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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윤동주에게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가 있었다. 소울메이트-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이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명동촌 친정집에 와있던 윤하현 장로네 큰딸 신영이가 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에 또 아들애를 보았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집에서 자랐다. 이런 혈연때문이였던지 얼굴과 키도 비슷해 쌍둥이같았던 두 사람이다. 송몽규는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성정미의 윤동주와는 대조적이였다. 소년시절부터 문학소년이면서도 활동적인 성격을 갖고있어 동료간에 리더십이 돋보였다고 한다. 크리스마스나 학기말에 이르면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가면서 연극을 연출하는 등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어릴적부터 둘은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했다.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그들 둘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시절이였다. 4학년때 동주와 고종사촌이고 동갑인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생활》을 구독하였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달라자에 있는 당시 화룡현립 제1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동안 한족학교에 다니기도 했다. 소학교 학생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산길을 둘은 함께 매일이고 걸었다. 윤동주 가(家)는 1931년 늦가을 룡정으로 이사하게 되고 윤동주와 송몽규는 1932년 4월 봄 은진(恩眞)중학교에 함께 입학한다. 이때에도 송몽규는 윤동주네 집에 얹히게 된다. 문단 진출도 남보다 빨랐다. 송몽규는 1934년 12월 은진중학 3년생으로 열여덟 어린 나이에 서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꽁트부문에 응모한다. 송한범(宋韓範)이란 아명으로 응모한 작품인 꽁트 《숟가락》이 당선되여 고향 간도사람들을 놀래웠다 윤동주보다 빠른 문단진입이였고 이는 윤동주에게 큰 자극이 되였다. 자기의 문호를 《문해》-《문학의 바다》라 지으며 문학적소망을 드러냈던 송몽규는 당시 은진중학교에서 한문을 가르치시던 민족주의자 명희조선생의 영향하에 결연히 직접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는 길로 나간다. 송몽규는 은진중학을 중퇴하고 남경에 있는 중앙군관학교 락양분교의 한인반에 입학하였다. 이 한인반은 한국림시정부의 요인으로 활약하던 김구선생이 반일민족독립전쟁에 수요되는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 운영하는 학교였다. 청년문사라는 그에 대한 별칭은 그 어디에서도 빛을 발하였다. 락양군관학교에서 송몽규는 군사기능을 열심히 련마하면서도 학생들을 조직하여 한인반 잡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등사로 인쇄하여 만든 두툼한 책을 보고 김구선생은 몹시 칭찬하시면서 책이름을 《신민(新民)》이라고 지어주었다. 1년간 교육을 받다가 1936년 4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濟南)에서 제남 주재 일본 령사관 경찰부에 체포된다. 그는 이제 일제의 경찰들의 검은 리스트에 그 이름이 오른것이다. 갖은 고문에 시달리다 겨우 석방되여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때부터 그에게 《요시찰인물》이란 딱지가 붙어 늘 일제당국의 감시망속에서 살아야 했다. 이것이 그후 일본 류학시기 교도에서 윤동주와 함께 체포되는 한 원인이 된것이다. 이때의 윤동주의 행적을 보면 또 다른 친구인 문익환과 함께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입학한다. 얼마 다니지도 못한 상태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숭실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룡정으로 되돌아와 윤동주와 문익환은 룡정광명학원(光明學院)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되였다. 