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중고생을 위한 시강의 제 1부
학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도 수업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하여 인터넷의 신나는 가상현실 속을 떠도느라 고생하시는 학생 여러분을 생각하면 기성세대로서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과 함께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 운명은 여러분들의 몫이지만, 그 운명을 만든 것은 기성세대의 무책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장래는 여러분의 어깨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들의 어깨에는 특별히 한국 시의 장래가 달려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학생 여러분에게 혹시 도움이 될까 하여 이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시작하기 전에, 우선 한국에 살면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아주 반가운 소식을 전하고자 합니다. 제가 한 20년 동안 시를 쓰면서 든 생각입니다만, 한국 시의 수준은 다른 인접 갈래와 비교해볼 때 별 볼 일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설과 비교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나라의 소설 수준은 정말 대단합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아도 시원찮을 작품들이 아주 많습니다.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황석영의 장길산 같은 작품이 다 그렇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렇지를 못해서 딱히 우러러 볼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냐면 시에 뜻을 가진 여러분이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입니다. 정말 좋은, 위대한 작품이 아직 안 나왔으니, 그것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여러분에게 남아있는 것입니다. 엘리어트의 황무지 같은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현재의 시인들이 아니라 여러분의 몫입니다. 그러니 한국에서 시를 자신의 희망으로 택한 여러분은 정말 좋은 기회를 앞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막 시를 시작하려는 여러분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있을까요?
혹시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분야에 눈독을 들이는 학생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장래희망을 얼른 시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더 희망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밥벌이가 된다는 보장을 못 하지만, 이상에 한참 불타는 여러분이라면 그 밥벌이 때문에 희망을 버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쓴 동기는 간단합니다. 한국 시의 장래는 젊은 학생들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 현장에서는 시 쓰는 법을 배우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시를 올바르게 읽는 것을 배우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학교에서 배우는 시는, 평론가들이 이미 정리해놓은 이론을 시에 어거지로 꿰맞추는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는 정서를 전하려고 하는 물건인데, 그것을 토막내어 내부구조를 들여다보고 있으니, 그 정서가 전달될 리가 없지요. 발 앞에서 튀는 개구리를 보자는 것인데, 그것의 안이 궁금하다고 갈기갈기 찢어놓은 꼴입니다. 시험지로 묻는 내용은 바로 그 내부 모양새입니다. 그러나 시는 그런 모양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읽고 난 직후의 느낌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과정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놀라 팔짝 뛰는 개구리의 모습을 보자는 것이지요. 이 자명한 사실을 가르치는 교재도 없고 교사도 없습니다. 입시가 원흉이지요.
시중에 나와있는 창작 안내서를 보면 창작보다는 이론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 창작에서 이론은 수박 껍데기를 핥는 일에 불과합니다. 수박 맛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거든요. 이론으로 백날 설명한들 단 한 번 쓰도록 유도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런데 시중에는 그런 맛을 느끼게 할 만한 이론서가 없습니다. 이것은 제가 도서관을 뒤져서 내린 결론입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직접 쓴 시를 인용하면서 실제로 창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기 위해 제가 발벗고 나섰습니다.
글쎄요, 여러분들이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얻을지 모르지만, 한 번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돈을 많이 벌면 저한테 그 돈 좀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이 원고를 좀 책으로 내게. 하하하.
학생 여러분, 반갑습니다. 한국 시의 유일한 희망인 여러분에게 저의 작은 선물을 드리고자 합니다.
참고로, 이 연재가 끝나면 여러분의 작품을 직접 봐드릴 예정입니다. 여러분이 평상시에 연습한 작품을 이 사이트의 회원 문단에 올리시면 제가 할 수 있는 한도까지 손봐드리겠습니다. 단, 학생인 경우에만 말이지요. 이미 대가리가 다 커버린 것들은, 가르쳐봤자 소용없습니다. 잔머리만 굴리거든요. 하하하.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1. 군소리
안녕하십니까?
지금부터 학생 여러분을 위한 시 창작 강의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자 하니 알아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무엇이든 태도가 중요합니다. 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느냐 하는 태도에 따라 시를 쓰는 방법도 방향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시 창작 기술을 얘기하기 전에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낀 몇 가지를 먼저 얘기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만 시 창작 강의에서 하는 말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1) 책탕물+1(?)
시 창작 강의라? 이건 물론 시 쓰는 법을 강의한다는 얘깁니다. 그렇기는 한데, 학생들을 상대로 이런 강의를 하자고 결심하기까지는 적잖은 고민이 뒤따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 쓰는 법에 관한 책이라면 이미 많이 나왔는데, 다시 한 번 더 반복해서 책탕물(?)에 또 다시 별 볼 일 없는 책 한 권을 보태어 독자들의 혼란만 가중시키는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고민을 했습니다. 책탕물이 뭐냐고요? 흙탕물이라는 말이 있죠? 여기에다가 ‘흙’ 대신 ‘책’을 집어넣은 것입니다.
애써 글을 썼는데 쓸모없는 책이 되면 어쩌나 하는 고민은 책을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합니다. 책이란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귀중한 방법인데, 쓸데없는 내용으로 가득 차거나 이미 남들이 다 써놓은 내용을 반복하면 그러잖아도 출판물이 홍수를 이루는 요즘 세상에 정말 처치 곤란한 쓰레기 하나를 더 보태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꽤 오래 고민을 하다가 결국은 쓰기로 결심하고 이렇게 나섰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도서관에 가서 시 창작에 관한 책들을 주욱 훑어보다가,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게 되었지요. 뭐냐면, 지금까지 시에 관한 창작이나 이론을 써낸 책들은 모두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는 겁니다. 특히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쓴 안내서나 개론서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공부하는 여러분들이 보기에는 다소 벅찬 내용들입니다. 또 창작을 위한 책이라고 하는 것들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제로 시를 쓰는 데는 크게 필요하지 않은 이론들까지 자세하게 나와 있어서 그런 책을 봤다가는 시 쓰는 일을 오히려 더 어려워 할 것 같았습니다. 궁색하지만, 이것이 제가 이 책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미 나온 것들의 내용이나 질서를 무시하고 그 동안 제가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낀 방법과 이론을 중심으로 설명하되, 어떻게 하면 어렵지 않고 재미있게 시를 쓸 수 있는가 하는 방법에 대해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물론 그 결과는 이 책의 맨 뒷장을 덮으면서 여러분들이 판단하겠지요.
이왕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더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지금은 학생들이나 청소년들이 읽을 책이 많아졌습니다. 제 또래의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위한 책을 많이 펴냈고, 또 외국의 청소년 서적을 많이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라던 19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책이 귀해서 동화책을 읽기도 어려웠지만, 그나마 동화책을 마칠 때쯤이면 어른들이 읽는 책으로 단계를 뛰어 넘어버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노키오나 삼총사들이 나오는 책을 읽다가 갑자기 프로이드 심리학이나 실존철학으로 넘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간에서 무협지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니 중 고등학교 때에 우리 세대가 겪었던 공부의 어려움은 이루다 말로 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안 가니 포기를 하던가, 아니면 아예 문장 전체를 외워버려서 어느 날 문득 머릿속에서 터득이 되는, 그런 미련 맞은 방법으로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이런 방법을 ‘독서백편의자현’이라던가요?
그런데 요즘은 청소년을 위한 좋은 책이 많이 나왔습니다. 아마도 이런 고생을 한 세대들이 어른이 되면서 다음 세대에는 이런 고생을 시키지 않고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맺은 결실이 아닌가 합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책이 많이 나오기 시작해서 1990년대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청소년 도서가 출판되었습니다. 2천 년 대 중반에 접어든 이제는 학생들을 겨냥한 도서가 출판업계의 소득과 생존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여러분을 위해서는 아주 다행한 일이지요.
그러나 아직도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실용서 부분에서는 많이 나왔는데, 정작 중요한 인문학 분야, 즉 철학, 문학, 예술, 사회학, 경제학 같은, 여러분들이 듣기만 해도 머리가 딱딱 아픈 분야에서는 아직도 청소년을 위한 도서가 거의 없다시피 한 실정입니다. 이름도 없는 제가 이렇게 발 벗고 나선 것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입니다.
문학 분야에서도 많은 개론서가 나왔습니다만, 대부분 대학 강단에 선 교수님들이 대학생 언니들을 상대로 쓴 것들이어서 여러분 같은 청소년들이 읽을 책은 거의 없는 형편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책을 따라가면서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여러분의 시각으로 충고를 해주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제든지 고치겠습니다. 지금 이 책은 저 개인의 명예를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에게 필요한 책을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시대가 변했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유사 이래 계속 있어온 말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 벽에도 ‘요즘 젊은 애들 싸가지 없다’는 말이 나온다니, 이 말이 진짠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럴 법한 이야기입니다. 이미 있는 것에 익숙한 어른들은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모험에 늘 의구심을 보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가 변했다는 말은 다른 그 어느 때의 그 말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정보 매체의 발달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누구나 편지를 쓰고 책을 읽었습니다. 새로운 정보를 접하는 방법은 책밖에 없었고, 소식을 전하는 방법은 편지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을 아날로그라고 한다는 것은 신세대인 여러분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랄 때만 해도 책 읽는 것이 새로운 정보를 얻는 유일한 창구였고, 바로 그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학교에 다녔습니다. 우리 시골 마을에 제가 중학교 2학년 때에 처음 전기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에 텔레비전이 들어왔지요. 그러니까 우리 세대만 해도 젊은 날의 가장 중요한 때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세상을 더듬은 것입니다.
바로 이 전기 때문에 세상은 확 뒤바뀌었습니다. 새로운 정보가 활자로 찍혀 나오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몇 달이 걸립니다. 가장 빠른 것이 신문인데, 신문은 하루가 걸리죠. 그러나 책은 그렇게 빨리 나올 수가 없습니다. 조판과 제본을 하고 그리고 그것을 필요한 사람에게 가져다주는 장사꾼의 손을 거치는 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책 한 권이 지은이의 손에서 여러분의 손까지 도착하는 데는 아무리 빨라도 보통은 3~6개월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텔레비전에서는 사건이 발생하는 그 즉시 화면을 타고 안방으로 전달됩니다. 시시각각으로 새로운 정보를 전해주는 것이지요. 이 속도는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더욱 빨라졌습니다. 더욱이 인터넷이라는 온라인 체계가 일상화되면서 지구 저편의 일까지도 책상 앞에서 금새 알아보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인터넷은 한쪽에서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쌍방체계라는 것이 앞의 텔레비전과는 또 다른 점입니다. 이러니 몇 달이 걸려서 새로운 정보를 전하는 출판 매체가 사양길에 접어들 수밖에 없는 시대입니다.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세상을 확 바꾸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을 바꾸었고, 그로 인해 세상을 사는 방법까지도 바꾸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지금 시대가 변했다고 하는 탄식은 옛날에 시대가 변했다고 탄식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가 아날로그 세대와 가장 다른 점은 사고의 방식일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책으로 사고 한 세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책으로 사고하기보다는 그 즉시 눈앞에 나타나는 화면을 통해 사태를 파악합니다. 즉 세상을 그림으로 읽어 들인다는 말이지요. 아프리카의 굶주림에 관해서 진단하고 해부한 몇 권의 책보다 그곳에서 찍어 보낸 사진 한 장이 여러분의 행동과 사고를 결정합니다. 우리 세대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들을 돕는 일일까 고민하는 동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후원회를 검색하지요. 또 애인이 필요하면 우리 때는 ‘썬데이서울’이라는 주간지의 뒤쪽을 뒤적여서 거기 나온 주소로 편지를 썼는데, 여러분은 인터넷 채팅 방에서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사진까지 보며 상대를 고르지요. 생각과 표현, 행동의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지털 세대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행동은 출판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골치 아픈 책은 팔리지 않습니다. 팔리는 책들은 그림책이거나 만화책, 그것도 아니면 본격소설이라고 하더라도 중간중간에 그림이 들어가서 눈맛을 시원하게 자극해주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문학보다는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영화나 드라마에 미쳐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기 싫어하는 폐인임을 자처합니다. 2003년도에 <다모>라는 미니 시리즈 드라마에 미친 사람이라는 <다모 폐인>이라는 말이 그 효시이지요.
