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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는 전통과 현대 서구적인것의 접목작업을 공감하기
2017년 04월 04일 21시 27분  조회:2304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3. 상상력을 부르는 체험과 관찰 


천 년 몇 천 년이 걸릴지라도 

네가 내게 입맞춤하고 

내가 네게 입맞춤한 

그 영원의 한 순간을 

말, 다할 수가 없으리. 

겨울 햇볕이 내리쪼이는 아침 

<몽수리>공원에서의 일이었네. 

< 몽수리>공원은 파리의 안, 

파리는 지구 위, 

지구는 별의 하나. 

자크 프레베르 <공원> 

시의식의 확대를 통해 범우주적인 사고를 하고 있는 시이다. '벤취 위에서 입맞춤을 하는 연인―몽수리 공원―파리―지구―우주' 로 확대되는 상상력이 독자를 자연스럽게 우주적 사고로 이끌고 있다.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 이토록 크고 넓은 우주적 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것은 바로 시인의 상상력이다. 

시는 소재가 훌륭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재를 어떤 의식에서 비라보고 관찰하며 또한 상상력으로 표출해내느냐에 달려 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김수영, <풀>, 1968.5.29) 


4. 시- 체험의 결과물이다 


시는 결국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쓰여지지만, 그 이전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면 시인의 체험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시를 머리로 쓰느냐, 아니면 가슴으로 쓰느냐, 아니면 몸으로 쓰느냐 하는 구분을 확연히 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시는 '온몸으로 쓴 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가슴(情)으로 쓴 시'에서 막연한 감동을 공감하게 된다. 이는 천박한 감상주의로 인해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명시'라고 들어 온 많은 시들에서 이러한 느낌을 받게 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고운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깃발> 


관념적 체험만 있으며, 그 관념도 '왜?'란 질문에 뭐라 답할 수 없는 막연함이 느껴진다. 

읽는 이에게 ' 깃발을 꽤나 어렵게 표현했군' 하는 생각을 가지게 할 뿐 별 감동을 주지 못한다. 교과서에도 실린 <깃발>에서 비유·상징의 묘미는 얻을 수 있을 망정 시가 지녀야할 내용성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별로 할 말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추상적 의미를 구체화시키며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구체적 사물을 추상적 의미로 바꾸어 낯설게 하고 있음에 의의를 찾아야 할까? 날아가지 못해 찢기우고 헤지는 색바랜 깃발이 더 우리의 마음을 흔들지 않는가? 지금은 그래도 많이 바뀌었지만 이 같은 시들이 중·고등학교의 국어교과서를 온통 뒤덮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 시에서 우리는 머리로 쓴 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진실된 체험이기보다는 '그럴 것이다'란 당위성에서 쓰여지는 시, 어른의 흉내를 낸 시들이 백일장을 휩쓸고 있다. 


봄의 소리 
새롭다. 


꽃잎이 
열리는 소리. 

나비의 
날개 젓는 소리. 

봄의 소리 
들으면 
가슴이 열리고 
마음은 훠얼훨 
하늘을 난다. 

초등학교 6학년 의 시<봄의 소리> 

초등학교의 어린이가 쓴 시에도 이처럼 억지 감동의 글이 있다. 어른들이 생각한 것보다도 더 심한 이 같은 꾸며진 상상은 상상이 아니라 거짓이다. 상상력과 거짓은 다르다. 상상력은 현실에 뿌리박고 있는 건강함과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하지만(딱지 따먹기), 거짓은 뿌리가 없으면서도 마치 있는 듯이,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짐작으로 위장된다(봄의 소리). 

딱지 따먹기를 할 때 

딴 아이가 

내 것을 치려고 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한다. 

딱지가 홀딱 넘어갈 때 

나는 내가 넘어가는 것 같다. 

