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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사인하다'가 올바른 표기입니다.
1. '서명'을 뜻하는 영어 단어 'sign'은 '사인'으로 표기하는데, <외래어 표기법> 원칙 가운데 중요한 것이 '된소리(경음)를 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지음이 된소리인 'ㄲ, ㄸ, ㅃ, ㅆ, ㅉ'으로 발음되더라도 각각 거센소리(격음) 또는 예사소리인 'ㅋ, ㅌ, ㅍ, ㅅ, ㅊ'으로 대입해 표기합니다.
즉, 'sign'의 첫소리는 된소리인 'ㅆ'로 적지 않고, 예사소리인 'ㅅ'으로 적습니다.
다른 예) 까페→카페, 씨스템→시스템, 싸이클→사이클
빠리→파리, 르뽀→르포, 삿뽀로→삿포로, 광뚱→광둥
2. 다만 예외적으로 중국어 표기에서는 'ㅆ, ㅉ'을, 일본어 표기에서는 '쓰(つ)'를 씁니다. 또 '푸켓→푸껫, 호치민→호찌민' 등처럼 동남아 2개 언어(태국어.베트남어)에서도 된소리를 사용하기로 최근 규정을 바꾸었습니다.
우리나라라고 도장의 관습만 있어 온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때 관직에 있는 관리들은 문서 결재를 할 때 수결(手決)이라고 해서 ‘일심(一心)’ 두 글자를 뜻하도록 서명하는 관례가 있었다.
수결의 특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하여 자신의 수결로 정하는 것으로, ‘一心’ 두 자를 내포해야 한다. 따라서 수결은 사안(事安)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아니한다는 굳은 맹세의 표현으로 써왔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일심결의 수결제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수결은 조선 시대 관료들의 공정한 정신관을 보여 준다고 하겠으나, 그럼에도 수결 위조를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는 혼탁한 관리들이 간혹 있었다. 수결에 서명자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위조가 쉬웠던 까닭이었다.
수결은 고위 공직자만의 독특한 제도였으나 점차 민간의 양반가에서도 흉내를 내어 토지 거래등의 문서를 작성할 때 자신의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 일정한 글자 모양을 그려 서명하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양반들은 토지나 노비 등을 사고 팔 때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심복인 노비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 데, 이때 노비는 매매를 마치고 문서를 작성하면서 왼쪽 가운데 손가락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의 길이를 잰 뒤 그림을 그려 서명에 가름했다.
글씨를 모르기 대문에 그 대안으로 행해진 표시로서, 양반들의 수결처럼 일종의 서명이었던 이 표식을 수촌(手寸)이라 불렀으며, 남자는 왼쪽 손을 사용했기 때문에 좌촌(左寸)이라고도 표시했다.
조선시대의 수결제도 영향인지 오늘날 공공 기관 또는 민간 직장의 결재란을 보면아직도 낮은 직급의 사람들은 도장을 찍는 데 비해 고위 간부들은 사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인이란 ‘높은’ 사람들만이 행하는 결재 표시라는 잠재 의식 때문에, 하위직 사람들은 물론 고위직 사람들도 은연중 ‘아랫사람들’의 사인을 터부시하는 까닭이다
서명은 국어사전의 뜻 풀이에 따르면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것을 뜻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이름표시를 말한다. 중세 유럽의 일부 귀족과 지식인들은 도장이 아닌 사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증명하였으니, 이것이 ‘배움의 과시’였다. 즉,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특권층의 과시적 행위로서, 사인이 도장보다 ‘세련된’ 증명 표시로 여겨졌던 까닭이다. 때문에 그이전의 도장문화에서 서서히 자신의 사인으로 대체됬으며, 일반인들도 귀족,학자들의 사인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씨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인을 모방하기가 쉽지 않았던 점도 사인이 도장을 제치면서 대중화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많은 사람들이 글을 배우게 되면서 사인이 도장을 대신하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도장 대신 사인으로 확인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사인하다(sign)’라는 말은 ‘십자 혹은 어떤 기호를 긋다’라는 뜻의 라틴어 Signare에서 유래하였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작품 중 “ 피에타(Pieta)”에만 직접 sign한 것으로 유명하다. ‘ 피에타’란 죽은 예수의 몸을 떠받치고 비탄에 잠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묘사한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를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왜 미켈란젤로는 ‘피에타’에만 서명을 했을까? 여기에 두가지 이유가 전해진다.
첫째, 롬바르디아인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롬바르디아인의 작품이라고 한 데서 격분하여 서명했다는 것이다.
둘째,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있는 그리스도 얼굴과 ‘피에타’의 그리스도 얼굴이 비슷해서 자기의 작품임을 명백히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프랑스 음악가 드뷔시는 sign을 의지의 표시로 활용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드뷔시는 50세 때 암애 걸렸고, 얼마 안 있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애국심에 불탄 그는 군에 입대해서 조국을 위해 싸울 생각까지 했으나 건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종군을 포기했지만, 그 대신 적에 의해 파괴되어 가는 프랑스 고전 예술의 재건을 위해 한동안 손을 놓았던 작곡을 다시 시작했으며, 그런 의지의 표시로 자신의 작품 악보에 ‘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라 사인하기 시작했다.
