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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들이 제일 애호하는 작품은 대부분 인상파가 그린 것이다. 그중 가장 사랑받는 이가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다.
마네는 대상의 입체감을 데생으로만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선 동양화 냄새가 난다. 여기에 절묘한 색채를 조합하여 그림이 담백함과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싱싱함을 담고 있다. 라페엘로가 신화적 그림을 기획했다면 마네는 초월적 무관심에서 붓을 들었다.
마네의 화폭에서 익숙한 관습을 찾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자유의 침묵이 그림 전체를 지배한다. 위반(違反)과 전복(顚覆)의 그림만이 그의 화폭에 가득 담겨 있다.
그림의 주제도 당대 사건과 상황에서 선택된다. 색채, 색조, 질감으로 사건을 재배치 한다. 하지만 마치 하나의 꽃송이를 그리듯 주제의 의미와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의 두 작품 〈올랭피아(Olympia)〉와 〈풀밭 위의 점심(Le Déjeuner sur l’herbe)〉은 동서고금의 명화 역사상 가장 격렬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기존 미술계의 이단아가 된 마네 주변에 모네, 시슬레, 피사로, 르누아르 등 젊은 화가들이 모여들면서 인상파 운동이 시작되었다.
주요 작품에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피리 부는 소년〉, 〈뱃놀이〉, 〈세탁부〉, 〈요람〉, 〈발코니〉,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등이 있다.
마네의 모든 명화에는 스캔들 제조기였던 복잡한 그의 사생활이 연관되어 있다.
마네의 첫사랑은 네덜란드 출신으로 마네보다 세 살 연상인 수잔 렌호프(Suzanne Leenhoff)였다. 예쁘고 상냥한 얼굴이지만 무언가를 혼자 깊이 간직한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그 이야기를 누가 알까 봐 조심하는 몸짓과 입술을 하고 있었다.
수잔은 마네의 아버지와 절친이었다. 심지어 두 사람이 연인관계라는 루머도 있었다. 마네의 아버지 오귀스트 마네(Auguste Manet)는 법무부 인사과장이었는데 타인에게 엄격하고 자신에겐 관대했다. 마네가 화가가 되기 원했으나 반대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보냈다. 마네가 낙방하고 화물선의 수습 조타수 일을 하다가 다시 해사에 시험을 쳤으나 또 떨어지자 아들이 화가가 되는 것을 허락했다.
마네는 1849년 가을, 토마 쿠튀르(Thomas Couture) 화실에 등록한다. 이때 수잔은 네덜란드를 떠나 낯선 파리에서 피아노교습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잔이 정착하기까지 마네의 아버지가 큰 힘이 되었다. 슈만의 음악을 좋아하는 수잔은 고마운 마음에 마네의 아버지가 교습소에 들릴 때마다 슈만의 곡을 연주해 주었다.
마침 마네가 등록한 화실이 수잔 교습실에서 가까웠다. 아버지는 마네를 이 학원에 보내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마네도 수잔을 친누나처럼 따랐다. 마네가 교습소에 다닌 지 2년째 되던 해 어느 날 수잔이 임신하고 아들 레옹 코엘라 렌호프(Leon Koella Leenhoff)를 낳았다.
모두 마네의 아이라 추측만 했다. 수잔은 아이의 대부로 마네를 정하고 이를 자신의 남동생으로 입적한 다음 네덜란드로 가서 혼자 기른다.
1856년 마네가 화실을 오픈한다. 처음으로 〈버찌를 들고 있는 소년〉을 그린다. 스물일곱 살에 그린 이 그림의 모델인 알렉산드로 소년은 화실의 심부름꾼이었다. 이 소년이 마네의 작업장 기둥에 굵은 못을 박고 목매어 자살했다. 비극적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마네는 화살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잠시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로 여행을 떠난다.
그 후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의 제안을 받은 작품 〈튈르리 공원의 음악회(Music in the Tuileries)〉를 내놓았다. 이 그림은 마네가 최초로 도시 생활을 그린 작품으로 프랑스 제2제정 때 들떠 있는 파리 상류사회 인사들을 묘사하고 있다.
