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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허구문제를 알아보다(5)
2017년 05월 05일 23시 22분  조회:2470  추천:0  작성자: 죽림

수필과 형상화(形象化)  이 관 희

 

 

소설문학은 끓임 없이 '형상화'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필문학은 어떠한가? 나는 수필과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생각해 보려고 먼저 내 서가에 꽂혀 있는 몇 권의 문학 이론서들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 서가에 꽂혀 있는 문학이론서들 가운데서 수필과 형상화 문제를 다루는 항목을 단 하나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는 할 수 없이 내가 사는 곳의 큰 거리에 있는 책방 두 곳을 뒤져 보았는데 두 책방에 꽂혀 있는 거의 모든 수필문학이론서에서도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 한 권까지 찾아보던 중에 마침내 수필과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수필 이론서 한 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정주환의 '쉽게 쓴 수필 창작론'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해 보았다. 왜 수필문학이론서들이 '형상화'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을까? 내가 미루어 생각해 낸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문학이론서든지 그 책에서 말하는 모든 내용은 결국은 작품의 '형상화'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내가 마침내 찾아낸 수필과 형상화 문제를 다루는 단 한 권의 수필문학 이론서인 정주환의 '수필 창작론'의 목차를 보면 1장과 2장으로 나뉜 밑에 총 9부의 항목이 들어 있었다. 그 중 형상화 문제는 마지막 9부에서 다루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마지막 9부 이전의 다른 항목들의 내용은 모두 형상화 문제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들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 같은 질문은 차라리 질문으로 성립이 안 된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주환의 수필 창작론의 모든 항목은 작품의 형상화 문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 것들일 것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형상화란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한가? 먼저 '형상화'라는 단어의 뜻풀이부터 찾아보기로 하자.

 

내가 가지는 국어사전에 찾아보니 '형상화形象化'란 "예술활동에서 구체적인 형(形)을 취한 상(像)을 그리는 일"이라고 되어 있었다.

(참고 - 形:<형상形狀형> : 꼴 이룰 형. 형상. 꼴. 모습. 모양. 본뜨다. 나타내다.

像:<꼴 상> : 꼴. 모양. 모습. 사람 짐승 같은 것의 형체를 만들거나 그린 것.

象:<코기리상. 모양 상> : 코끼리. 꼴. 모양. 본떠 모양을 그리다. 象形文字)

이상의 뜻풀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예술활동에서'라는 단서다. 구체적인 형을 취한 상을 그리는 일은 예술활동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얼마 전에 철도파업이 있었다. 그날 나는 꼭 참석해야 할 회합이 있어서 서울까지 외출하게 되었다. 시간이 되어 전철역에 나갔더니 역사 안은 평소와는 달리 그야말로 발 들여 놓을 틈도 없이 승객들로 붐볐다. 파업으로 전철 배차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오랫동안 기다리던 전철이 들어오자 이미 콩나물시루같이 꽉 들어찬 전철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마구 밀고 올라타서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겨우 회합장소에 도착하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전철 사정이 괜찮았느냐고 걱정하였다. 나는 괜찮은 게 다 뭐냐, 30년 만에(이민 갔다 돌아와서) 처음으로 콩나물시루 같은 차를 타 보았다고 방금 내가 겪은 '지옥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내가 말(이야기) 해 준 '지옥철 이야기'는 분명히 방금 내가 겪은 만원전철의 모습을 그려 보여 준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의 그 같은 말(이야기)은 문학적 형상화 작업과 같은 것인가? 말할 것도 없이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국어사전에서조차도 '형상화'라는 단어를 뜻풀이할 때 '예술활동에서'라는 단서를 분명하게 달아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 활동에서의 형상화와 일상 언어생활에서의 형상화는 어떻게 다른가?

내가 콩나물시루 같은 전철 안의 모습을 말로 그려 보여 준 행위는 존재하는 현실의 어떤 특정 사물 자체를 전달해 주는 데 목적이 있는 행위였다. 나는 내가 방금 타고 온 만원 전철이라는 사실 자체를 이야기 해(전달해) 주었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상상의 세계의 사실을 그려 보여 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예술에서의 형상화 작업의 목적은 그것이 시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그리고 수필까지도 존재하는 현실의 특정 사물 자체를 전달해 주는 데 목적이 있는 행위가 아니다.

