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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묘비의 각인을 살펴보다...
2017년 04월 21일 01시 26분  조회:3469  추천:0  작성자: 죽림
 

해방되던 해 유월십사일 동생 일주, 광주 세우다

 

 


1945년 2월 16일 29세에 돌아가니

 

재주는 당대에 쓰일 만하고 시는 이 사회를 울릴 것이나

춘풍에 무정한 꽃 떨어지고 열매 없으니 안타깝도다


시인이라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다

 

 


정확한 시신은 찾지 못한듯 누이와 조카의 아쉬움이 돌로 남았다

 

 


돌아서며 다시 뒤돌아보는 시인의 묘소. 평안히 쉬소서

 

 

 

 


윤동주 장례식(1945.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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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은?

 [ 연변일보 ] 2011-11-28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극본을 창작하고 정광이 연출을 맡고 서태문이 해설을 진행한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윤동주가 15살때부터 생활했고 그의 장례식까지 치러진 집터를 배경으로 윤동주의 모습과 문학창작배경을 새롭게 발굴된 자료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세인의 주목을 받고있다.

기자: 다큐멘터리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어떤 내용을 담고있습니까?

남철: 우선 제목은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가 명동에서 태여나 소학교를 졸업한후 1932년에 중학교에 붙을무렵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아들의 장래를 위해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이사한 집이 지금의 룡정정부청사동쪽에 있는 집이였습니다.

그때 그 집에는 윤동주의 조부모, 부모, 형제 셋에 고모의 아들 송몽규까지 여덟 식솔이 살았습니다. 동주가 입학한 중학교는 지금 룡정로년대학(옛날 모윤숙이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교)옆에 있는 영국선교사들이 꾸린 은진(하느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는 뜻)중학교였습니다. 그 은진중학교는 바로 지금 룡정에서 말하는 《영국더기》에 있었고 윤동주네 집은 바로 그 더기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큐드라마의 제목이 《더기아래 윤동주의 집》으로 되였습니다.

기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의 창작계기는 무엇입니까?

남철: 지금까지 윤동주의 생가와 묘지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윤동주가 15살부터 살았고 은진중학(초중), 평양숭실중학(고중), 서울 연희전문(대학), 일본 도지샤대학(류학)시절을 지냈으며 윤동주가 세상뜬 후 장례식을 치렀던 집은 아는 사람이 극히 적고 또 그 집자리는 지금 파가이주되여 어느 공장의 창고로 돼있습니다.

열백번 문화재로 되여야 할 그 자리가 력사의 진토속에 묻혀버린 아쉬움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것이 저의 프로 기획 의도였습니다. 윤동주 사망후 가족들은 계속 그 집에서 살았고 그 집에서 윤동주의 조부모, 어머니가 사망했으며 1958년에 아버지 윤영석은 동주의 계모 홍씨, 막내아들 윤광주와 함께 용문교쪽으로 이사갔습니다. 윤동주가 살던 옛집은 그냥 방치된채로 있다가 1996년에 이개축을 하면서 허물어졌습니다.

기자: 무엇때문에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이 국제상을 수상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까?

남철: 프로가 상을 받자면 우선은 제재가 참신해야 합니다. 저의 프로에는 우리가 다 알고있는것 같았지만 또 모르고있었던 윤동주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있습니다. 이 정보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김혁주임이 제공한것입니다. 《연변문학》지에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발표한 김혁작가도 지난해에야 이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 정보제공자가 바로 1930년대에 은진중학교부근에서 종살이를 했고 윤동주의 은진중학교 12년 후배인 최근갑로인(86세)입니다. 또 다른 정보제공자는 윤동주의 막내동생 윤광주의 딱친구인 리송덕로인입니다.

연변라지오방송국 문학부 남철주임이 제작한 《더기아래 윤동주네 집》은 일전에 한국 KBS 세계한국어방송인대회에서 시상하는 국제상인 《서울프라이즈》 시상식에서 라지오부문 특별상을 수상했다.

/ 허국화기자


더기우의 시인의 집
 
2015-8-5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일제의 서슬푸른 총칼아래에서도 붓자루를 놓지 않고 우리 말, 우리 글을 보듬었던 저항시인 윤동주,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룡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간행물 《나라사랑》 23집에 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은진중학과 몇분 거리에 있는” 윤동주의 룡정자택 주소는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济昌路) 1ㅡ20이였다.

룡정으로 이사오면서 윤동주네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윤혜원 3남매, 거기에다 큰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룡정생활이 시작되였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나갔다.

