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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김소영
비는 지붕을 두다린다. 비소리에 내 몸은 젖고야 만다. 나는 침묵의 음계와 묵상을 잃고 깊은 밤 쓸쓸히 자리에 드러 눕는다 비는 참밖에 어둠을 헝클고 살라먹는다.
비는 지붕을 두드린다. 밤의 어둠에 못질한다. 우주의 침묵에다 돌맹이질 한다.
나는 길을 잃은 어린아이 어머니는 인젠 나를 찾으려고 하지 않었다. 그 여인의 광란된 눈물은 북녘 하늘 밑에서 메말라 버렸다......
비는 백양나무 푸른 가지에서 줄곳 나린다. 비는 무엇을 이야기 하려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이상스런 혼의 쓸데없는 잠고대런지........ <인간은 울고, 슬퍼하기 위해서 태여 난 것이다>.....라고 누가 말해 주는 것만 같은 맘이다.
- 1956년 김소영시집 -
요양 중인 김소영 시인. 시인은 매우 연로하셨으며, 지팡이를 짚어야 움직이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하신 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론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계신 달변가였다. 정말 시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말씀을 전해주신다.
김소영 시인은 한 시대를 풍미하신 시인이다. 문학평론가 임중빈은 김소영의 시를 들어 “김소영의 포에지 입법은 매우 다양하면서 자못 간명한 시안에 의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長江大河 高山 深谷을 샅샅이 누비는 大自然과의 合一, 남성적이기만 한 역사적 흐름과의 統一, 그리고 초자연과 역사 현장과의 合命題를 동시에 추구하는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시작을 결실해 나가기에다, 일체감으로서의 대자연 속에 大我가 깃들어 있으며, 역사 靜脈 하나가 되려는 성스러운 싸움 속에 시맥의 역동함이 여실하다.”고 평가한다.
또 민병욱 문학평론가는 김소영의 서사시에 대하여 “한국문학의 비평적 폐쇄성을 웅변하고 있는 김소영의 시적 생애는 향토경험, 가족경험, 문화적 교양경험, 실향민 경험 등 시적 경험을 기반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의 이러한 경험세계와 그것이 형성한 민족의식, 전통의식에 의해서 제작된 시편이 『어머니』와 『조국』이다. 『어머니』는 그의 가족경험, 특히 어머니의 정신적 감화경험과 실향민 경험이 서로 어울려서 창조된 것이라면 『조국』은 그의 모든 경험들이 총체적으로 어울러 선택된 것이다.”라고 그의 서사시를 높이 평가한다.
김소영 시인의 본명은 김면식으로 본은 경주 김씨다, 1922년 11월 9일에서 태어났으며 황해도 이원초등학교와 일본 와세다 중학교를 나왔다. 이후 1945년 일본 경도京都 입명관대학立命館大學 문학부 수학한다. 해방 직후 한국에 들어온 그는 단국대 강사를 비롯하여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였으며 고등학교 교장을 지내기도 했는데 그의 이력은 탄광생활, 신문기자. 영화인, 서점 경영 등 다채로운 경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서사시 『조국』을 써내는 데 큰 역할을 한 듯싶다. 슬하에는 두 아들이 있다.
향년 92세의 김소영 시인.
선생님에게 있어 시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시란 인간이 창출하는 것 중에서 가장 소박한 것이며 넉[魂]에 밀착된 肉聲의 예술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위하여 줄기차게 미화하려는 의도를 배척하여야 합니다. 시의 본래 목적은 인간의 가슴속 깊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감정, 그 자체의 본질을 의심스런 눈으로 보아 더욱 감정을 활발하게 흘려 내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시란 감정의 신경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시의 특성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시의 세계는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남과 더불어 성장하는 법이지요. 그 깨달은 사람이 사람들 사이에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시는 황홀경(ecstasy)의 발동체와도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황홀경 자체가 근원이 되어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되지요, 따라서 언어의 모든 수사학은 이미지의 황홀경에 의하여 유기적으로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미루어본다면 시란 꿈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꿈은 불가능의 가능이기에 시간적, 공간적 사물일지라도 꿈의 세계에서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실상 이처럼 놀라운 황홀경이 이 지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영상을 통하지 않고 추상화된 주관적인 감정만으로 직접 독자의 감정으로 옮겨가려는 따위의 경향을 지닌 시작품이 오늘 우리 주변에서 봇물 터지듯 범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감상적인 낭만주의의 시를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직접적인 표현주의의 시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이 같은 시의 위협에 직면한 나머지 아주 심한 역경에 부딪히기 일쑤입니다. 격렬한 애수에 젖어 넘치도록 차 있는 감정이나 정서가 그들 시에 담겨져 있다 손치더라도 그로 말미암아 인생의 구체적인 현실과 어떠한 연관성을 이루고 있는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와 같은 감정만을 노출시킨 시는 독자와의 사이에 아무런 교감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입니다.
시인에게 있어 시풍이란 어떤 것일까요? 또 시인의 시풍은 변화하면 안 되는 것인가요?