그러니 이런 열광이 문학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시인들이 내는 시집을 보지 않고 소설을 읽지 않습니다. 소설은 머잖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그 때까지 기다립니다. 예술을 생각하는 기준과 가치가 달라진 것입니다. 우리 때는 시인을 아주 고상한 예술가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감수성이 조금 있는 학생들은 예외 없이 문학청년의 시절을 겪었습니다. 어쩌다가 학교에서 발행하는 교지나 청소년 잡지에 자신의 작품이 실리기라도 하면 천하를 다 얻은 듯이 자랑을 하고 자부심을 느꼈지요. 주변의 친구들도 그러는 그에게 존경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관심 분야가 다르다 보니 이러한 세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누구나 탤런트나 영화배우, 또는 슈퍼모델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그러니 얼굴을 고치면서까지 그 꿈을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델이나 탤런트를 양성하는 기관이 생기고 가수를 배출하는 전문회사가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런 영향은 시나 문학에서 독자의 감소로 나타납니다. 영화판으로 젊은이들의 관심이 몰리자 문학판에는 텅 비어버리는 공동화 현상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요새 무슨 문학상이나 신인상 같은 데 응모해오는 사람들의 연령을 보면 대부분 30대 후반이라고 합니다. 세월과 세태의 변화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일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그렇다고 해도 글의 중요성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사고는 잠시 스쳐가는 영상 몇 컷이 아니라 머릿속에 새겨진 깊은 이해력과 그러한 영상을 제공하는 현실세계 속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조리 있는 사고는 대부분 글을 읽고 쓰는 능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에 의하면 시대의 변화 때문에 시의 독자가 감소한다는 식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면도 있습니다. 어차피 젊은이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을 배웁니다. 하기 싫더라도 거쳐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현실에 몸담고 있으면서 그 현실을 잠시 거쳐야 할 곳으로 생각하지 내가 앞으로 미래를 걸고 한 번쯤 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탓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지금 문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는 문학을 너무 엄숙한 분위기로 했습니다. 무슨 상이라도 타면 마치 옛날에 과거 급제한 사람 모양으로 대접을 했고, 또 주변의 분위기가 그렇게 돌아갔습니다. 바로 이 엄숙주의가 젊은이들의 발랄한 사고를 용납하지 못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든 재미가 있어야 거기에 오래 매달립니다. 그런데 엄숙한 분위기에서는 재미를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재미없는 곳에 누가 오래 머무르겠습니까? 오늘날 디지털 시대를 맞이해서 문학판이 이런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은 문인들 스스로 자초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시도 재미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과서에서 여러분들이 배운 시, 또는 그 시를 배운 시간을 돌이켜보십시오. 과연 재미있었는지요? 아마도 그렇다고 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국어시간의 시 공부는 지루합니다. 그런 분위기가 여러분들을 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지요. 이 지루함의 원인은 앞으로 이 책 곳곳에서 지적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어떻게 같고 다른지 천천히 따라오면서 감상해보기 바랍니다
3) 학생도 변했다
앞서 시대가 변했다는 말을 했습니다. 변한 그 시대에 따라서 학생들도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변화의 조짐이 심상찮다는 것을 느낀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문예반 학생을 지도하다 보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맞닥뜨립니다. 제일 골치 아픈 것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에 학생들을 참가시켜달라는 주문입니다. 문예반 학생들을 지도하면 그런 공문이 전부 넘어와서 학생들을 대회에 내보내라는 은근한 압력이 들어옵니다. 그러다가 학생들이 대상이나 금상이라도 타면 학교에서 전교생이 보는 가운데 시상을 하지요.
그러다 보니 그런 대회에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예컨대 민족의 비극인 6.25을 소재로 한 글짓기 대회가 열리면 할아버지의 얘기를 꺼내서 당시의 아픔을 회상한 다음 다시는 그런 비극이 없도록 힘써야겠다는 식의 수필을 쓰고 시를 짓지요. 그러면 이따금 운이 좋아서 상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행사가 학생들의 문예활동을 망가뜨리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주최 측에서도 내보내는 학교 측에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왜 학생들의 문예의식을 망가뜨리는 일이냐 하면, 그런 대회에 참가하면서 상 타기 위한 거짓말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학은 일종의 거짓이 조금씩 다 들어있다는 점에서 그것을 또 합리화합니다. 그렇게 해서 몇 차례 상을 타면 그 학생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통해서 사람을 감동시키는 방법을 배웁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양치기 소년의 거짓부리와 같은 것이어서 나중에는 문학이 일종의 거짓을 통해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점차 문학을 잊고 맙니다. 진실하지 않은 것에 평생을 매달린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금방 지루해지고 또 남들이 봐주는 재미도 없으면 스스로 그 판을 떠납니다.
바로 이런 점을 중고등학교의 문예반에서 차단하는 것이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서 우러나는 느낌을 글로 적은 것이 문학임을 깨닫는 것이 청소년 때의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시를 보는 시각과 시를 평하는 태도를 기르는 것입니다. 교과서에서 배우는 것은 대개 시를 감상하는 법입니다. 창작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1992년에 제천상고라는 학교에서 문예반을 지도할 적에,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에게 몇 가지를 주문했습니다.
먼저 본받을 만한 좋은 시집 목록을 30여권 골라주면서 구해 읽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학생들 개개인이 이 많은 시집을 사려면 용돈이 바닥날 것이니, 한 학생 당 한두 권씩 사서 동아리에 기증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시집을 서로 돌려서 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쓴 시를 가져와서 친구들과 돌려 읽으며 잘못 된 곳과 잘된 곳을 검토하는 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시 창작에 도움이 될 만한 이론서를 쉬운 것으로 골라서 소개했습니다.
다행히도 당시 학생들은 잘 따라 주었습니다. 매주 토요일 날 학교에 남아서 학생들 스스로 창작한 시를 돌려 읽으며 잘못된 부분과 잘 된 부분을 지적하며 몇 달을 지내니, 학생들이 시를 보는 안목과 시 쓰는 능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해마다 한 번씩 시민회관을 빌려서 시화전을 했습니다.
그때 학생들의 관심은 자신의 고민과 생활의 느낌을 시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상을 타겠다던가 하는 다른 욕심은 있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도에 대도시의 한 인문계고등학교로 전근을 왔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의 부탁으로 이미 있던 문예반을 기꺼이 맡았습니다. 그리고는 회장을 불러서 앞서 제천상고의 학생들에게 주문했던 것을 그대로 다시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1달이 가고 2달이 가도록 어떻게 했다는 소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장을 불러서 사정을 알아보았더니, 내가 요구한 사항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학과 공부 때문에 바쁘고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학생들의 태도에 어이가 없었습니다. 속으로 굉장히 실망을 했지요. 과연 시대가 변했다더니 애들이 어쩜 이 지경이 되었단 말인가 하고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새롭고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처한 환경이 10년 전과는 그 근본부터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즉 대학에서 내신 성적을 반영하여 수시로 신입생을 뽑는데, 그 내신 점수에 영향을 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국 고교생들이 참여하는 백일장의 수상 경력이었던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대상을 타면 입학할 때 혜택을 주는 제도가 그 10년 사이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상을 한 번 타보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고, 관심이 글쓰는 즐거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장에 온통 쏠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그 학생들에게는 원론에 가까운 나의 요구가 오히려 이상했던 것이지요. 문학의 기초를 배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당장 몇 달 후에 벌어질 백일장에서 상 타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런 것을 동상이몽이라고 하지요? 한 침대에서 잠자면서도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것이 이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에게 시 쓰는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인데, 학생들은 상 타는 방법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운 일입니까?
그런데 학생들의 이 같은 그릇된 열망을 채워줄 선생님조차도 일선 학교에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또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국어선생님들도 문학을 다 배워서 알고 있지만, 창작하는 법은 따로 배우지를 않습니다. 대학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창작은 순전히 혼자서 궁리해야 할 몫이지요. 그러나 장래에 국어 교사를 하겠다고 해서 창작에 나서는 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창작하는 분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 한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일선에서 애 타는 학생들을 위해서 누군가 그에 필요한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몇 년을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기에 재주 둔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각 대학에서 주최하는 문학상에는 나름대로 다 의도가 있습니다.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겠지요. 그러나 그러한 행사가 학생들에게 안겨주는 좌절감은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닙니다. 대상은 한 명한테 돌아가는데 거기에 참가하는 학생들은 1천명에 육박하거든요. 그러니 그 한 명 때문에 나머지 1천여 명이 재주 없는 학생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백일장의 맹점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관청에서 주관하는 대회가 갖는 나쁜 점을 백일장 역시 그대로 안고 있을 수밖에 없지요.
백일장은 시를 삶의 표현으로 놔두지 않고 이벤트로 만들어서 극소수에게 엄청난 영광을 돌리고는 많은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런데도 각 대학에서는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계속 강행하고 있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쁜 일이라고만 단정 짓기도 어렵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그런 백일장에 응모하는 것을 보면 학생들의 관심을 모으게 하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니까요.
그러나 먼 장래를 내다보고서 말하자면 그런 기획성 행사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습니다. 생활 속에서 자연히 우러나서 시가 되어야지 어떤 행사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맞는 작전으로 시를 쓰는 것은, 오래 우려서 국물을 내려고 하지 않고 조미료를 부어서 맛을 내려는 것과 같습니다. 입맛을 확 당길지는 몰라도 몸에 좋을 리는 없겠지요.
새 학교에 와서 이런 상황을 접하게 되자, 안타깝지만, 학생들이 시를 잘 쓰는 법을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천천히 가는 것이 옳은 길이라고 해서 빨리 가려는 학생들에게 달리는 방법을 아예 안 가르쳐주는 것도 역시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나름대로 학생들이 빨리 시 잘 쓰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서둘러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쁘더라도 원칙부터 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살아가는 모든 분야에서 법칙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시 창작이라고 해서 그 원칙에서 벗어날 리는 없습니다.
4)어른들의 시가 재미없는 사연은?
2004년 10월부터 1년 동안 시집을 1,000여 권 읽었습니다. 손에 닥치는 대로 다 읽은 것입니다. 옛날에 읽었던 것은 물론이고 최근에 나온 것까지 손에 잡히는 대로 다 읽었습니다. 학교 도서관은 물론 시립 도서관, 그리고 시집을 갖고 있는 벗들이 소장한 것까지 빌려다가 모조리 읽었습니다.
