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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은 변해야 한다 저는 오늘 두 분 선생님께 한 가지 질문만 하겠습니다. 수필이 변하려면 남녀 간의 성문제를 표현하는데 있어서 조금은 개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시와 소설에서 보여주는 적나라한 포르노 상태로 진입하자는 것이 아니라 청자연적에 준하는 운우지정이란 막연한 표현에서 벗어났으면 하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 선 김에 평소 제가 생각하고 있는 수필이 달라져야 하는 나름대로의 소회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두 분 선생님께서 제가 평소에 생각해 오던 것을 조목조목 잘 정리해 주셔서 앞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제시해 주신 수필의 갈 길은 무지개가 뜨는 곳처럼 방향은 분명한데 그 곳까지 가야 할 구체적 방법은 아직도 모호합니다. 백내장 환자가 사물을 보듯 흐릿하기만 합니다. 저는 ‘수필이 엄청나게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입니다. 수필이 달라지려면 허구성 논쟁도 그만 두어야 합니다. 그러한 소모성 논쟁은 발전 쪽으로 달리는 전진 에너지를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할 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습니다. 수필에 허구를 수용하자는 사람은 그런 글을 쓰면 될 것이고, 허구는 용서치 못해도 상상력을 대체용품으로 활용하자는 이들은 아름다운 상상을 발휘하여 글을 꾸며 가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허구나 상상에 돌아 앉아 경험한 사실만으로 글을 쓰시는 분들은 그렇게 나아가시면 됩니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앉아 허구논쟁을 종결짓고 뜻을 한 곳에 모은다고 하더라도 사람마다 각자의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에 지나고 보면 소득 없는 논쟁에 시간만 낭비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국가나 사회가 다양성을 요구하듯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와 소설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해 가는 동안 수필은 고정관념이란 틀을 깨지 못하고 벽속에 너무 오래 갇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가르친 1세대의 잘못도 있지만 그것 보다는 개혁과 실험을 시도해 보지 않은 후세대들의 책임이 오히려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필이론이 지나치게 도덕적 인간이기를 요구한 나머지 문학이 가야할 길인 감추어진 욕망이 언어로 표현되는 것을 거부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수필이 오랜 세월 동안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에 포섭되어 욕구와 욕망의 바다로 내딛는 수필가들의 아장걸음까지 눈치를 살펴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부터 시작된 우리 현대시는 김소월 이상 김수영 서정주 김춘수 등에 의해 갈고 닦이고 그리고 수많은 난해 시와 무의미 시를 생산해 내는 시인들에 의해 오늘의 시로 성숙했습니다. 소설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독 수필만은 실험과 도전 정신이 부족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수필의 한계를 모르고 하는 소리군”하고 말씀하시는 어른들도 물론 계실 줄 압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상의 ‘오감도’정신을 수필로 흉내 내는 사람이 없었으며 투철한 실험 정신으로 난해 수필을 시도해본 수필가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것은 ‘수필은 고고해야 한다.’는 매듭을 풀지 못하고 위리안치 상태에서 세월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수필이 고향. 가족. 아이 키우기. 학창시절. 외국여행기란 틀에 박힌 주제에서 탈피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선생님들의 지적대로 수필은 변해야 합니다. 편집자도, 비평가도, 수필가 자신도, 그리고 독자까지 변해야 합니다. 변하지 않으면 다른 장르의 문학인들로부터 옳은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며 신춘문예의 한 축에 영원히 끼지 못할 지도 모릅니다. 정말 이대로 가다가는 미래의 문학 판에서 제명되거나 추방될지도 모릅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서울 경기 지역에서 좀 떨어진 대구 부산 대전 경남 전북에는 수필이 신춘문예의 한 장르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발간되는 신문들이 수필을 신춘문예의 장르로 넣어주지 않는 것은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필 관계자들의 노력과 열성이 부족한 소치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잡지 만들고 책 팔고 신진작가 등단시키는 일이 아무리 바쁘더라도 수필잡지를 만들고 있는 발행인과 편집 책임자끼리라도 서로 반목하지 말고 힘을 합쳐 원로들의 조언을 얻어 신문사를 찾아다니며 적극적인 활동을 벌인다면 안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간 신문에서 수필을 신춘문예의 한 장르로 받아 준다면 수필의 발전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얘기가 잠시 신춘문예 쪽으로 샜습니다. 