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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제목은 바로 시의 얼굴...
2017년 02월 07일 18시 32분  조회:2930  추천:0  작성자: 죽림

5-3. 제목(題目)에 대하여


시 쓰기에서 시의 제목(title)을 붙이는 일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잘 아는 바와 같이 시의 제목은 바로 시의 얼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맨 먼저 얼굴에서 첫 인상을 보는 것과 같이 한 편의 시를 볼 때 첫 눈에 띄는 것이 시의 제목입니다. 이 제목만 보고도 그 시의 내용을 미리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비추어 본다면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의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황무지』로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Eliot)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유럽의 문화적, 정신적으로 황폐한 모습을 재생한 것을 암시한 것이 바로 작품 <황무지>이며 단테의 『신곡(神曲)』은 인간의 영혼이 죄악의 세계로부터 회오(悔悟)와 정화(淨化)에 이르고 다시 천국으로 다다르는 경로를 다양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의 현대시들의 제목을 보면 사물이나 관념에서 옮겨와 단순하게 한 단어로 된 명사형이 있는가 하면,
<돌이 되어 누워 있음>(김송배)
<갈고리 마을의 달>(차한수)
<또 다른 고향>(윤동주)
<석류꽃 그늘에 와서>(유치환)
<지붕 위의 바람개비>(방지원)
등과 같이 단순 명사형이 아닌 한 문장의 제목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어찌보면 단순 명사형에서 시인들이 사유(思惟)할 수 있는 의식의 한계가 이미지로 전환되는데는 너무 광범위하거나 아니면 이미 기존의 시인들이 동일한 제목으로 시를 창작했다는 유추도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시를 쓰는 과정에서 제목을 정하는 방식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ㅇ 제목을 미리 정해 놓고 작품을 쓴다.
ㅇ 작품을 써가는 도중이나 완성한 다음에 제목을 붙인다.
ㅇ 제목이 없이 그냥 일련번호를 매겨서 구분한다.(적당한 제목이 떠오르지 않으면 <무제(無題)> 또는 <실제(失題)>라고 붙이는 경우가 옛날에는 가끔 있었습니다.)
ㅇ 작품 내용 중에서 한 행을 뽑아다가 제목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어떤 제목이 좋은 제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시의 형태나 내용에 따라서 결정될 문제이지만 일반적인 관점에서 살펴 본다면 다음과 같은 사항에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

① 제목은 함축성(含蓄性)이 있어야 한다
    시 전체를 대신하여 이를 암시할 수 있는 것, 어떤 상징성이나 이미지를 띄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② 제목은 신선미(新鮮味)가 있어야 한다.
    낡고 진부한 것을 버리고 독창성이 있어야 합니다.
③ 제목은 간명해야 한다.
    제목 자체가 지저분하다든지 너무 엉뚱하면 시를 읽기 전에 벌써 혐오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④ 제목은 겸손해야 한다.
    시를 배우거나 처음 시 쓰기에 임하는 사람은 특히 유념해야 합니다. 이해가 빠르고 가벼운 제목으로 시작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⑤ 제목은 멋과 재치가 넘치면 더욱 좋다.
    이렇게 시의 제목은 잘 붙이면 경우에 따라서 평범하게 머물고 말 작품이 매우 의미있는 것으로 끌어 올릴 수도 있고 내용이 엉뚱하거나 단조로운 것이라도 그 질서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도록 만들어 주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의 제목은 대체로 어떻게 붙이면 될까요

- 소재를 제목으로 한다.
- 주제를 제목으로 한다
- 소재도 주제도 아닌 다른 그 무엇을 제목으로 한다.
- 제목을 아예 붙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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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의 통로 
―채호기(1957∼)

 

 

산에 있다.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
녹색의 잎들 사이로 신경이 엿보이는.
그 신경을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람이 불고, 잎이 손바닥을 뒤집고
나무의 머리칼인 푸른 살덩이가 송두리째
휘어지고 뒤집히며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
비가 내린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눈앞에 비의 블라인드가 쳐지고 눈은 갇힌다.
비는 물방울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
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다.
물줄기가 된다. 신경의 통로
물속에, 격렬한 역류 속에,
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
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된다.
비가 온몸에 부닥친다. 심장충격기가 피를
가격하듯 대지의, 하늘의 신경이 맨살을
파고든다. 땀도 아니고 비도 아닌
언어가 몸에서 흘러나온다. 끈적끈적하고
무색의 번쩍이는 언어에 신경이 파고든다.
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뱀장어처럼
번개가 언어에 접속되고 신경 덩어리가
되는 언어들. 흙, 돌, 풀잎, 수피, 잎,
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어들이
송두리째 산이 된다. 몸은 
산에 있다.



화자는 산에 있다. 바위 능선이 아니라 ‘검은 나무둥치와 검은 가지’가 울창한 숲 속이다. 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불더니 나무들이 ‘얼굴 뒤의 가면’을 보여준다. 가면은 의도를 암시하는 얼굴, 과장된 표정의 무서운 얼굴이다. 아니나 다를까 ‘방울이었다가, 선이 되고/선이었다가 면이 되고 입체가 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 물기둥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돌의, 풀잎의, 수피의, 잎의, 덩굴줄기의 신경이/하늘의 검은 공기 덩어리의 신경에 연결’되는 ‘신경의 통로’란다. 호된 충격을 느낄 정도로 거세게 몸을 때리는 비! ‘하늘의 신경이’ 화자의 맨살을 파고든단다. 찌릿찌릿 전기를 방출하며 천둥이 울고 번개가 날아다니나 보다. 코를 찌르는 비리고 매캐한 냄새 속에서 ‘무의식의 검은 심연을 파고드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면서도 화자의 몸에서는 ‘언어가 흘러나온다’. ‘흙, 돌, 풀잎, 수피, 잎/덩굴, 공기, 빗줄기 등의 단어들이/ 송두리째 산이’ 된단다. 독자의 몸도 그 산에 있는 듯하다. 산속의 폭우를 강렬한 언어로 생생히 그렸다. 깊은 산에서 폭우를 만나면 무섭기도 하지만 장쾌하기도 할 테다. 산행에는 비옷을 챙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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