이런 무모한 짓을 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고 또 그것은 사사로운 것이어서 굳이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시집 1천 권을 읽고서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시인들은 거대담론에 집착해있다는 것과, 그 결과 시에서 가장 중요한 시 읽기의 즐거움을 시인들의 시집에서는 찾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거대담론이란 커다란 주제라는 말입니다. 즉 민족의 장래, 국가의 통일, 이 시대 문명의 폐해나 방향,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끼치는 영향, 생명과 환경……, 이런 것들 말입니다. 시인들의 시와 시집에서는 이런 커다란 주제들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커다란 주제를 말하면서 익살스럽고 재미있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뭐, 하자면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게 쉽지는 않겠지요. 그러니까 시인들은 너무 진지한 주제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느라고 시가 원래부터 갖고 있는 놀이와 재미의 속성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시가 진지하고 무겁고 부담 가는 주제를 다루게 되면서 그런 분위기를 싫어하는 보통 사람들은 저절로 시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인문학의 위기네 시의 몰락이네 하면서, 독자를 탓할 것도 없는 일이지요.
수수께끼 하나 내겠습니다.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약 오르면 빨개지는 것은?
답은 뭐지요? 답은, 고추입니다. 썰렁하다구요? 썰렁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자라던 시대에는 이런 수수께끼를 들으며 낄낄거렸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요. 이와 똑같은 수수께끼는 아니겠지만, 말장난으로 이루어진 수수께끼나 삼행시 짓기를 하면서 연인들끼리 혹은 친구들끼리 아주 재미있게 보내는 것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재미는 우리 시대나 여러분의 시대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아있는 한 이런 말장난은 우리의 생활을 재미있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심하면 실없는 사람이 되겠지요? 그리고 삶을 허망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예컨대, 제가 한 학생을 혼내려고 불러서 ‘너 도대체 몇 살이야?’ 그랬더니 ‘게맛살!’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화가 치밀어서 종아리를 때렸지요. 농담도 좋지만, 상황을 구별하지 않으면 큰 오해를 사기도 하는 것입니다. 말장난은 함부로 할 게 못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말장난이 꼭 필요한 분야가 바로 문학이고, 그 중에서도 시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내용 때문에 감동하기도 하지만, 시에서 말이 만드는 재미를 또한 놓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살면서 먹고사는 문제로 인생의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먹고사는 일에 허덕이다 보면 어느덧 세월은 가고 살 만해지면 이미 나이가 들어서 옛날 청춘 시절에 꿈꾸었던 것들은 아득해져버립니다. 그러다 보니 삶의 모든 문제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그러다 보니 시도 이런 문제를 자꾸 다루게 됩니다. 이런 커다란 문제들은 인생사의 중요한 일이기에 시에서도 중요하게 다룹니다. 통일이라든지 민족의 장래라든지 문명 비판이라든지 환경 문제라든지, 하는 모든 것들이 시의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지금 제가 읽은 1,000권의 시집 대부분이 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겁습니다.
그렇지만, 시가 다루어야 할 것이 꼭 그런 것이어야만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는 우리가 우리 생활의 느낌을 표현하는 문학의 갈래입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우리 같은 소심한 사람들의 애환과 고민, 기쁨 같은 것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런 것을 우리 스스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하며, 그런 표현을 받아주고 발표해줄 수 있는 어떤 기관이나 잡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요? 여러분들이 고민하는 바를 시로 쓸 수 있습니까? 일기장에 써놓은 시를 발표할 잡지가 여러분 주변에 있던가요?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시의 위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의 시는 무언가 큰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시도, 서점에서 사보는 기성 시인들의 시도 모두 큰 주제에 집착해서 시가 가진 가볍고 재미있는 부분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간과하고 자꾸 무거운 주제를 다룬 시들만을 좋다고 강요하다보니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이 사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가 너무 무겁고 큰 것만을 다루지 않고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느낌과 감정을 그때그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그 방법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것이구요.
기성 시인들이 쓴 시를 읽으면 여러분은 당장 부끄러움을 느낄 것입니다.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은 아주 작은 것인데, 시인들이 쓴 시는 시란 큰 것을 노래하는 것이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으로 작용하니까요.
따라서 여러분은 우선 그런 생각부터 벗어 던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는 아주 작은 감정들을 노래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좀 더 깊어지고 시 쓰는 실력이 나아지면 그때 가서 좀 더 큰 주제를 노래해도 된다. 지금은 말장난이라도 좋으니 글을 쓰고 말을 꾸미는 재미에 빠져서 시의 맛을 느끼는 일부터 하자. 시는 놀이의 일종이다.
이것이 앞으로 시를 즐기면서 평생을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여러분들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시를 가볍게 생각하고 매일 부딪치는 감정을 일기 쓰듯 쓰기 바랍니다. 시라는 거 별거 아닙니다. 엄청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맛있는 사탕 같은 것입니다. 쓰디쓴 것을 억지로 삼키려고 할 것 없습니다. 맛있는 것부터 핥아먹기 바랍니다. 지금 이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그것이고, 마침내는 그 방법을 알려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의 끝까지 따라가면 저절로 그렇게 될 것입니다.
5) 엉뚱함은 예술의 원천
혹시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행동을 해서 어른들한테 혼난 적은 없나요? 아마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은 청소년 시절에 그런 적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요. 그런 중에도 유난히 엉뚱한 짓을 많이 해서 혼나는 사람이 있지요? 있을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이 거기에 해당할 것이고, 말과 행동은 안 해도 주변에서 혼나는 친구들을 보면서 혼내는 어른들에 대한 불만을 속으로 삭인 경우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 엉뚱함은 일상생활에서 많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환경은 이미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안정된 모습이란 가장 필요한 것만을 해서 불필요한 낭비를 없애는 방향으로 오랜 세월 발전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이 빨리 성공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이미 있는 질서와 환경이 장애가 되고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그 장애를 뚫어야만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됩니다. 젊은이들 가운데 새로운 길을 뚫어서 성공하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술에서는 그 엉뚱함이 생명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예술을 성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회는 경제성을 본능에 가깝게 추구하지만 인간의 내면에는 경제성과는 상관없이 놀고자 하는 욕망도 있습니다. 노는 데는 경제성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지요. 바로 놀고자 하는 이 욕망을 높은 차원으로 승화시킨 것이 예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성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엉뚱한 생각과 행동이 정말로 즐거움을 주는 원천이 되곤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 엉뚱한 생각을 한다고 혼나는 학생들은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술 쪽으로 방향을 바꾸십시오. 그 엉뚱함을 예술 쪽에서 살리면 칭찬 받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에서는 이 엉뚱함이 어떻게 작용하는가 하는 것을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봄에 일제히 피는 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름답지요? 당연하지요. 봄에 피는 꽃의 특징은 잎새보다 먼저 핀다는 것입니다. 잎이 피기도 전에 꽃이 피고, 꽃이 지면서 잎사귀가 나지요.
그런데 어느 날 저는 봄꽃을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가지 끝에서 밀려나오는 꽃이 꼭 똥으로 보이는 겁니다. 꽃은 나무가 누는 똥이다. 하하하. 웃기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녁 밥상에서 아빠한데
아빠, 오늘 꽃피는 것 보니까 꼭 똥 싸는 것 같애.
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도 그 아빠가 예술가가 아니라면 좋은 소리를 듣지는 못할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지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라는 사람이 다른 선생님이나 교장 선생님한테
어째 꽃이 똥으로 보이네요.
라고 한다면, 겉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속으로는,
미친 눔!
할 겁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그게 궁금하거든 옆 친구한테 한 번 그렇게 말해 보세요. 그 반응을 보면 알겠지요.
그런데도 그 발상이 너무 아까워서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궁리 끝에 저는 이것을 시로 쓰기로 했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혼날 짓인가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이 작품을 보고 시가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유명한 시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분명히 시지요.
이 시를 써 가지고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읽어줬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배꼽을 잡고 웃더군요. 그러면서 ‘뭐, 그런 시가 있담?’ 하는 반응이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지 않습니까? 바로 그 재미로 학생들은 시에 한 발 더 가깝게 다가간 것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제가 시를 잘 썼다고 자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시 중에는 이런 시, 이렇게 쓰는 시도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꺼낸 것입니다. 이 시가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기 다를 것입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시각의 신선함으로 보면 잘 썼다고 할 것이고, 지금 유행하는 시집들의 무거운 분위기로 보면 시가 무슨 장난이냐고 힐책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그런 말에 개의치 않습니다. 재미없는 시는 그 시가 재미없는 것을 떠나서 시를 독자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마침내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결과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재미있는 모습으로라도 독자의 곁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편 더 보겠습니다. 봄에 벚꽃 피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벚꽃은 어느 날 갑자기 확 피었다가 불과 열흘을 못 버티고 순식간에 져버리지요. 불어오는 봄바람에 하얀 꽃잎이 눈발처럼 날릴 때는 황홀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확 피었다가 급히 지는 꽃의 특성 때문에 일본 사람들은 그 꽃을 가장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들의 민족성에 갖다 붙입니다만, 꽃에서 국수주의의 냄새를 읽을 필요는 없겠지요. 어쨌거나 여러분은 이런 벚꽃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던가요? 아무 생각 없다구요? 하하하.
무슨 폭발이라도 하듯이 피는 벚꽃을 보고, 어느 날 저는 갑자기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거, 무슨 뻥튀기 장사가 튀밥 튀겨내는 것 같다.
쌀알을 뻥튀기면 하얀 튀밥이 되어 나오지요. 벚꽃 피는 모양이 그렇게 보인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떨까요? 그래도 이번에는 아까 그 똥 연상보다는 나으니, 아빠한테 혼나는 일은 없겠지요. 그렇지만 엉뚱하다는 핀잔은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엉뚱하기는 하지만 버릴 수 없는 아주 소중한 발상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시를 썼습니다. 다음이 그겁니다.
벚꽃
4월의 봄바람에 가지를 흔드는
벚나무 뿌리 밑에서는
뻥튀기 장사가 기계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
맹꽁이처럼 똥똥한 몸통을
스스로 풀무질한 장작불 위에서
시커먼 숯검댕이가 되도록 궁굴리며
고압계 바늘이 허용하는 눈금까지 가까스로 참았다가
손가락으로 꼭 막은 우리들
어린 날의 귓바퀴를 뻥! 하고 때리면
하얀 콧김과 함께 헤벌어진 검정 아가리로
와르르르르 쏟아지던 튀밥과 강냉이들,
지금은 벚나무 가지에서 정신없이 터지고 있다.
뒤쫓아온 우리를 동구밖에 세워두고
황톳길로 돌아간 그 뻥튀기 아저씨일까?
우주의 손잡이를 잡고 지구를 빙글빙글 돌려
겨우내 땅속에서 풀무질 하다가
뜸 잘 들었다는 표시로 아지랑이가 오르면
앞이빨처럼 하얀 강냉이들이 폭발음을 내며
검은 가지마다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계절이 뻥틀 자루를 잡고 시간을 돌리는
벚나무 밑을 지나노라면
이 가지에서 뻥 저 가지에서 뻥
뻥뻐벙뻥 뻥뻥 뻐버버버벙뻥 뻥뻥
강냉이들 터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귓구멍을 활짝 열어놓는다.
정신없이 터지는 벚꽃들을 보며 강냉이를 먹던 옛날의 추억을 떠올린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설명해놓으니까 어떤가요? 엉뚱함도 아주 버릴 것만은 아니죠? 엉뚱함도 쓸모가 있는 겁니다. 사람의 행동은 버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합니다. 여러분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공상이나 엉뚱함을 굳이 없애려 하지 말고 이렇게 예술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런 엉뚱함이 너무 심해서 일상생활을 도저히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곤란합니다. 그러나 예술의 열정은 자기 뜻대로 되는 게 아니어서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정신병원에서 생애를 마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짜라투스투라로 유명한 니체가 그랬고, 함형수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삶을 마감했고, 김소월도 말년에 앓던 우울증을 아편으로 달래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엉뚱함의 열정이 삶을 망가뜨린 경우에 해당합니다만, 그런 엉뚱함이 이룬 예술의 성취 때문에 그 뒤를 살아가는 우리는 높은 정신의 경지를 감상하고 사는 것이지요. 개인으로서는 불행이지만, 그 뒤의 인류에게는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시인이 된다는 것.
