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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상상에 대하여
李正林
1. 서두
<수필과 소설의 한계성>이라는 논문에서, 본인은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同義語)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구절에 대하여 김병규(金秉圭) 선생은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원용(援用)하면서 '창조'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혀 주었다. "상상력이 문학을 만드는 측에서도 문학을 읽는 측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은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문학의 핵심에 상상력이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상상력이 예술의 창조와 수용에 소중하다고 말하기에서부터, 거길 뛰어넘어 상상력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불가결한 기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생은 이렇게 덧붙였다. "얼핏 보면 상상력은 소설의 허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상상력이 예술의 창조에도 수용에도 중요하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경청해야 할 것이다. 오에는 '자연에 대하든 무엇에 대하든, 대상을 향하여 마음이 열려가는 것, 그 근본의 힘이 상상력이다'라고 말한다. (...) 그런 상상력에서 비로소 '창조'가 나온다. 수필에서 허구는 용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필에서도 허구가 아닌 창조는 용인되어야 하지 않을까. 수필가가 일상 생활 속에서 여느 사람이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라 할 수는 없을까."
본인은 김병규 선생의 이 글을 대했을 때, 애정 어린 지적에 감사하면서 또한 앞뒤 전후를 배제하고 어느 한 문장만을 가지고 해석한다면 본의 아니게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독자들이 선생의 이 글을 읽으면, 본인이 상상조차 수용하지 않는 편협한 수필관을 가진 것으로 오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라서 이 글은 다분히 그런 해명성 동기에 의하여 수필과 상상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펴 보일 수 있는 장(場)으로 삼고자 한다.
2. 창조와 상상
앞의 논문에서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한 배경에는 전제된 이론이 있었다. 문제의 그 문장은 <수필과 소설의 한계성>에서 두 장르의 본질을 다루는 두 번째 항목에 들어 있다. 본인은 그 항목에서 수필의 본질은 체험이요 소설의 본질은 허구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은 '수필문학의 창조적 지평을 확장할 수 있다면 이를 (허구) 거부할 이유가 없다'(鄭震權)고 하면서, '허구가 있음으로써 사람의 정신세계는 풍요로워지고 생활의 폭은 넓어진다'(孔德龍)고까지 주장한다"는 것을 전제 이론으로 제시하였다. 이들 허구론자들에게 수필의 '창조적 지평'이란 곧 허구의 도입을 뜻한다. 그러므로 사실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수필에서 '허구적 창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한다는 것이 그 글이 말하고자 한 논지였다. 따라서 본인은 그런 자신의 논지를 설득시키기 위해 성급하게 "수필에서 창조라는 말은 허구와 동의어이다. 수필은 결코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을 했다. "수필은 소설처럼 허구를 통하여 없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도 새로울 것이 없는 우리의 실제체험 속에서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선택되는 소재를 가지고 형상화되는 것이다."
"실제체험 속에서 작가의 눈으로 '새롭게' 선택되는 소재를 가지고 형상화되는 것이다"라는 문구에서 '새롭게'라는 뜻은 '소재의 의미화'를 말한다. 수필은 결코 사실의 기록도 아니요, 사실의 기록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소재의 의미화는 대상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철학이다. 그리고 그것은 체험과 사실의 재창조라 할 수 있다. 김병규 선생이 앞의 글에서 "수필가가 일상 생활 속에서 여느 사람이 여태껏 발견하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썼을 때 그것은 하나의 '창조'라고 할 수는 없을까" 하고 제시한 그 창조와 바로 동의어인 것이다. 수필은 사실의 의미화를 통하여 체험을 재창조해 낼 때 비로소 사실의 기록문이 아닌 문예작품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프란시스 베이컨은 "역사가 기억에, 철학이 이성에 의지할 때, 문학은 상상(想像, imagination)을 바탕으로 전개된다"고 했다. 여기에서 상상이란 무엇인가. 베이컨은 "상상은 사실의 세계에 매이지 않고 사실들을 마음대로 변형시켜 사실보다 더 아름답게, 좋게, 다양하게 만들어 즐기는 것"이라고 하였다. 영국의 조지프 에디슨은 <상상의 즐거움>이라는 평론에서 상상을 이렇게 정의했다. "상상은 감각적 체험을 심상으로 파악하는 능력일 뿐 아니라, 감각의 대상이 없을 때에도 머리 속에 심상을 만들어 보고, 또한 여러 심상들을 융합하여 전혀 새로운 심상을 형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즉 상상은 사실이나 실재의 부족한 것을 완전하게 꾸밀 수 있는 일종의 창조적 능력"이라고 하였다.
