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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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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조탁(彫琢)과 사랑이다...
2017년 04월 08일 00시 07분  조회:2587  추천:0  작성자: 죽림
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3. 시 쓰기와 고치기 

시 쓰기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수없이 많은 퇴고의 과정 속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어쩌면 이 과정이 몹시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정이 창작의 과정이고 자신을 확인하는 아주 귀중한 시간이다. 고쳐 쓰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시가 태어날 확률이 높아간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촉발된 시상을 부여잡고 하얗게 밤을 새우는 날, 비로소 언어의 조탁(彫琢)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된다. 


다음은 필자 자신의 시 쓰기 과정을 보인 것이다. 

지난 해 여름, 방학을 했지만 보충수업은 여전히 실시되고 있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뭐든지 붙들어야만 하는 교사와 고3 입시생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 땀을 흘렸다.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고도 흐르는 땀은 멈출 줄 몰랐다. 앞 뒷문을 열어 젖히고 언어영역 참고서 문제에 나온 김수영에 거품을 물다보니, 아이들은 어느 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버렸다. 반 이상의 잠들고 나머지 반은 비몽사몽이다. 칠판 한 쪽에는 'D-99'가 선명했다. 이른 바 수능고사 99일전이란 무언의 압력이었다. 정말 고3교실은 전쟁터였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싸움 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공격 99일전에 이미 패잔병이 되어가고 있었다. 

벽에 걸린 전자식 둥근 시계가 눈에 들어 왔다. 유리는 벌써 오래 전에 없어진 듯 자판이 누렇게 변색이 되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빨간 초침은 전지가 다 닳았는지 9자를 건너뛰지 못하고 움찔거리고만 있었다. 시침도 ㄹ자로 구부러졌고, 시침도 반쯤 꺾어져 나간 채였다. 

고3이란 정말 불가사의의 특수 그룹이다. 그들에게는 초능력이 요구되고 그들에게는 판단이나 청소년의 푸른 삶이 존재하지 않았다. 잠든 아이들과 벽에 걸린 초현실적 시계가 그대로 오버랩 되었다. 그리고 거의 단숨에 다음의 시를 썼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부러졌을 거다. 
또 누군가의 입에서 
분침은 부러졌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이리저리 구부러졌을 거다. 

지금은 폭염. 
아이들은 모두 D-99를 보고 있었다. 
훅훅거리는 교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 시를 두 번째 고쳐 썼을 때는 1연의 마지막 초침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지 못해 '이리저리'를 고3학생들이 꿈꾸는 S대학의 이니셜로 바꾸어 대학과 아이들의 반항적인 행위를 상징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연에서는 'D-99'의 상징적 숫자가 타의에 의해 빚어진 일종의 엄포요 압력수단임을 드러내기 위해 ' 눈 앞에 내걸린 D-99'로 바꾸어 썼다. 

3연에서 '남은 전지가 다할 때까지 (마지막으로 초침을)밀어 올리는 달리의 시계처럼'의 뜻이 되어 이미지의 연결이 되지 않을뿐더러 초현실주의 미술가 달리가 지나치게 강조되는 면이 있어 '남은 전지가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으로 바꾸었다. 

이렇게 해서 다음의 시가 되었다. 조금 정리된 듯하지만 아직도 선명치 못한 구석이 있었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거다. 


아이들은 모두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었다.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한밤이다. 


두 대의 선풍기로 맴도는 교실처럼 

남은 전지가 마지막으로 초침을 밀어 올리는 

3학년 7반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불만이다. 사실적이지만 구체성은 오히려 살리지 못하고 있다. 시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직 만족할 수가 없다. 분침을 익명성에, 아이들은 특수성을 강조했다. 2연에서는 교실분위기를 좀더 구체화시키고, 시계의 고통스러움과 교실의 풍경을 삽입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살지 못하는 아이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3연에서 현실을 떠난 교실의 모습으로 이미지화시켰다. 차라리 희극적이던 선풍기를 교실을 들어올리는 프로펠러로 비유하면서 초현실주의자 달리의 그림처럼 흘러내리는 시간성을 드러냈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구부러졌을 것이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을 것이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특수반 아이들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을 것이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반 