우리가 시인, 시인, 하는데 그 시인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거나, 아니면 단순하게, ‘시 쓰는 사람’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 붙이는 호칭입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묻겠습니다. 시라고는 모르는 어떤 직장인이 술을 마시고 와서 저녁에 시를 썼습니다. 그 시는 일기장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시인인가요? 시인이 아닌가요?
어때요? 갑갑하지요? 앞의 말에 의하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니 시인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시 한 편 썼다고 시인이라고 부를 수도 없고……. 이를 어쩌지요?
자, 우리가 보통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과 어쩌다 시를 한 편 쓴 직장인의 사이에는 이상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 이상한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장황하게 서두를 꺼낸 것입니다.
1) 시인이 되는 방법
앞서 말한 대로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다 시인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나 보통 앞서 시 한 편을 쓴 직장인에 대해서는 시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관습 때문입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일군의 사람들은 시 쓰는 것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생각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시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이 되는 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습니다. 그 절차란 이른바 <등단>을 말합니다. 등단이란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다는 말은 시인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의 무대에 오른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시인이라는 무대에서 활동하도록 해주는 어떤 단체나 조직이 있다는 뜻이겠지요? 맞습니다. 우리가 시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보통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시인이라는 인정을 누군가한테서 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그런 자격을 인정해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런 일을 할까요?
보통은 문학잡지사에서 그런 일을 합니다. 잡지사에서는 문학작품을 싣는 잡지를 냅니다. 보통은 정기간행물로 내지요. 거기에는 문학 전반을 다루는 잡지도 있고, 시만을 다루는 시 전문지도 있습니다. 이런 잡지들이 출판되면 그런 잡지를 사서 읽는 사람이 생깁니다. 문학에, 또는 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들 가운데 시를 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잡지사에서는 추천해주겠다는 광고를 합니다. 그리고는 작품을 받아서 그 중에서 좋은 작품을 쓰는 사람이 발견되면 그 작품을 잡지에 발표해줍니다. 이런 것을 추천이라고 하지요. 이러한 관문을 통과하여 잡지에 계속 시를 발표하고 그러한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내면 그때부터 시인이라는 호칭이 따라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추천을 잡지사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각 신문사에서도 매년 초에 이런 행사를 합니다. 이름하여 <신춘문예>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매년 말에 상금을 걸어놓고서 작품을 모은다고 광고한 다음에 응모작 중에서 가장 좋은 작품을 뽑아서 이듬해 첫날 신문에 발표하고는 수상자를 불러서 상금을 주지요. 여기에 당선되는 것을 우리나라 문학지망생들은 가장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좀 우스운 일이지요? 그런데 그 우스운 일이 왜 전통으로 굳었을까요?
잠깐 골프 얘기 좀 하겠습니다. 골프는 유럽에서 발생한 운동인데 미국에서는 메이저 대회가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종목으로 성장했지요. 아마도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기 있는 종목인 만큼 그것을 즐기는 사람도 많아서 대중 스포츠로 정착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바라보는 골프는 어떻습니까? 돈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귀족스포츠지요? 왜 이렇게 됐을까요? 그것은 전파과정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국에서는 골프가 이미 대중화되었고, 마음만 먹으면 일반 시민들도 다 배울 수 있습니다. 이 얘기는 비용이 크게 들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땅이 넓은 미국에서는 얼마든지 그 용지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따라서 골프를 치고 나오면서 흘린 땀을 씻을 수 있는 샤워 실이나 한 칸 있으면 누구나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골프가 들어오면서 성격이 약간 변했습니다. 일본은 땅이 좁은 나라입니다. 땅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골프장을 짓는 사람은 거기에 든 본전을 뽑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찾아오는 손님들이 주머니를 열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법은 간단합니다. 부대시설을 좋게 만들어서 그 사용료를 비싸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골프를 치기 위해 골프장에 들어서면 우선 옷을 갈아입는 곳이 있고, 대기실이 있고, 휴게실이 있고, 샤워 실이 있습니다. 매점도 만들어야겠지요. 이런 시설을 아주 으리으리하게 해서는 그만큼 비싼 이용료를 받는 겁니다. 좋은 시설에서 골프를 치고 싶은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골프라는 운동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시설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도 역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단가가 올라가면 일반 봉급쟁이들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원으로 올라가 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골프는 일반 대중 스포츠가 아니라 귀족 스포츠가 되는 겁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하기 어렵겠죠.
문제는 한국의 골프 역시 신분계층을 가르는 노릇을 톡톡히 한다는 점입니다. 웬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계층이 아니고는 골프를 즐기기 어려운 것이 우리나라의 실정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미국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 아니고 일본식 골프 문화가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위공직자들이 골프를 친다는 고발이 뉴스에서 이따금 나오는 것은 골프 문화의 이런 속성 때문입니다.
추천제도라고 하는 관행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유럽에서는 우리나라 같은 추천제도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문단을 형성하는 어떤 장치가 있겠지만, 그것은 쌀롱이라든지 아카데미라든지 하는 식의 운영방법이 있지, 마치 옛날에 과거제도처럼 군림하는 우리나라 식의 추천제도는 없다는 얘깁니다. 그들은 시를 써서 시집을 내면 그것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우리나라에 이렇게 추천제도가 정착한 것은 일본의 제도를 본뜬 것입니다. 일본에서는 오래 전부터 그런 제도가 있었고, 일제가 우리나라를 식민통치하면서 그 제도가 그대로 들어와 정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을 뒷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따르는 것은 우리나라에 그런 전통이 수백 년 이어져왔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과거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제도는 지방에서 실력이 뛰어난 후보자들을 시험으로 뽑아서 중앙으로 올려보내고 중앙에서 두 차례에 걸쳐서 시험을 치른 다음에 장원을 내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그리고 벼슬길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었기도 합니다. 따라서 옛날 조선시대에는 공부를 해서 과거를 치른 다음 거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는 것만이 선비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무언가 뽑히지 않으면 자격을 주지 않는 어떤 관행이 생긴 것이지요. 바로 이런 관행이 잡지사에서 신인을 뽑는 제도로 정착하고, 거기에 신문사까지 가세해서 오늘날의 문단이라는 세력이 형성된 것입니다.
물론 근대문학 초기에 신문사에서 문인들의 작품을 신문에 실어준 것은 당시에는 문인들이 작품을 써도 딱히 발표할 지면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소설을 실어서 신문을 한 장이라도 더 팔아보겠다는 속셈도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금도 그렇게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요.
뽑히는 자가 있으면 뽑는 자도 있는 법입니다. 신춘문예건 잡지사건 어떤 추천을 통과하면 뽑힌 나와 나를 뽑은 사람의 관계가 저절로 생깁니다. 그렇게 되면 뽑는 사람의 시각에 맞는 작품이 뽑힌다는 결론이 나오지요? 무슨 얘기냐면 누구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 뽑힌다는 얘깁니다. 사과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과와 배, 바나나를 주고서 고르라고 하면 당연히 사과를 고르지 않겠어요? 그렇다고 배나 바나나가 잘못 된 것은 아니거든요. 이처럼 입맛에 맞지 않는 것들은 저절로 묻히게 됩니다. 묻힌 그것이 아무런 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만약에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면 그것을 어떻게 할까요? 신춘문예 심사에서 초심을 맡은 사람이 버린 것을 본심을 맡은 사람이 주워서 당선시켰다는 얘기가 종종 들려오는 것을 보면 이런 우려는 그냥 우려로 그칠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추천해주는 잡지사가 잡지 경영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 어떤 의도를 깔고 추천을 감행한다면 그건 더욱 큰 문제를 일으키지요. 그것은 장사꾼들이 하는 흥정과 같습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자격증을 주는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질 테니까요. 추천제도 하에서 이런 일은 안 생길래야 안 생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추천제라고 하는 것은 옛 시대 과거제도의 잔상이 남아서 전해오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얽매이는 것은, 부끄러운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자랑스러울 리 없는 일이지요.
이런 관행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나섭니다. 그 방법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동인지를 내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 돈을 걷어서 시집을 내는데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참여하여 시집 한 권 안에 여러 사람의 시를 싣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동인 활동이라고 합니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자신들의 세계를 마음껏 드러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지요. 여러분도 주변에 시 쓰는 친구들이 있으면 한 번 모여서 해보기 바랍니다. 꼭 출판사에 의뢰하지 않아도 됩니다. 두 세 명이 모여서 복사기로 복사를 해서 10부만을 해도 좋고, 아니면 부모님들의 지원을 받아서 출판을 해도 좋습니다. 미숙하더라도 어릴 때 그런 일을 해본 것이 나중에 굉장한 추억이 됩니다. 사실 이런 방법으로 시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야 시가 진정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스스로 시집을 내는 것입니다. 남의 눈치 볼 것 없이 오래도록 시를 쓰다가 50편이 되고 100편이 되면 그것을 시집으로 묶는 것입니다. 실제로 시집을 평생에 한 권만 내고도 유명해지는 사람도 있고, 한 권도 내지 못한 채 죽고서 나중에 뒷사람들이 시집을 내줘서 유명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여러분이 저항시인으로 알고 있는 윤동주 같은 분도 생전에는 시집을 한 권도 못 냈는데, 그 뒤 해방 후에 친지들이 그가 남긴 유고를 모아서 낸 시집으로 유명해진 경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것을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내가 즐거워서 시를 쓰면 지금 당장은 시인이라는 이름을 듣지 못해도 나중에 언젠가는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시인이 들어있습니다. 그 시인을 불러내어 노래하게 하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지금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 숨어서 잠자고 있는 시인의 방문을 두드리십시오. 똑똑똑!
2) 시의 관행과 전통을 이해하는 방법 : 남의 시집 읽기
이 정도 하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시인이 되는가 하는 것을 대충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아있습니다. 추천제도 같은 억지 제도가 해줄 수 없는 중요한 일 한 가지가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시라는 전통과 관습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입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시는 이미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옛날부터 써서 그것이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전통의 한 분야로 굳었습니다. 사회를 구성하는 분야라고 하는 것은 그 분야에 오래도록 종사한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이고, 그러는 과정에서 다른 분야와는 다른 그 분야의 전통과 질서가 형성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시만을 놓고 보면 시라는 전통이 섰으면 시 아닌 것과 시인 것을 구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문단에서 추천을 해주든 말든, 이미 오랜 세월 동안 이어져온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시의 역사는 아주 오랩니다. 문헌으로 기록된 것을 보더라도 고구려 2대 유리왕이 지은 ‘꾀꼬리의 노래’라는 것이 있지요. 고구려는 기원전에 선 나라이니 벌써 2000년도 넘은 세월입니다. 그 후에도 계속 한자가 들어와서 기록으로 남기는 바람에 이루 헤아릴 길이 없을 만큼 많은 시들이 있습니다. 국어시간에 배운 것들만 해도 민요, 향가, 고려가요, 경기체가, 시조, 가사, 한시 같은 것들이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시의 전통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시의 전통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선배 시인들이 써놓은 시를 읽으면 됩니다. 남의 시를 읽다 보면 시라는 것은 이렇게 쓰는 것이구나 하는 판단이 저절로 생겨납니다. 그리고 그런 방법을 익혀서 거기에 맞춰서 나의 감정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방법을 이렇게 시 읽기가 아닌 설명으로 배우는 중이구요.
