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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화폭같은 이미지를 잘 구사할줄 알아야...
2017년 05월 02일 09시 43분  조회:2719  추천:0  작성자: 죽림

섬세한 서정과 이미지

전 종 봉 ( 문학박사, 서일대학 부교수 )  

1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이가 많다. 위기는 많은 원인을 내포하기에 나름의 진단과 처방으로 평자들 역시 분분하다. 더러는 원인을 작가들에게 찾고, 더러는 문학을 외면하는 독자들에게 돌리고, 아니면 작가와 독자를 아울러 편한 것만 찾는 가벼운 시대를 탓하기도 한다. 문학이 위기라면 시의 위기는 말할 나위 없다. 위기는 시를 찾는 이가 점점 줄어든다는 말일 것이다. 수험용 독서와 글쓰기가 아닌 시가 좋아 시집을 열독하는 문학소녀나 작가 지망생을 자처하는 문학 청년은 보기 힘들어졌다. 대학마다 문학 동아리가 명맥을 유지하나 문학적 탐구의 치열성이 약화된 느낌이다. 밀란 쿤데라가 말한 ‘속도의 엑스터시’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책읽기는 점점 부담스러운 작업이 되었다. 더구나 모호성, 다의성으로 대상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시는 즉흥적인 영상시대에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다. 
실험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을 거쳐 해체전략이 주무기인 후기모더니즘에 이르는 동안에 시는 더욱 어려워졌고 독자 대중은 한층 멀어져갔다. 위기에 처하면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있음을 역사에서 배운다. 종교의 위기가 오면 원리주의자들이 득세하고, 민족의 위기가 오면 새삼 민족의 뿌리에 눈을 돌리게 되듯, 시의 위기라면 시의 근원적 특성을 되새겨 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시의 본질적 요소에 바탕을 두며 추출해본 박강남 시인의 특성적 사항을 중심으로 시인의 시를 감상해 보고자한다. 

2  
  상호 교감이 예술의 속성이지만, 시와 그림의 연결은 더욱 자연스럽다.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시심이 일고, 시를 읽으면 그림이 떠오른다. 그러기에 ‘시화전’이라는 정감 있는 장르가 가능할 것이다. 박강남 시인의 시 중엔 읽으면 그림이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시적 이미지에 강점을 지닌 시인임을 암시해준다.
주지하다시피 시의 근원적 특성 하나가 이미지 창출이다. “시는 그림이다”라는 말은 시에 있어서 이미지 구축작업이 시적 생명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임을 말한다. 선명한 이미지는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 언어이다. 거기에 복잡한 해석이 필요 없고 구구한 주가 딸리지 않아도 된다. 
박강남 시인의 시적 이미지는 다채로운 색상의 조화가 우선 두드러진다. 

사랑한다는 말
소리 내어 말한 적 없어도
한 곳에 서서
푸르게 푸르게
그대 바라보다가
저 혼자
누런 잎 떨구는 
소나무인 것을요.
(‘아시나요’ 1연)

  무언의 고백을 색감으로 잡아 풀어놓은 한 폭의 수체화이다. 푸른 색과 누런색의 대비는 탄탄한 구조를 만들어 주는 시적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화자의 섬세한 내면적 경험을 푸른색이라는 단색으로만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 풋풋한 정서가 미세한 파동을 이어가며 가녀린 마음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누런색으로 포착함으로써 견실한 이미지를 제시하고 있다. 푸른색과 누런색의 상징성이 첨가되어 시는 다의성이 내포된 더욱 알 찬 구조를 이루게 되었다.

  기차가 들어온다는 신호등은
여름 한 낮 해로 돌아
부산해진 철도원이
긴 차단기로 건널목을 철컥 잠궈
또 다른 경계가 된 길 저편은 
빠-아-앙
소리위에 한 점 섬으로 떠 있어
(‘나팔 부는 하루’ 1연)

  나른한 오후 기차가 통과하는 동안 잠시 차단되는 건널목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여 생생하게 전달해주지만 인용된 부분만 보면 정적인 사상(寫像)이다. 
모더니즘의 한 부분을 장식하였던 이미지즘은 직접적인 이미지 제시로 선명한 시적 정서를 전하지만 단조로운 풍경묘사에 그칠 위험이 있다. 시를 풍요롭게 하는 상징에 바탕한 다의성 창출에 한계를 보이는 시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문학사에서 이미지즘의 단명 요인 중의 하나로 지목된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다음 인용하는 후편은 이 단조로움을 깨는 한 차원 고양된 이미지이다. 