동생 윤일주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은진중학교는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사람들은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여기서 더기란 언덕을 가리키는 옛날 방언이다.

룡정 사람들은 이곳에서 서양문화에 눈을 떴다. “영국더기”안에 있던 학교나 교회는 독립운동을 하다 일본경찰에 쫓기는 학생들의 피난처가 되였고 병원은 부상당한 독립운동가들을 치료해주고 숨겨주는 은신처가 되였다.

그 결과 “영국더기”는 반일운동을 지원한다는 리유로 일본경찰당국으로부터 견제와 탄압을 받았다. 이런 배경에서 “영국더기”는 인걸을 많이 키워냈다. 김약연과 윤동주, 송몽규를 비롯하여 박계주, 리태준, 명희조,  문익환, 리봉춘, 안병무 등등. 력사의 행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걸출한 독립운동가, 문인, 종교인들이 이곳 “영국더기”를 거쳐 나갔다.

“영국더기”의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몇백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문예지를 만드는가 하면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또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오래동안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다가 타계한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6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우에 빈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학교 문예지를 만드는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모아보면 룡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또렷이 나타난다.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기도 하고 동시인을 지향하는 문학도이면서도 축구선수이기도 하고 웅변대회에서 일등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 관련 서적만 들고 다니던 그였으나 뜻밖에도 수학을 잘하는데는 친구들이며 집안 식구들이 모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오늘날 신세대들의 용어를 빈다면 그야말로 “꽃미남”, “인기 짱”이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한 뒤 윤동주는 방학때마다 룡정으로 돌아오군 했다. 그는 집에 돌아오면 사각모와 교복을 벗어 가지런히 걸어놓고 베바지, 베적삼에 밀짚모자를 쓰고 소를 몰고 나갔으며 집안일을 도왔다. 꼴도 베고 물도 긷고 때로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매돌도 갈아드렸다.

윤일주씨의 회고에서 보면 윤동주가 “방학때마다 이불짐속에 한아름씩 넣어오는 책은 800권 정도” 되였고 “벽 한쪽을 전부 메웠던 서가”가 있어 그 책들을 꽂았다고 한다.

집의 한쪽벽을 전부 차지한 서가, 그 서가에 꽂혀있는 800여권의 책들, 이것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자택의 풍경이였다. 

 

윤동주의 유명한 일화인 진학문제를 놓고 아버지와의 “설전”도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 치렀다.

“물사발이 밖으로 휙 휙 날고 아주 란리가 났었어요.” 하고 윤혜원은 당시를 회상했다.

윤동주는 문과에 가겠다고하는 반면 그의 부친은 의과를 해서 의사가 돼야 한다고 강요한데서 아버지와 윤동주 사이에 처음으로 대립이 생긴것이다.

아버지 윤영석은 젊어서 북경, 일본 도꾜에서 문학쪽의 공부를 한적 있었으나 문학적으로 양명(揚名)해본적은 없었다. 했기에 아들에게만은 그런 전철을 밟지 않게 하려는 의지가 강력했던것이다.

대립이 계속되더니 끝내는 동주가 밥을 굶고 생전 처음으로 집에 안 들어오는 날까지 생기도록 사태가 악화되였다. 윤일주씨에 의하면 집안의 험악한 분위기에 동생들은 어지간히 겁이 들었다고 한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문과 지망을 고집하는 손자의 고민을 보다 못한 할아버지 윤하현(尹夏鉉)의 중재와 외삼촌인 규암 김약연 선생의 권면에 힘입어서야 윤동주의 문과 지망의 길이 드디여 열렸다.

1940년 은진중학을 졸업한후 윤동주는 “영국더기”를 내렸다.

룡정촌의 더기를 내려선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동산”으로 올랐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또 다시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와 함께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꾜 릿교대학 영문과, 도꾜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했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 《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돼 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상복을 입고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사연많은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경 그 자택에서 직접 살았던 윤동주의 녀동생 윤혜원에 의해 이뤄졌다.

오스트랄리아에 거주하고 있는 윤혜원과 그의 남편 오형범은 중국에로의 자유로운 출입이 가능해진 1990년 이후, 해마다 윤동주의 고향 연변으로 와서 윤동주묘소를 새롭게 조성하고 중학생잡지사에서 주최하는 “윤동주 문학상”시상식에 참석했다.