 

위에서 '수필까지도'라고 한 까닭은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창작되는 문학예술행위이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 수필문학이 겪는 작품성의 질 저하의 문제의 근본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첫째는 수필은 '붓 가는 데로 쓰는 글'이라는 자살 꼴 식의 잘못된 문학이론에 있고, 두 번째는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쓰이는 글이라는 피 할 수 없는 운명론에 있다.

 시에서 '형상화' 문제는 시는 시어를 창작하는 일이므로 시의 형상화 작업이란 시어를 통한 작품의 형상화 작업이라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설은 사건(허구의 사건)을 창작하므로 소설의 형상화란 사건(허구)을 통한 작품의 형상화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무엇을 통해서 작품을 형상화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수필문학도의 대답은 자칫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형상화한다.'라는 오답에 빠지기 쉽다. 이것이 바로 한국 현대 수필 문학사 근 1세기 속에 숨겨진 수필 문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암적 요인이었다.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쓰이므로 당연히 '경험된 사실 자체를 형상화하는 글'이라는 잘못된 인식의 결과 많은 수필 작가들이 '경험된 사실'이라는 것에 묶여 사실 자체를 전달해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 같은 글쓰기와 일상생활에서 의사 전달(Communication)과 다른 점은 단지 말을 문자로 전환한 것뿐이다. 그 같은 수필 쓰기의 반복 누적의 결과 오늘날 수필문학은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저 평가를 받게까지 된 것이다.

만약에 수필이라는 것이 참으로 경험된 사실 자체를 전달해 주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라면 수필은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말(이야기)을 글자로 적어놓은 전신 통신문이나 컴퓨터 화면에 뜬 채팅 문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즉 자신이 경험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문학이 아니다.

  

문학이란 무엇이며 이야기란 무엇인가?

문학과 이야기의 근본 차이는 두 가지로 크게 대별 할 수 있다. 첫째, 이야기는 말(언어)의 행위이고(구전 문학이 있었다.) 문학은 문장(글)의 행위(현대문학)라는 것이다. 두 번째 차이는 이야기에는 문학예술적 구성이 없다는 것이고 문학예술 작품(현대문학)에는 반드시 문학예술적 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첫 번째 차이인 '언어의 행위'와 '문자의 행위'에 관한 문제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 보도록 하고 오늘은 두 번째 차이인 구성에 관한 문제만 생각해 보도록 하자.

 

구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이야기와 어떻게 다른가?

 'E.M 포스터'는 그의 소성론에서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라는 것이 이야기이고,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는 것이 구성이라고 하였다.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라는 것과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는 것과의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왕이 죽고 다음에 왕비가 죽었다.'라는 것에는 '그래서'만 있고 '왜'가 없다는 것이다. 즉 '왕이 죽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다음에 왕비도 죽었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왕이 죽자 왕비도 슬퍼서 죽었다.'라는 것에는 '그래서'가 아닌 '왜'가 있다. 즉 '왕이 죽자 왕비도 죽었다.' 왜 죽었느냐? '왕이 죽은 슬픔 때문에 죽었다.'라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는 청중은 이야기하는 자의 입술을 바라보며 '그래서 다음은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묻는다. 그러나 소설(현대문학작품)의 독자는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의문을 가지고 작품을 읽게 된다.

 

