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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영화를 본후 시쓰기...
2017년 04월 10일 23시 15분  조회:2846  추천:0  작성자: 죽림
 영화를 응용하여 시를 써보자

  ― 시, 영화를 만나다

  프레베르의 시 중에는 영화 같은 시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영화가 준 인상이 생생할 때 시를 써 보십시오. 영화의 제작 기법이 문학에 전이된 예도 적지 않습니다.

 

  시 같은 영화, 영화 같은 시

  여러분은 최근에 무슨 영화를 보셨습니까?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시보다는 영화를 화제로 삼을 때가 더 많지요? 지금 개봉 중인 무슨 영화가 볼 만하다느니 무슨 영화는 영 재미가 없다느니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 가운데 영화는 성큼 들어와 있는데 시는 멀어져만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영상 매체와 활자 매체 사이의 거리가 먼 것 같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쓴 감상문류의 시가 무척 많으며, 시 같은 영화도 꽤 많습니다. 시 같은 영화의 예로는 장 콕토의〈시인의 피〉〈오르페우스〉〈미녀와 야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거울〉〈향수〉〈희생〉같은 영화를 들겠습니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은 영상 시인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가 만든〈희생〉의 그 유명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세워진 집, 그 곁에 죽어 있는 나무의 생로병사, 물의 친화력을 암시하는 바닷가 배경……. 기독교적인 희생의 정신을 통해 인류의 미래 사회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암시한, 대단히 시적인 영화였습니다. 르레 클레망의〈금지된 장난〉이나 페데리코 펠리니의〈길〉, 배용균의〈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광모의〈아름다운 시절〉을 저는 시적인 영화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장 콕토는 영화감독이면서 시인이었습니다.

 

        불쑥

        진흙과 풀더미의 구덩이에서 나타난

        집시 여인이

        서커스단을 위해

        백작의 아들을 훔쳤네.

 

        미쳐버린 엄마가

        길거리에서 소리쳐 부르고 있을 때

        아이는 서커스의 사다리 꼭대기에서

        날기를 배우고 있네.

 

        (…)

 

        씁쓸한 술을 너무 마셨기에

        어린애는 졸려 몸을 가누지 못하네.

        수프 그릇 옆에서

        그애의 머리는 바닷가를 헤매고 있네.

 

        꿈은 훔치는 것에 길들어 있는 것

        아이는 길거리에 있는

        무서운 석상을 꿈꾸네.

        손으로 훔치는 석상을 꿈꾸네.

                                        ―〈어린아이를 훔치는 자들〉부분(전채린 역)

 

  총 7연으로 된 시의 앞의 두 개 연과 끝의 두 개 연입니다. 시의 세계를 서커스의 세계에, 시인을 집시에 빗대어 쓴 시입니다. 보들레르는 시인을 날지 못하는 커다란 새, 어부들에게 잡혀 조롱감이 되는 알바트로스 같은 존재로 봤지만 콕토는 영원한 떠돌이로 봤습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면 역마살이 낀 사람이 시인입니다.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에밀 쿠스트리차의〈집시의 시간〉과 폴커 슐렌도르프의〈양철북〉의 여러 장면을 떠올렸습니다. 두 영화는 명작 중의 명작이지요. 소설가 이제하는 영화 평론도 곧잘 쓰는데, 언젠가〈길〉과〈집시의 시간〉을 자신이 본 모든 영화 중 최고작으로 꼽은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수긍이 가는 선정입니다. 콕토는 영화를 편집하는 식으로 시를 쓰다가 에라, 영화를 만들자 하고는 영화감독이 됩니다. 영화의 몇몇 장면이 시가 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1930년대에 쓴 시라 에밀과 폴커의 영화보다 훨씬 앞서 나온 것입니다. 자크 프레베르의 시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우유 탄 커피에

        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아침식사〉앞 부분(김화영 역)

 

  이 시는 마친 영화처럼, 카메라 앵글을 고정시키고 ‘천천히 보여주기’로 진행이 됩니다. 웬 사람이 식당에 들어가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이 클로즈업됩니다. 즉, 시인이 필름을 돌리는 것이지요. 독자는 흡사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내겐 아무 말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버렸지

        말 한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 버렸지.

                                        ―〈아침 식사〉뒷 부분(김화영 역)

 

  참 매정한 그이입니다. 시적 화자한테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가버리다니. 저는 이 시를 읽을 때면 시도 영화같이 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프레베르의 시 중에는 영화 같은 시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도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영화를 보고 와서 그 영화가 준 인상이 생생할 때, 시를 써보십시오. 영화의 제작 기법이 문학에 전이된 예도 저적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 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거리를 통하여

        값싼 일반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 껍질과 톱밥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우리 갑시다.