김우종(金宇鍾) 씨는 한국수필의 문제점 중의 하나로 "상상력의 공급 부족으로 인한 미적 감동의 결핍 현상"을 들었다. 수필에서 상상이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수필은 허구의 문학이 아니라 체험의 문학'이라는 본질을 편협하게 해석한 때문이다. 체험은 허구가 아니다. 수필 속의 상상은 그 체험의 한 부분이다. 따라서 수필의 상상은 허구가 아니다. 그러나 수필의 상상이 허구가 아닌 좀더 분명한 논거는 수필에서는 상상이 상상임을 밝힌다는 점이다. 소설의 구성도 체험적 요소와 상상으로 짜여져 있지만, 소설 속의 상상은 상상임을 밝히지 않는다. 따라서 소설에서는 실제체험에 해당되는 부분까지 허구라 하듯이, 소설에서의 상상은 상상이라 하지 않고 허구라는 말로 대체된다. 그러나 상상이 상상임을 밝히는 수필에서의 상상은 허구라 하지 않는다. 수필의 "체험은 내적 체험까지를 포함하고 그 내적 체험은 상상까지를 포함한다. 그러나 상상을 곧 허구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 허구는 허구이고 상상은 상상인 것이다." 수필에서의 상상은 허구의 도입이 아니라 수필을 좀더 문예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수법이자 기법일 뿐이다. "(수필 쓰는) 우리는 사실 과정을 지킨다. 그러나 수필이 단순한 사실 기록에 머물 수 없다. 그 사실이 감동적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그 감동적인 전달을 위해 예술적인 표현을 개발해야 한다. 그 예술적인 표현의 한 방편으로 '상상'을 마다하지 않는다."
3. 작품의 실례
수필에서 상상이 훌륭하게 작품성을 얻은 예는 찰스 램의 <꿈속의 아이들>이다. 이 수필에는 '하나의 환상'이라는 부제목이 붙어 있다. 이 부제목에서 이미 이 수필은 실제의 이야기가 아님을 암시하고 있다. 아들딸을 앞에 놓고 증조 할머니와 큰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고, 세상 떠난 아이들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사이에 아이들이 눈앞에서 멀리 사라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은 환청을 듣는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가 아니오, 당신의 아이도 아니오.(...)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트럼을 아버지라 부른다오.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오, (...) 그저 꿈이라오. 우리는 단지 존재할 수도 있었던 것에 불과할 뿐이오."
여기에서 독자들은 잠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램은 독자를 혼란 속에 오래 놔두지 않는다. 이렇게 곧 다음 문장을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바로 잠을 깨 총각 신세인 내가 안락의자에 앉아 잠이 들었던 거다."
램이 이 문장을 달지 않았다면, 이 글은 콩트다. 왜냐하면 램은 어린아이가 없는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허구론자들은 이 <꿈속의 아이들>을 수필에서 허구를 도입해도 된다는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글에 허구라는 용어 사용은 적합치 않다. 꿈이었음을 밝히지 않았다면 허구다. 그러나 밝혔기 때문에 그것은 상상이 된다. 이 글이 수필로 장르 구분이 될 수 있는 열쇠는 바로 상상임을 밝혔다는 데 있다.