광명학교는 당시 흉년의 여파로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일본인에게 매각되여 친일계 학교가 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퇴한 윤동주와 문익환은 조선인의 황국화(皇國化)를 위해서 세워진 중학부에서 공부할수밖에 없는 신세에 《솥에서 뛰여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구나.》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여기서 《이런 날》(1936.6.10)이라는 윤동주의 시 한편을 보자. 사이좋은 정문의 두 돌기둥끝에서 오색기와 태양기가 춤을 추는 날 ...(중략) 이런 날에는 잃어버린 완고하던 형을 부르고싶다. 동주가 다니는 친일계 광명중학교 정문 량쪽 돌기둥에는 만주국 기발과 왜놈들의 일장기가 걸려 펄럭이고있었다. 이런 무가내한 상황에서 동주는 하소연하고 기대고싶은 존재로 송몽규를 찾고있었다. 겨우 석달이상이지만 랭철한 현실 대처의 자세로 언제나 그들의 선두주자였던 의젓한 형 송몽규를 사무치게 그리고 마음으로 부르고있는것이다. 1937년 4월,송몽규는 룡정대성중학에 입학하여 그동안 중단했던 학업을 다시 계속하였다. 그는 문학에 대한 뜻을 버리지 않고있었다. 그의 졸업일기에는 영어로 《일체는 문학을 위하여》라는 글발이 남겨져있다. 1938년 초봄, 그들은 당시 간도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연희전문에 나란히 합격한다. 윤동주는 의사나 고등고시로 출세하라는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문과를 택했고 몽규도 같이 문과로 간다. 남성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인데다 달변인 그의 주도하에 문과학생회는 문학동아리들의 잡지 《문우》를 펴냈다. 송몽규는 《꿈별》이라는 필명으로 《문우》지에 《하늘과 더불어》라는 시를 발표했다. 우리 말이 억압당하던 시기 몽규(夢奎)를 꿈별이라 굳이 우리 말로 풀어 이름을 단것이다. 서울생활 4년을 마친 뒤 1942년 봄 두 사람은 일본류학을 함께 떠났다. 남의 나라, 적국이였지만 대학과정으로 진학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였다. 이것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의 무가내한 선택이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송몽규는 교도제국대학 사학과 서양사학 전공에 입학하고 윤동주는 이케부쿠로에 있는 릿교대학에 들어간다. 1940년대에 조선인이 일본의 제국대학에 입학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그후 윤동주는 학교를 바꾸어 1942년 도시샤대학에 입학, 다시 송몽규와 재회한다. 늘 머리를 맞대고있으면서 그들은 일경이 그를 감시하는줄 모르고 《우리 민족의 장래》며 《민족독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강렬한 민족의식의 지배하에서 민족독립의 래일을 기원하였고 일제당국의 조선민족과 문화에 대한 말살정책을 비난하였다. 송몽규는 자신은 앞으로 연극분야에 투신해 연극을 통한 민족문화운동을 해보겠다는 포부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일본경찰의 마수에 떨어진다. 송몽규는 1943년 7월 10일, 윤동주는 7월 14일 각각 교도에서 특고 형사에게 체포되여 교도 시모가모경찰서 류치장에 감금된다.일제 경찰의 감시하에 있던 송몽규가 그 사정권에 들었던것이다. 죄명은 《재경도(在京都) 조선인학생 민족주의그룹사건》이라는것이였다. 1944년 봄, 두 사람에 대한 결심공판이 있었다. 재판시에는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사건(조선독립운동)》으로 그 죄목이 정해졌다. 징역은 각각 2년이였다. 형은 같았으나 형 종료시기는 윤동주는 1945년 11월 30일, 송몽규는 1946년 4월 12일이였다. 송몽규의 형이 더 무거웠다.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도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다. 물론 윤동주 연구자들에 의해 내용은 이미 알려진 상태지만 일본의 검찰청 기록과에서 공식적으로 공개한것은 처음이다. 7매로 된 재판판결문에는 송몽규의 주된 활동이 비교적 정리가 잘 되여있었다. 판결문 내용을 보면 송몽규는 일본의 민족말살정책 특히 언어문화를 말살하는 사회상황구조를 파악하여 지적하고있고 기존의 독립운동의 한계를 자성하며 학구적 리론적 필요성을 역설하고있다. 