이상은 소설론이므로 수필에는 해당이 안 되는가? 만약에 수필을 읽는 독자가 수필을 읽으면서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라고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면서 읽고 있다면 그 수필은 틀림없이 문학작품으로 구성하지 않은, 이야기를 글자로 옮겨 놓은 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수필은 과연 신변잡기 곧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이 수필은 절대로 신변잡기 곧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 잡문이 아니다. 그런데 왜 많은 수필 작가라 하는 사람들이 구성하지 않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 까닭은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쓰이는 글이라는 글의 소재에 관한 문학적 오해 때문이다. 문학적 구성에 관해서 다음으로 우리가 분명하게 밝혀두고 넘어가야 할 점은 '이야기'에도 많은 분량 사실이 아닌 허구가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는 경험된 사실 자체의 전달도 이야기될 수 있는데 반하여 문학 작품은 경험된 사실 자체의 전달은 문학작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소재가 A라는 인물에 관한 것이라면 A라는 인물을 문학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함은 현실세계 속의 A라는 특정 인물 그 자체를 복사하기 위한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현실세계가 아닌 '문학예술세계 속'의 A라는 인물로 재창조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문학예술세계 속의 인물'이란 무슨 뜻인가? 현실세계와 문학예술세계는 서로 독립된 별개의 세계다. 문학예술세계 속의 사물은 문학예술세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속의 '소년과 소녀'는 영원히 황순원의 '소나기' 속에서만 존재한다. 두 소년 소녀는 10년 후에도 천 년 후에도 결코 '소나기' 속에서 현실세계로 뚜벅뚜벅 걸어 나올 수 없다. 즉 현실세계 속에는 황순원의 '소나기' 속의 두 소년 소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언제라도 황순원의 '소나기'를 읽으면 우리는 그 속에서 지금도 가슴 두근거리며 소녀에게 등을 돌려대는 소년과 그 소년의 등에 업히는 소녀의 콩닥콩닥 뛰는 가슴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로 이것, 황순원의 '소나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소년 소녀'가 문학예술세계 속의 사물이며 인물이다. 그런데 수필의 문제는 '경험된 사실을 소재'로 하여 쓰이는 문학이므로 수필 속의 인물은 당연히 현실 속의 인물과 같은 인물일 수밖에 없지 않으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피천득의 수필 작품 속의 <서영이>는 황순원의 소년 소녀와는 달리 작품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서 현실 세계로 나올 수 있는 사실적 존재인가? 혹은 <서영이>는 피천득이 <서영이>를 쓸 당시의 서영이라는 딸을 소재로 쓴 글이므로 (딸 서영이를 소재로 삼아 글을 쓰기 시작할 때와 글쓰기를 마쳤을 때의 서영이는 이미 글쓰기 시작할 때의 서영이가 아닌 그만큼의 시간이 지난 다음의 서영이지만 이론 전개를 위한 편의상 동 시간대의 인물이라고 여겨 주기로 한다면)그 당시에만 살아 있는 인물의 문학이고 지금은 죽은 인물의 죽은 문학인가? 즉 피천득의 수필작품 <서영이> 속의 서영이라는 인물은 지금은 환갑 나이 근처의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므로 더는 작품 속의 서영이는 존재조차 하지 않는 인물인가? 즉 죽은 인물인가? 만약 그렇다면 피천득의 모든 문학은 죽은 문학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서영이>라는 수필 속의 인물은 지금도 피천득의 문학세계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로 팔팔하게 생동하고 있다.

 

만약에 수필이라는 것이 내가 철도 파업이 진행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전철역에 나갔다가 30년 만에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전철을 타 보고 그 경험담을 그날 만난 사람에게 말로 전달해 준 것과 같은 현실 그 자체를 전달해 주자는 데에 목적이 있는 행위라면 피천득의 <서영이>는 물론 모든 수필 작품 속의 이야기(사건)들은 신문시사적인 역사서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신문기사와 역사서도 광의적 의미에서는 문학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문학예술작품은 아니다. 아무리 좋게 변명해 준다 해도 그와 같은 글들은 전기문학 이상이 될 수 없다. 만약에 역사서와 문학예술작품이 다를 바가 없다면 김훈은 이순신 이야기를 다시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과 현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 대답은 너무도 분명하고 간단명료하니 곧 수필과 경험된 사실(현실)의 관계는 경험된 사실은 단지 수필의 소재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밝히고자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 보도록 하자. 즉 이 세상에 현실에서 그 소재를 취하여 가지 않은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런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는가? 회화, 음악, 무용, 희곡, 시, 소설 - - -등 모든 예술작품의 소재는 동일하게 경험된 사실에 있다. 'E.T'와 '해리포터' 속에 나오는 각종 기괴한 등장인물들조차도 그 근본이 경험된 사실에 있지 않은 인물이나 사물이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사고력은 '경험된 사실'이 아닌 것은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한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상천외한 창작물이라 할지라도 경험된 사실로부터의 연상, 변형 혹은 허구적 창작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모든 예술 작품의 소재가 경험된 사실에 있다면 수필과 다른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다른 모든 장르의 소재가 경험된 사실에 있듯이 수필도 같이 경험된 사실에서 그 소재를 취해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여기에 수필문학의 고민이 있다. 시는 경험된 사실에서 소재를 취하여 가서 시어를 창작하고 있고, 소설은 경험된 사실에서 소재를 취하여 가서 허구의 사건을 창작하고 있는데 수필은 무엇을 창작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선 듯 명쾌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오늘날 수필문학의 문제가 있다. 만약에 수필은 경험된 사실을 변형하거나 그것에서 창작 영감을 얻어 새로운 대상, 즉 허구의 사건을 창작하지도 않고 경험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작품 내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창작할 것이 없지 않은가, 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대답이 맞는다면 우리는 고만 붓을 꺾고 모두가 시인이 되거나 소설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는 없다. 수필도 시나 소설처럼 독립된 그것만의 문학예술성을 창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이 시나 소설과 구분되게 창작하는 그것만의 문학예술성의 실체는 무엇인가? 나는 그 이름을 '수필문학적 감성'이라고 부른다.