상상임을 밝히지 않아 결과적으로 독자를 기만한 꼴이 되어버린 예로는 차배근(車培根)의 <아빠의 편지>를 들 수 있다. 이 글은 군에서 보내 온 아빠의 편지를 아가에게 들려주면서, 기합을 받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다가 눈시울을 적셨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글이 주로 가정주부들이 투고하는 신문의 가정란에 실리자, 같은 처지에 있는 독자들로부터 백여 통의 편지를 받았다는 후일담이 공개되면서, 이 글은 일약 허구론자와 비허구론자 사이에 상반되는 의미의 텍스트가 되었다. 그 이유는 이 글을 쓴 사람이 남편을 군에 보낸 젊은 새댁이 아니라 대학교 4학년생인 청년이었다는 데 있었다. 허구론자들은 허구로 쓴 이 글이 그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다면, 수필에서도 허구를 도입해 볼 만하지 않겠느냐 그 가능성을 타진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쓴 이가 주부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했어도 독자들의 반응이 그렇게 컸을까는 왜 생각해 보지 않는 것일까. 그 글은 글재주가 있는 남자 대학생이 어디까지나 상상으로 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상상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수필이라고는 볼 수 없고, 동병상련을 느낀 많은 독자들을 우롱하고 기만했다는 비난을 떠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지은이가 그 글을 콩트로 썼다면 상상은 허구가 된다. 그리고 콩트의 상상은 상상임을 밝힐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 글을 수필로 썼다면 그것이 상상임을 밝혀야 한다. "상상은 허구를 포함한 모든 구상적인 생각의 전부"이지만, 수필의 상상과 소설의 허구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본인의 수필에서 상상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두 편을 소개해 볼까 한다. <실종(失踪)>(1992)이라는 글에서는 버스에 붙어 있는 사람 찾는 광고 사진을 보며 실종자를 상상해 보았다.
이 사진을 찍었던 어느 해 봄, 어쩌면 사진 속의 남자는 아이들과 함께 화단에 꽃씨를 심었을지 모른다. 그는 모종삽을 들고 채송화와 나팔꽃 같은 순박한 꽃 씨를 흙 속에 묻으면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가꾸어질 그의 화단을 머리 속에 그려 보았으리라. 그리고 그 옆에서 잔시중을 들고 있던 그의 아내는 고운 흙에 촉촉이 물을 뿌리면서, 행복이란 결코 크고 화려한 것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을 것이다.
봄볕이 따스하던 어느 날, 드디어 그들의 화단에는 다투듯 꽃들이 피어났다. 이른 봄 정성어린 손길로 심었던 씨앗들이 그 가정에 기쁨을 선사한 것이다.
남자는 작은 사진기를 가지고 그 꽃들 앞에서 가족의 사진을 찍어 주었으리라. 처음에는 꽃보다 예쁜 자기 아이들을 화단 앞에 세웠을 것이다. 다음에는 그 아이 들을 양팔에 안은 사랑하는 아내의 모습을 찍었을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그 자신도 사진이 찍고 싶어졌을까. 그는 배우처럼 멋진 포즈를 취하고 꽃 앞에 섰다. 하늘을 쳐다보면 더 멋있지 않을까. 팔을 늘어뜨리기보다는 팔짱을 끼 는 편이 더 근사해 보이겠지. 그렇게 남자는 자기 연출을 하면서 화단 앞에 섰고,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렌즈 속으로 들여다보면서 남편이 아닌 행복을 찍었을 것 이다. "사람을 찾습니다."라는 그 절박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광고 전단 속의 사진 은 그렇게 평화스럽게만 보였다.
―<실종(失踪)>
다음은 국가적인 경제 위기를 맞이하여 많은 가장들이 실직을 당한 오늘의 현실을 상상을 통한 상징적인 수법으로 그려보고자 한 <태양이 없는 그림>(1998)이다.
