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적인 미술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최초의 화가로, 미국 미술의 자존심으로 여겨진다.
잭슨 폴록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20세기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아이콘이다. 추상표현주의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50년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추상회화 경향을 가리킨다. 용어 자체는 1932년 독일 출신 미국 화가 한스 호프만의 그림을 보고 비평가 로버트 코츠가 “물감을 그저 뿌리고 칠하기만 할 뿐”이라고 비꼰 데서 나왔다. 폴록이 물감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최초의 화가는 아니었으나 뉴욕 현대미술관의 큐레이터 윌리엄 루빈은 이렇게 지적했다.
“문제는 뿌리기나 쏟기, 흘리기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기법을 가지고 폴록이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폴록은 1912년 1월 28일 미국 중서부 지방인 와이오밍 주의 코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족은 자주 이사를 다녔고, 그는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 등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폴록이 화가가 된 데에는 화가가 되고 싶었던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막내였던 그는 거칠고 반항적인 청소년기를 보냈는데, 16세 때 리버사이드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후 수공예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LA 매뉴얼아트 고등학교에 들어가 미술을 배웠다. 이곳에서 그는 장차 추상표현주의 화가로 이름을 날릴 필립 거스턴을 알게 되었다. 또한 화가 쉬완 코프스키로부터 신지학(神智學)을 접하고 매료되었으며, 코프스키와 크리슈나무르티의 집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사회주의 모임에도 나갔는데, 이때 트로츠키가 ‘혁명적 예술의 모범’이라고 일컬은 벽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들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이듬해 큰형 찰스가 다니던 뉴욕의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들어갔다. 이곳에서 토마스 하트 벤턴에게 사사하며 또 한 차례 크게 영향을 받았다. 벤턴은 유럽 중심의 예술이 아닌 미국의 예술인 지방주의를 주장한 선도적인 추상화가였다. 폴록은 후일 이름을 떨친 후 “나의 흥미를 끄는 미국 화가는 그(벤턴)밖에 없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또한 벤턴의 소개로 폴록은 조각, 회화, 드로잉, 설치 미술에 이르기까지 개성 있는 작품 세계를 형성한 가브리엘 오로즈코를 만나게 되었다. 폴록은 오로즈코의 벽화를 보고 생애 최초로 접한 대형 벽화에 전율을 느꼈다고 기록했다. 이 시기에 폴록은 미국을 여행하고 유럽 거장들의 고전을 입체파적으로 재구성하는 데생 작업을 했다. 그런 한편 조각에도 관심을 가져 석공을 배웠다고 한다.
1930년대 폴록은 대공황 이후 침체에 빠진 미국 경제를 재건하는 루스벨트 프로젝트의 예술가 지원 프로그램으로 대규모 벽화 주문을 받게 되었다. 그는 오로즈코, 리베라와 함께 멕시코 화단의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시케이로스와 벽화 작업을 하면서 그의 화풍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한 1940년대까지는 피카소의 입체파 시기 작품들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피카소가 아프리카 원시미술에서 영감을 받았다면, 폴록은 멕시코 신화 및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회화 외에 폴록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정신분석이었다. 폴록은 10대부터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분노 조절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1937년부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다. 담당 의사는 융 심리학을 중심으로 정신분석 치료를 시도했고, 폴록은 그 과정에서 자동기술법으로 스케치하면서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찾으며, 융의 분석심리학에 크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뉴욕 화파, 즉 추상표현주의 그룹은 유럽의 초현실주의 화파와 비슷한 맥락에서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내면의 무의식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특히 비슷했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에 근거하고 있었다면, 미국 미술가들은 융의 집단 무의식 이론, 즉 현대인의 기억 저변에 깔린 전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상징적이고 원형적인 이미지들을 찾아내고자 했다.
1940년대 초부터 그는 신진 예술가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특히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의 눈에 뜨이면서 재정적인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몬드리안은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열린 젊은 예술가들의 전시회에서 폴록의 작품을 보고 “지금까지 미국에서 본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평했다.