백일주로 무너진 녀석은 아직 눈알이 새빨갛다 

책들만 어지러이 쌓이고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교사의 다그침이 메아리지는 

여기는 삶의 변방.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은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아직 시상의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3연 구성이 단조로움을 주고 있다. 강조할 부분과 시적 배경이 조화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연과 2연을 바꾸어 '상황 제시- 상징적 묘사- 시상의 전환- 부정적 인식의 끝맺음'으로 4연 구성으로 정리했다. 먼저 1연에 교실 상황과 분위기를 속도감 있고 건조하게 묘사했다. 2연은 시상의 구체적 전개부다. 여기서는 상징의 방법을 썼다. 따라서 굳이 추정적 어미를 버리고 단정적인 어미로 바꾸었다. 3연에서는 지친 시계와 아이들을 초현실주의자들의 식탁으로 시적 전환을 꾀했다. 이어 4연을 1행으로 처리하면서 삶의 변방으로 끝맺음을 했다. 어느 정도 만족한 모습이다. 제목은 아무런 수식 없이 <고3 교실>로 했다. 비로소 주제가 살아난다. 군더더기도 많이 사라졌다. 


눈앞에 내걸린 

D-99를 보고 있는 고3 교실. 

펼쳐진 책장 위에서 

아이들은 고개를 꺾었다. 

분필가루 속에서 벽 속의 시계는 컥컥댄다. 



누군가의 손에서 

시침이 ㄱ자로 구부러졌다. 

또 누군가의 손에서 

익명의 분침은 떨어져 나갔다. 

남은 초침이 

마흔 여섯 명의 손아귀에 

S자로 구부러졌다. 



초침을 밀어 올리다 지쳐버린 

3학년 교실 

초현실주의자의 식탁처럼 

흐르고 있었다. 

두 대의 선풍기는 프로펠러가 되어 

교실을 들어올린다. 



여기는 삶의 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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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독대가 있던 집 
―권대웅(1962∼)

햇빛이 강아지처럼 뒹굴다 가곤 했다

구름이 항아리 속을 기웃거리다 가곤 했다

죽어서도 할머니를 사랑했던 할아버지

지붕 위에 쑥부쟁이로 피어 피어

 

 

적막한 정오의 마당을 내려다보곤 했다

움직이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떠나가던 집


빨랫줄에 걸려 있던 구름들이

저의 옷들을 걷어 입고 떠나가고

오후 세 시를 지나

저녁 여섯 시의 골목을 지나

태양이 담벼락에 걸려 있던 햇빛들마저

모두 거두어 가버린 어스름 저녁

그 집은 어디로 갔을까

지붕은, 굴뚝은, 다락방에 모여 쑥덕거리던 별들과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은

흘러 어느 하늘을 어루만지고 있을까

뒷짐을 지고 할머니가 걸어간 달 속에도

장독대가 있었다

달빛에 그리움들이 발효되어 내려올 때마다

장맛 모두 퍼가고 남은 빈 장독처럼

 

 

웅웅 내 몸의 적막이 울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고, 다시 제 온 곳으로 물러나 사라지는 시공간이 있다. 언덕 위의 교회당, 동네 한복판에 있던 호박밭, 곡마단이 들어서던 공터, 담장 너머로 내려다보이던 한강과 강 건너 흰 모래밭, 어느 늦저녁 누구네 집에서인가 마루에 동네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보던, 내용도 생각나지 않는 영상물, 어둠 속에서 돌아가던 영사기 소리…. 딱히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머릿속 저 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마치 무언가 살며시 흔든 것처럼 저 혼자 떠올라오는, 내 어릴 적 시공간들.

‘장독대가 있던 집’은 어머니와 할머니뿐 아니라 그 집 자체에 대한 그리움에 찬 시다. 한국인의 정취와 정서를 소박한 필치로 아련히 그려낸, 가령 박수근의 그림을 보는 듯하다. ‘어머니의 슬픔이 묻은 부엌’이라니 아마 아버지로 비롯된 그늘이 드리워진 집일 터인데, 그 그늘로 다른 가족들은 더욱 결속돼 있었을 테다. 집이 아니라 아파트, 개인주택이 아니라 공동주택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집’이라는 공간에 마치 생명체처럼 정드는 심성을 알 수 없을 테다. 이사를 갈 때면 같이 살던 ‘집’을 버려두고 떠나는 듯한 생이별의 슬픔 같은 걸 느끼지 않을 테다. 현재 도시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향수를 부르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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