아까 앞서서 제가 시집 1000권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1000권이나 되는 시집을 다시 읽고 또 읽은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점, 과연 정말 좋은 시가 되려면 어떤 속성을 갖추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직접 깨닫기 위한 것입니다. 이론으로 시를 배우지만 남의 시를 읽으면서 확인을 하고, 그렇게 해서 터득한 원리로 내가 직접 써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방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1000권이라는 숫자에 기죽지는 말기 바랍니다.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여러분처럼 이제 막 시 쓰는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 마음을 먹은 경우에는 많이 익는 것이 오히려 혼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시를 인생의 목표로 삼아서 이미 등단의 과정을 마친 사람입니다. 말하자면 프로인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무모한 짓을 한 것입니다. 프로는 프로다워야 합니다. 프로답다는 것은 자신이 택한 전문 분야의 일을 전부는 아니라도 큰 줄기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000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앞서 시의 전통을 배우려면 남의 시를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시인들의 시집이 참 재미없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많은 시집을 다 읽을 수는 없을 것이고, 설령 많이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좋은 작품을 골라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점이 생깁니다. 그렇다고 1000권을 다 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이건 정말 고민될 일입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좋은 시집만을 골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겠지요. 문제는 좋은 시집을 골라놓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주변에서 좋은 시집 목록을 골라놓은 분 보셨나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물론 좋은 시 몇 편을 뽑아서 소개한 책들은 있겠지요. 궁여지책으로 그런 책들을 사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 장래에 시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꾸는 사람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한 일입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분들을 위해서 이 자리에 그 목록을 제시할까 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1000권을 읽고 그 가운데서 이런 건 시 쓰는 사람이 꼭 읽어볼 만하구나 하는 생각을 한 시집들입니다.
□진달래꽃□김소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 미래사, 199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윤동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3, 미래사, 1991
□님의 침묵□한용운,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 미래사, 1991
□광야□이육사,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8, 미래사, 1991
□접시꽃 당신□도종환, 실천문학의 시집 37, 실천문학사, 1986
□농무□신경림, 창비시선 1, 창작과비평사, 1975
□뿔□신경림, 창비시선 215, 창작과비평사, 2002
□탄광 마을 아이들□임길택, 실천문학의 시집 75, 실천문학사, 1990
□나그네□박목월,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30, 미래사, 1991
□청산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정유화, 시작시인선 24, 천년의시작, 2003
□땅의 연가□문병란, 창비시선 26, 창작과비평사, 1981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임영조, 민음의 시 94, 민음사, 2000
□도화 아래 잠들다□김선우, 창비시선 229, 창비, 2003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복효근, 경계시선 8, 문학과경계사, 2002
□대설주의보□최승호, 오늘의 시인총서 22, 민음사, 1983
□노동의 새벽□박노해, 풀빛판화시선 5, 풀빛, 1984
□정선 아리랑□박세현, 문학과지성시인선 103, 문학과지성사, 1991
□오라, 거짓 사랑아□문정희, 민음의 시 102, 민음사, 2001
□붉은 편지가 도착했다□박미라, 현대시시인선 16, 현대시, 2004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문정희, 민음의 시 119, 민음사, 2004
□적멸의 불빛□오세영, 문학사상 신작시집, 문학사상사, 2001
□너는 꽃이다□이도윤, 창비시선 113, 창작과비평사, 1993
□사람의 마을에 꽃이 진다□도종환, 문학동네 시집 2, 문학동네, 1994
□입 속의 검은 잎□기형도, 문학과지성시인선 80, 문학과지성사, 1989
□만국의 노동자여□백무산, 청사민중시선 33, 청사, 1988
□난초□이병기,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8, 미래사, 1991
□세속도시의 즐거움□최승호, 세계사시인선 4, 세계사, 1990
□머나먼 곳 스와니□김명인, 문학과지성시인선 71, 문학과지성사, 1988
□우리 이웃 사람들□홍신선, 문학과지성시인선 39, 문학과지성사, 1984
□산시□이성선, 시와시학 시인선 4, 시와시학사, 2000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창비시선 86, 창작과비평사, 1990
□아무도 울지 않는 밤은 없다□이면우, 창비시선 211, 창작과비평사, 2001
□제비꽃 여인숙□이정록, 민음의 시 105, 민음사, 2001
□몸에 피는 꽃□이재무, 창비시선 144, 창작과비평사, 1996
□이 짧은 시간 동안□정호승, 창비시선 235, 창비, 2004
□물 건너는 사람□김명인, 세계사시인선 21, 세계사, 1992
□어딘지 모르는 숲의 기억□박남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9, 미래사, 1991
□별빛 속에서 잠자다□김진경, 창비시선 143, 창작과비평사, 1996
□향수□정지용,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9, 미래사, 1991
□슬픔이 기쁨에게□정호승, 창비시선 19, 창작과비평사, 1979
□백년 자작나무 숲에 살자□최창균, 창비시선 236, 창비, 2004
□기억들□송재학, 세계사시인선 107, 세계사, 2001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신용목, 문학과지성시인선 290, 문학과지성사, 2004
□멧새 소리□백석,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0, 미래사, 1991
□오감도□이상,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19, 미래사, 1991
□사랑의 기교□오규원, 오늘의 시인총서 11, 민음사, 1975
□외롭고 높고 쓸쓸한□안도현, 문학동네시집 1, 문학동네, 1994
□길은 광야의 것이다□백무산, 창비시선 82, 창작과비평사, 1999
□가난한 사랑노래□신경림, 실천문학의 시집 50, 실천문학사, 1988
□경주 남산□정일근, 문학동네, 2004 개정판
□절정의 노래□이성선, 창비시선 96, 창작과비평사, 1991
□누구도 마침표를 찍지 못한다□정일근, 시와시학 시인선 15, 시와시학사, 2001
□동두천□김명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9, 문학과지성사, 1979
□거미□박성우, 창비시선 219, 창작과비평사, 2002
□아무 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안도현, 현대문학북스의 시 1, 현대문학북스, 2001
□오래 말하는 사이□신달자, 민음의 시 122, 민음사, 2004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이정록, 문학과지성시인선 221, 문학과지성사, 1999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유하, 열림원, 1999
□문자들의 다비식은 따뜻하다□주용일, 경계시선 20, 문학과경계사, 2003
□천지현황□김종길,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41, 미래사, 1991
□세상의 밥상에서□김은자, 세계사시인선 69, 세계사, 1999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김선우, 창비시선 194, 창작과비평사, 2000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이윤학, 문학과지성시인선 159, 문학과지성사, 1995
□조국의 별□고은, 창비시선 41, 창작과비평사, 1984
□한 잔의 붉은 거울□김혜순, 문학과지성시인선 288, 문학과지성사, 2004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정영선, 문학동네 시집 42, 문학동네, 2000
□서울의 예수□정호승, 오늘의 시인총서 21, 민음사, 1982
□무화과는 없다□김해자, 실천문학의 시집 135, 실천문학사, 2001
□내 안의 열대우림□정해종, 생각의 시 1, (주)생각의 나무, 2001
□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정일근, 문학사상사, 2003
□지상의 편지□조성림, 우리시대의 시인 100인 선집, 문학마을사, 2002
□강릉, 프라하, 함흥□이홍섭, 문학동네 시집 29, 문학동네, 1998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김수우, 시와시학 시인선 19, 시와시학사, 2002
□우포 늪 왁새□배한봉, 시와시학 시인선 17, 시와시학사, 2002
□어두워진다는 것□나희덕, 창비시선 205, 창작과비평사, 2001
□개□최준, 세계사시인선 14, 세계사, 1991
□청산행□이기철, 오늘의 시인총서 20, 민음사, 1982
□세상의 모든 저녁□유하, 민음의 시 56, 민음사, 1993
□사랑의 감옥□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02, 문학과지성사, 1991
□자신 없는 것들은 걸려있다□금기웅, 문학동네 시집 68, 문학동네, 2003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나희덕, 창비시선 125, 창작과비평사, 1994
□집은 아직 따스하다□이상국, 창비시선 174, 창작과비평사, 1998
□개같은 날들의 기록□김신용, 세계사시인선 9, 세계사, 1990
□국경의 밤□김동환,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7, 미래사, 1991
□알 시□정진규, 세계사시인선 77, 세계사, 1997
□젖은 눈□장석남, 솔의 시인 11, 솔출판사, 1998
□이용악 시 전집□윤영천 편, 창작과비평사, 1988
□푸르른 날□서정주,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23, 미래사, 1991
□무지개가 되기까지는□박정만, 문학사상한국시선 18, 문학사상사, 1987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조용미, 문학과지성시인선 283, 문학과지성사, 2004
□악어를 조심하라고?□황동규, 문학과지성시인선 53, 문학과지성사, 1993
□다보탑을 줍다□유안진, 창비시선 240, 창비, 2004
□우리 낯선 사람들□이하석, 세계사시인선 3, 세계사, 1989
□처용 이후□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19, 민음사, 1982
□비단길□강연호, 세계사시인선 42, 세계사, 1994
□천년의 바람□박재삼, 오늘의 시인총서 7, 민음사, 1975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69, 문학과지성사, 1988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장정일, 민음의 시 16, 민음사, 1988
□산정묘지□조정권, 민음의 시 33, 민음사, 1991
□풀잎□강은교, 오늘의 시인총서 5, 민음사, 1974
□쓰러진 자의 꿈□신경림, 창비시선 115, 창작과비평사, 1993
□맨발□문태준, 창비시선 238, 창비, 2004
□모래인간□최승호, 세계사시인선 101, 세계사, 2000
□우리들의 양식□이성부, 오늘의 시인총서 4, 민음사, 1974
□햄버거에 대한 명상□장정일, 민음의 시 7, 민음사, 1987
□자명한 산책□황인숙, 문학과지성시인선 281, 문학과지성사, 2003
□어머니와 할머니의 실루엣□신경림, 창비시선 172, 창작과비평사, 1998
□붉은 눈, 동백□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239, 문학과지성사, 2000
□추억의 푸른 이끼□장병천, 현대시 시인선 14, 현대시, 2004
□지상의 그 집□홍윤숙, 시와시학사, 2004
□나나 이야기□정한용, 민음의 시 92, 민음사, 1999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32, 문학과지성사, 1983
□인간의 시간□백무산, 창비시선 152, 창작과비평사, 1996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김남주, 창비시선 128, 창작과비평사, 1995
□누가 두꺼비집을 내려놨나□장경린, 민음의 시 21, 민음사, 1989
□진흙소를 타고□최승호, 민음의 시 8, 민음사, 1987
□지상의 인간□박남철, 문학과지성시인선 36, 문학과지성사, 1984
□나를 위해 울어주는 버드나무□이윤학, 문학동네 시집 22, 문학동네, 1997
□여우를 살리기 위해□이학성, 민음의 시 58, 민음사, 1994
□낯선 길에 묻다□성석제, 민음의 시 39, 민음사, 1991
□처용□김춘수, 오늘의 시인총서 2, 민음사, 1974
□김씨의 옆 얼굴□이하석, 문학과지성시인선 35, 문학과지성사, 1984
□사랑은 늘 혼자 깨어있게 하고□한승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60, 문학과지성사, 1995
□벽을 문으로□임동확, 문학과지성시인선 149, 문학과지성사, 1994
□황금 연못□장옥관, 민음의 시 44, 민음사, 1992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4, 문학과지성사, 1978
□무인도를 위하여□신대철, 문학과지성시인선 7, 문학과지성사, 1994
□예레미야의 노래□박두진, 창비시선 29, 창작과비평사, 1981
□별의 집□백미혜, 민음의 시 112, 민음사, 2002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이성복, 문학과지성시인선 13, 문학과지성사, 1980
□지리산의 봄□고정희, 문학과지성시인선 64, 문학과지성사, 1987
□게 눈 속의 연꽃□황지우, 문학과지성시인선 97, 문학과지성사, 1990
□자유가 시인더러□조태일, 창비시선 60, 1994
□겨울날□김광섭, 창비시선 4, 창작과비평사, 1975
□그대의 하늘길□양성우, 창비시선 63, 창작과비평사, 1987
□적당히 쓸쓸하게 바람 부는□심재휘, 제3의 시 10, 문학세계사, 2002
□내 몸이 유적이다□이순현, 문학동네 시집 62, 문학동네, 2002
□변명은 슬프다□권경인, 창비시선 181, 창작과비평사, 1998
□사무원□김기택, 창비시선 185, 창작과비평사, 1999
□유리의 나날□이기철, 문학과지성 시인선 211, 문학과지성사, 1998
□수런거리는 뒤란□문태준, 창비시선 196, 창작과비평사, 2000
□이팝나무 길을 걷다□박정남, 문학세계현대시선집 180, 문학세계사, 2001
