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림의 수필 [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1936년 그가 스물여덟 살 때
쯤 발표한 것입니다. 김기림은 함경도 성징 태생으로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습니다.
1914년, 즉 막 한일합방이 되던 무렵, 아버지는 계모를 들였고, 어린 소년이 어떻게 자라왔
느냐를 짧은 수필에 담았습니다.
'나의 소년 시절은 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喪輿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 빛에 호져 때없이 그 길을 넘어 江가로 내려 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江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번 다녀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
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난 지를 모른다는 마을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
려 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이 수필은 몇 대목에서 우리가 음미할 대목이 있습니다. 즉 도입부는 한 문장입니다. 첫 문
장에서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자기 마을의 풍경과 두 번째로는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라
는 대목으로 어머니를 일찍 여의였음을 말하고, 세 번째로는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
다'라는 대목에서 유년 시절이 방황과 배회로 점철되어 있음을 나타냅니다. 두 번째 문장의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는 얼마 전 작고하
신 황순원 선생의 [소나기]에서와 같은 사랑을 그린 겁니다. 그래서 푸른 하늘 빛에 이끌려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북 자줏빛으로 젖어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강가라는 공간과
노을이 지는 시간이 자기 속에 어떻게 각인되느냐를 이미지로 그린 게 실감나게 그려졌습니
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가마귀는 텃새입니다. 반면에 두루미는 철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새를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가마귀와 두루미로 상징되는, 어린 소년을 보살펴 주던 어머
니며 누이들이 떠나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 '모래둔(모래언덕)'과 '어두운 내 마음
'은 병치되어 있습니다. 쓸쓸한 마음을 깔깔하고 음산한 모래둔에 비긴 것입니다.
'어느 새 어둠이 기어와서'에서는 동구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년이 보이고, 뺨의 얼룩에
서는 그 소년의 볼에 흐른 눈물이 보입니다. 어둠이 눈물을 가려주는 것을 수사법으로 그린
것입니다.
제가 이 수필을 굳이 들려 드리는 까닭은, 가령 저 같으면 한번쯤이라도 슬프다거나 울었다
거나, 눈물이라거나 그립다거나 외롭다거나 하는 말들을 쓸 법한데 잘 절제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말을 쓸 때 직접적인 말을 쓰지 않고, 어떻게 간접화법으로 수필이며 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눈뜨게 하는 명편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도 간접화법을 이용하여 말맛을 자아내면
서 자신의 심상을 그리는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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