  초록뱀이 꼬리를 흔들며 바삐 사라지자
잠시 흐름이 멎었던 강물은 섞여지고
남은건 문명이 흩뿌리고 간 멍멍한 귀울림 뿐
나팔꽂은 그 소리를 먹고 크는지
사열 끝난 철길을 향해
모두가 나팔을 부는 하루의 정점
(‘나팔 부는 하루’ 2연)

  초록뱀과 나팔꽃의 붉은 색으로 채색된 선명한 이미지가 전반의 다소 권태로운 분위기를 깨며 시적 긴장을 유발한다. 전반부의 정적인 분위기와 후반의 동적인 상황이 대조되는 구조로 상호 효과를 견인하고 있다. 섞여지는 동적 동작에 가려 선명하지는 않지만 강물 역시 맑고 푸른 색감적 이미지로 시가 더욱 생기 있게 하는 내적 구조를 만들고 있다. 나팔꽃의 붉은 색조는 무언가 경청하고 무언가 외치는 강렬함을 준다. 
  이러한 생동적 이미지에서 풍기는 강렬함은 시인의 시에 대한 열망으로도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박강남 시인의 시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여러 시에서 쉽게 감지된다. 

   지리산 화가의 전시회를 보고
   송도 바다를 들이킨 밤

   파도 소리로 추임새를 넣으며
   창(唱)으로 삶을 울어예는 소리꾼과 

   붓만 들면 지리산을 온통
   불바다로 만드는 고독한 고호와

   늙어버린 시를 배고프게 줍는 나는 
   별빛만 축내고

  달빛을 기울여 그 밤에 마신 건
  송도 바다와 갈매기 소리였어
  (‘밤바다에서’ 전문)

  화폭 같은 이미지를 구사하는 시인과 화가의 전시회는 자연스러운 어울림으로 다가온다. 
빈센트 반 고호(Gogh, Vincent Van)는 자기 응시의 작가였으며 그가 그린 많은 작품이 그의 정신적인 자화상이었다. 외부의 사물을 자신의 내부에 용해시켜 강렬한 화필로 고뇌에 찬 내면의 세계를 표출하였던 고호를 시어로 활용함으로써 시인이 추구하는 시 세계의 열망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붓만 들면 지리산을 온통 / 불바다로 만드는”에서 투사된 이미지는 고호가 그의 생애 중 가장 왕성한 창작력을 발휘했던 시기에 발표한 화염과 같은 강렬한 “해바라기”를 연상시킨다. “별빛만 축내고”라는 비하적인 발언은 역설적으로 시인의 시에 대한 높은 이상을 가늠케 한다. 어두운 미완의 밤바다에서 자기 예술에 혼을 쏟았던 고호는 시인의 예술적 등대이기도 하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고층 아파트 등 뒤에서
너울너울 타오르는 불덩이를 만난다.
급히 가면
그 불덩이를 혹시 받을까
속력을 내 달려오니
연기도 피어오르지 않는데
산만 여울여울 불타고 있다
(‘일몰’ 일부)

  이렇게 등장하는 불덩이의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에 불타는 모닥불이 있음을 알린다. 그 모닥불의 근원이 무엇이든 시로 유입된 모닥불은 시혼으로 승화되어 간단없이 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불덩이를 피함이 아니라 달리는 자동차로 불덩이를 맞이하려는 열망을 보여준다. 그 불덩이는 고호를 불태웠던 예술혼이며 시인이 갈망하는 시혼으로 여겨도 무방한 것이다. 
  많은 경우 예술가의 고독은 바로 예술에의 열망, 예술혼에 사로잡힘이다. 예술혼에의 고독이 때로는 고뇌가 되고 고통이 되기도 한다.

