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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을 넘는 불멸의 기억 ‘윤동주 현상’
하나. 개봉된 윤동주 관련 영화가 우리에게 은은한 충격과 감동을 던져준 바 있다. 영화 ‘동주’는 윤동주의 삶과 죽음을 영상화한 거의 최초의 대중물이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함께한 오랜 벗 윤동주와 송몽규, 두 사람이 어떻게 시대를 이겨냈고, 그 시가 어떻게 이 땅에 남았는지, 그 과정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바람 하나로 이 작품을 시작했다.”는 이준익 감독의 포부는, 한 세기 전의 신산한 세월을 꼼꼼하게 구성해 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달성된 것 같다. 그들의 일대기를 흑백 화면에 담아 고고학적 속성을 높인 것도 실감을 더해주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송몽규가 신춘문예에 당선할 때 몽규가 동주에게 ‘정지용시집’이나 ‘사슴’을 전달하는 장면은, 그 시집들이 당선 시점보다 훨씬 뒤에 출간된 것을 감안하면 잘못된 고증이다. 동주, 몽규와 동기로 나오는 강처중은 윤동주의 작품 일부를 보관하였다가 해방 후에 대중에게 공개하였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의 발문까지 쓴 분인데, 영화에서는 다소 코믹한 단역에 머물러 참으로 아쉬웠다.
시의 창작 시점과 화면 시점이 맞지 않는 것도 꽤 있었고, 시가 낭송될 때는 자막 처리를 하여 대중의 이해를 도왔어야 했을 것 같다. 그리고 동주가 호감을 가진 두 여성이 등장하는데, 옥천 출신의 이화여전 학생 이여진은 추정에 불과한 인물이고, 일본 여성 쿠미는 철저히 허구적인 인물이었다(물론 영화에 이 여성들이 나온 것에 대해 불만은 전혀 없다.). 도쿄 릿쿄(立敎)대학에서 공부할 때 동주의 보고서가 깨끗한 A4 용지에 컴퓨터 글씨체로 제출된 것이나, 동주의 시집을 그 엄혹하던 시절 일본에서 영어로 번역 출간하겠다는 발상을 쿠미가 하는 데서는 실소를 머금기도 했다. 몽규가 교토(京都) 친구들에게 동주를 이종사촌으로 소개하는 장면도 있는데, 몽규가 동주에게 고종사촌이니 몽규에게 동주는 ‘외사촌’이 맞다.
하지만 이러한 ‘옥에 티’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윤동주의 문학적, 사상적 생애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받고 죽어 가는 조선 청년들의 마지막을 실감 있게 보여주었다. 특별히 송몽규의 존재를 대중에게 알린 점 또한 고무적이라 생각된다. 극중에서 정지용으로 출연한 배우 문성근은, 윤동주나 송몽규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아들이니까, 일종의 우정 출연 같은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너는 스물아홉에 영원이 되고/나는 어느새 일흔 고개에 올라섰구나./너는 분명 나보다 여섯 달 먼저 났지만/나한텐 아직도 새파란 젊은이다”라고 그의 시 ‘동주야’에 적었는데, 우리는 죽어 ‘불멸의 영원’이 되고 살아 ‘뜨거운 역사’가 된 두 선구자의 아름다운 만남을 여기서 느끼게 된다.
그렇게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윤동주-송몽규-강처중-문익환으로 이어지는 청춘의 아름다운 기억을 바라보고 있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논쟁도 있었고,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협상을 서둘러 마친 시점 직후이기도 했던 터라, 우리는 ‘동주’가 던져준 전혀 다른 민족의 ‘빛’과 ‘상처’를 더욱 강렬하게 느낀 것일 터이다. 그 아름답고도 가혹하기 짝이 없는 빛과 상처를 기억하면서 말이다.
둘.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에서 짧은 유학 생활을 하다가 독립운동 죄목으로 체포되어 차가운 감옥에서 1945년 2월 16일 젊은 날을 마감하였다. 27년 1개월 남짓의 삶이었다. 이러한 생애를 거느린 윤동주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시와 삶이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뚜렷이 증명해온 실례일 것이다. 그의 순결한 언어와 비극적 죽음이 이러한 결과를 선명하게 증언하고 있고, 그는 이렇듯 불멸의 삶과 죽음, 그리고 그것의 결정(結晶)인 시편들을 남기고 그의 ‘또 다른 고향’으로 떠났다.