□이형기 시 99선□이형기, 도서출판 선, 2003
□물은 목마름 쪽으로 흐른다□허만하, 솔, 2002
□두고 온 시□고은, 창비시선 213, 창작과비평사, 2002
□버려진 사람들□김신용, 시작시인선 16, 천년의시작, 2003
□바늘구멍 속의 폭풍□김기택, 문학과지성 시인선 151, 문학과지성사, 1994
□빗자루를 타고 달리는 웃음□김승희, 민음의 시 99, 민음사, 2000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장석남, 문학과지성 시인선 156, 문학과지성사, 1995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이윤학, 문학과지성 시인선 241, 문학과지성사, 2000
□적멸의 즐거움□김명리, 문학동네 시집 37, 문학동네, 1999
□사물의 운명□하종오, 문학동네 시집 19, 문학동네, 1997
□뒤란이 시끌시끌해서□조달곤, 작가정신, 2004
□국토□조태일, 창비시선 2, 창작과비평사, 1975
□파천무□송수권, 경계시선 1, 문학과경계사, 2001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조정인, 시작시인선 37, 천년의시작, 2004
□염소좌 아래 잠들다□전명숙, 시작시인선 39, 천년의시작, 2004
□상처가 스민다는 것□강미정, 시작시인선 15, 천년의시작, 2003
□몽유 속을 걷다□김신용, 실천문학의 시집 118, 실천문학사, 1998
□열 손가락에 달을 달고□이준관, 문학과지성시인선 122, 문학과지성사, 1992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송찬호, 민음의 시 22, 민음사, 1989
□10년 동안의 빈 의자□송찬호, 문학과지성시인선 148, 문학과지성사, 1994
□혼자 가는 먼 집□허수경, 문학과지성시인선 118, 문학과지성사, 1992
□고슴도치의 마을□최승호, 문학과지성시인선 46, 문학과지성사, 1985
□그리운 바다 성산포□이생진, 동천사, 1987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오규원, 문학과지성시인선 19, 문학과지성사, 1981
□북 치는 앉은뱅이□양성우, 창비시선 23, 창작과비평사, 1980
□사평역에서□곽재구, 창비시선 40, 창작과비평사, 1983
□전야□이성부, 창비시선 30, 창작과비평사, 1981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최승호, 문학 판 시 1, 열림원, 2003
□꽃산 가는 길□김용택, 창비시선 70, 창작과비평사, 1988
□어여쁜 꽃씨 하나□서홍관, 창비시선 80, 창작과비평사, 1989
□밤의 공중전화□채호기, 문학과지성 시인선 201, 문학과지성사, 1997
□대머리와의 사랑□성미정, 세계사시인선 71, 세계사, 1997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임동확, 민음의 시 31, 민음사, 1990
□풍경 뒤의 풍경□최하림, 문학과지성 시인선 254, 문학과지성사, 2001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신현림, 세계사시인선 41, 세계사, 1994
□화개□김지하, 실천문학의 시집 141, 실천문학사, 2002
□섬진강□김용택, 창비시선 46, 창작과비평사, 1985
□반시대적 고찰□박남철, 세계사시인선 89, 세계사, 1999
□푸른 삼각형□강유정, 청하시선 8, 도서출판 청하, 1983
□국어선생은 달팽이□함기석, 세계사시인선 86, 세계사, 1998
□1차원 나라□박순업, 세계사시인선 25, 세계사, 1992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세계사시인선 59, 세계사, 1995
□지리산 갈대꽃□오봉옥, 창비시선 69, 창작과비평사, 1988
□자본주의의 약속□함민복, 세계사시인선 31, 세계사, 1993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이수명, 세계사시인선 62, 세계사, 1995
물론 이 중에는 여러분이 소화하기 힘든 시집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몇 권 읽어보고 어렵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이 중에서 구미에 맞는 것부터 골라 읽으면 됩니다. 시간이 가면서 시를 보는 안목이 발전하고 정신이 성숙하면 저절로 다 이해가 될 만한 시집들입니다. 접하기 쉽고 이해하기 쉬운 순서로 배열하려고 애썼습니다만, 그게 제대로 됐는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이 다르다면 저에게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의 의견을 감안해서 순서를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3)일기 쓰기의 중요성
장래에 시인이 될 꿈을 꾸는 학생들을 위해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러니까 장래에 시인까지 될 필요가 없는 학생들은 읽지 않고 넘어가도 되는 부분이 되겠습니다. 단순히 남이 써놓은 시를 읽는 독자로만 남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냥 넘어가도 좋습니다.
시인은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해진 것 같아도 그렇게 되기까지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사전에 몇 가지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무슨 100미터 달리기를 하듯이 준비 땅! 하고서 해도 되는 일이라면 일상생활에서 버릇까지 들일 필요는 없겠지요. 그러나 시 쓰는 일은 시의 격식과 형식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런 훈련이 되어있을 때 시로 표현할 느낌이 찾아오면 그 순간에 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실로 시를 발상하는 순간은 몇 초에 불과하지만, 몇 초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시를 만들 수 있는 능력과 기술은 그 전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시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크게 오해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시는 천재성에 의존한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즉, 굳이 시의 형식을 배우지 않아도 천재 시인은 나타나서 위대한 작품을 쓴다는 것입니다. 시의 천재는 어릴 때부터 재주를 드러내서 굳이 시 쓰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어른이 되기 전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어린 시절에 시를 몇 편 써보고서 뜻대로 안 되면 ‘아, 나는 재주가 없는가보다!’ 하고는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착각은 없습니다. 시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그 형식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고, 그 형식을 배우는 데는 상당한 시일이 걸립니다. 물론 그런 형식을 전혀 모르고서도 쓸 수 있는 것이 시이기는 합니다만, 역사 이래 위대한 작품은 그런 형식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고서 이루어진 작품은 없습니다.
시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것은, 등산에 비유할 때 9부 능선 언저리쯤입니다. 누구나 노력하고 시간을 들이면 8부 능선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형식을 완전히 배워서 익힌 다음에 그 사람의 감수성이 절묘하게 작용하여 위대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시인들이 위대한 작품을 남기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작품을 쓰고 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부분이 작용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런 위대한 작품만을 위해서 시가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는 우리 일상생활의 즐거운 도구입니다. 감상하는 것도 이런 창작의 비밀을 알 때 정말 큰 즐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의 위대성을 알아보는 것 역시 위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시를 쓰기 위해서 평상시에 길들여야 할 버릇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일기입니다. 일기를 꾸준히 쓰면서 시의 감성을 닦아야 합니다. 감성이라는 것은 느낌입니다. 이 감수성은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차 줄어듭니다. 그냥 두면 20대 후반에 메말라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감수성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래서 감수성을 갈고 닦아서 나이가 들어도 세상을 그런 감수성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런 자세를 길러야 합니다. 그 방법이 일기 쓰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와 똑같이 쓰면 그건 부족합니다. 일반인들이 쓰는 일기는 보통 사건을 중심으로 씁니다. 오늘 누구를 만났고, 무엇을 했으며,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 하는 식이지요.
그러나 시인 지망생의 일기는 달라야 합니다. 일기의 초점을 사건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 즉 감수성에 맞추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니 안개가 끼었는데, 그 모습이 어땠다던가, 그 하얀 안개를 보니 무슨 느낌이 들었다던가 하는 그런 방식으로 말입니다. 사건을 접하더라도 그 사건의 개요만이 아니라 그 사건을 보는 나의 느낌을 적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감성과 느낌을 중심으로 일기를 오랜 세월 쓰면 어떤 사물을 보고 어떤 사건을 접하는 순간 말해야 할 느낌을 금방 잡아내게 됩니다. 시는 사건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느낌을 전하는 갈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일기를 ‘감성일기’라고 합니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감성일기를 꼭 써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 중요해서 백 번을 강조해도 좋습니다. 감성일기를 쓰지 않는 사람은 30 중반이 못 되어 시를 떠납니다. 감수성이 메말라서 세상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이 시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약간 빗나갑니다만, 말이 나온 김에 소설가를 지망하는 학생들에게도 한 마디 하겠습니다. 역시 소설을 지망하는 학생들도 일기를 쓰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시인 지망생이 쓰는 감성일기와는 약간 다르게 써야 합니다.
소설은 사회의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문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의 변화에 따라서 변하는 사람의 의식과 풍속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수성이나 생각도 중요하지만, 소설 지망생은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꼼꼼히 적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앞서 <다모 폐인>이라는 말을 했지요? 무슨 드라마와 관련하여 폐인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도의 일입니다. 그런데 한 50년 세월이 흐른 뒤에 2002년도의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2002년도에는 김두한의 일생을 다룬 <야인시대>라는 드라마가 유행했습니다. 소설에서 2002년도의 그 드라마에 반한 사람을 등장시키는데 여기서 <폐인>이라는 말을 쓰면 될까요? 안 될까요? 당연히 안 됩니다. 시대 배경이 2002년인데 그 후에 생긴 말을 쓰면 안 되지요. 또 임진왜란 때 고추장을 담갔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지요. 왜냐? 고추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가져온 것이거든요. 그러니 그 후에는 되지만 그 전에는 안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점입니다. 소설은 사회의 변화를 꼭 읽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일기에 꼼꼼하게 적어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인터넷이 발달하여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인터넷에는 거짓 정보가 하도 많아서 그것을 걸러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자료가 가장 정확한 것입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꼼꼼히 기록해놓으면 세월이 갈수록 자신에게 귀중한 소설의 자료가 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 한 가지, 소설 지망생이 해야 할 일은 소설을 읽고 그것을 정리하는 공책을 만드는 일입니다. 소설을 읽으면 그에 대한 정리를 하는 버릇을 길러야 합니다. 즉 제목, 지은이, 출판사, 발행년도, 소설의 시점을 차례대로 적고 줄거리를 요약한 다음, 그에 대한 느낌과 문제점을 정리하는 버릇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소설을 읽는 대로 정리를 해두면 나중에 그것이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그런 작업을 하면서 소설에 대한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됩니다. 깊은 이해는 창작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4) 진정으로 살아있는 시는 생활을 노래한 시이다
시인들이 쓴 시는 거대담론에 빠져서 재미가 없다고 앞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된 데는 다 사연이 있습니다. 그 사연은 우리나라의 복잡하고 한 맺힌 역사에서 비롯합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일본군 소위였던 사람이 해방 된 뒤에 장군이 되었는데, 이 사람이 4.19로 어지러운 정국을 틈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대통령이 됩니다. 자신의 과거를 덮기 위해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죽을 때까지 평생토록 대통령을 하려는 욕심으로 헌법을 고칩니다. 그것이 저 악명 높은 유신헌법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1979년에 자신의 부하가 쏜 권총을 맞고 죽습니다. 20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던 독재자가 죽자 우리나라 정치권은 갑자기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정국은 한 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에 빠졌습니다.
