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눈과 시의 몸 /박남희
잠결에
시가 막 밀려오는데도,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
지구라는 이 알이
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
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
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
온몸을 물들이는 무한,
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
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
잠을 청하였으니......
(쓰지 않으면 없다는 생각도
이제는 없는지
잠의 품속에서도
알을 부화한다는 것인지)
―정현종, 「시가 막 밀려오는데」전문(『세계의 문학』2003년 겨울호)
필자의 경험으로도 잠결에 기가 막힌 시가 몰려올 때가 있다. 필자 역시 인용 시에서처럼 한번도 좋은 시를 얻은 적은 없지만, 이것은 누구나 흔히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체험이기 때문에 쉽게 공감이 간다. 그런데 시인이 잠결에 본 시의 형상은 그리 간단하게 설명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자신이 잠결에 본 시를 "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지구라는 알이/알 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시간이 영원히 온통/ 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 "무슨 푸르른 공기의 우주/ 통과하지 못하는 물질이 없는 빛,/그 빛이 만드는 웃고있는 무한"이라는 복잡한 수식어로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를 간명하게 간추려보면, 시인이 잠결에 본 시는 푸르른 공기와 투명한 빛을 받고 있는 알(지구)속에서 깨어나는 환희에 찬 생명, 즉 "웃고 있는 무한"이나 '우주'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시의 육체는 종종 형이상학적 상상력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시를 써야 시가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정현종 시인은 시는 쓰지 않는 곳에서도 존재하고 잠 속에서도 존재한다는 사유에까지 나아간다. 이러한 사유는 라캉이 "나는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하고,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고 한 말과 유사한 맥락에서 읽힌다. 이처럼 시의 몸은 일상적 물질성을 뛰어 넘는 차원의 물질성을 지니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
구례 화엄사에 가서 보았다
절집 기둥 기둥 마다
처마 처마 마다
얼음 송송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그 속에서 누가 혈거시대를 보내고 있나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개미와 벌과
또 그들의 이웃 무리가
내통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화엄은 피부호흡을 하는구나
들숨 날숨 온몸이 폐가 되어
환하게 뚫려있구나
그날 밤 누군가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잠을 털고 일어나 문을 열어 젖혔다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
별들이 환한 박하향을 내고 있었다
―손택수, 「화엄에서」전문(『애지』2003년 겨울호)
이 시는 제목부터 낯설다. "화엄사에서"가 아니고 "화엄에서"라니? 화엄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고 하나의 관념이다. 시인은 '화엄'이라는 관념에 육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화엄이란 구멍이 많다"는 진술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화엄'은 관념이지만 시인에게는 구체적인 육체로 읽히는 것이다. 물론 시인은 화엄의 육체성을 화엄사라는 대상을 통해서 환유적으로 읽어낸다. 시인은 절집 기둥과 처마에 송송 뚫려있는 구멍을 통해 개미와 벌이 서로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통해서 '화엄'의 실체를 인식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화엄'이라는 불교 사상 역시 자아와 타자의 '관계' 즉 열린 차원의 소통을 강조하고 있지 않은가? 시인의 이러한 사유는 급기야 절터에서 벗어나 우주로 향해있다. 시인은 하늘에서 박하향을 내며 반짝이고 있는 별들을 "창문 앞 물오른 나무들이/ 손가락에 침 묻혀/ 첫날밤을 염탐하듯/ 하늘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시인은 자아라는 견고한 육체성을 허물고 그 곳에 '관계'의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곳에서 화엄의 육체성을 발견한다. 이처럼 물질이 아닌 것을 물질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내 눈 속에 나비 한 마리 살고 있다
부신 햇살을 타고 어느 먼 풀밭이 문득 내 눈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풀꽃만한 나비 한 마리가 그 속을 종일 날고 있다
(중략)
어느날 내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 그는
문득 날아와 다시 어룽대기 시작했다
더듬이를 비비고 은빛 날개를 턴다
행간이 뿌옇다
흰 벽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그는 나와 그것들의 행간에서 어룽거렸다
나는 그를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부르기로 했다
―홍승주, 「내 눈 속으로 들어온 나비」부분( 『리토피아』2003년 겨울호)
눈에서 나비같은 것이 어룽거리는 현상, 즉 환시 현상을 시인은 자신의 눈 속에 나비가 살고 있다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의사는 이런 현상을 "망막에 이상이 생겨 맺힌 像"으로 설명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그것이 '나비'로 인식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사라졌던 나비가 "바르트의 텍스트를 펼쳤을 때"다시 나타난 것일까? 시인이 바르트를 읽는 의도는 아마도 어떤 규칙이나 문법에도 얽매이지 않는 롱랑 바르트의 자유로운 글쓰기로부터 어떤 자유를 배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바르트가 모든 글을 하나의 기호로 인식했듯이 시인 역시 나비를 하나의 기호로 인식하고 있다. 이 시에서 '나비'라는 기호는, 그러나 자유와는 상반되는 '검열'로서의 기호이다. 나비는 시인이 "흰 벽과 같은 세상과 마주할 때"나 "흔들리는 길 위에 있을 때" 시인의 눈 속에 나타나서 경고의 신호를 보낸다. 시인이 환시 현상을 "검열하는 어룽나비"라고 명명하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자기 검열을 통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일 것이다.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달콤한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게 된 남자, 생각 끝에
구름수풀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주었지
강변에 앉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는 여자와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는 강물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혔지
물 항아리 속 웅숭깊은 우렁각시 그 여자, 날마다
남자의 빈집으로 동그랗게 소반을 차리러 가지
그녀가 나간 사이
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지
저녁의 붉은 강물이
그녀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 빠져나가고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가 빠져나가지
달콤한 도넛구름이 빠져나가지 남자가 빠져나가지
우렁이 껍질 같이 가벼워진 물 항아리만 물 위에 두고
그녀가 빠져나가지
―류인서, 「구름도넛」전문(『현대시』2004년 1월호)
류인서의 「구름도넛」은 처음엔 따뜻하게 읽히다가 차츰 서늘하게 읽힌다. 그것은 이 시가 허무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삶의 과정으로서의 여성성을 파노라마처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1연은 담배를 끊고부터 그녀에게 구름도넛을 만들어줄 수 없는 남자가 그 대신 구름수풀을 헤적여 반지를 건져다 준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시의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결코 황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이 시의 둘 째 연에 나오는 우렁각시 설화와 만나면서 시적 진정성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연의 중심 이미지인 '구름도넛'과 '반지'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일까? 사내가 그녀에게 만들어준 '달콤한 구름도넛'은 남편에 대한 그녀의 달콤한 환상의 환유이고, '반지'는 둥글다는 이미지 속에 일종의 성적인 메타포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읽힌다. 즉 1연은 신혼의 환상을 잃어버린 아내에게 남편이 그 대신 성적인 즐거움을 준다는 줄거리로 요약된다.