 

모든 예술작품의 감동은 그것의 감성적 작용으로부터 우러나오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봄'을 소재로 창작된 예술 작품이라도 그림의 봄과 음악의 봄과 시의 봄에서 받는 감동이 다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 까닭은 회화예술적 감성과 음악예술적 감성, 그리고 시의 문학예술적 감성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필은 어떠한가? 말할 것도 없이 수필도 마찬가지다. 그림과 음악과 시의 감성이 각기 다를 뿐만 아니라 저마다 독특한 특성이 있고 독립되어 있듯이 수필문학적 감성도 수필문학만이 가지는 독특한 감성을 가지고 독립되어 있다. 만약에 수필이 수필문학만의 독특한 문학적 감성을 창작하고 있지 않다면 수필은 아무것도 창작할 것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필문학적 감성을 창작하고 있지 않은 수필가는 그가 경험한 사실을 말로 이야기하는 대신에 이야기를 단지 글자로 옮겨 놓는 작업을 하고 있을 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는 어느 문학 지망생의 여행 수필 원고를 읽은 일이 있다. 여행을 하고 돌아와서 쓴 그의 글은 다음과 같은 식의 글이었다.

 "A라는 곳을 다녀왔다. 그동안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가보니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두 번째 가 본 곳도 정말로 아름답기 비할 데 없는 곳이었다. 우리는 돌아오면서 너무나 행복감에 젖어 다음에는 꼭 C라는 곳을 여행하기로 다짐하였다."

이상에 든 예문의 글은 문학예술작품인가 아닌가? 만약에 이 글이 문학예술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이 문제가 되고 있는가?

 위의 예문은 말할 것도 없이 문학예술작품이 아니다. 적어도 함량 미달의 글이다. 함량 미달 쳐 놓고도 결정적인 요소, 곧 계란의 노른자위라 할 수 있는 수필문학작품으로서의 결정적인 요소가 빠진 글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수필문학에서 계란 노른자위는 무엇인가?

 그것은 '왜(어떻게)'가 빠졌다는 것이다. 위의 글에 필자는 멋있고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곳이 왜(혹은 어떡해) 멋있고 아름답단 말인가? 위의 예문과 금강산 구경을 갔다 온 사람이, "야, 금강산 진짜 멋있더라. 어찌나 멋이 있던지 그냥 입이 딱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오더라."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금강산 일만 이천 봉 앞에 서니 입이 딱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오더라."라고 말하는 것이 문학인가? 금강산이 입이 딱 벌어져서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름답고 멋지더라는 것은 보통 사람들(일반인)의 언어(말. 대화. 이야기)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상적 어법이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은 금강산 일만 이천 봉 앞에 섰을 때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여 입이 딱 얼어붙어도 괜찮다. 그러나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작가는 입이 딱 얼어붙어서는 안 된다. 작가는 반드시 금강산이 어떻게 아름다우며 왜 멋있는지 그 아름다움과 멋있음의 구체성(즉 왜 입이 딱 벌어지는지)을 느껴야지만 된다.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할 언어(글)를 찾아내야지만 된다. 그래야 작가다.

 

위의 예문의 여행기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가 여행하고 돌아온 곳이 아무리 평소 말로 듣던 대로 멋있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떻게 라는 문학예술적 구체성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문학이 아닌 말(일상 대화. 이야기)에 지나지 않게 된다.