죄송합니다. 수필은 재미가 있는 가운데 의미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수의 삶의 영역으로 확대도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그 속에 철학까지 끼어들면 더 좋겠지요.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여간한 기술자가 아니고선 원고지 열 몇 장에 그렇게 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는 모든 것 다 접어두고 지금부터 수필은 낯설고 생기가 넘치는 것이 주제가 되고 소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시대에는 낯설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합니다. 익숙한 것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그래서 파격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물을 보는 시각도 글을 쓰는 기법이나 기교도 신선해야 하고 발랄해야 합니다. 모든 예술의 지향점도 그러하고 아트 전반의 추세가 그렇습니다. 최근 삼성사건으로 유명해진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은 옛날 풍경화만 봐오던 눈에는 그림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일본의 야요이 쿠사마가 그린 동그라미로 그린 호박 그림은 그림 같잖은 그림이지만 실제로 잘 익은 누런 호박이 오천 원 정도 인데 비해 무려 만 배인 5~6천만 원입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낯설기 때문입니다. 낯선 것은 신기하고 신기한 것은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몇 달 전에 타계한 입 생 로랑은 남성 전용 턱시도를 여성에게 접목시켜 세계적으로 히트 시킨 패션 디자이너입니다. 뉴 에이지 뮤지션으로 제3세대 음악을 이끌고 있는 야니가 타지마할, 자금성, 그리고 아크로폴리스의 헤롯 아티쿠스 음악당에서 공연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낯설고 신기하여 음악 애호가들에게 경이롭게 느껴졌던 까닭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요즘은 오페라도 벗는 시대입니다. 오페라에서 ‘살로메’역을 맡은 마리아 에윙은 ‘일곱 베일의 춤’을 부르다가 일곱 베일의 망사를 완전히 벗어 던집니다. 그리고 지난해 뉴욕시티 오페라단이 공연한 ‘모세와 아론’에선 합창단원 모두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무대에 올랐습니다. 현대 발레는 발레리나들이 발레복과 토슈즈를 벗어 던지고 무대에 오릅니다. 또 일본의 전라 여성 관현악단은 샌달 하나만 신고 바이올린과 첼로를 켜고 풀륫을 불었으며 지휘자 역시 지휘봉 외엔 별로 걸친 것이 없는 공연 장면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소설도 마찬가집니다. 박상륭이란 소설가는 ‘잡설품’이란 난해소설을 시대의 화두로 던져두고 있습니다. 그는 종교와 철학의 단서들을 조합하여 소설에 영문자까지 섞어 아주 낯설고 불친절한 소설 읽기를 시험대에 올려놓았습니다. 중국의 한소공은 ‘마교사전’이란 새로운 형식의 자전적 소설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그의 소설 속에는 가난한 장애자 남동생을 보러 왔다가 여자도 없이 혼자 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가련하여 “그냥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한 번 만이라도 여자의 맛을 느껴 보렴”하고 몸을 주려한 누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남동생은 아무 말 없이 비바람 속으로 떠납니다. 성이 아무리 문란한 시대지만 이런 이야기는 낯설고 신선합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예술 전반이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런대도 수필을 고고한 공식에 대입하고 치수로 재단하여 맞느니 안 맞느니를 따지고 있습니다. 수필은 변해도 아주 단단히 변해야 합니다. 구각을 벗지 못하고 음풍농월이나 하고 있으면 신춘문예는커녕 지금 자리도 지키기 어려울 것입니다. 수필 속에 성적인 묘사도 좀 더 과감해 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와 소설이 보여주는 포르노 상태로 진입하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사람들의 모험성 짙은 실험수필도 기대해 볼 만한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대구의 문학 평론가이자 수필가인 신재기 교수는 ‘나는 계획한다. 분서를’이란 신작수필집 서문에서 “수필을 떠나라. 울타리에서 벗어나라. 그리고 내동댕이쳐라. 이젠 수필 아닌 수필을 쓰자.”고 했습니다. 수필이 신선하게 변하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한국 문화예술위원회는 2009년 창작지원 모집 요강을 발표하면서 수필을 해당 장르에서 제외시켰습니다. 해당 장르는 장편소설 시 시조 평론 동시 동화입니다. 그러니까 수필은 문학이 아니란 말을 이렇게 문서로 표현한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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