강원 사북초등학교 4학년 강원식 <딱지 따먹기>,『나도 쓸모 있을걸』1990.창작과 비평사 


시는 마음이다. 억지로 되는 게 아니다. 시삼백이면 사무사(詩三百 思無邪)라고 했다. 진실된 마음으로 사물을 보고 거짓이 없다는 얘기다. 

우리는 이쯤에서 뛰어난 독일의 서정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충고 몇 마디를 떠올려 보아야겠다. 


①모든 사건은 언어를 넘어선 영역 속에서 일어난다. 

②자기 자신 속에 침잠(沈潛)하라 

③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캐어라 

④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써라 

⑤쓰지 않고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 속에서 써라 

⑥자연에 근접하라. 그리고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게 될 것을 모방하지 말고 표현하라 

⑦보편적 주제를 피하라 

⑧창조하는 자에게는 빈곤도 없다 

⑨어린 시절의 풍성한 추억의 보고(寶庫)를 간직하라 

⑩자기 자신 즉, 고독 속에 파고 들라 


릴케의 이와 같은 충고는 우리를 주눅들게 하기 충분하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시도 하나의 글에 지나지 않으며, 글이란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에서 시작된다. 글에 대해 어렵다는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포기하기 때문이다. 릴케의 충고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결국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하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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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毒)을 차고
―김영랑(1903∼1950)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아직 아무도 해한 일이 없는 새로 뽑은 독
벗은 그 무서운 독 그만 훑어 버리라 한다
나는 그 독이 선뜻 벗도 해할지 모른다고 위협하고

독 안 차고 살아도 머지않아 너 나 마주 가 버리면
억만 세대가 그 뒤로 잠자코 흘러가고
나중에 땅덩이 모지라져 모래알이 될 것임을
‘허무한듸!’ 독은 차서 무얼 하느냐고?

아! 내 세상에 태어났음을 원망 않고 보낸
어느 하루가 있었던가 ‘허무한듸!’ 허나

앞뒤로 덤비는 이리 승냥이 바야흐로 내 마음을 노리매
내 산 채 짐승의 밥이 되어 찢기우고 할퀴우라 내맡긴 신세임을

 

 

나는 독을 차고 선선히 가리라
막음날 내 외로운 혼 건지기 위하여



‘김영랑 시집’(범우)에 실린 시인 연보를 훑어보다가 ‘1926년 장녀 애로(愛露) 출생’에서 입 끝이 빙긋 올라갔다.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 딸 이름을 정성껏 짓는다면, 요조하고 현숙한 여인을 기원하는 마음이나 인생의 심원한 뜻을 담던 시절에 ‘애로(사랑의 이슬)’라니! 세상 눈치 보지 않는 자유로운 의식, 그리고 사랑과 아름다움과 쾌락을 추구하는 찬란한 감각이 엿보인다. 

 

 

선생의 시는 ‘서구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전통적인 시형을 현대시 속에 끌어들여 전통적인 것과 현대 서구적인 것의 접목 작업에 성공하고 있다. 특히 호남지방의 토착적인 언어를 탄력적으로 구사하여 언어예술로서 시의 참맛을 살려나간다’(평론가 김우종). 쉽고 친근한 시어로 시심을 불러일으키는 선생의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내 마음을 아실 이’ ‘오― 매 단풍 들것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에 공감하고 애송하는 독자가 많을 테다. 

‘독을 차고’는 선생이 나긋나긋한 감성의 ‘초식남’이기만 한 게 아니라 강건한 뼈와 근육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내 가슴에 독을 찬 지 오래로다’! 이런들 저런들 어떠하리, 짧은 인생 그냥저냥 살고지고, 하는 친구에게 설핏 경멸의 독기를 뿜으며 끝내 독을 차고 가련다는 이 기개! 의당한 독을 버리고서야 어찌 사람이겠는가. 이 슬픔의 독, 분노의 독을 차고 가리라! 이 시는 식민지 시대 말기의 반항의식을 나타낸다고 한다. 선생이 6·25전쟁을 무사히 넘기셨으면 이후 어떤 시를 쓰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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