을 헤집고 지나갔다.
사실 나는 피카소라는 화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말할 것도 없이, 피카소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 미술의 아이콘이다. 90년이 넘는 인생을 살면서 3만 점이 넘는 그림을 그리고, 열네 살에 이미 라파엘로처럼 드로잉했다는 이 천재 화가는 여성 편력도 정말이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평생 일곱 명의 여자와 같이 살고 그중 두 명과 결혼했다. 그 일곱 명 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여인들도 무수히 많았을 것이다. 〈울고 있는 여인〉은 그 일곱 명의 여인들 중 하나인 사진작가 도라 마르(Dora Maar, 1907-1997)를 모델로 한 그림이다.
도라 마르는 1937년에 피카소가 그 유명한 대작 〈게르니카〉를 작업하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처음 피카소와 만났다. 도라는 프랑스인이지만 에스파냐어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촉망받는 젊은 사진작가였다. 피카소는 1937년 에스파냐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가 독일 공군에 의해 무차별 폭격을 당하자 그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높이 3.5미터, 길이 7.7미터에 달하는 대작 〈게르니카〉를 6주 동안 그렸다. 그는 이 6주 동안 벽화 작업뿐 아니라(〈게르니카〉는 파리 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에 전시하기 위해 제작된 벽화다) 이 대작의 부분에 대한 스케치도 무수히 그려 댔다. 도라는 그 과정들을 사진으로 기록해 가며 6주 내내 피카소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게르니카〉가 완성된 후,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도라가 30세, 피카소가 56세 때의 일이었다.
〈울고 있는 여인〉은 〈게르니카〉의 한 부분을 닮아 있다. 〈게르니카〉 벽화에서 아이를 잃고 울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유화로 그린 작품이 이 〈울고 있는 여인〉이다. 〈게르니카〉는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흑백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게르니카〉의 참상은 〈울고 있는 여인〉에서 선명한 색채로 되살아나 있다. 빨강, 노랑, 파랑 같은 원색과 함께 여인의 얼굴은 하얀 눈물로 온통 덮여 있다. 하얀 눈물은 여인의 볼과 입술, 목으로 흘러내린다. 피카소는 이 그림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에스파냐 내전과 게르니카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피카소는 도라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대부분이 슬프거나 고통스러워하는, 왜곡되고 뒤틀린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피카소의 그림에 그려진 모습처럼, 도라의 인생은 피카소에 의해 굴절되었다. 1943년, 피카소는 새로운 연인인 젊고 아름다운 여자 프랑수아즈 질로(Françoise Gilot)를 만났다. 피카소는 자신의 정물화 몇 점과 프로방스에 있는 집을 주어 도라를 쫓아 보냈다. 버려진 도라는 정신발작을 일으켰다. 그녀는 훗날 정신병에서는 회복되지만 피카소를 만나기 전에 자신이 추구했던 사진과 그림의 세계로는 되돌아가지 못했다. 한마디로 도라에게 피카소는 파멸로 이르는 길이었던 것이다.
피카소는 90세에 이르는 긴 생애 내내 화가로서 늘 명예와 찬탄을 받았고,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다. 그의 절친한 친구 조르주 브라크의 표현대로라면, 피카소는 “불을 뿜기 위해 석유를 마시는 광대처럼” 광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피카소가 늘 즐겨 그린 대상 중에는 그리스 신화의 반인반수(半人半獸) 미노타우로스가 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괴물이 되어서 미궁에 갇힌 채 젊은이들을 잡아먹는 미노타우로스는 결국 피카소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도라는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갇힐 운명으로 태어난 여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말로 설명하더라도, 피카소라는 이 놀라운 천재를 이해하기 어렵다. 그는 늘 나에게 대단한 화가이자, 너무 멀리 있는 천재, 인간적으로 결코 좋아할 수 없는 남자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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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72세에 만난
마지막 여인 쟈클린 로크와
피카소
파블로 피카소가 사랑한 여인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짐 없이 그가 사랑했던 7명의 여인들이 등장한다. 그는 열정적으로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현대미술의 커다란 기둥인 피카소는 여인들로부터 영감을 얻었던탓인지 그의 작품수는 무려 4만 5000점으로 회화 1885점, 조각 1228점, 도자기 2280점, 스케치 4659점과 3만 점에 달하는 판화 작품 등을 남겼다. 피카소가 사랑했던 여인과 작품속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첫번째 연인-페르낭드 올리비에Fernande Olivier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피카소와 동갑내기로 1904년(23세)에 만났다. 검붉은 머리에 키가 크고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육감적인 여인 올리비에는 항상 쾌활한 성격으로 피카소를 기쁘게 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절박한 생활을 묘사하던 "청색 시대"에 올리비에를 만난 피카소는 그녀의 헌신적 도움으로 침울한 청색을 벗고 "장미색 시대"로 변신할 수 있었다. 그 백미가 "아비뇽의 처녀들"로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큐비즘을 개척했다. 그러나,이 시기에 피카소는 올리비에에게 등을 돌렸고 덕분에 올리비에는 피카소와의 모든 것을 청산해야 했다. 올리비에는 회고록 <피카소와 그의 친구들 Picasso et ses amis>에서 피카소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적었다. "그를 모른다면 피카소는 그리 특별나게 유혹적이지 않았다. 물론 그의 수상쩍게 꿰뚫어보는 듯한 시선 때문에 집중이 되긴 했다. 여러분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분이 그에게서 감지하는 이러한 열정, 내면의 불꽃은 그에게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석처럼 작용했다. 그리고 나를 알고 싶어 하자, 나 역시 그를 알고 싶어졌다." 두번째 연인- 에바구엘Eva Gouel 피부가 무척 하얗던 여인. 피카소는 구년에 걸친 페르낭드와 동거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그녀를 선택한다. 유달리 몸이 약했던 에바. 1차세계대전 이듬해인 1915년 12월 14일 이 젊은 여인은 결핵으로 죽는다. 세번째 연인- 올가 코클로바Olga Kokhlova <퍼레이드> 공연 때 만난 러시아 무용수, 피카소가 서른 여섯 살 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여인이다. 올가는 서민적이고 편안한 것을 즐겼던 피카소와 달리 깔끔하고 상류사회적인 기질을 가졌다. 그녀는 피카소의 첫 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네번째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Marie Therese Walter 피카소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27년 당시 열일곱 살의 건강하고 관능미 넘쳤던 소녀 마리를 6개월동안 쫒아 다닌 끝에 작업실로 데려와 초현실주의때의 걸작 <거울앞에 선 처녀>의 모델로 세울 수 있었다. 페르낭드와 에바, 올가가 갈색 머리카락을 가졌던 것과 달리 그녀는 금발이였다. 그녀가 스물두살 때 피카소의 두 번째 아이 딸 마리야를 낳는다. 피카소에게 가장 창조적인 영감을 준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피카소가 죽었을 때 저승에서도 피카소를 보살펴야한다며 자살한 여인이 바로 마리테레즈였다.
피카소와 결혼했던 일곱 명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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