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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요 "반달"의 작곡가와 그리고 룡정
2017년 04월 02일 23시 10분  조회:3427  추천:0  작성자: 죽림
동요 “반달”과 작곡가 윤극영 그리고 룡정
(ZOGLO) 2017년4월1일 

우리 민족의 한을 담은 동요《반달》은 항일가요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널리 불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 동요의 작곡가 윤극영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한국의 《음악대사전》,《중국조선족아동문학》등 문헌들을 참조하면서 우리 민족 음악교육과 아동문학의 발전에 크나큰 기여를 한 저명한 작곡가 윤극영에 대한 일화를 수집해 보았다.

이야기에 앞서 그가 작사, 작곡한 노래 “반달”의 가사를 적어본다.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그루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추이는건

새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윤극영작곡가는 1903년 9월 6일 경성(서울)종로구 소격동에서 아버지 윤정구(尹政求)와 어머니 청송 심씨(青松沈氏)사이에 1남 3녀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1917년 서울교동보통학교를 졸업한 2년 후인 1919년의 《3.1》반일운동이 서울에서 일어나자 반일시위에 참가하였다. 1920년 윤극영은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갑자기 중퇴하고 음악공부를 하기 위하여 동료들과 함께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련락선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건너간 윤극영은 일본 도꾜음악학교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한편 1923년부터는 방정환, 정순철 등 동료들과 함께 도꾜에서 어린이 문화재단 《색동회》를 조직하고 동요를 작곡하면서 어린이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말 가사로 된 노래는 찬송가뿐이였고 나머지는 정부노래였다.

"색동회"회원들과 윤극영(뒤줄 오른쪽 두번째)

윤극영은 조선 최초의 노래단체인 《다리아회》를 조직하고 지도해갔다. 1924년 윤극영은 나라를 잃고 방황하는 민족적 비운을 그린 동요 《반달》을 창작하였다. 1924년에 동요《반달》은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애환을 달래주었으며 조선반도는 물론 중국에 있는 조선인들에게도 재빨리 보급되여 나이 구별이 없이 아동이거나 성인이거나를 물론하고 모든이들이 널리 애창하는 동요로, 류행가로 되였다. 

세계명곡 200수에까지 기록된 동요 《반달》이 창작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윤극영의 어린 시절에 극영이보다 나이가 10년 이상 되는 누님 한분이 경기도 가평군으로 시집갔다. 째진 생활난으로 하여 누님은 10년이 퍽 넘도록 한번도 집에 오지 못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병으로 세상떴다. 그때 누님의 나이는 30세밖에 안되였다.

윤극영은 그토록 보고싶던 누님의 죽음으로 하여 밤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너무도 울어 퉁퉁 부은 두눈으로 멍하니 밤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윤극영은 은하수같은 엷은 구름너머에 반달이 걸려있고 그 멀리로 새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때 윤극영의 머리에는 《반달》 악상이 떠올랐다. 윤극영은 즉시 가사를 써내고 곡까지 지어냈다. 그는 21세 어린나이에 천재적 음악재질로 최초의 가요를 세계명곡으로 탄생시킨것이다.

연변대학의 우상렬교수는 《이(반달) 동요는 전통적인 7.5조 가사에 달에 깃든 전설을 곁들여 천진란만한 상상속에서 일종 희망찬 미래를 약속하기도 하였다.》고 평하고있다.

한국의 《아동문학사전》에는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우리 민족의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그린 이 동요는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였다.》고 적혀있다.

1924년에 처음으로 동요 《반달》을 조선 최초의 아동가요로 탄생시킨 후 윤극영은 《설날》,《고기잡이》,《고드름》,《따오기》등을 작곡하였다. 그는 1926년 조선 최초의 동요곡집 《반달》을 출간함과 동시에 같은 제목의 음반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1926년 1월, 윤극영은 일본의 간섭과 집탈이 심해지자 간도(지금의 연변) 룡정에 건너와 동흥중학, 광명중학, 고등녀자학교 등에서 음악교원으로 있으면서 약 10년간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윤극영은 다시 서울로 돌아가 음악활동을 하다가 193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음악공부를 하면서 극장가수로 취직하기도 하였다.