윤동주의 매제 오형범은 어제날의 기억을 더듬어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략도를 그렸다. 비교적 소상하게 그려낸 그 그림에는 당시 “영국더기”의 진풍경이 빠침없이 그려져 있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 그 곁의 명신녀중학, 독립선언서를 찍었던 제창병원 그리고 동산교회와 카나다 선교사들이 거주했던 사택의 위치와 간호사들의 기숙사까지 그려져 있다. 그 략도에 윤동주의 자택이 명확하게 표시되여 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해 확인한 또 한분이 있었다. 연변박물관 연구원으로 지냈던 리송덕 옹이였다. 그는 1960년대에 윤동주의 막내동생인 윤광주와 두터운 교분을 맺어 이 자택을 늘 찾았다고 한다.

리송덕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간도일본총령사관”(지금의 룡정시정부청사) 동쪽 담장에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룡정시 문화관의 바로 뒤편에 자리한 그곳은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현재 “룡정.윤동주연구회” 사무실이 바로 그 위치에 오픈돼 있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기계수리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의족공장으로 탈바꿈했다가 현재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 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으나 현재는 작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생겼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차고 부근이 바로 윤동주의 룡정 집터이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을 아울러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한다.

글 김혁 사진 리련화

윤동주의 장례식을 치르고 가족이 윤동주의 룡정자택 뜨락에서 남긴 합영.

표지석조차 없는 윤동주 룡정자택 옛터.

 

 


 
. 역사기행 .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룡정자택을 찾아서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종합신문” 20101122
 
 
==============================자료===

 
윤동주와 은진중학교
 
  윤동주는 짧디짧은 인생에서 선후로 명동소학교,달라자(大砬子)중국인소학교(6학년1년간 수학),은진중학교(룡정),숭실중학교(평양),광명학원(룡정),연희전문학교(한국서울),릿교대학(일본동경),동지사대학(일본교토)을 다녔다.
 
 
1932년4월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윤동주는 1935년9월1일 평양숭실중학교로 전학가기전까지 줄곧 은진에서 공부했다.
 
 
 
윤동주와 은진중학교1.jpg
 
은진중학교 본관 3층건물
 
함께 은진에 입학한 동기생들로는 송몽규,문익환등이 있다.셋은 1935년에 이르러 각자의 길을 가게 되였다.4월 송몽규는 학업을 중단하고 중국락양군관학교 조선인반 2기생으로 들어갔고 문익환은 숭실중학교 4학년에 편입하였다.9월 윤동주는 편입시험에 실패하여 숭실중학교 3학년으로 편입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송몽규와 윤동주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윤동주는 광명중학교에,송몽규는 대성중학교에 편입되였다가 1938년4월 둘은 북간도에서 유일하게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윤동주와 은진중학교2.jpg

 
왼쪽사진-숭실중학교때 윤동주(뒷줄 오른쪽 첫번째,뒷줄 가운데 문익환)
오른쪽사진-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윤동주와 송몽규
(왼쪽 첫번째 윤동주-광명학원시절/오른쪽 첫번째 송몽규-대성중학교시절)
 
 
일찍 윤동주와 은진을 같이 다녔던 문익환목사는 <은진에서 우리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분은 력사와  한문을 가르쳤던 명의조(明義朝)선생이였다.그는 동경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분으로서 력사를 가르키면서 민족의 독립과 조국의 광복을 일깨워주신 분이였다>고 회고했다.명의조선생은 항상 전통민족복장차림으로 다니면서 학생들에게 민족적 기개를 품게 하였으며 상해,남경,제남 등지에서 활동하던 저명한 독립운동가들인 김구,리웅 등이 이끄는 반일민족독립단체들과 련계를 갖고 있었던 인물로서 대단한 애국자였다.송몽규를 락양군사학교로 보낸것도 명의조선생이였으며 그가 가르쳤던 학생들 중에는 동북항일투쟁에 참가하여 중공동만특위 조직부장 겸 중공연길현 제1임서기로 있었던 김성도도 있었다.
 
명의조선생은 1938년 체포되여 서울서대문형무소로 압송되여 갔다.
 
 
은진중학교시절의 윤동주는 다방면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축구도 잘했으며 재봉질도 곧잘 잘해 축구부선수들의 유니폼도 그가 직접 만들어 왔을정도라고 했다.교내 잡지를 만들랴 밤새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으며 내성적인 성격에 반해 웅변대회에 나가 “땀 한 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까지 하였다고 한다.의외로 수학도 잘하였으며 뭐니뭐니 해도 그는 문학소년이였다.