그렇기 때문에 강물도 "잠시 흐름을 멈추고 물비늘의 반짝임 속으로 몸을 숨기"고, 그들은 "반지의 동그라미 속에 찰랑찰랑 함께 갇"히는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2연에 오면 여자는 우렁각시가 되어 남자의 빈집으로 소반을 차리러 가게 되는데, 여기서의 '남자'는 문맥상으로 보면 1연의 '남자'인 남편이 아니라 다른 남자 즉 외간남자로 읽힌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나간 사이/동그라미 속 동그마니 남은 마음들 살금살금 실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2연은 남편에게서 떠나가는 그녀의 마음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3연에 오면 그녀의 여성성은 거의 황폐화되고 그녀의 존재의 집이었던 '물항아리' 역시 그녀가 빠져나간 후 우렁이 껍질처럼 가벼워져서 물위에 둥둥 떠있게 된다. 우리는 3연에서, 그녀의 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저녁의 붉은 강물"이 여성의 폐경을 암시해주고 있다는 것과, "개망초 떨리는 꽃빛"이라든가 "잠 속에서도 젖지 않는 비오리 속날개"에서 젊은 여성이 가지고 있던 사랑의 감정이나 꿈, 또는 희망의 은유를 읽어낼 수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소멸되어 가는 여성성과 아프게 대면하면서 여성의 존재성을 반추해 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노력은 어떤 결론을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과정 속에 배치되어 있는 내밀한 시의 육체성을 읽어내는 재미만으로도 이 시의 존재이유는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밖에 필자가 관심있게 읽은 시들은 이나명의 「왜가리는 왜 몸이 가벼운가」(『현대시』 2003년 12월호)와 김경인의 「거울을 만드는 사람」(『세계의 문학』 2003년 겨울호), 김행숙의 「한 사람」(『애지』 2003년 겨울호), 안명옥의 「먹구름」(『불교문예』2003년 겨울호) 등이다. 이들 시 역시 좋은 시의 눈과 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면관계상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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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걸린 시어머니
―진효임(1943∼)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명주 베 보름새를 뚝딱 해치우시던 솜씨 좋은 시어머니가
팔십 넘어 치매가 왔습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손발은 말할 것도 없고
방 벽에까지 그림을 그렸습니다.
대소변도 못 가리시면서 기저귀를 마다하시던 시어머니,
꼼짝 없이 붙잡힌 나는
옛날에 한 시집살이가 모두 생각났는데,
시어머니가 나를 보고.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허요, 용서해 주시요 잉.
공대를 하는 걸 보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니 시집살이도
나만큼이나 매웠나 봅니다.
이제는 전설 속에나 있을 캐릭터, ‘눈도 못 맞추게 하시던 무서운 시어머니’가 등장한다. 시인의 연배가 짐작되는 대목이다. 위 시가 실린 시집 ‘치자꽃 향기’에서 시인 소개를 보니, 시인은 열여덟 살에 결혼했다. 사십여 년, 그 긴 세월을 매운 시집살이 시키던 시어머니, 치매가 와서도 유난해서 시인은 ‘꼼짝 없이 붙잡힌’다. 시인도 젊지 않은 나이, 새삼 옛날 생각에 미운 생각이 버럭 나기도 하고, 어쩌면 고소하기도 하고, 만감이 교차하는데, ‘엄니, 엄니 제가 미안 혀요, 용서해 주시요 잉.’ 이 한마디에 마음이 풀린다. 치매 걸린 시어머니 눈에 나이 든 여인이 며느리가 아니라 시어머니로 보인다. 치매로 상한 머리에도 그 오래전 무서움이 지워지지 않는 시어머니! 우리 어머니들, 그렇게 제 며느리한테 호랑이 노릇 톡톡히 하고는 늙은 몸을 푹 맡겼단다. 고부(姑婦)간에 대를 물려 그랬단다.
진효임은 일흔 다 돼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한글을 배우니까 즐거운 일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좋은 건 머릿속 생각들을 내 손으로 직접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치자꽃 향기’ 앞머리에 적힌 ‘시인의 말’이다. 평생 소리(말)로 날려 보냈던 생각들을 이제 그림(글)으로 남기는 도취감! 소리를 붙잡아 앉히는 두근두근함을 그의 시 곁에서 숙연히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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