   이따금
울타리에 가두십니다.
그 울타리에 기쁘게 들어 앉아
소나무가 되어 별빛 달빛을 받습니다.

중략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바라지 않는다 하여
정-말 원하는 게 없는 것은 아니어요.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당신의 맑은 물살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섬’ 일부)

  섬으로 상징된 시인의 고독과 바람이 형상화 되어있다. 시인의 숙명인 고독에 침참하여 순응한 듯하지만 강한 바람이 있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바라는 ‘맑은 물살,’ 그것은 예술적으로 승화된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은 모든 예술가의 보편적 희구이며 예술적 고독의 지향점이다.

3  
   박강남 시인의 또 다른 시적 특성 중의 하나는 섬세한 서정성이다. 단시에 있어서 서정성의 확보 역시 시를 읽을만한 시로 만드는 본질적 요소이다. 
‘낭만적 서정성’이라는 용어는 본래 개인적 경험과 감정에 크게 의존한 듯이 보이는 위고(Hugo), 라마르틴느(Lamartine), 뮈세(Musset), 드비니(de Vigny)등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서정시에서 유래되었다. 극히 주관적인 시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말이다. 따라서 개인적 서정을 잘못 다루면 감정 과잉 노출이나 거북한 사적 정서의 남용이라는 부작용이 우려된다. “시는 개성으로부터 도피”라고 한 엘리어트의 명제는 낭만적 서정성의 이러한 부적 기능을 염두에 둔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 정서나 감정을 어떻게 시적으로 변용시키느냐가 시인의 역량이며 시적 상상력의 역할이다. 
  그러한 위험에도 불구하고 시에 있어서 서정성은 중요하기에 개인적 정서를 다루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작업이다. 적절히 절제되고 시적 변용에 성공한 개인적 정서는 독자의 정서를 자극하여 공감으로 이끈다.

바람벽에 걸어 두면
마르는 줄 알았더니

물기 촉촉 흐르는 채
바라보고 있는 시선
(‘그리움 쫓아내기’ 일부)

일상으로 경험하는 그리움을 쏟아 붇지 않고 정제하여 시의 그릇에 담아낸 구절이다. “바람벽‘과 물기, ”마름과 촉촉“이 주는 대조효과는 절제된 그리움의 크기를 가늠케 해준다. 바람길인 토담집 모퉁이에 엮어 걸어 놓은 푸성귀가 연상되는 1행과 2행은 그리움을 이겨내고자 하는 화자의 마음이다. 모진 다짐의 ’객관적 상관물‘이다. 푸성귀는 걸어 놓으면 바람이 지나며 바짝 건조되지만 그리움은 시들지 않은 배춧잎 그대로임을 3행과 4행에서 담담히 보여주고 있다. 

등불을 내 걸어야겠다
온 밤을 걸어올 그가
길을 잃고 방황하지 않도록
잠들지 말고
지구의 이쪽 끝에서도 불을 밝혀야겠다.
(‘나를 부른다’ 3연)

앞서 인용한 ‘그리움 쫓아내기’와는 달리 강한 그리움을 서술적으로 진술하고 있다. 단조로운 감상에 빠질 염려가 많은 서술적 진술을 적절한 통제와 효과적인 시어 선택을 통하여 시적 진술로 성공하고 있다. ‘등불’의 따스한 이미지와 아늑함 그리고 막막한 어둠 속에서 등대와 같은 방향성은 그리움이라는 모티브에 적합한 시어로 볼 수 있다. 희구하며 깨어있는 경야(經夜), 비난수로 밤을 세는 여인의 이미지로 중첩되어 간절함이 배인 시가 되었다. 
  여기서 시인이 갈망하는 그리움의 정체는 시적 호기심을 자아내는 요소이다. 시인이 염두에 둔 그리움이 무엇이든 독자는 시를 통하여 그리움을 독자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시는 좋은 시다.