폴록의 작품에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 즉 그의 유명한 액션 페인팅 방식이 시작된 것은 1945년 여성 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해 맨해튼을 떠나 롱아일랜드의 시골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자연 속에서 폴록은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그때까지의 추상회화가 아닌 서정적이고도 다소 전통적인 작품을 제작했다.
그 이듬해부터 폴록은 천을 캔버스에 고정시키지 않고 바닥에 펼쳐두고 막대기나 붓으로 물감을 뿌리는 방식의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1930년대 시케이로스와 작업하면서 이런 드리핑 기법을 처음 접했으며, 1943년 〈쏟아 붓기 구성 3〉에서 이 기법을 실험한 바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자동기술법에 의해 액션 페인팅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전개한 것은 이때부터다.
“그림을 그릴 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나도 알지 못한다. 어느 정도 익숙해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뭘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림은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닌다. 나는 그 생명이 드러나게 하려고 노력한다.”
1947년, 폴록은 첫 번째 드리핑 작품들을 완성하여 전시회에 출품했다.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는 그의 작품들을 “몸으로 그렸다.”라고 말하면서 액션 페인팅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작품뿐만 아니라 작업 과정 자체가 예술로 인정되었다.
폴록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 등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며 칭송했으나, 일부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혼돈스러운 작품을 만들 뿐이라면서 연쇄살인마 잭 더 리퍼에 빗대 ‘잭 더 드리퍼(물감을 떨어뜨리는 잭)’라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폴록은 그의 말처럼 단순히 물감을 뿌리고 흐트러뜨린 것이 아니었다. 최초의 드리핑 작품 중 하나인 〈다섯 길 깊이〉를 엑스레이로 검사하자 제일 위의 물감 층 아래 납 물감으로 그린 인체 형태가 숨겨져 있음이 드러났다. 이를 중심으로 열쇠나 단추 같은 물건들이 배치되어 있고, 위의 물감 층은 이런 형상들을 중심으로 리듬감 있게 흩뿌려져 있었다.
폴록은 이 무렵부터 1950년대 초까지 정력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아라베스크 No.13A〉, 〈No.1, 1950-연보랏빛 안개〉, 〈가을 리듬 No.30〉, 그의 최대 걸작으로 꼽히는 〈One: No.31〉 등 수많은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작업 방식은 1950년 사진작가 한스 나무트가 영화로 촬영하여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상영되었다.
그러나 1950년대 후반부터 그는 다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아내 크래스너는 폴록이 이 무렵부터 예술가로서 정체기를 맞았고, 같은 작품을 반복할 뿐이라며 우울증에 빠졌다고 말했다. 폴록을 괴롭힌 것에는 ‘소묘 하나 제대로 못하는 화가’라는 비아냥도 포함되어 있었던 듯하다. 폴록은 자신이 스케치 화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거듭 말했으며, “애송이들이 나를 간단하게 걷어차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 한스 나무트와 다큐멘터리 영화를 촬영할 때 나무트가 촬영에 대해 사소한 요구를 하자 “나는 가짜가 아니오.”라며 테이블을 엎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1952년부터 폴록은 드리핑 기법으로 제작한 〈No.2〉를 비롯해 피카소의 흔적이 느껴지는 흑백의 구상 미술 〈메아리 No.52〉, 〈초상화와 꿈〉, 마티스를 상기시키는 〈부활절과 토템〉, 〈토템 수업〉 등 드리핑 기법 이전에 시도했던 기법들의 작품을 제작했다. 특히 1952년에 제작된 〈부활절과 토템〉이나 〈토템 수업〉은 폴록의 위기의식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폴록은 엄청나게 치솟은 국제적 명성과 함께 찾아온 알코올 중독과 슬럼프라는 위기에서 아메리카 원주민의 토템이나 부활절을 ‘재생’, 즉 탄생 모티프로 다루며 극복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그는 무엇도 극복하지 못하고, 정신적 방황을 계속했다. 그리고 결국 1956년 8월 11일 만취 상태로 차를 몰다 교통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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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추상 표현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뿌리며 그림을 그리는 ‘드립 페인팅’이라는 혁신적인 기법으로 회화의 정의를 바꿔 놓았다. 생전에 이미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가 반열에 올랐으며 미국 미술이 유럽의 영향을 벗어나 자신의 색을 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작가로 평가받는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에서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측량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다. 