1862년 9월 25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 마네에게는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째, 시대의 위선을 고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863년 발표된 〈풀밭 위의 점심〉은 파리사회를 뒤집어 놓았다. 과거의 화가들도 누드화를 그렸다. 그러나 마네처럼 이 세상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여인들의 누드가 아닌 신화 속의 여인들을 주로 그렸다.
풀밭 위에서 피크닉을 즐기며 점심을 먹는 그림도 흔했다. 하지만 숲이 우거진 풀밭 위에 발가벗고 앉은 한 여인이 정장을 입은 두 남자 사이에 다리를 세운 그림은 없었다.
그림에서 뒷부분에는 목욕하는 여인이 있다. 꼭 소변을 본 후 뒤처리하는 모양새다. 그 여인 옆의 배는 자그맣게 그려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무시했다.
또한 고전적인 명암 대비법인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포기하고 중간 색조를 과감히 생략했다. 녹색과 갈색 톤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그늘에 비치는 부분도 생략하고 세부묘사는 실루엣으로 단순하게 처리했다.
이런 전대미문의 작품을 1863년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미술전에 출품했으니 낙선되는 것은 당연했다. 이 관선 살롱전에서 낙선한 세잔, 모네, 시슬레, 피사로 등은 혁신적 작품들을 따로 모아 함께 낙선전(Salon des Refusés)을 열었다.
시민들이 몰려들었고 그중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보자 비난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이 낙선전을 지시한 나폴레옹 3세도 와 보더니 “작품의 질이 많이 떨어지고 너무 외설적”이라며 비난했다. 그날부터 마네는 ‘풍속 저해 화가’란 악명과 동시에 국민적 유명인사가 된다.
발가벗고도 천연덕스러운 그림 속 모델을 비난하면서도 시민들은 관음증을 지닌 것처럼 마네의 그림 앞에만 몰려들었다.
이 그림을 욕망과 편견을 벗어놓고 보면 정장과 알몸, 물과 숲의 4각 구도 속에 양복을 입고도 풀숲에 주저앉을 수 있고, 누드로 앉아 있어도 무례가 되지 않는 4인의 평안한 관계가 보인다. 마네는 낙선전이 끝난 뒤에도 한동안 악평에 시달렸다. 반면 젊은 작가들이 주변에 몰려드는 효과도 있었다.
두 번째 변화는 네덜란드에서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는 수잔을 찾아가 1863년 10월 28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결혼식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는데 이는 수잔이 아버지와 내연관계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심지어 레옹이 아버지의 혼외자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마네는 여기에 전혀 개의치 않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1년 후 수잔과 전격적으로 부부가 된 후 수잔과 레옹을 데리고 파리로 돌아왔다. 보들레르 등 친구들도 매우 놀랐다. 가정을 꾸린 후 마네는 친구와 함께 파리 경마장을 들락거리더니 〈롱샹의 경마〉를 그린다.
파격적 그림을 전시해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혼식을 치른 후 마네는 더 혁명적인 작품을 준비했다. 이 그림의 모델이 빅트린 뫼랑(Victorine Meurent, 1844~1927)이다.
뫼랑은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른 채 이모라 부르는 사람에게서 자랐고, 십 대 때 오페라단 발레무용수로 생활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마네를 만나 모델 일을 시작한다.
당시 마네는 신화에 나오는 여신급 누드화가 아니라 사람들의 위선을 건드는 창녀 이미지로 그릴 누드화를 구상 중이었다. 그런 모델을 찾다가 뫼랑의 눈을 보는 순간 이 여자라는 직감을 받았다. 그녀의 눈빛이 창녀로 그려 놓아도 당당히 ‘당신들은 비난하면서도 날 원하고 있죠. 은행가부터 황제까지 누구도 예외는 아니죠’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그녀를 화실로 데려와 작업했는데 과연 마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마네가 뫼랑의 매력에 얼마나 빠져 있던지 길거리에서 모델로 제격인 여인을 보고 캐스팅하려다 거절당하면 “싫으면 그만둬. 내게 뫼랑이 있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뫼랑은 〈풀밭 위의 점심〉을 비롯하여 모두 11점 작품의 모델로 등장한다. 그리고 문제작 〈올랭피아〉에 등장한다.