                                        ―〈J.A. 프루프록의 연가〉앞 부분(이창배 역)

  T.S. 엘리엇 시의 위대함은 이분법적 사고를 통합하려 하거나 혹은 넘어서려 한 데 있지 않을까요? 선과 악, 영원과 순간, 지상과 천상, 세속과 신성, 전통과 현상…….〈J.A. 프루프록의 연가〉는 주제도 주제이지만 병행몽타주, 원근법 등의 화면 구성을 해서 시각적인 효과를 드높였습니다.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참으로 중요한데, 저는 ‘이 시는 시각적 이미지가 뚜렷해 영화의 한 장면 같군’ 하고 생각하며 외국 시를 읽을 때가 많습니다. 프랑스 시인 테오필 고티에, 영국 시인 톰 건, 독일 시인 고트프리트벤……. 이들의 시를 읽으면 뇌리에 영상이 펼쳐집니다. 이것이 곧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문학과 영화 사이의 거리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고 사물을 모방하는 것처럼 영화도 현실의 재구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예사조 가운데 사실주의는 현실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재현하려는 정신인데 영화도 현실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화상(畵像)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사실주의입니다. 문학과 영화가 어떤 만남을 이룩해 왔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미국 최초의 장편 영화인 그리피스의〈국가의 탄생〉(1915)은 영국의 사실주의 작가 찰스 디킨즈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리피스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구사한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스타인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에이젠스타인의 대표작이〈전함 포템킨〉인 것, 알고 계시죠? 예전에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어떻게 있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영화가 예술이냐는 것이지요. 문학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뒤틀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해 변형, 재구성하지만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 사람이 많았던 탓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자 인도에서는 영화를 드르시아 카비아(drsya kavya), 즉 ‘눈에 보이는 시’라고 했습니다. 리치토 카누도 같은 사람은 영화를 공간예술(조각 ․ 건축 ․ 회화)과 시간예술(음악 ․ 무용 ․ 문학)을 종합한 제7예술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알렉상드르 아스트뤼크란 영화학자가〈카메라 만년필론〉(1948)에서 영화감독도 시인이나 소설가처럼 작가의 개성이 드러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카메라가 펜처럼 현실을 뒤틀고 재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던 거지요. 인생의 희로애락을 시는 짧은 시행 속의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이지만 소설은 언어로 설명하고(스토리 텔링), 영화는 영상으로 표현합니다. 좋은 예술형화나 문예영화는 시적 영상을 담지 않던가요. 이인성은 오버랩과 시간의 비약이라는 영화 제작 기법을 응용하여 소설을 썼고, 유하는 편집 효과를 적절히 응용해 시를 썼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장 콕토,〈마지막 황제〉를 만든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오이디푸스〉를 만든 파울로 파졸리니는 모두 시인이었습니다. 시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는〈일 포스티노〉(파블로 네루다),〈그라나다에서의 죽음〉(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토탈 이클립스〉(랭보와 베를렌느),〈금홍아 금홍아〉(이상) 같은 것들이 있었지요. 우리 문학도 90년대에 들어와 영화와의 만남이 활발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소설 속에 영화를 끌어들이거나 소설가의 영상 체험 자체를 갖고 소설을 쓰는 일이 빈번해집니다. 최성각은 엽편소설집《택시 드라이버》에서 영상 체험이나 영화 이야기를 소설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방법을 썼습니다. 조성기는〈피아노, 그 어둡고 투명한〉에서 영화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작중 화자의 이야기를 넣는 방식을 썼습니다. 소설로 쓴 영화 관람기라고 할까요, 영화 평론이라고 할까요. 김경욱은《바그다드 카페에는 커피가 없다》에서〈시네마 천국〉〈택시 드라이버〉〈지존무상〉같은 영화의 제목을 따와 영화 관객을 대상으로 한 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유명한 감독의 대표작 가운데 원작이 명작 소설인 경우가 많지만 소설을 영화화한 것을 보는 것과 책을 보는 것은 분명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영상은 뇌리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인간 의식의 심층을 다루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문학은 인식하고 사고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영화는 감각에 호소하고 현장감을 느끼게 합니다. 하지만 문학과 영화가 서로 배척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영역이 다르기는 하지만 공유하는 영역도 있기 때문에 상대방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견해인데, 앞으로 영화적 기법을 이용한 시들이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언젠가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가 대담에서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활자 문화의 종교성을 믿고 있습니다. 활자 문화가 경시되고 있기 때문에 충무로 영화가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상황에서는 좋은 시나리오가 안 나옵니다. 충무로 사람들은 시나리오를 문학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품으로, 이게 장사되겠느냐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전혀 설득력도 없고 개연성도 없는 작품을 내놓게 되지요.” 지당한 말입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어느 시상식장에서 “지금 영화를 하는 후학들에게 해줄 말이 없냐”는 질문을 받자 “책을 많이 보세요”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시를 영상으로 옮기는 운동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장정일과 유하 시의 영상미