슬픔에 젖어 눈물짓는 것을 보고 감상에 젖을 수 있을 런지는 몰라도, 자칫하면 억울한 눈물의 강요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를 내림으로써 무엇 때문에 눈물짓지 않을 수 없었던가를 자각하였다면 그 눈물은 거짓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진정한 눈물입니다. 시인은 그 황홀함이 인생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는 사건과 어떤 연관성에서 이어져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 시 그 자체는 하나의 주제에만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의 형식적 인습을 체득해야만 시를 쓸 수 있다고 고집하는 것은 지나친 아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평생을 나들이 옷 단 한 벌로 지냈다는 황희 정승의 아내처럼 자신의 개성으로 다져진 자기만의 시풍이라는 옷을 걸치고 다녀야 한다는 지난날의 사학은 이제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비록 한 편의 시라 할지라도 시정신은 한 시대에 대한 역사적,사회적 감각과 비판이 밀착되어 있을 때, 비로소 민중과 더불어 새로운 시의 탄생을 찬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에 있어 시문학의 경향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다고 보시나요? 근년에 이르러 시문학의 상황은 아주 극단적인 혼맥을 빚어내고 있음은 누구나 느끼는 사실입니다. 또 그 중에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든지, 지적 무정부주의가 판을 쳐온 나머지, 시의 출판물은 어느 때보다도 놀랄 만큼 소책자로 둔갑한 자비출판이 헤아릴 수 없도록 봇물이 터진 듯 쏟아져 나돌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 시인들은 자유시라는 미명하에 멋대로 형식적 개인주의가 횡행한 나머지, 수많은 독자로 하여금 혼돈으로 빠뜨려 넣는 테러행위를 저질러 놓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의 평가기준을 마음대로 정한다는 것은 광풍과도 같은 횡포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단의 이 같은 횡포는 전통에 의하여 다져진 시적 탐구의 영역을 협소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시인이 진실을 표출하여야 할 사명을 등진 나머지 '노래쟁이‘라는 부끄러운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럼 오늘날 시인은 어떤 자세를 취하여야 할까요?
오늘의 시인은 오늘보다도 내일을 위하여, 랭보, 보들레르, 아뽈리네르, 엘뤼아르 등이 그랬던 것처럼 이미지의 풍요로움과 신선함에 충실한 나머지 어디까지나 모던하게 표출하려고 몸부림쳐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우리의 아늑한 시환경을 실현하기에 알맞은 시의 쟁기를 지녔다고 큰소리 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뽈엘뤼아르는 “연결이 없는 언어의 얼빠진 돌조각임에 지나지 않는 자유율시라는 손쉬운 유혹만은 뿌리쳐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실상 ‘지난날의 낡은 詩와의 밀교의 전통’은 오늘의 시를 해쳤을 뿐만 아니라 독자인 민중까지도 멀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를 위하여 새로운 리얼리즘을 찾아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한다는 것은 여러 시인들에 의해 누차에 걸쳐 강조되어온 지론입니다. ........ 우리나라 시의 근대사를 정리하신다면 어떻게 정리하실 수 있을까요?
돌이켜 보건데 해방 반세기에 이르는 오늘날, 시인 자신의 상아탑이라 할 수는 없더라도 독자적인 착색 속에 몰입하였다가 또다시 시인과 민중의 거리를 두고 나타나듯이 우리의 국토는 8.15광복과 더불어 38선이라는 놀라운 20세기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무서운 사실을 피해서 갈 수 없는 비통한 상황에 놓여있음을 현대인들은 잊고 있습니다. 그래서 70~80년대 시들은 이 같은 현실에 직면하여 있는 상황에서 시인으로 하여금 빵과 평화를 위해 땀 흘리고 있는 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성과 영혼의 갈등 속에서 지난날의 숱한 개념들이 침전되어 수많은 껍데기를 벗겨내는 한편 걷잡을 수 없는 거센 회오리바람 속에서 진정한 내일을 조명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은 한밤에 태양이 뜨게 하는 것과도 비유될 수 있는 엄청난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 즉 새로운 시를 위해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시와 현실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닐까요?
시도 현실도 모두 새로워져야만 합니다. 일찍이 A. 랭보는 “시란 절대 새로워야 한다. 시인은 창조자인 동시에 발명가다. 그러므로 항상 전통에 혁신적인 정신을 심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시에 나타난 현실은 단순한 현실의 한 조각만일 순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의미적인 현실일 따름이지요. 시는 현실이 문명의 시간적 공간적 관계로부터 진실하게 파악된 나머지 언어를 통해서 구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의미적 현실이란 어디까지나 현실의 본질적인 부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날의 안일한 시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비판적인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야말로 민중과 더불어 값진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길입니다. 내일의 희망찬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달과 작별하여야 하니까요. 우울을 용기로, 의혹을 확신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악의를 선의로, 회의를 신뢰로, 편견을 침착 냉정으로, 오만을 겸손으로 대치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좋은 말씀입니다. 이제 시가 나가야 할 방향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오늘의 시는 하나의 시적 세계어의 성립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는 온상이며 대평원이라 할 수 있는 민중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민중이란 세계를 상대로 한 민중임에 틀림이 없구요. 오늘의 민중을 감동시키게 하는 힘은 자유요, 사랑이라는 심장의 고동소리입니다. 시인은 세계를 향해서 어떤 자수의 시선을 던질 것인가를 깨닫고, 언어에 의해서 전달되는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오늘의 시인이라는 사명감에서 새로운 내일을 찾아 역사적 현실을 조명하는 동시에 내일로의 힘찬 발걸음을 내딛어야 합니다. .....하략(대담했던 것을 정리해서)
단상-김소영
10년이 가고 하루가 왔구나
하루가 가고 10년이 왔구나
10년이니 강산이 변했다
하루가 변해 10년이 되고 10년이 변해 하루가 되고.
하루는 10년이요 10년은 하루다.
그래서 나는 나아닌 또 하나의 그림자를 봐야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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