 
윤동주와 은진중학교3.jpg
 
 
 
 
'영국더기'로 올라가는 두갈래 길.(오른쪽 사진 건물이 '제창병원'옛터)
 
 
 
왼쪽 사진 길로 곧게 올라가면 바로 '명신녀자학교'로 통했다.오른쪽 길로도 은진중학교로 다닐수 있었다.
아마 윤동주는 자택에서 이 길을 오르고 내리고 걸어다녔으리라...
 
당시 윤동주를 키웠던 은진중학교는 어떤 학교였을가?
 
 
1905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합방’등 불평등조약으로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채  일제의 침략하에 허덕이게 되였다.
 
당시 중국으로 망명해온 수많은 우국지사들과 반일민족투사들은 룡정에 들어와 앞다투어 학교를 세워가고 있었다.

 
윤동주와 은진중학교4.jpg
 
 
왼쪽사진- 새로 낸 도로로 인하여 '영국더기'는 허리가 뭉텅 잘리웠다.
오른쪽사진- '영국더기' 일각
 
(오늘의 '영국더기'에서는 당년의 위용을 전혀 찾아볼수 없다. 새로 낸 도로로 몸퉁이가 두동강이 나 있고 옛 건물들은 하나도 찾아볼수도 없다.설상가상으로 새로 선 아파트며,나무들로 한 눈에 바라볼수도, 사진에 담을수 없다.)
 
(팻말조차 없는 '영국더기',누가 이곳에 그것도 100여년전에 최신의료기술을 자랑하는 '제창병원'이 있었으며,최고의 시설을 갖추고 최고의 교수진으로 수많은 인재들과 항일투사들을 길러낸 민족교육문화의 요람인 은진중학교가 있었으리라 상상이나 하랴...)
(恩眞은 훗날 세계적인 시인 윤동주를 배출하는 영광을 안게 되였다.)
 
당시 룡정동산(東山)에는 일본인들도 마음대로 손을 댈수 없었던 ‘치워법권’인 특수 지역이 있었다.바로 영국조계지인 ‘영국더기’였다.’영국덕이’란 영국사람들이 살던 언덕을 줄인 것으로 일제시대 ‘영국국적’을 지녔던 카나다장로회 선교사들이 살던 동네라는 뜻이다.바로 카나다장로회 룡정 선교부(mission station)가 있었던 곳이다.
 

 
윤동주와 은진중학교5.jpg
 
 
1910년대 초 선교 차 말을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는 구례선(로버트 그리슨)목사와 부인 레나.
나룻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고 있는 영국국적 카나다 선교사들,
이들은 룡정에 와서 제창병원을 세웠으며 학교와 교회를 륙속 세웠다.
 
캐나다장로회는 1907년 룡정 선교에 착수한 후 교인이 늘어나자 1913년 바커(한국명 박걸)선교사를 룡정주재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계속해서 1914년 푸트(부두일)와 1915년 마틴(민산해)등을 파송하였다.이들은 룡정 동산언덕에 1만여평 대지를 구입하고 선교사 사택과 병원(제창병원),학교(은진중학교,명신녀학교),교회(동산교회)등 건물을 지었다.이때로부터 이곳을 ‘영국덕이’라 불렀다.
 
1920년2월4일 부두일의 노력으로 은진중학교가 설립되였다.<하나님의 은혜로 진리를 배운다>라는 뜻의 은진(恩眞)은 개학당시 학생은 27명,제1교장에는 부두일,학감에는 리태준,고문에는 김약연,리병하,박래수였다.교사는 잠시 성경서원 2층을 사용하였고 수업과목은 자연과학을 위주로 성경,영어,한문 등을 배워주었으며 학제는 5년이였다.
 
 
부두일이 학교를 설립하여 학교건축을 시작하였지만 1920년12월에 귀국한 관계로 제2임교장인 빠제브(박걸부)목사가 부임되여 왔고 1921년 여름 건평이 600평방메터 되는 3층짜리 교사를 건축하고 나서야 옮기게 되였다.
 
 
1922년4월 일찍 훈춘일대에서 선교사업과 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사업에 종사하였던 서고도(소크트)선교사가 제3임교장으로 부임되였다.대뜸 학교는 명성에 걸맞게 조선과 북만,로씨야 연해주 등지에서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300여명을 넘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1925년9월 서고도(스크트)교장이 조선으로 전근되고 페레스목사가 제4임교장으로 부임되였다.리사들로는 남존경명신녀자학교 교장),김약연,리병하,김내범,문재린등이였다.
 