사막을 걷다가도
타닥타닥 장작 타는 난로를 빙 둘러 앉으면
사람과 사람사이 온기 흐르고
군고구마 꺼내 놓듯
곰삭은 이야기 접시에 수북이 담아내고
(‘산이 웃고 바람이 달려오고’ 1연)

‘사막’과 ‘난로’라는 역설 속에 시적 메시지가 담겨 있다. 사막은 불타는 곳이지만 생명의 온기가 없는 곳이다. 메마른 인간 세상은 삶의 경쟁으로 불타는 사막이다. 인간미 흐르는 사람 찾아보기 힘든 사막이다. 거기에 난로가 필요하다. 사람이 모여드는 난로,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난로, 난로 주위의 군고구마는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라 누구든 집어들 수 있는 공유물이 된다. 난로의 온기는 모여든 모든 이에게 방사된다. 그곳은 나눔의 장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 곳에 이야기가 꽃피우게 된다. 현대인의 사막은 대화의 단절에 있다. 사라져 버린 이야기의 세계, 그것은 상실된 과거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인간성에 대한 근원회귀의 여망이다.

4
  시에 대한 열정이 시를 향한 출발이라면, 시적 기교는 시를 산출하는 구체적 도구이다. 박강남 시인의 시에 대한 열정과, 시의 근원적 요소인 견실한 이미지 창출력은 그 양자를 겸비한 시인임을 보여준다. 모던풍의 감각은 물론, 복고풍의 전통적 정서에 이르기까지 시의 바탕이 되는 섬세하고 풍부한 서정성은 박강남 시인의 또 다른 강점이다. “새는 노래로 씨를 뿌리고(4월 봄산)”라고 시인이 말한 바와 같이 부단히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부 같은 시인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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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 
―황학주(1954∼)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날이 있다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 묶어주려다
갑자기 바람구멍이 열리자
풍선이 갯벌 위로 끌려 날아간다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싶어 문득 소름 돋는다

간간이 대화를 하며 뭔가 부풀리다
열려버리는 바람구멍
묵은 굴레를 하나도 풀지 못한 채
입김처럼 그것이 사라지는 날이 있다
그 사이 나는 얼음장처럼 얼다 녹는다

색색의 풍선이 떠있는 바다
또 하나 풍선이 터지면
부끄러운 입술 하나가 다물어지는 걸까
풍선 속에 하나 둘씩 별을 묶던
여기, 마음은 그때 가난한 밤을 위한 묵념으로 흐른다

 

 

말이 나를 끌고 멋대로 날아가도
기절할 정도로 좋았던 시절은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
아직도 풍선을 불고 있는
슬픈 입술



 

 

입으로 부는 풍선과 입으로 떠드는 말을 병치시켰다. 풍선을 입술로 살짝 물고 양손 엄지와 검지로 살포시 누른 채 후후! 바람을 불어 넣어 부풀린다. 언제까지 풍선을 불까. 거죽이 팽팽해지도록 최대한 크게 부풀리고 싶지만 한계를 넘으면 빵 터진다. 풍선을 부는 아빠나 보는 아이나 조마조마하다. 드디어 풍선을 다 불어 주둥이를 묶으려는 순간, 아이가 손뼉을 치며 기뻐하려는 순간, 풍선을 놓친다. 로켓처럼 발사돼 갯벌에 떨어져서 푸르릉푸르릉 제풀에 끌려가는 풍선. ‘무슨 말을 저리 온몸으로 하나!’ 


바닷가에서 아이에게 풍선을 불어주다 놓친 경험을 모티브로 자기성찰을 보여주는 시다. 떠드는 즐거움에 취해 말에 이끌려서 얼마나 많은 말을 하고 살아왔던가. 말이 많다 보니 지나치게 부풀리다 묶는 걸 놓친 적도 있었지. 말이 다른 데로 새어버렸지. 애먼 데로 튄 말, 핀트가 안 맞는 말에 어색하게 얼어붙었지. 아, 허풍선이! 입김처럼 사라져버린 말, 말, 말들! ‘풍선 속에 하나 둘씩 별을 묶던’, 말 한 마디 한 마디, 시 한 구절 한 구절에 진실과 아름다움을 새겨 넣던 시절도 있었건만. 겉만 번드르르한 말, 기교만 승한 시! 바다 위에 내가 불어버린 색색 풍선들이 떠다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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