아버지들은 그러고 싶어도 감히 집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걱정스러워하는 아내 의 눈길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피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릴 것 같은 아이들의 얼굴을 차마 마주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아니면 지하도 맨바닥에서 신문지 한 장 깔고 누워 천장을 바라볼 때,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제까지 달려온 숨가쁜 세월, 그것은 누구 를 위해서였던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였다면, 그들은 아마 일찌감치 그 고된 삶 의 짐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한 여자를 만나 아이 낳고 기르면서, 그들을 위해 사는 것이 평범한 사람이 가는 정도(正道)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를 가기 위해 자신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렸다. 하고 싶은 일도, 뱉고 싶은 말도, 모두 버리고 참았다. 밥값을 내지 않으려고 제일 늦게 구두끈을 매는 좀생원이 되었어도, 그런 비굴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상 사(上司)의 모욕적인 말도 저녁때 한잔 술로 풀어내면 귀는 다시 깨끗해졌다. 내 가정만 지킬 수 있다면, 내 아이들만 잘 기를 수 있다면 아비의 자존심 따위가 무 슨 대수랴 싶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아버지들이 의욕을 상실했다. 날로 야위어 가는 것은 육체뿐만 이 아니다. 육체를 지탱케 해주는 것은 의욕이요 희망인데, 그것이 없는 사람에게 찾아드는 것은 무기력일 뿐이다. 무기력은 정신을 갉아먹는 좀벌레와 같다. 이젠 더 이상 체면이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고, 무료배급소에서 밥을 타 먹는 두 손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생존만이 절체절명의 과제일 뿐이다.
―<태양이 없는 그림>
4. 결 미
수필은 산문이다. 그러나 수필이 감동을 얻기 위해서는 문예적인 산문이 되어야 한다. 문예적인 산문은 문예적인 요소를 지닌다. 문예적인 요소란 비유·상징·상상 같은 표현상의 기법을 말한다. 시(詩)에서만 비유와 상징이 동원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만 상상이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수필은 이 모든 표현법을 포용하되, 다만 그 정도가 지나치지 않아야 한다. 또 어디까지나 산문의 성격에서 일탈되지 않도록 이를 자제해야 한다. 이 중용의 자세만 잃지 않는다면, 수필에서 상상은 사실체험에 윤기를 주고, 형식의 다양성을 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표현 기법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참고 문헌>
李正林. 《한국수필평론》, 서울: 범우사, 1998.
金秉圭. <수필의 자리매김을 위한 노력-李正林의 《한국수필평론》을 읽고>,
《수필공원》, 1998. 여름.
李商燮. 《문학비평용어사전》, 서울: 민음사, 1976.
金宇鍾. <한국수필의 문제성과 그 극복-젊은 독자가 원하는 수필>, 《隨筆公苑》,1997. 겨울.
許世旭. <想像은 예술의 한 방편>, 《수필문학론집》2, 서울: 수필문학사, 1994.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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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말맛으로 읽는다
손 광 성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진다. 그러나 같은 산문인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운문적 성격이 강하다.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적 언어보다는 간결하고 여운이 있는 문장을 택한다." "수필은 치고 빠지는 것"이라든가, "수필은 탕관에 넣고 끓이면 주옥 같은 시가 되고, 가마솥에 넣고 삶으면 대하소설이 된다"고 하는 비유적 표현들은 모두 수필의 언어가 시, 소설, 희곡과 다른 언어적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질펀하게 눌러 앉아 뭉그적거리는 언어가 아니라, 핵심을 때리고 다음 목표로 이동하는 순발력이 있는 언어이다. 수필의 언어는 "갈고-닦아-빛나게-가다듬어-선택한 언어, 다시 말해서 거친 언어가 아니라, 엘레강스한 언어이다."(18페이지)
"수필은 자기 고백의 문학"이라고 한다. 이것은 내용 제시 방법에서 수필이 다른 장르와 구별되는 특징이다. 시, 소설, 희곡에서는 작가는 뒤에 숨고 화자話者를 대리인으로 전면에 내세워 말을 하게 한다. 그러나 수필에서는 작가 자신이 전면에 나서서 독자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준다. 시나 소설에서 서정적 자아 또는 화자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 아니지만, 수필의 화자인 '나'는 작가와 동일 인물이다.