그때 일본에 있던 윤극영은 룡정에 있는 안해 오인경을 그리면서 《두만강의 노래》를 지었다. 노래가 나오자 절찬을 받았다. 일본에서 지명도가 가장 높은 《요미우리》신문에서 《한국예술인의 도꾜진출》이라는 제목으로 윤극영과 우리 민족 무용계 거목인 최승희(崔承喜)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하였다.

1940년에 다시 중국에 온 윤극영은 북간도(지금의 흑룡강성) 할빈에 할빈예술단을 설립하고 만주(지금의 동북3성) 지역과 서울 등지에서 공연활동을 벌리려고 하였으나 일제놈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결국 해산되고말았다. 더는 예술단을 경영할수 없게 된 윤극영은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아동가요를 창작하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광복을 맞이했다.

《하늘에는 예측하기 어려운 풍운이 있고 사람의 인생은 조석으로 뒤바뀐다.》고 일본이 관여하는 협화조직에 가입한것이 죄가 되여 1946년 겨울에 그는 경비대에 체포, 룡정에서 비판 투쟁을 받고 사형판결까지 받게 된다.

이 대목 이야기는 연변주당위에서 촬영사로 활약하셨던 황범송선생이 2005년 여름 한국에 갔을 때 저명한 작사자이며 작곡가인 가수 반야월(원명 박창오, “번지 없는 주막”, “울고 넘는 박달재”, “유정천리” 등 5000여수의 곡을 창작) 선생에게서 들은후 옮겨놓게 된 것이다. 황선생은 반야월선생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고 그의 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첫 이야기로 윤극영에 대해 문의하였다.

반야월선생은 《윤선생이 간도에 오래동안 계셨으니 모두 알고있나봐요. 세상뜬지 10년이 많이 넘었습니다.》라고 하면서 광복후 룡정에서 있은 사형집행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친일파로 당장 사형에 처하게 된 윤극영은 마지막 유언을 이렇게 남겼다.“나는 생활난으로 일제를 위한 노래도 많이 지었고 상도 많이 타다보니 죽을 죄를 졌습니다. 그러니 무슨 할말이 있겠소만은 지금 와 보면 공산당을 위해서도 공로를 세웠습니다. 한가지 남기고 싶은 말이라면 내가 죽은 후에도 내가 작곡한 동요들을 계속 불러준다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한 사형집행자가 “당신은 공산당을 위해 무슨 좋은 일을 했는가?”라고 묻자  윤극영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 이 노래도 내가 지은것입니다.”

당시 룡정현 현장으로 지내던 문정일선생은 사형장에서 사형수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검토하던중 윤극영이 노래《반달》과 “동북인민의 해방의 봄이 왔네”의 작곡가임을 확인하고 사형결정을 당장에서 취소하였다.

《죽이지 마시오. 그의 음악재질이 아깝지 않습니까? 이러한 인재들은 사상을 개조해서 유용하게 써야 합니다.》

문정일현장의 그 한마디에 윤극영은 사형선고를 피면할 수 있게 되였다. 윤극영은 3년 도형을 받고 연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얼마후 보석으로 풀려나왔다. 그 후 윤극영작곡가는 한국에 살면서 자기의 생명의 은인 문정일선생을 늘 외웠다고 한다.

1950년대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 《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음반(音盘)을 내기도 하였고 1979년에 《반달》은 《하얀쪽배》(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한문)통용 음악교과서에까지 수록되였다.

아동가요 선구자중의 한 사람인 불멸의 작곡가 윤극영은 1988년 11월 15일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뜨셨다. 윤극영선생은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는 우리 민족 어린이들과 어른들 할 것 없이 영원히 즐겨 부르는 명곡으로 울려퍼질것이다.

/ 김원범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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