오성 이항복 대가에 관한 일화 한 토막이다.
오성은 산적한 사무를 빨리 처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간단한 수결(手決)을 고안해냈으니, 그의 수결 모양은 다만 一자로 그 상하에 아무 표시가 없었다.
그런데 어느 사안의 결재가 논의되었을 때 자신의 수결을 둔 기억이 없어 결재한 바 없다 하였으나 담당관은 오성의 수결이 있는 문건을 제시하여 이것은 분명 대감의 수결임에 틀림없지 않느냐고 반박했다.
이에 오성은 一자 수결이 틀림없으나 그 자신의 것은 아니라 하고, 자신이 손수 둔 수결과 대조하라고 하였다. 비교 결과 진짜 수결에는 一자좌우 양 끝에 바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가짜 수결에는 좌우에 구멍이 없어 진가가 판명되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다른 표시를 해 둔 재치 덕분에 곤란을 넘기긴 하였으나 이 사건 후, 오성은 다른 수결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동양에서의 싸인의 유래~~~~~~~~~~~ 우리나라라고 도장의 관습만 있어 온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때 관직에 있는 관리들은 문서 결재를 할 때 수결(手決)이라고 해서 ‘일심(一心)’ 두 글자를 뜻하도록 서명하는 관례가 있었다. 수결의 특징은 一자를 길게 긋고 그 상하에 점이나 원 등의 기호를 더하여 자신의 수결로 정하는 것으로, ‘一心’ 두 자를 내포해야 한다. 따라서 수결은 사안(事安)결재에 있어서 오직 한마음으로 하늘에 맹세하고 조금의 사심도 갖지 아니한다는 굳은 맹세의 표현으로 써왔다. 중국이나 일본에는 일심결의 수결제도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수결은 조선 시대 관료들의 공정한 정신관을 보여 준다고 하겠으나, 그럼에도 수결 위조를 통해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는 혼탁한 관리들이 간혹 있었다. 수결에 서명자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위조가 쉬웠던 까닭이었다. 수결은 고위 공직자만의 독특한 제도였으나 점차 민간의 양반가에서도 흉내를 내어 토지 거래등의 문서를 작성할 때 자신의 성명이나 직함 아래에 도장 대신 일정한 글자 모양을 그려 서명하는 관습이 생겼다. 또한 양반들은 토지나 노비 등을 사고 팔 때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심복인 노비에게 시키는 경우가 많았는 데, 이때 노비는 매매를 마치고 문서를 작성하면서 왼쪽 가운데 손가락 첫째 마디와 둘째 마디의 길이를 잰 뒤 그림을 그려 서명에 가름했다. 글씨를 모르기 대문에 그 대안으로 행해진 표시로서, 양반들의 수결처럼 일종의 서명이었던 이 표식을 수촌(手寸)이라 불렀으며, 남자는 왼쪽 손을 사용했기 때문에 좌촌(左寸)이라고도 표시했다. 조선시대의 수결제도 영향인지 오늘날 공공 기관 또는 민간 직장의 결재란을 보면아직도 낮은 직급의 사람들은 도장을 찍는 데 비해 고위 간부들은 사인을 하는 경우가 많다. 사인이란 ‘높은’ 사람들만이 행하는 결재 표시라는 잠재 의식 때문에, 하위직 사람들은 물론 고위직 사람들도 은연중 ‘아랫사람들’의 사인을 터부시하는 까닭이다 ~~~~~~~~~~~~~~서양에서의 싸인의 유래~~~~~~~~~~~~~ 서명은 국어사전의 뜻 풀이에 따르면 자신의 이름을 써넣는 것을 뜻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이름표시를 말한다. 중세 유럽의 일부 귀족과 지식인들은 도장이 아닌 사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증명하였으니, 이것이 ‘배움의 과시’였다. 즉,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특권층의 과시적 행위로서, 사인이 도장보다 ‘세련된’ 증명 표시로 여겨졌던 까닭이다. 때문에 그이전의 도장문화에서 서서히 자신의 사인으로 대체됬으며, 일반인들도 귀족,학자들의 사인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아울러 대부분의 사람들이 글씨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인을 모방하기가 쉽지 않았던 점도 사인이 도장을 제치면서 대중화되는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많은 사람들이 글을 배우게 되면서 사인이 도장을 대신하게 된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쉽게 확인된다. 오늘날 서양에서는 도장 대신 사인으로 확인하는 것이 보편화되어 있는데, ‘사인하다(sign)’라는 말은 ‘십자 혹은 어떤 기호를 긋다’라는 뜻의 라틴어 Signare에서 유래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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