수필의 이와 같은 고백적 형식을 통해서 작가는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독자는 작가에게 신뢰를 보낸다. 소설 독자가 소설을 읽을 때,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는 것과는 다르다. 수필 독자는 이것은 사실이라고 믿으며 읽는다. 만약 '수필의 허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대로 수필도 허구적 서사를 원용한다면, 필자와 독자 사이에 형성된 이와 같은 친근감과 신뢰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필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결국 독자는 수필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될 것이다. 수필이 허구적 서사를 원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내용을 직접 제시하느냐 간접적으로 제시하느냐 하는 것은 수필을 시, 소설, 희곡과 구별하는 가장 뚜렷한 특성이 된다.(27페이지)
운율은 수필에 있어서도 중요한 요소이다. 심상은 생각과 느낌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회화적 효과를 낸다면, 운율은 문장에 탄력을 주어 낭창거리게 하여 음악적 효과를 낸다. 수필은 '말맛'으로 읽는다는 말이 있다. 말맛을 내는 것은 심상 쪽이 아니라 운율 쪽이다. 시에서 운율이 중요한 것처럼 수필에 있어서도 중요한 구실을 한다. 특히 시적 수필에서 그렇다. 이어령이 말한 소위 '나비의 언어'니 '춤추는 언어'니 하는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나 수필에서 운율이 주도적 역할을 맡게 해서는 안 된다. 운율이 주도적 역할을 하면 운문이 된다.수필은 어디까지나 산문이지 운문이 아니다. 따라서 수필에서는 논리적 구조가 주도적이어야 한다. 리듬은 어디까지나 종속적이어야 한다. 논리적 구조가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 운율이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산문과 운문이 나뉜다.(35페이지)
단어 선택에서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선택하려는 단어들이 서로 어느 정도로 잘 조화되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려는 조화란 단어들의 계통, 또는 위계와 관용적 용법을 말한다. 단어는 추상적 기호이지만 그 결과 무늬를 가지고 있다. 고유어에 대한 한자어가 있고, 경어敬語에 대하여 평어平語가 있고, 평어에 대하여 비속어卑俗語가 있으며, 상위어에 대한 하위어가 있다. 또 관용적으로 어떤 말은 저희들끼리만 어울리기 좋아하고 다른 말이 오는 것을 배척한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결이 맞지 않아서 이음새가 흉하게 보이거나, 아니면 무게가 한 쪽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난다. (79페이지)
소설 서사와 수필 서사는 같지 않다. 첫째, 서사의 세 가지 요소 가운데 하나인 행동 주체의 성격이 다르다. 소설에서 행동의 주체는 가상의 인물이고 전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수필에 등장하는 행동의 주체는 실제 인물이고 전형성이 아닌 역사성을 띤다. 둘째, 소설 서사는 인과적 원리 위에서 조직되지만, 수필 서사는 우연성 위에서 취사선택된다.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사건은 논리성이나 인과성에 의하기보다 우연성에 의해 발생할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소설 서사와 수필 서사의 차이는 원소재를 다루는 미적 변용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적 감동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소설 서사는 다음과 같은 미적 변용 과정을 밟는다.(134페이지)
좋은 수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조건은 대략 다음 여섯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통일성, 일관성, 완결성,경제성, 명료성 그리고 균형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수필이 되기 위해서는 이것 외에 한 가지 조건을 더 충족되어야 한다. 바로 예술성이다. 이제 이 일곱 가지 조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여섯 가지 기본 요건 가운데서 다시 그 중요도의 순서에 따라 세 가지로 압축한다면 통일성, 일관성 그리고 완결성을 들 수 있다. 이것들은 글을 조직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지켜야 할 조건들이다. 경제성과 명료성은 주로 단어 선택과 문장 차원에서 지켜야 할 요건들이라면, 균형은 비율의 문제이다.(195페이지)
* 출전 : 손광성의 수필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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