1927년 4월 150여명의 학생들은 종교와 수업의 분리를 요구하면서 집단퇴학을 선포하고 동흥중학교와 대성중학교로 집단전학하였다.하여 은진중학교에는 신도들의 자제들만 몇십명이 남게 되였다.
 
 
1930년 은진중학교도 기타 룡정중학교 학생들과 같이 <일제의 노화교육을 반대한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웨치면서 시위행진을 벌렸다.
 
 
1934년5월 페레스가 귀국하자 빼훈목사가 은진중학교 대리교장으로 왔다.새로운 실험기재를 구전히 갖추었으나 1936년2월부터 만주국 교육부의 지령에 좋아 공과학교로 고치고 토목과와 건축과를 두었다.1937년12월에는 교육권 이양식까지 거행하게 되였다.
 
1938년4월 만주국민생부대신으로부터 공과은진중학교로 윤허를 받자 종교교육은 정식으로 페지되였다.
 

 
 
윤동주와 은진중학교6.jpg
 
 
 
왼쪽으로부터
 
 
 
사진1: 현, 룡정시 4중학교 내에 있는 은진중학교 기념비
 
사진2: '영국더기'에 있었던 '명신녀자학교'옛터
 
사진3: 현, 룡정시 4중학교 동쪽(은진중학교 옛터)
 
 
 
 
 
이때 페레스가 다시 돌아왔으나 1940년12월 부득불 교장직에서 사직하고 리태준에게 학교사무를 맡기고 귀국하였다.그때 박종렬(朴宗烈)이 제6임교장으로 되였으나 일제한테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였다.영국인과 카나다선교사들이 떠나자 일본관동군 진규시(神宮司)부대가 진주하여 학교를 점령,병영으로 만들었다.
 
 
1942년3월 은진중학교는 만주국교육부의 지시로 간도성제3국민고등학교로 개칭하고 1943년초에는 일본인 히다까겐조(日高健三)가 제7임교장으로 부임하면서 교권은 완전히 일제에게 넘어갔다.
 
 
1945년초 일본인 마에다유베몬(前田右部門)이 제8임교장으로 부임되여 왔고 학교는 일본군에게 빼앗겨 합성리영림서자리로 이사갔다.
 
 
1945년8월 최시학(崔時學)선생이 은진중학교 제9임교장으로 부임하였다.그해 겨울 학교명을 <흥민중학교>로 고쳤다가 1946년2월 다시 원래 학교명으로 고쳤다.
 
 
1946년9월16일 룡정의 6개중학교는 하나로 합쳐 길림성룡정중학교로 거듭났다.
 
 
총적으로 카나다선교사들은 ‘영국더기’에다 <동산교회>와 <제창병원>을 세워 선교활동과 치료를 병행하였으며, <은진중학교>,<명신녀자학교>를 세우면서 계몽교육활동과 남녀평등을 실현하기에 노력하였으며 특히 조선인들의 반일투쟁,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7.jpg

은진중학교에서 열린 명신녀자학교와의 합동체육대회
 
 
 
윤동주가 다녔을 시 은진중학교는 ‘치외법권’지역이였으므로 ‘특수성’을 누렸을뿐만 아니라  명의조(明義朝)같은 교사의 밑에서 민족주의에 한층 눈을 뜨게 되였으며 문학에 더욱  증진할수가 있었다.
 
 
윤동주의 작품생애에서 처음 ‘1934년12월24일’으로 기록된 ‘초한대’, ‘삶과 죽음’, ‘래일은 없다’ 3편의 작품도 바로 이 시기에 태여났다.
 
 
이때 윤동주와 한집에,명동소학교서부터 줄곧 문학소년이였던 고종사촌간인 송몽규는 1935년1월1일자 [동아일보]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응모하여 <술가락>이 당선되였다.은진중학교3학년 학생이 일반인들과 겨뤄 당당하게 저명한 신문의 신춘문예에 이름을 올린 쾌거였다.이는 송몽규 자신에게도 고무가 되였을뿐만아니라 윤동주에게도 큰 자극이 되였을것이다.
 
 
초 한대
 
윤동주
 
 
초 한대-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버린다.
 
 
그리고도 책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초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가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1934.12.24
 
 
오늘의 윤동주가 있기까지 태여나서 자란 명동촌,가정배경 그리고 매 시기마다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恩眞 또한 윤동주의 성장과정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수 있다.
 
 
2013년4월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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