아홉 살 때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면서 폴록은 불우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예술 고등학교를 다녔으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었다. 1930년 역시 화가가 되고 싶어 했던 형과 함께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지역주의 화가 토머스 하트 벤턴에게 그림을 배웠다. 그는 거장들의 그림을 연구하는 한편 벽화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벽화 화가들과 어울리며 작업을 함께 했다. 1932년 처음으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으나 큰 주목을 끌지 못했다. 1937년부터 1943년까지 연방 정부가 주도하는 공공 작품 제작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이 프로젝트는 대공황 시기에 예술가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 주려는 목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이 당시 폴록은 알코올 의존증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원래 폭력적이고 충동적인 성격인데다 늘 술에 취해 있기 때문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았고 경찰서를 자주 들락거렸다. 1938년 알코올 의존증 치료를 위해 심리 상담을 받았는데 이때 무의식을 표현하는 그림을 통해 마음의 안정을 찾으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는 초현실주의, 입체파 등의 영향을 받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 일은 그가 자신의 스타일을 찾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구상적, 재현적 요소가 강한 그림을 그렸다.
1936년 훗날 부인이 되는 리 크래스너를 처음 만났다. 그녀 역시 추상 표현주의 화가로 1940년대 초 폴록의 그림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의 미술을 지지해 주었다. 1945년 결혼하여 폴록이 안정적으로 창작 활동에 전념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1943년 정부 프로젝트 일을 그만두고 미술관의 관리인으로 일하면서 페기 구겐하임을 만났다. 그녀는 폴록의 첫 개인전을 열어 주었고 비교적 호평을 얻었다. 1943년 페기 구겐하임은 폴록에게 자신이 사는 아파트 입구에 벽화를 그려달라고 의뢰했는데 이 작업은 그가 ‘드립 페인팅’이라는 기법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40년대 중반부터 기존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점점 더 추상적이고 거친 느낌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947년에 이르러 ‘드립 페인팅’ 기법을 찾았고, 1948년 완성한 〈넘버 1A〉는 그의 대표적 스타일이 최초로 등장한 작품이었다. 1950년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을 통해 ‘드립 페인팅’ 작품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바닥에 놓인 거대한 캔버스 위를 오가며 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으로 완성되는 그의 혁신적인 그림을 본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워했으나 거물 평론가 해럴드 로젠버그를 비롯해 소수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1948년부터 1950년대까지 술을 끊고 창작 활동에 매진하며 ‘드립 페인팅’ 작품을 많이 만들었고 예술가로서 정점을 찍었다.
1952년에는 구상적인 스타일의 그림과 흑백 페인트를 사용한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평가가 좋지 않았다. 다시 술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서 점차 충동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급기야 1954년 이후로는 작품 활동이 뜸해졌다. 1956년에는 아내 크래스너마저 그를 견디지 못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1956년 8월 내연의 관계였던 스물다섯 살의 젊은 화가 루스 클리그먼을 태우고 만취 상태로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캔버스의 개념을 재현하고 표현하는 공간에서 직접 행동하는 공간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현대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의 그림은 동시대 추상 표현주의 작가들뿐만 아니라 이후 등장하는 미술 운동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현대 예술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그를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고 평가했다. 잭슨 폴록을 중심으로 한 ‘뉴욕 스쿨’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면서 세계 미술의 중심축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4위. 〈넘버 5〉
• 48위. 〈넘버 19〉
• 99위. 〈넘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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