이 때 서울을 지키던 젊은 군인 몇몇이 흑심을 품고 또 한 번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자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이용하여 서울을 장악했고,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휴전선을 지키는 군대까지도 몰래 빼내어 동원했습니다. 군대가 나라를 다스리는 체제로 간 것입니다. 나라는 발칵 뒤집혔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 날마다 거리로 나와서 데모를 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에 동참했습니다. 전국의 각 도시는 날이면 날마다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습니다. 권력에 눈이 먼 이들은 마침내 칼을 뽑았습니다. 전국의 도시 하나를 택하여 본때를 보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를 택했습니다.
1980년 5월의 일입니다. 다른 여느 도시와 마찬가지로 당시 광주는 매일 같이 학생들의 시위로 최루탄이 터졌습니다. 18일 새벽에 공수부대가 도시를 점령했고, 군인들은 물러가라고 시위하는 학생들을 공수부대들은 몽둥이로 무참히 때렸습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분노하여 군인들에게 항의하자 군인들은 이들을 역시 몽둥이로 다스렸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날 군인들의 무지막지한 행동에 항의하기 위해 수만 명의 시민들이 도청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들에게 총을 쏘았고, 그들이 모여들었던 금남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변했습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5.18광주항쟁의 발단입니다.
그 뒤로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광주에서 피를 뒤집어 쓴 그 군인들은 권력을 잡는 데 성공하고, 친구가 친구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주며 10년 동안 한국을 주물럭거립니다. 문제는 이 젊은 군인들의 움직임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던 미국이 끝내 침묵을 지켰다는 사실입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반미를 외치지 않던 나라 대한민국이 이 사태를 계기로 미국의 정체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한국의 정치를 다시 보고, 미국을 다시 보고, 그리고 진정 무엇이 조국을 위하는 길인가를 깊이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기 시작합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진 것을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 것도 안 된다는 믿음이 당시 민주주의를 꿈꾸던 평범한 젊은이들을 투사로 만듭니다. 그리고 군부독재를 타도하여 민주주의를 이루자는 혁명의 길로 나섭니다. 이것이 1980년대 내내 팽배했던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여러분이 시인이었다면 이런 시기에 어떻게 했을까요? 뒷짐 지고서 한가하게 세월을 노래하고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을까요? 아마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인은 순수한 영혼을 지닌 사람들이거든요. 순수하다는 것은 욕심 없이 올바르다는 것이고, 올바른 사람은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합니다. 나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시인은 순수하기 때문에 옆에서 일어나는 불행을 그냥 보고 지나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것이 가족과 이웃과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결정하는 커다란 일이라면 목숨을 바쳐서 바로잡으려고 하겠지요. 당연한 일 아닌가요?
1980년대 이후의 시는 이런 상황을 빼놓고서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인들은 당시의 독재 정권이 만드는 암울한 세태에 대해 절규를 했고,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것인가 하는 고민을 했습니다. 당연히 이런 것들이 그 당시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습니다. 그런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시도 일정한 기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시의 주제가 통일이라든가 민족, 문명, 환경 같은 거대한 주제를 다루었던 것입니다.
어른들의 시가 재미없어진 것도 바로 이런 분위기와 깊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루도 아니고 10년이 넘게 매일 같이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통일을 해야 하고,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도시 문명을 비판하는 분위기가 이어져온 것입니다. 좋은 얘기도 한두 번이지 10년이 넘고 20년이 넘도록 들으면 어떻겠어요? 지겹지요?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이러한 경향에 반발을 보이는 시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주제들이 틀렸다거나 잘못된 것이라고 받아들이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통일이 되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는 날까지 가장 중요한 시의 주제가 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은 그러한 주제들이 너무 강해서 상상력이 딱딱해지고 그 바람에 시의 즐거움이 많이 줄었다는 것과 그런 영향으로 인해 시가 일반 독자들로부터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현실의 내용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1980년대의 시인들이 그러한 거대담론을 주제로 삼은 것은 그 당시에 그들의 고민이 거기에 집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떨까요? 여러분도 그런 주제에 깊은 고민을 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여러분들도 그런 내용을 시로 써야 할 것입니다. 어떤가요? 그런가요? 날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나요?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도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게 여러분 고민의 전부는 아닐 겁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어떻게 하면 성적을 더 올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고민할 테고, 아니면 어떻게 하면 예쁜 여학생과 사귈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멋쟁이 남학생을 사귈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것입니다. 아니면 어떻게 하면 용돈을 더 올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극히 사소하지만 중요한 고민들을 하며 지낼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것을 시로 써야 할까요? 답은 자명하지요? 시는 여러분들의 고민을 담아야 합니다. 당연히 공부 때문에 걱정하는 내용이 시에 담겨야 하고, 이성 친구에 대한 관심이 시에 나타나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여러분의 나이에 써야 할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평생토록 그런 내용으로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관심은 계속 바뀝니다. 그러면 시의 내용도 바뀌겠지요. 대학에 가서 운동권이 된 학생은 조국의 장래를 노래할 것이고, 평범한 주부가 된 사람은 평범한 주부의 일상을 노래하는 시를 쓸 것이고, 그럴 것입니다.
제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서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시를 쓸 때는 그 당시의 고민을 솔직하게 쓰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가 고민하는 것을 쓰는 일에 익숙해지면 나중에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순간이 오고, 그때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아주 감동스런 시를 쓸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프로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자기 주변의 일과 감정을 시로 쓰면서 시의 재미를 느끼다가 나중에 가서 실력이 쌓이고 재능을 발휘하게 되면 저절로 시인이 되는 겁니다. 진정한 시의 즐거움과 발전은 프로페셔널리즘이 아니라 아마튜어리즘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시의 그런 즐거움을 만끽해야 할 나이이고 그런 때라는 것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5) 시평 하는 법
여러분들이 시에 관심을 갖고 살다보면 주변에서 그런 친구들을 만납니다. 시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라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여러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이 훨씬 진도가 빠릅니다. 재미도 있구요. 그래서 혹시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있으면 머뭇거리지 말고 동아리를 만들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매주에 한 번씩 모여서 자기가 쓴 작품을 보여주고 그들의 견해를 들으면 혼자서 고민하고 쓸 때에는 볼 수 없던 여러 가지를 보고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를 쓰는 사람들은 굉장히 콧대가 높습니다. 그래서 칭찬을 해주기를 바라지 단점을 지적 받는 것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래서 시평을 하다가 크게 상처를 받고 싸워서 그예 시를 그만두고 마는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손핸가요? 그만 두는 사람 손해겠지요?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발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시평을 하는 방법에 대해서 간단히 알아보고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26살이 되던 1985년에 시를 처음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제가 몸담고 있던 <창문학(窓文學)>이라는 문학 동아리가 있었는데, 거기서 시평 하는 방법을 처음으로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시평 하는 방법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창문학에서 하던 그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방법을 소개하려고 하는데, 만약에 나중에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되면 그때 가서는 그 새로운 방법을 소개하지요.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먼저 자리를 둥글게 배치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모든 사람을 볼 수 있고, 어느 한쪽이 논의를 주도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둥근 배치가 어려우면 네모난 배치를 해서 될수록 가운데를 향해 집중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물론 사회자는 사회 보기 편한 자리에서 합니다.
사회자는 보통 모임의 회장이 합니다. 회장이 없을 때는 연장자나 부회장이 맡게 되지요. 사회자는 특별히 할 것이 없고 회의 진행을 원만하게 하면 됩니다. 대개 논의가 시작되면 두 패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기 쉽습니다. 그러면 사회자는 눈치를 봐가면서 그 논쟁이 개인의 감정을 상하는 단계까지 나가지 않도록 적절히 조절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진행을 위한 발언 이외에는 될수록 아끼는 것이 좋습니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시는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복사해옵니다. 사회자가 미리 확인을 해서 시를 쓴 사람에게 복사해오라고 하던가 시를 미리 받아서 복사해둡니다.
지금은 복사하기가 편해서 좋지만, 옛날에는 칠판에 쓰고 그것을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복사해서 보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기도 합니다. 쓰여 있는 시를 맨눈으로 볼 때와 손으로 한 번 옮겨 적는 것은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눈으로 읽을 때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이 손으로 적으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복사 얘기를 했지만, 가장 좋은 것은 시를 자신이 직접 손으로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을 읽다가도 유난히 좋다고 느껴지는 시가 있으면 꼭 한 번 공책에 적어두기 바랍니다. 눈으로 대충 읽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 많이 발견됩니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시를 돌리면 그것을 읽느라고 조용해집니다. 그 상태로 5분가량 둡니다. 그러면 시를 받아든 사람은 시를 읽으면서 자신이 말해줄 부분을 표시하고 내용을 정리해둡니다. 그리고 발표할 시간이 되면 발표합니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반드시 소리를 내어 읽어야 합니다. 옛날에 시는 노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이 잘 살아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대부분 잊고 삽니다. 시를 소리 내어 읽을 때하고 그냥 눈으로 읽고 말 때하고는 굉장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를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또 시 낭송의 즐거움을 이런 때가 아니면 누리기 어렵습니다. 보통 때에 우리는 시집을 사서 눈으로 읽지 그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지은이 자신이 읽는 것은 혹시 글로 적는 과정에서 잘 못 적은 것이 있는가 확인하는 차원입니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읽습니다. 아무나 읽고 싶은 사람이 읽도록 하고, 자원자가 없을 경우에는 사회자가 지정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두 번 낭송이 끝나면 이제 사회자는 시에 대해서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시의 문제점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순서는 굳이 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나 한 사람의 발표가 끝나면 다른 사람이 발표하면 됩니다. 종종 서로 발표하려는 수가 있는 그 때는 사회자가 교통정리를 해주면 됩니다. 또 반대로 모두 침묵을 지키는 수가 있는데 그때도 사회자가 눈치를 봐서 시키면 됩니다.
중요한 건 이 부분입니다. 한 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시의 단점을 지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왜냐하면 습작기의 여러분이 완벽한 작품을 쓸 리 없기 때문이지요. 시의 초보자인 여러분이 쓰는 시에는 아무래도 미숙한 부분이 많이 있기 마련이고, 그런 부분은 시의 전문가가 아니라도 금세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런 단점을 지적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적을 당하고 나면 시를 쓴 사람은 큰 충격을 받는 것이 보통입니다. 자신은 잘 썼다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경험을 처음 하면 약이 얼마나 오르는지 그날 밤에 잠을 못 이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자존심이 너무 강한 사람은 그날 당장 시를 때려치우지요. 실제로 그래서 시를 그만 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 손해인지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것입니다. 처음부터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시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래서 남이 지적하는 단점을 겸허히 받아들여 더 좋은 작품을 쓰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정도도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면 그 사람은 시가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미워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부분을 고치라고 지적하는 것이 시평의 의도이기 때문입니다.