  자, 그렇다면 국내 시인 가운데 영화와 시를 넘나든 이로 누가 있을까요? 물론 장정일과 유하지요. 장정일의 소설은 여러 편이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만 그는 영화 같은 시를 여러 편 쓴, 영상 미학을 아는 시인입니다.

 

        서서히 8미리 촬영기가 돌아가고, 그녀의

        두 뺨은 흥분으로 달아오른다. 실연이자, 연기!

        그녀의 연기에는 대역이 없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지에 버터를 바른다. ‘여기서 컷!’

        ‘이 장면은 위에서 내리, 찍어, 줘요’ 촬영기사에게

        명령하니, 그녀는 감독을 겸하는구나, ‘점점 클로즈업

        시키면서 컷트, 알죠?’ ‘레디 고’

                                        ―장정일,〈8미리 스타〉부분

 

  이 시에 나오는 포르노 영화 전문 여배우는 돈을 벌려고 마지못해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 영화 찍기 자체를 즐깁니다. 8미리 필름의 영화를 찍으면서 포르노 영화계에서의 출세를 꿈꾸는 한 여인의 욕망이 시가 되었습니다. 장정일은〈잔혹한 실내극〉이나〈즐거운 실내극〉같은 희곡 형식의 시를 쓴 바 있고 시나리오 형식의 시와 영화 감상문을 시로 발표한 적도 있습니다.〈샴푸의 요정〉같은 시는 텔레비전 단막극으로 만들어졌었지요.

 

          S#1.

          *F.I.

          카메라가 높은 하늘에서 점점 내려오며 고속도로 위를 질주하고 있는 오픈카를 클로

        즈업시킨다. 운전자는 잘생긴 청년으로, 즐거운 듯 경쾌한 휘파람을 불고 있다. 카메라

        가 그의 상반신을 비추다가 뒤로 빠진다. (D ․ I ․ S)

                                        ―〈자동차〉제1연

 

          영화〈파리, 텍사스〉를 보고

          대구 유일의 종합잡지인《빛》에다

          원고지 열 매의 감상문을 쓴다.

 

          지상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이야기가 있고 그 숱한 이야기들은 흔히 이렇게 시

        작된다. ‘옛날, 먼 옛날, 아주 살기 좋은 아름다운 마을에 누구와 누구가 살았더란다. 그

        런던 어느날……’

          빔 밴더스 감독의 84년도 칸느영화제 대상 수상작인〈파리, 텍사스(Paris, Texas)〉

        역시 이런 이야기 방식의 너무나 보편적인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슬픔〉부분

 

〈자동차〉는 총 12연으로 된 시인데 아주 짧은 시나리오입니다.〈슬픔〉은 원고지 10매의 영화 감상문을 다른 지면에 발표한 것인데 아깝다고 생각했는지 시집에 수록함으로써 시가 되었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장정일의 영상 미학과 서사 구조에 대한 관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시에 만족할 수 없어 소설가가 되고 시나리오를 손보고 연극대본을 썼던 것이겠지요. 영문학도였던 유하 역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영화 감상문 연작시인 ‘영화 사회학’ 시리즈를 씁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화학과 대학원에를 가더니 영화〈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결혼은 미친 짓이다〉〈말죽거리 잔혹사〉를 만들었습니다. 유하의 ‘영화 사회학’ 시리즈는 단순한 영화 감상문이 아니라 1970~80년대 우리 사회에 대한 예리한 비판이고 유쾌한 풍자였지요.

 

        미국영화에 나오는 수십만 마력의 무쇠 로보캅이

        우리 사회에도 곧 등장할 필요가 있을 거라구?

        돌과 화염병쯤은 어린애 장난 같을 불사신의

        사이보그 경찰, 강철도 종이 구기듯 하는

        그 초강력 파워가 민중의 지팡이가 되는 미래 사회?

