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극단에 처해 있을 때 평범한 생활이 ‘위대한’ 평범한 생활이었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 박찬일, 시집『모자나무』 6 아포리즘 기타 중에서
자신의 시론을 가지고 있는 시인은 행복할 것이다. 이 말은 어떤 시인들은 자신의 시론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함축하고 있다. 시의 경향이 다르고 시를 다루는 기법이 다른 까닭은 시의 정의와, 더 나아가서 시의 핵심인 언어에 대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시의 정의가 다양하고 언어의 쓰임새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여러 갈래인 까닭에 작품의 좋고 나쁨을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시, 훌륭한 시가 존재하는 것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뚜렷한 시론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우리는 좋은 시, 훌륭한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시인 앞에 주어진 오브제를 직관적으로 통찰할 때 빚어지는 찰라의 아름다움을 붙잡을 수도 있고, 시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이미지를 선연하게 그려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경우에 시인은 대상이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만일, 대상이 시인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될까? 詩心이나 詩興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여행을 할 것인가? 노련한 낚시꾼은 이무 곳에나 낚싯대를 드리우지 않는다. 자신이 잡고자 하는 어종에 따라서 장소에 따라서 미끼를 선택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론이란 그런 것이다. 한없이 미끄러져 나가는 이미지와 메시지를 붙잡기 위해서 詩作의 목적과 효용성을 분명히 자각하는 것과, 이미지와 메시지를 포획하기 위한 그물, 즉 언어의 쓰임새를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다.
창작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시론이 없어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직관력만으로도 훌륭한 시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약관의 나이에도 세계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꿰뚫어보고 살아보지 않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 언어의 쓰임새를 궁구하지 않았어도 呪術과 念力으로 獅子吼를 토해낼 수가 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의 작품 세계는 얼마든지, 충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명되거나 이해될 수 있다. 논리적 설명이나 이해의 근저에는 시인의 고정되어 있으나 투명한 詩眼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 만물을 바라보되, 투명하고 명확하게 초점을 맞추는 것, 그것을 詩論이라 이른다면 너무 억지를 부리는 것인가?
생각을 뒤집어 놓고 보면 확고한 레이더 (시안이나 시론이라 불러도 좋다)를 장착하고 그 레이더에 포착된 관념을 형상화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장은 주목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자신의 시론을 정립해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시를 쓰는 것이 배설과 타인에 대한 훈도의 목적을 배제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인격을 가다듬고, 혼탁한 세상을 맑게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는 나만의 시론을 가지고 있는가? 이미 자신의 시론을 가지고서 창작에 임하는 시인들은 행복할 것이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자신의 시론을 가지지 못한 시인들이 불행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난 후에, 나는 나의 시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할 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지금은 나의 시론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따라서 시인으로서 행복한 지 아닌 지 불명확한 상태라고 해야겠다. 오늘날의 시인들은 과거의 시인들에 비해서 높은 대접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先知者의 역할도, 세상과 삶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증언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시와 시인의 역할은 다양한 표현 매체의 출현으로 계속 축소되어가고 있으며, 이 추세대로라면 가까운 미래에 문학이라는 장르가 소멸해버릴 것이라는 불길한 전망 앞에 놓여 있는 처지를 놓고 보면 나는 분명 불행한 자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외적인 요인 말고도 더 불행한 사태는 시인이 지니고 있는 비극적 성향에 기인한다. 예술의 숙명이 그러하지만, 시도 평온한 일상의 뒷면을 들춰보거나 평범 속에 가리워진 불안을 노래하는데 관심을 기울인다. ‘아름다운 꽃’ 이나 ‘노래하는 새’를 부정하고 ‘꽃이 피는 이유’와 목청을 돋우는 새의 ‘신호 해독’에 더 눈길을 준다. 갈수록 부조리해지고 해체되어 가고 있는 세계에서 시인인 ‘나’는 불안하고 부조리한 세상을 증언해야 하는 억압에 시달린다. 나의 시 「벚꽃 축제」에서 벚꽃이 떨어지면서 생화임을 주장하는 까닭은 이 세상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造花’가 판치는 세계임을 증언하는 것이며, “죽을 때까지 사랑한다고/ 나는 그 끝마저도 / 뛰어넘고 싶다” -시 「아침에 전해준 새소리 부분」 -처럼 일차적인 새의 지저귐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모든 생명은 ‘울부짖음’을 내포하고 있다는 자각을 증언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게 되기 때문이다. ‘否定’과 낯설음‘을 통과하지 않은 시들은 그 절실함에서 격이 떨어진다. 부정을 통한, 부정을 넘어서고 난 후의 평화와 안락을 노래하는 시는 시인과 더불어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섣부른 달관과 자연에 대한 찬미는 시의 한 덕목인 眞正性과 ‘상상력의 총화’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이 시대는 분명히 이 시대만이 가지고 있는 傾向性을 지니고 있다. 시인들은 분명히 이 경향성과의 싸움을 마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경향에 편입되거나 끝까지 자신의 주관과 시대의 흐름과 길항하는 것, 그 모두가 시인에게 주어진 싸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내가 나의 삶을 타인에게 맡길 수 없듯이 내 삶의 증언을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는 까닭에 아무리 사소하고 버려질 만한 것이라도 나의 삶을 증명하고 반성하는 도구로서 시는 충분히 불행해져야 할 것으로 믿는다.
단풍나무 그늘이 소인처럼 찍힌
주유소가 있다 기다림의 끝,
새끼손가락 걸 듯 주유기가 투입구에 걸린다
행간에 서서히 차 오르는 숫자들
어느 먼 곳까지 나를 약속해줄까
주유원이 건네준 볼펜과 계산서를 받으며
연애편지를 떠올리는 것은
서명이 아름다웠던 시절
끝내 부치지 못했던 편지 때문만은 아니다
함부로 불질렀던 청춘은
라이터 없이도 불안했거나 불온했으므로
돌이켜보면 사랑도 휘발성이었던 것,
그래서 오색의 만국기가 펄럭이는 이곳은
먼길을 떠나야하는
항공우편봉투 네 귀퉁이처럼 쓸쓸하다
초행길을 가다가 주유소가 나타나기를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여전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
[감상]
마지막 구절 "그리운 것들은 모든 우회로에 있다"는
구절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사랑은 휘발성이라고 믿는다
휘발유와 첫사랑의 공통점은 쉬이 닳아 없어진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진한 흔적이 남는다.
라이터 없이도 폭발할 수 있었던 불온한 사랑도
한 시절이 지나고 나면 귀 닳은 편지봉투처럼
시들해지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이 휘발(揮發)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억이거나 혹은 불면의 가슴앓이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먼 길을 떠나는 중이다.
저 모퉁이를 지나노라면 우회로에
몇 개쯤의 주유소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추억은 늘 가슴 아픈 법이다. [양현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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