여행을 하고 돌아온 사람이 그가 여행하고 돌아온 곳이 어떻게 아름답고 멋진 곳이었다고 작가답게 문학적으로 느낀 느낌(혹은 사색, 사상, 철학, 종교적 내용)을 구체적으로 형상화 시킨 것이 곧 수필 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이다. 문학적 형상화 작업이란 바로 그가 느낀 문학적 감성을 예술문장이라는 문학적 도구를 매개로 삼아 구체화 시키는 작업을 가리켜 형상화 작업이라 한다. 수필의 구성이란 바로 그가 느낀 느낌을 가장 효과적으로 형상화 낼 수 있는 각종 장치와 그것들의 얽음을 말한다. 그 같은 각종 장치와 얽음을 통해서 작품의 형상화가 이루어진다.

수필문학적 감성의 내용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무한히 많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수필문학의 다양한 양식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필과 형상화의 문제를 생각해 볼 목적에서 크게 세 가지 경우만을 실제 작품에서 예를 들어서 살펴보도록 하자. 그 하나는 서정적 감성의 형상화에 관한 것이고, 그 두 번째는 사색적 감성의 형상화에 관한 것, 세 번째는 서사적 감성의 형상화에 관한 것이다.

        

서정적 감성의 형상화 - 정목일의 <대금산조>

 

한밤중 은하(銀河)가 흘러간다.

이 땅에 흘러내리는 실개천아. 하얀 모래밭과 푸른 물기도는 대밭을 곁에 두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아.흘러가라. 끝도 한도 없이 흘러가라. 흐를수록 맑고 바닥도 모를 깊이로 시공(時空)을 적셔가거라.

그냥 대나무로 만든 악기가 아니다.

영혼의 뼈마디 한 부분을 뚝 떼어 내 만든 그리움의 악기―.

가슴속에 숨겨 둔 그리움 덩이가 한(恰)이 되어 엉켜 있다가 눈 녹듯 녹아서 실개천처럼 흐르고 있다.      

눈물로 한을 씻어 내는 소리, 이제 어디든 막힘없이 다가가 한마음이 되는 해후의 소리―.

한 번만이라도 마음껏 불러 보고 싶은 사람아.     

마음에 맺혀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아.

고요로 흘러가거라. 그곳이 영원의 길목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고 아득한 소리, 영혼의 뼈마디가 악기가 되어 그 속에서 울려 나는 소리―.        

영겁의 달빛이 물드는 노래이다.  

이상은 무엇에 대한 서정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대금산조 가락을 듣고 느낀 서정적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정목일은 대금산조 가락에서 듣고 느낀 감성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는가?     

흘러가는 은하로, 쉬임없이 흐르는 실개천으로, 혹은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빗대어, 시공을 초월하는 흐름과 적심으로, 영혼의 빼 마디로, 가슴 속에 숨겨 둔 그리움의 덩어리로, 눈물로, 한으로, 그리운 사람으로, 영원의 길목으로, 영겁의 달빛으로… 이 모든 '수필어'들을 통하여 형상화 시키고 있다.('통하여'란 그것들을 직조하여 혹은 얽어서…, 즉 구성적 작업을 통하여라는 뜻)

        

 

* 사색의 형상화 - 피천득의 <수필>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이상의 글은 무엇에 대한 사색의 내용을 형상화한 글인가? 수필에 대한 사색적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다.(필자 주: 피천득의 <수필>은 수필 이론이 아닌 수필을 소재로 한 수필 작품임)     

피천득은 어떻게 자신의 수필에 대한 사색을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 

청자 연적, 난, 학, 여인의 몸맵시, 숲 속 고요한 길, 가로수 길, 주택가 길 등의 '수필어'들을 통해서 자신의 수필에 대한 사색적 감성의 내용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통해서'란 왜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를 서두에 놓지 않고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를 서두에 놓았는가의 문제다. 즉 글 구성의 문제다.)