올랭피아는 당시 창녀들이 흔히 쓰던 이름이었다. 그림 속 여인은 완전히 벌거벗은 데다가 목걸이로 창녀나 무희의 장식물인 벨벳 끈을 둘렀다. 팔찌와 슬리퍼 역시 나른하게 늘어진 여인을 떠오르게 한다.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흑인 하녀는 지금 문밖에 손님이 기다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당시 난교하는 대표적 음란 짐승으로 알려진 새까만 고양이도 올랭피아의 발아래 앉아 있다.
이 그림이 전시회에 걸리자 파리의 신문은 예외 없이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림 속의 여인은 비너스는커녕 님프도 아니다. 완전히 창부와 같은 여인인데 그런 그녀가 감히 관객을 정면으로 쏘아보고 있다. 그들의 손가락질은 조금도 안중에 없다는 듯 당돌한 시선이다. 전람회장에 찾아온 관객들은 그림 속의 올랭피아에 야유와 욕설을 퍼부었고 그중 한 노인 관객이 지팡이를 휘두르는 바람에 그림이 찢길 뻔했다.
마네는 ‘진정한 누드’란 ‘땅의 에로티시즘이 하늘로 승화될 때만 탄생’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관중들의 기대와 정반대이다. 비슷한 시기에 시대와 부합한 누드화로 성공한 그림이 알렉상드르 카바넬(Alexandre Cabanel)의 〈비너스의 탄생〉이다. 바다 물거품에서 태어난 비너스가 큐피드들의 축하를 받으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이다.
나폴레옹 3세도 크게 감동하고 거액을 주어 이 그림을 구입했다. 반면 대중의 기대를 저버린 마네는 대소동을 견디다 못해 1865년 8월 스페인으로 떠났다.
오늘날 〈올랭피아〉는 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작품으로 존중받고 있다. 당대 관습에 맞서 싸웠던 마네가 역사의 승리자가 된 것이다.
스페인으로 떠났던 마네는 스페인어도 모르고 음식도 맞지 않아 고생만 하고 다시 돌아왔다. 아내 수잔이 누드화보다 아들 레옹을 모델로 인물화 그려 출품해 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그린 그림이 〈피리 부는 소년〉이다. 이 그림을 파리 살롱전에 제출했지만, 심사위원들 전부가 뚜렷한 이유 없이 낙선시켰다. 하지만 지금은 제일 대중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항상 진보적 화풍으로 대중적 논쟁을 일으키는 마네를 기존화단이 철저히 외면했다. 이때 젊은 소설가 에밀 졸라가 유일하게 신문에 평론을 기고하며 옹호해주었다.
에밀 졸라의 옹호로 겨우 한숨 돌린 마네는 1868년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을 들른다. 그곳에서 명작을 열심히 모사하고 있던 여인을 본다.
모델로 제격이라 여기며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그녀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1895)’인데 거장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1796~1875)의 제자였다. 살롱전에 출품한 화가이며 관능적 미모로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화단의 문제아인 마네가 모델 일을 제안하자 마네가 스캔들 제조기임을 잘 알고 거절했다. 그러자 마네가 모델 일보다 그림을 함께 그려보자며 설득했다. 마네의 천재성을 알고 있던 모리조도 그림을 배울 욕심으로 허락했다. 마네의 화실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우면서 차츰 모델도 하게 되면서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의 초상〉, 〈발코니〉,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 등의 작품이 나온다.
〈부채를 든 모리조〉의 그림에는 모리조가 자신을 그리고 있는 마네를 보지 않고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마네가 싫어서 돌린 눈빛이 아니라 연인 이상으로 깊이 신뢰하는 시선이다.
이때는 모리조가 마네를 결혼한 유부남이라며 거절하던 단계를 지나 계속 추파를 던지던 마네와 정서적으로 얽혀진 시기였다.
〈발코니〉의 그림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리조는 범접하기 어려우리만큼 아름답다. 그 앞에 강아지와 옆에 수국화도 모리조의 아우라에 신비감을 보태고 있다. 가운데의 남성은 마네의 친구 화가이며 오른쪽 우산을 든 여인은 마네의 아내 수잔의 친구로 바이올리니스트였다. 발코니 안쪽 한 소년이 어둠 속에 희미한 모습으로 서 있는데 마네의 아들 레옹이다.