그런가 하면 윤동주는 지금의 중국 땅에서 태어나 지금의 북한(숭실중학)과 남한(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릿쿄대학, 도시샤[同志社]대학)에서 유학하였으니 그야말로 동아시아 전체에 걸친 공간 편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한중일(韓中日)에 모두 시비가 세워진 유일한 시인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 ‘북간도-평양-서울-도쿄-교토’라는 공간 확장의 기억 단위를 가질 수 있고, 윤동주의 현재성이 이러한 동아시아적 공간 확장성에서 온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를 심각한 ‘결손 민족’으로 과장하면서 하루빨리 일본에 동화되는 것만이 우리가 살길이라는 신념을 표현했던 그때의 사람들은, 내선일체와 황국 신민화의 당위성을 고무하면서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등 폭력적 담론들을 무반성적으로 양산하였다. 최근 탈(脫)국가주의의 목소리들이 점증하고는 있지만, 아직 국민국가 단위의 실천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기에, 우리가 윤동주가 보여주는 기억의 정치학을 경험하고 확장하는 일은 시의적으로도 썩 종요로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이, 치욕스러울 정도로 거듭되는 망각 관행에 반성적 함의를 던지게 될 것이고, 모든 타자를 자신의 안으로 해소하면서 강력한 동일성을 확보하려 했던 일제의 ‘전도된 오리엔털리즘’ 담론에 천연스런 논리로 부역했던 이들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윤동주라는 기억 단위를, 국민국가 바깥으로 모든 것을 밀어내려는 담론 기획과는 전혀 다른, 말하자면 ‘기원의 기억 상실’을 극복하는 자료로 간직해야 한다. ‘기원의 기억 상실’이란 기억과 망각의 장을 통해 기원이 은폐되고 자연화되는 것을 말한다. 이 자연화된 기억은 계급과 성 그리고 인종의 위계적 차별화를 지움으로써 한 개인을 동질화된 집단으로 호출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 기제이다. 그것은 그래서 식민지 경험을 ‘원경(遠景)’으로 처리하는 이데올로기적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그 점에서 윤동주는 이중적 망각, 곧 ‘식민지’와 ‘언어’에 대한 망각에 대하여 저항하는, 기억의 정치학 혹은 미학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자료로 일정한 항구성을 가질 것이다. 영화 ‘동주’에서는 세 번 주인공들이 무언가를 찢는 장면이 나오는데, 몽규가 친일 인사의 작품을 찢고, 동주가 창씨개명 용지를 찢고, 동주가 서명 문서를 찢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세 지점의 파열 장면은 ‘친일-제국주의’의 흔적을 ‘윤동주’라는 이름으로 내파(內破)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시집 제목이 뭐냐고 묻는 쿠미의 질문에 동주가 또박또박 조선어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말하는 장면 역시, 윤동주 시가 ‘일본어-조선어’의 갈등을 넘어 조선어의 존재증명에 바쳐진 결과임을 알게 해주지 않는가.
셋.
윤동주는 적국(敵國)에서조차 역사의 ‘기념비(monument)’로 남은 거의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도시샤대학 교정에는 정지용과 윤동주 두 사람의 시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시 정신의 두 정점을 만나게 해준다. 이렇게 늙지 않는 젊음으로 남아 누리는 윤동주만의 예외적 특권은, 비극적 생애를 불멸의 기억으로 바꾸어내는 예술사의 속성을 충족하면서, 자신과 자신의 시편들을 우리 현대시사의 정전으로, 교육 자료로, 더 활력 있는 젊음으로 거듭나게 하고 있다.
최근 윤동주를 기억하고 각인하려는 지향과 실천이 여러 차원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3월 6일 다큐멘터리 ‘불멸의 청년 동주’가 KBS 1TV를 통해 방송되었고, 6월 3일에는 백상예술대상에서 ‘동주’가 영화 부문 대상을 수상하였다. 한 해 내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판과 재판은 원본 그대로 인쇄되어 낙양의 지가를 끌어올렸다.
모두 망각을 넘어서는 불멸의 기억에 기여하는 실천적 움직임일 것이다. 그리고 내년 탄생 100년을 앞두고 윤동주를 역사적으로 기억하고 현재형으로 각인하려는 ‘윤동주 현상’이 일시적일 수 없는 이유들이다.
유성호/ 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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