또한 일본이 머지 않아 대동아전쟁에서 패전을 할것이므로 그 시기에 맞춰 한꺼번에 대세를 몰아 조선의 독립으로 이끌어야 한다는 전략적방법론도 전개하고있다. 형이 확정된 그들은 후꾸오까형무소로 이송되였다. 머리를 깎고 또 사상범인 연고로 다른 죄수들과는 달리 붉은색 죄수복을 입었다. 이때 일제는 패망으로 줄달음치고있었다. 마구 잡아들인 조선인 복역자들은 일제에 큰 짐이 되고있었다. 그들은 이들의 처치방법을 생각하고있었다. 바로 생체실험이였다. 의문의 주사를 맞고 윤동주는 1945년 2월 16일 절명했고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송몽규는 그 며칠 뒤인 3월 7일 윤동주를 따라갔다. 민족에 대한 충정과 민족문화에 대한 수호의 의지를 한가슴 지녔던 애젊은 나이의 문사는 비참하게 적국의 땅에서 한줌의 재로 스러졌다. 윤동주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죽었고 송몽규는 눈을 감지 못했다. 시신을 거두러 간 아버지 송창희가 통곡하며 눈을 감겼다. 일제의 패망과 광복을 불과 5-6개월 앞둔 때, 《밤보다 깊은 꿈》을 펼치지도 못한 두사람의 원통한 옥사였다. 이들의 의문사에는 후꾸오까형무소와 구주제대 의학부의 생체실험의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있다.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로 변한 윤동주의 시신은 고향 룡정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1945년 3월 6일 장례를 치르고 룡정 동산의 교회 묘지에 묻었다. 《시인》 윤동주 지묘라 비석을 새겼다. 한학에 밝은 윤동주 아버지의 친구 김석관이 비문을 썼다. 송몽규의 시신도 후꾸오까 화장장에서 재가 되였다. 명동의 장재촌 뒤산에 묻으며 가족들은 《청년문사(靑年文士) 송몽규 지묘》라 비석을 세웠다. 비문은 역시 윤동주의 비문을 작성했던 김석관이 썼다. 1990년 4월 그들을 기리는 이들에 의해 송몽규의 묘는 룡정 동산으로 이전했다. 불과 몇메터 가까이 손잡힐듯한 곳에 친구 윤동주가 묻혀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삶과 죽음을 온전히 함께 한 벗이였다. 지성인들에 의해 근년에 송몽규의 《밤》이라는 시 한편이 또 발굴되였다. 《조선일보》 1938년 9월 20일자에 실린 작품으로서 연희전문 1학년때 쓴것으로 보인다. 송몽규의 작품은 동아일보 공모에 입선된 꽁트 《숟가락》과 연희전문시절 《문우지》에 발표한 시 《하늘과 더불어》 등 두편이 고작이였다. 고요히 침전(沈澱)된 어둠/ 만지울듯 무거웁고/밤은 바다보다 깊구나/ 홀로 헤아리는 이 맘은/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 쉬파람 분다 맑고 고운 결, 고운 마음으로 캄캄했을 세상에 대한 고심이 깊다. 젊은이의 사색이 잘 옹글었다. 벗인 윤동주의 시를 닮은듯하다. 그들은 같은 해에 한집에서 태여났고 같은 해 한 형무소에서 함께 죽는다. 참으로 기이한 운명이였다. 윤동주가 감성적이고 내성적이며 자연과 평화를 사랑하는 글발을 통해 저항의 표현을 했다고 한다면 송몽규는 일찍 그의 문학적재질을 인정받으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선견지명을 갖고 문학보다는 반일운동에 적극 뛰여들었고 그 와중에 젊은 몸을 바쳤다. 오늘날 윤동주가 겨레 시인으로 높이 추앙됨은 천행이라 하겠다.그런데 유감스러운것은 송몽규는 그에 비해 아는이가 적다. 뒤미처 한반도 나아가 그를 숨지게 한 적국에서까지 사랑받고있는 친구의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송몽규이다. 그러나 차라리 숙명의 동반자였던 윤동주가 옆에 있어 그는 외로웁지 않을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존재가 다시금 각인되는것은 그 역시 친구가 읊조리고 지켜왔던 생의 수칙처럼 《한점 부끄럼 없이 주어진 길》을 걸어간 위인이기때문이다.
/김혁 |
하늘과 더부러
꿈별(송몽규의 필명)
하늘 ー
얽히여 나와 함께 슬픈 쪼각하늘
그래도 네게서 온 하늘을 알수있어 알수있어…
푸름이 깃들고
태양이 지나고
구름이 흐르고
달이 엿보고
별이 미소하여
너하고만은 너하고만은
아득히 사라진 얘기를 되풀고 싶다.
오오ー 하늘아 ー
모ー든것이 흘러흘러 갔단다.
꿈보다도 허전히 흘러갔단다.
괴로운 사념들만 뿌려주고
미련도 없이 고요히 고요히……
이 가슴엔 의욕의 잔재만
쓰디쓴 추억의 반추만 남어
그 언덕을
나는 되씹으며 운단다.
그러나
연인이 없어 고독스럽지않아도
고향을 잃어 향수스럽지 않아도
인제는 오직ー
하늘속에 내맘을 잠그고 싶고
내 맘속에 하늘을 간직하고싶어.
미풍이 웃는 아침을 기원하련다.
그 아침에
너와 더불어 노래부르기를 가만히기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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