마네의 아내 수잔은 남편이 모리조와 보통 관계가 아님을 눈치챘다. 그러나 질투하거나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대해 주었다. 마네는 수잔을 아내로 아끼고 있었다. 수잔도 마네에게 다정했으며 마네가 바람피우는 것을 알아도 웃어넘기고 상냥하게 대했다.
화실에도 자기가 가는 대신 아들이나 친구가 들르게 했다. 마네와 모리조는 수잔의 태도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마네는 모리조가 잉그리드 버그먼이 로버트 카파에게 집착하듯 ‘우리 인생의 잔을 격하게 마시자’고 나왔더라면 새 출발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리조는 한때의 풋사랑으로만 남고자 했다. 여기서 마네의 명작들이 탄생한다.
이때의 마네의 감정이 〈부채를 든 모리조〉에 그대로 나타난다. 모리조가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부채로 가린 채 앉아있다. 그녀의 꿈은 여성 화가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당당히 여성화가로 우뚝 서고 싶었다. 그런데 만일 마네와 스캔들을 일으키면 그렇지 않아도 여성화가가 천대받는 시대에 화가의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된다. 미묘한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가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에 나와 있다.
마네도 나날이 고민이 깊어갔다. 자신의 사랑을 채우자고 모리조의 꿈을 짓밟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해야 모리조를 가족처럼 곁에 둘까? 그래서 동생 ‘외젠 마네(Eugène Manet)’와 결혼하도록 했다. 마침 동생도 모리조를 좋아하고 있었다. 모리조도 마네의 마음을 알고 1874년 결혼했다. 이제 마네와 모리조는 영원한 친척이 되었다. 결혼한 그해부터 모리조는 1886년까지 총 8회 열리는 인상파전에 일곱 번 참가하여 최초의 여류 인상파 화가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마음에 간직한 뮤즈 모리조가 동생과 결혼할 때 마네의 나이 마흔세 살이었다. 모리조가 떠난 이후 마네는 여덟 살 어린 클로드 모네와 우정이 깊어졌다.
두 사람은 이미 1866년도에 처음 만났었는데 그 후 10년간 서먹한 관계로 지냈다. 모리조를 보낸 마네는 모네와 더불어 센 강 변으로 자주 나가 함께 그림을 그렸다.
〈뱃놀이〉, 〈배 위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등 마네의 작품 중 가장 밝은 그림들을 그렸다. 마네는 가난한 모네가 어렵다고 호소할 때마다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이때 이미 마네는 자기 화실에서 개인전을 열어도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대소동을 이룰 정도로 인기화가였다.
1879년 암스테르담에 대형 건물을 구입해 마지막 화실을 열었다. 이때쯤 마네는 매독으로 생긴 괴저병으로 다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이를 치료하기 위해 광천수가 나오는 벨뷰에 자주 다녔다. 2년 후 베르사유 별장을 임대하여 요양하면서 여배우 잔 드 나바르를 모델로 〈잔(Jeanne)〉과 〈봄(Spring)〉을 그렸다. 병이 악화하는 가운데에서도 마지막 대작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도 내놓았다.
이 술집은 파리의 상류층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그림의 배경이 거울에 반사되어 있다. 거울 속에 술잔을 든 사람들, 왁자지껄 떠드는 수많은 사람이 생생하다.
그 사람들 앞의 정중앙에 여종업원이 서 있다. 흥겨운 풍경을 응시하면서도 현실과 동떨어진 화면을 보는 느낌으로 서 있다. 마네는 이 그림을 그린 후 왼쪽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얼마 후 1883년 쉰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등져야 했다.
다음 해 1월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서 그의 추모전이 열렸다. 그리고 그의 그림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 중 〈풀밭 위의 점심〉과 〈올랭피아〉는 미술사에 모더니즘의 효시로 공인받았다. 흥미로운 것은 아내 수잔을 그린 11점보다 빅토린 뫼랑을 모델로 그린 10점이 모두 걸작이 되었다. 그림은 아내보다 애인을 더 좋아하는 모양이다.
마네의 시신 앞에서 가족 이상으로 슬퍼한 사람이 바로 모네였다. 그는 장례식이 끝난 뒤 교육부 장관에게 편지를 보냈다. “위대한 마네의 작품은 프랑스의 영광이자이자 기쁨입니다. 해외 특히 미국인들에게 팔려 나가지 않도록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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