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作 및 詩는 救援이다
등산이나 낚시나 바둑이 구원이듯이 시작도 구원이다. 구원이란 말을 너무 무겁게, 또는 비장하게 생각하는 것은 로맨티스트의 나쁜 버릇이다.
시작이 구원이 된다고해서 하루 왼종일 시작에만 몰두하고 있을 수가 없다.그러나 그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생활을 멸시하고, 소시민이니 속물이니, 하고 백안시 하는 것은 또한 로맨티스트의 나쁜 버릇이다. 아니, 악덕이다. 이런 경우 시작은 오히려 구속이 되어 그의 인생을 망치게도 되지만, 위대한 시를 남긴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일들이 있었다. 물론 아ㅣㄴ생도 망치고 시도 남기지 못한, 그야말로 로맨티스트의 수는 더할 나위 없이 많은 것이지만- 시와 생활을 구별 못하는 사람을 나는 로맨티스트라 부른다. 시작이 생활의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괴테는 질풍노도기를 겪으면서 깨달았다. 그러나 딜란 토마스라든가 김수영은 훌륭한 시를 남긴 로맨티스트다. 이 두시인에게 시작은 숙명이었다. 그들의 죽음까지가 시작의 연장선상에 있다.
누구는 은행의 행원이면서 일급의 시를 쓰고, 만년에는 출판사의 중역을 지내기도 하면서 시작을 했다고 하지만, 이런 비전문가적 처신은 시를 생의 구원이게 한다.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말라르메처럼 <지성의 축제>(폴 발레리)를 유일한 생의 보람으로 삼으면서 시작을 <지성의 축제>의 으뜸으로 여기는 태도도 구원이다.
시작은 하나의 장난game이지만, 휠더린과 같은 로맨티스트에 있어서는 이 장난 위에 형용사<위험한>이란 말이 붙어 있었다. 내 경우에는 <위험한>이란 이 로맨틱한(비장한)형용사 대신에 <오묘한>이란 형용사를 붙이고자 한다.
나에게 있어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도피가 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말하면, 시작은 생활로부터의 해방이 된다는 뜻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전문가적 처신을 할 때 시작은 생의구원이 된다는 뜻이다. 운동선수는 운동경기가 오히려 지옥일는지도 모른다. 지옥이란 말이 과장된 말이라고 한다면 생의 가장 강열한 구속이라고 해도 된다. 비전문가란 생활과 시작을 구별하는 사람이니까 시작은 구속이 아니라 해방이 된다.
시에서 뭔가 구원을 노래함으로써 어떤 시적 결론을 얻게 되는 그 과정이 구원이 아니라, 시를 쓴다는 어떤 과정 그 자체가 구원이고, 보다는 나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에 시가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구원일 수도 있다. 마치 하늘이 있고 아름다운 노을이 (내 의지와는 관게없이)있다는 그 사실이 그대로 구원이 되듯이 말이다.
----의미와 무의미, 김춘수, 문학과 지성사, 22쪽에서 23쪽----
* 펌-나호열교수(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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