        

* 서사적 감성의 형상화 - 이태준의 <作品愛>

        

어제 경성역으로부터 신촌 오는 기동차에서다. 책보를 메기도 하고, 끼기도 한 소녀들이 참새 떼가 되어 재깔거리는 틈에서 한 아이는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흑흑 느껴 울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우는 동무에게 잠깐씩 눈은 던지면서도 달래려 하지 않고, 무슨 시험이 언제니, 아니니, 내기를 하자느니 하고 저희끼리만 재깔인다. 우는 아이는 기워 입은 적삼 등허리가 그저 들먹거린다. 왜 우느냐고 묻고 싶은데 마침 그 애들 뒤에 앉았던 큰 여학생 하나가 나보다 더 궁금했던지 먼저 물었다. 재재거리던 참새 떼는 딱 그치더니 하나가 대답하기를,"걔 재봉한 걸 잃어버렸어요." 

한다."학교에 바칠 걸 잃었니?"   

"아니야요. 바쳐서 잘했다구 선생님이 칭찬해주신 걸 잃어버렸어요. 그래 울어요."   

큰 여학생은 이내 우는 아이의 등을 흔들어 달랜다.        

"얘 울문 뭘 하니? 운다구 찾아지니? 울어두 안 될 걸 우는 건 바보야."

이상의 글은 무엇을 형상화하고 있는가? 필자가 경험한 사건(이야기)의 감성을 형상화하고 있다. 필자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의 감성을 어떻게 형상화 시키고 있는가?   

필자는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소설적 서술' 방식을 빌어서 형상화 시키고 있다.('소설적 서술 방식'이란 '소설적 구성법을 빌어서' 라는 뜻임을 놓치지 말자.)       

이상의 예문에서 정목일과 피천득은 수필어를 통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고 하였고 이태준은 소설적 서술 방법을 빌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키고 있다고 하였다(수필문학의 특성은 그 다양하고 자유로운 표현방법의 채용에 있다. 그러므로 소설적 서술 방법을 채용하였다고 수필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수필어라는 것은 무엇인가? 시에 시어가 있듯이 수필에도 수필어가 있는가? 그렇다.

위에서 수필문학만이 가지는 수필문학적 감성이라는 것은 좁은 의미에서는 수필어적인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시어가 시적 감성을 들어내기 위한 목적의 시어를 가지듯 수필도 수필문학적 감성을 형상화해 내기 위한 목적에서 수필어를 가진다.      

맺는 말무릇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이 목적하는 바의 작품성에 이르려면 형상화 작업이 완성되어야지만 된다. 형상화 작업은 구성을 중심으로 한 문학예술작업의 전반적인 기법을 통해서 기대할 수 있다. 시가 시어를 통해서 시적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소설이 소설적 서술 방법을 통하여 사건(허구. 이야기)을 형상화 시키듯 수필은 수필어를 중심 도구로 삼아 수필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킨다.    

수필은 수필어를 중심으로 삼아 수필문학적 감성을 형상화 시킨다는 말의 뜻은 수필은 시, 소설과 달리 그 형식의 무한한 자유를 가지는 수필문학의 특성 때문이다. 수필은 위에서 예를 든 대로 소설적 서술 기법을 빌어다가 쓸 수도 있고 혹은 서간문이나 일기문 등의 기법을 빌어다가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표현기법을 차용 해다 쓴다 할지라도 수필은 전체적으로 혹은 그 하나하나의 문장을 통해서 또 혹은 하나하나의 문단을 통해서, 또 혹은 단어 하나하나를 통해서 수필문학적 감성(느낌, 사색, 사상, 철학, 종교)을 형상화 시켜야 한다. 만약 하나의 글이 그 필자만의 독특한 감성(느낌, 사색, 사상, 철학, 종교)을 형상화 시키는 일이 없이 단지 경험된 사실을 서술(나열)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면 이는 일반적으로 부르는 산문(혹은 잡문)은 될 수있을지언정 수필문학이라는 독특한 예술 작품은 될 수 없다.   

일반인은 금강산 구경을 가서 그 아름다움에 압도당하여 입이 딱 벌어져 할 말이 없을 수 있고 그것으로 넉넉할 수도 있으나 작가는 그래서는 안 된다. 작가는 감기를 앓아도 보통 사람들처럼 그냥 끙끙 앓아서는 안 된다. 작가는 반드시 어떻게 끙끙 앓아야 한다. 작가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그 작가만이 느끼는 것(혹은 사색, 사상, 철학, 종교)이 있어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형상화) 해 낼 글(단어. 문장)을 찾아내어야지만 된다. 그래야 문학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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