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박종헌
1) 시를 압축하고 생략하기
시를 쓸 때 감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노력과 끈기, 그리고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게 된다. 상식적인 생각과 관습적인 사고로서는 결코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 낼 수 없다.
길가에는 벚꽃이 뿌려지고
언제 저버릴지 모르는 벚꽃은
계속 피고, 피고 있었다.
위의 글에서 '길가에는 벚꽃이 계속해서 피어난다'는 사실 이외에는 별다른 요소가 보이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분명 벚꽃이 피고지고 하는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느꼈기 때문에 쓴 것일텐데 단순한 자연의 현상만이 나타나 있어 왜 이런 시를 썼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무엇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글을 쓰게 한 것일까? 시는 바로 이러한 이유와 근거마저도 시 속에 담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유의해야만 한다.
우리는 흔히 시는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런 표현을 썼느냐는 되물음에는 묵묵부답이거나 그것이 정서다라는 말로 얼버무리는 경우를 본다. 마치 시는 적당히 써놓으면 이렇게 저렇게 이해하면 된다는 안일한 답변을 듣는 경우도 생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이름 있다는 반짝거리는 시인들의 시에서도 발견한다. 시는 그렇게 무책임한 것이 아니다. 길다란 산문보다도 더욱 엄격히 완벽성을 요구하는 것이 시이다.
최초에 느꼈을 그 '무엇'을 찾아내어 시를 빚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잘 빚은 항아리는 보기도 아름답고 그 기능면에서도 쓸모가 있기 마련이다. 위의 시를 아래와 같이 고쳐보면 어떨까?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을 보면서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매달리고
꽃봉오리가 벙글고.
위의 3행을 여섯 행으로 늘리면서 비유을 통한 이미지화를 꾀하고 있다. 앞의 시보다 훨씬 구체적이다. 그런데, 시는 압축의 문학이라고 하는데 길어졌으니 마음에 흡족하지 않다. 자신이 쓴 글이나 시에서 빼거나 줄여도 내용을 전달하는데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면 될 수 있는 대로 줄이고 빼야 한다. 물론 리듬의 조화를 위해 남기거나 오히려 늘릴 수도 있지만 이는 한 두 음절에 지나지 않게 된다. 이러한 압축을 위해 우리는 상징이나 비유 등의 방법을 사용하게 된다.
길가에는 벚꽃이 지고
지는 꽃 사이사이에
다시 뜨는 하늘의 별처럼
꽃봉오리가 벙글고.
이러한 시 고쳐쓰기는 활자화되기 전까지 얼마든지 고칠 수 있다. 또 고쳐서 보다 완전한 시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 활자화가 된 이후에 고치는 경우도 있게 되는데 이를 개작(改作)이라고 한다. 다음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어떻게 개작되어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시가 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가실 에는 말업시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고히고히 보내들이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내
아름 다 가실길에 리우리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 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고히나 즈러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처음 『개벽』25에 실렸을 때는 오른 쪽의 모습이었으나, 후에 자신의 시집 『진달래꽃』에는 왼쪽의 모습으로 개작되어 실렸다. 이렇듯 시는 끊임없는 퇴고 속에서 다듬어지고 완전해지는 것이다.
흰 달빛 흰 달빛이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경주 불국사 자하문을 열고 들어서면
달안개 달빛 젖은 안개가 피어오르고
물 소리 물소리는 청량하게 들려 온다.
대웅전(大雄殿) 절의 대웅전 뜨락에 서니
큰 보살 큰 보살님이 미소짓고 있네
바람 소리 바람소리가 시원하게
솔 소리 소나무사이 소근거리는 소리로 불어오네
범영루(泛影樓) 절 앞의 누각인 범영루는
뜬 그림자 추녀깃을 들어 올리는 그림자로
흐는히 달빛에 흐릿하게
젖는데 젖고 있는데
흰 달빛 흰 달빛이 내리 비치는
자하문(紫霞門) 불국사 자하문 근처의 밤은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한데 어울려
물 소리. 달빛 안개 속에서 깊어만 가네
박목월, <불국사(佛國寺)> 필자가 늘여 쓴 박목월의 <불국사>
시와 산문의 가장 큰 차이는 같은 내용이라면 길이가 짧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는 압축과 생략의 문학이라고도 한다. 없어도 상상이 되는 불필요한 수식이나 어휘, 조사, 어미 등은 과감히 생략할 수 있어야 한다. 의미의 생성과 전달, 그리고 음악적인 리듬감을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불필요한 언어라고 보아도 된다.
위의 박목월 시인의 <불국사>를 본래대로의 의미와 묘사로 확장시켜보면 오른쪽에 늘여 쓴 시와 같은 모습이 된다. 왼쪽의 <불국사> 원문과 다른 점이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오른쪽의 시는 오히려 풀어지면서 상상의 여지가 사라져 버렸다. 시에서 언어의 과감한 생략은 많은 어휘를 쓰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표현 방법이 된다.
처음 시를 쓰는 사람은 자꾸 덧보태려 하는데, 시는 더하기의 미학이 아니라 빼기의 미학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기야. 너는 어디서 온 나그네냐? 보는 것, 듯는 것, 만 가지가 신기롭고 이상하기만 하여 그같이 연거푸 울음을 쏟뜨리는 너는, ―몇 살이지? ―네 살? 어쩌면 네가 떠나 온 그 나라에선 네가 집 나간 지 나흘째밖에 아닌지 모르겠구나!
유치환, <아기>『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 동서문화사, 19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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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천상병(1930∼1993)
산등성 외따른 데,
애기 들국화.
바람도 없는데
괜히 몸을 뒤뉘인다.
가을은
다시 올 테지.
다시 올까?
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
지금처럼
순하게 겹쳐진 이 순간이……
선생님의 생몰(生沒) 연대를 옮겨 적으며 무심히 나이를 계산하다가 깜짝 놀랐다. 정말 63세에 돌아가셨어? 인사동에서 우연히 몇 차례 뵈었던 모습을 떠올리며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틀림없다. 서른 안팎 사람의 눈에는 예순 안팎 사람이 한참 노인으로 보이기 십상이지만, 그걸 감안해도 선생님은 십년 세월은 더 지나간 모습으로 기억된다. 가슴이 시리다. 선생님의 창창하게 젊은 시절을 짓밟은 모진 시대, 그 뒤에 만신창이가 된 선생님의 삶…. 그래도 천진하고 선한 성품을 잃지 않으셨다. 사회인으로 세상 안에 계실 곳은 없었지만 보석 같은 시를 계속 쓰셨다. 들국화, 나이 들어서도 애기 들국화 같았던 시인.
들국화 꽃은 가을에 피어나 가을에 진다. 그래도 들국화 꽃은 봄도 모르고 여름도 모르는 저를 슬퍼하지 않는다. ‘가을은/다시 올 테지’ 고개를 갸웃이 기울인 들국화의 애잔한 속내가 들리는 듯하다. 져가는 들국화의 가녀린 모습에 시인의 모습이 겹친다. ‘다시 올까?/나와 네 외로운 마음이,/지금처럼/순하게 겹친 이 순간이……’ 내가 내년 가을에도 살아 들국화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내 마음이 이렇게 순하게 살아나는 순간이 또 올까? 고마워라, 들국화! 시인의 지순하고 맑은 마음과 만나 들국화, 이렇듯 향기로운 시로 자취를 남겼네. 이 시를 기약 없는 이별을 애달파 하는, 들국화 같은 연인의 짧은 조우로 읽어도 좋겠다. 이제 들국화를 보면 천상병 선생님 생각이 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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