        삐삐삐삐 시인분주웅 조옴 보옵시이다

                                        ―〈로보캅―영화 사회학〉부분

 

        베드룸 윈도우에서 본 그 엽색의 살인귀도

        집에선 홀어머니에게 늦게 들어온다고 꾸중 듣는

        평범한 아들이고, 직장에선 성실한 직원이다

        마치 악랄한 고문을 일삼는 자도, 집에선

        딸네미 대입 학력고사 걱정하는 자상한 아버지인 것처럼,

        밤마다 살인귀는 뱀눈을 치켜 뜨고 여자 사냥을 한다

                                        ―〈베드룸 윈도우―영화 사회학〉부분

 

  앞의 시는 미국 영화〈로보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듯하다가 분위기를 한순간에 바꿉니다. 로보캅은 행인을 무작위로 잡아 불심검문하는 이 땅의 전경이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시인은 한국의 살벌한 정치적 상황을 풍자합니다. 영화〈베드룸 윈도우〉에 나오는 ‘엽색의 살인귀’가 한국적 상황에서는 정치범에게 갖은 고문을 하는 경관으로 탈바꿈됩니다. 영화 속의 살인귀가 그렇듯이 그도 집에 가서는 자상한 아버지가 되는 것이지요. 영화 속의 살인귀는 어머니의 꾸지람에 말대꾸 한마디하지 않을 정도로 얌전합니다. 그야말로 ‘영화 사회학’적으로 시를 쓰던 유하는《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와《세운상가 키드의 사랑》에 가서는 온갖 키치적인 것들을 끌어와 90년대 우리 사회의 지형도를 그렸는데, 영화배우와 영화 및 영화에 관련된 것들을 시의 양념으로 삼았습니다.

 

  영화가 있었기에 시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김춘수 시인이 말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혁명아 사파타〉를 보았다고 믿도 있습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멕시코의 농민 혁명을 주도한 사파타의 일대기를 그린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處容斷章 第二部 Ⅴ〉)라는 시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파타가 왜 사바다로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영화를 보면 사파타가 아닌게아니라 일자무식이어서 글을 깨치는 문제로 고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탁번 시인이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원작, 데이빗 린 감독의 영화〈닥터 지바고〉를 보지 않았더라면 아래의 시는 탄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原州高校 이학년 겨울, 라라를 처음 만났다. 눈 덮인 雉岳山을 한참 바라다보았다.

 

          (…)

 

          라라, 그 보잘것없는 계집이 돌리는 겨울 풍차소리에 나의 아침은 무너져 내렸다. 라

        라여, 본능의 바람이여, 아름다움이여.

                                        ―〈라라에 관하여〉첫 연과 끝 연

 

  하재봉의 시〈비디오/극장에 다녀왔다〉는 영화〈장미의 이름〉을, 김혜순의 시〈또 하나의 타이타닉호〉는 영화〈타이타닉〉을 보고 와서 쓴 시입니다. 시인 배용제는 삼류극장에 죽치고 앉아 젊은 시절을 보냈던가 봅니다. “나는 줄곧 에로 영화만을 원했다”(〈삼류극장에서의 한때 2〉)고 말한 시인은 제목부터 에로틱한 영화를 제법 많이 보았던가 봅니다. 시인의 영감을 자극한 영화가 어디 에로 영화뿐이었겠습니까.

 

        무릎과 무릎 사이에 엎드려

        깊은 밤 깊은 곳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네

        뻐꾸기가 밤에 우는 이유를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난,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의 매끄러운 살결을 더듬으며

        사랑의 방식에 대해 터득했네

        어둠의 성역에서 타락과 포옹하는 것이라고,

        그것이 신이 감춰둔 또 하나의 천국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1〉부분

 

  우이동 시인 채희문은 시의 제목으로 자신이 본 영화의 제목을 붙이고 ‘세계 영화 추억 만나기’라는 부제를 달아 53편의 시를 써 시집《추억 만나기》라는 시집을 낸 바 있습니다. 시로 쓴 영화 감상문이 한 권의 시집이 된 것이지요. 박용재는 연극 관전기와 연극인에 대한 인상기를 모아 시집《우리들의 숙객―동숭동 시절》이라는 시집을 냈습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영화를 시적 상상력의 근간으로 삼는 시인들이 나오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영화 보기’를 생활의 일부로 삼으신 분들이 많을 텐데, 시와 영화가 동떨어진 예술 세계가 아니므로 접목을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떨까 싶습니다. 물론 시가 영화에 수렴되어서는 안 될 것이며, 새로운 상상력의 불꽃놀이를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영화〈러브 액츄얼리〉를 보러 가려는 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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