시평을 해주는 사람도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를 비평하는 것은 그것의 잘못 된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인격과 관련하여 상처를 받을 듯한 발언은 절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시에 잘못된 점이 발견되었을 때 그 점을 지적한 뒤에 반드시 자기의 체험을 말해주어야 합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런 문제점을 이렇게 해보니까 시 쓰기에 훨씬 좋더라, 하는 식으로요. 말하자면 그것을 고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사회자는 논쟁이 격해지면 특히 조심해서 운영해야 합니다. 논쟁이 너무 뜨겁게 진행되면 식혀주어야 하고, 너무 진행이 안 되면 잘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논쟁과정에서 개인이 상처를 입을 듯한 상황이 오면 재빨리 제지를 해서 좋게 풀도록 해야 합니다. 시평이 개인의 인격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좀 더 성숙된 토론의 장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단점을 지적해주는, 그래서 오히려 격려해주는 것이라는 점을 계속 부각시켜주어야 합니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모임이 진행되다 보면 잠잠해지는 순간이 옵니다. 할 이야기가 대부분 나왔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눈치를 봐서 시평을 마칩니다. 이때 사회자가 대충 총정리를 해주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작품 발표자입니다. 작품을 낸 사람은 발언권이 없습니다. 시평이 끝날 때까지 일체 한 마디도 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글 쓴 사람에게 발언권을 줘놓으면 이상하게도 변명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작품을 쓴 동기가 어떻고, 어떤 구절은 어떤 의미로 썼으며, 이런 말을 하려고 했다. 뭐, 이런 얘기를 하지 않겠어요? 그러니 그건 변명이 되지요. 작자가 그렇게 얘기를 해놓고 나면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겠어요. 시평이 진행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반박을 하면 시인을 욕하는 것이 되고요. 이래서 작품을 낸 사람에게는 일체 발언권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총무를 뽑아서 총무가 이 시평의 내용을 정리해두는 것이 좋습니다.
⑧ 뒤풀이를 한다.
시평을 마친 뒤에 반드시 뒤풀이를 합니다. 우리는 신분이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주로 막걸리를 마셨습니다만, 중고생인 여러분들은 그러면 안 되겠지요? 빵집에 가서 빵을 사먹든가, 아니면 음료수와 간단한 먹을 것을 사다가 먹는 것도 좋습니다.
왜 이것을 해야 하냐 하면, 시평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상합니다. 아무리 상대의 인격을 존중하더라도 단점을 지적하는 것인데, 서로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요. 그래서 말은 안 해도 속이 편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바로 그런 찜찜한 기분을 없애주는 것이 뒤풀이입니다. 음료수를 마시면서 시평에서 못 다한 이야기도 하고, 시평에서 마음이 상했으면 위로도 해주고, 생활하면서 겪는 고민도 털어놓고 또 고약한 성미를 지닌 선생님들 흉도 보고, 하면서 마음을 푸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 층 더 친한 친구가 되는 것이지요.
자, 이상 장황하게 시평하는 절차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상의 논의를 간단히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자리를 둥글게 배치한다.
② 시를 미리 복사해온다.
③ 시를 돌려주고서 5분가량 읽는 시간을 준다.
④ 사회자의 지시에 따라 지은이가 한 번 소리 내어 읽는다.
⑤ 지은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한 번 더 낭송한다.
⑥ 자유롭게 시에 대해서 견해를 발표한다.
⑦ 더 이상 새로운 견해가 없으면 마친다.
⑧ 뒤풀이를 한다.
자, 지금까지 사설이 좀 길었지요? 이제부터 진짜 시 쓰는 법으로 넘어갑시다.
3.시 창작의 원리와 실제
시를 쓰는 방법은 모두 3가지입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① 빗대어 쓰기
② 그리듯이 쓰기
③ 직접 말하기
애개개! 겨우 세 가지 뿐이예요? 시가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방법이 모두 세 가지 뿐이라구요? 뭐, 이런 질문을 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일어나지요?
그러나 사실입니다. 위의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어떤 내용이든지 원하는 것을 모두 시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다른 책에서는 뭐라고 설명하는지 모르겠으나 제가 한 20년 넘게 시를 쓰다 보니 이 정도로 나누면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실은 이것도 많이 늘려서 얘기한 겁니다. 아예 두 가지로 줄일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게 하면 이론으로 설명하기는 좋아도 실제로는 조금 불편하니 그대로 두겠습니다.
너무 간단하지 않냐구요? 하하하. 별 걱정을 다 하는군요. 바둑 두는 분들의 말씀을 들으면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전략과 계획은 무한대라고 하는군요. 바둑알은 색깔이 많아서 작전과 전략이 많은가요? 단 두 가지 색깔인데도 바둑판에 드러나는 정신의 질서와 배열은 무한대로 확대됩니다. 시 역시 그렇습니다. 이 세 가지가 혼자서, 또는 서로 섞이면서 만드는 시의 양상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무한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한 가지씩 보면서 연습을 하겠습니다.
1)빗대어 쓰기 : 비유와 상징
빗대어 쓰기란 시를 비유의 방법으로 쓰는 것을 말합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상대가 알고 있는 것을 토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시는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이 보고 느낀 것은 그 사람만의 체험에서 나옵니다. 특수한 것이죠. 그 특수한 체험을 그대로 쏟아놓으면 혼잣말이 되기 쉽습니다. 이렇게 혼자 느낀 내용이 어렵거나 복잡할 때 그것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미 익숙한 것에 빗대어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자는 사바나 지역에 살기 때문에 온대 기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은 볼 수 없는 짐승이었습니다. 만약에 그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들이 외국에 가서 이것을 보고 왔다면 사자가 뭐냐고 궁금해 하는 이웃들에게 뭐라고 알려주었을까요? 이거 궁금하지 않은가요? 나는 무척 궁금하던데……. 사자를 본 사람은 사자를 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렇게 설명할 겁니다.
먼저 사자는 맹수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짐승에 비유할 겁니다. 조선의 호랑이가 먼저 얘기되겠죠. 그런데 사자와 호랑이는 여러 모로 다릅니다. 그래서 먼저 전체 모습이 비슷하다고 한 다음에 부분부분의 다른 점을 열거할 겁니다. 우선 목둘레에 긴 털이 수북이 난다는 것이 호랑이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머리가 훨씬 더 크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큰 얼굴 때문에 눈이 더 강조되죠. 뭐라고 하겠어요? 왕방울 만하다고 하겠죠. 거기다가 커다란 입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머리통은 몸의 절반쯤이나 되게 크고, 목엔 목도리처럼 털이 달렸고, 입은 귀밑까지 찢어지고, 두 눈은 왕방울만하고…….
이와 같이 새로운 사물에 대해 설명할 때는 그것과 비슷한 것을 통해서 재구성하도록 듣는 사람이 잘 아는 것과 비교합니다. 그래야 빨리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의 기능입니다. 이를 토대로 비유를 정리해보면 비유는, 이미 있는 것을 토대로 낯선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앞서 사자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 설명을 듣고서 우리 조상들이 떠올린 사자의 모습을 알 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어디에? 탈춤에! 탈춤에 나오는 사자들이 우리 조상들이 말로만 듣고서 머릿속에 그려본 그것입니다. 이제 알겠지요? 탈춤의 눈에 왜 커다란 방울이 달렸는지를요! 사자의 큰 눈을 보고 왕방울 만하다고 누군가 표현했고, 그 말이 비유인 줄을 모르는 순진한 할아버지가 진짜로 커다란 방울을 달아버린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들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사자는 두 눈에 방울이 달린 괴상망측한 모습이었습니다. 하하하.
이 비유는 같은 문학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갈래 예컨대 소설이나 수필, 희곡보다 시에서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쓸 수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시에서 가장 화려하고 멋있게 쓰입니다. 시의 전유물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옛날부터 시인들이 써온 방법입니다. 그래서 시를 배우는 첫 번째 항목에서 이 방법을 다루는 것입니다.
비유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비유와 상징이 그것입니다. 보통 문학이론서나 시 개설서에서는 비유와 상징을 많이 다른 것으로 다루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시를 오래 쓰면서 보니까 이 두 가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조금 다른데 시를 쓰는 원리와 방식은 동일합니다. 그래서 같은 항목으로 묶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론가와 시를 쓰는 사람은 다릅니다. 이론가는 이미 나타나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이고, 시인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지금 시의 이론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시 쓰는 방법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론가들의 생각과는 어긋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비유를 살펴본 다음에 상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비유는 한자로 <比喩>라고 쓰는 데 이 <比>나 <喩>는 모두 옛날 한문에서 쓰이던 표현법입니다. 비는 좀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이고, 유는 하고픈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슬쩍 돌려 말해서 상대가 말하는 이의 의중을 눈치 챌 수 있도록 하는 표현법입니다. 메타포라는 서양의 이론을 번역하면서 이 두 가지를 합쳐서 <비유>라고 한 것이지요.
비와 유의 뜻을 보면 비유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직접 말하지 않고 그와 비슷한 다른 상황이나 사물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좀 과장을 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여러분의 말로 좀 뻥을 치는 것이지요.
우리 집 아이가 어렸을 때 음악 책의 악보를 보더니 꼭 콩나물 같다고 말하더군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음악 책의 음표가 하고자 하는 말이고, 콩나물이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밤중에 켜져 있는 가로등을 보고서도 역시
아빠, 저거 콩나물 같아.
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가로등의 모습과 콩나물의 모습이 비슷하게 생긴 것이고, 그것을 연결시켜서 말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비유의 시초이고 시의 출발점입니다. 누구나 새로운 풍경을 보거나 사물을 보면 이런 연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입니다.
비유는 새로 발견한 것을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바꾸어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는 콩나물을 먹었기 때문에 이미 익숙한 것이죠. 그런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음악 책에서 악보에 그려진 음표를 봤습니다.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찾아내서 얘기한 겁니다. 이것이 비유의 의미이고 기능입니다.
따라서 비유는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재주이고 기능입니다. 다만 시에서는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뿐이지요.
자, 그러면 이번에는 비유를 활용해서 시를 쓰기 위한 예행연습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요? 그런데 사랑이 뭐냐고 물으면 누구나 머뭇머뭇 거립니다. 그건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딱히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어서 그런 것이죠. 그런 상황에서 비유보다 더 잘, 그리고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그냥 마주보고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그러면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랑하는가보다,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나 편지를 쓸 때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편지를 쓰는데 달랑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만 달랑 써 보낼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하여간 날씨는 어떻고 어쩌고 하면서 분위기를 잡은 다음에 사랑 얘기를 꺼내야 하지 않겠어요? 일종의 기교가 필요하다는 얘깁니다. 그때 비유는 사랑을 표현하는 아주 좋은 방법이 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라고 쓰는 것보다
내게 당신은 별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 영혼 속에서 언제나 반짝반짝 빛나기 때문이지요.
라고 쓴다면 그것을 받아본 사람은 그냥 사랑한다고 쓴 것보다는 훨씬 더 감동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감동의 진폭을 크게 만들어주는 손쉬운 방법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유는 하고자 하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거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면 한 번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한 사랑을 표현해보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이다, 라고 해놓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유를 말해봅니다. 한 번 해보세요. 사랑이 왜 사닥다리일까요? 제가 한 번 해볼까요?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어때요? 그럴듯한가요? 별루라고요? 하하하하. 그러면 여러분들이 좀 더 좋은 해석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 더 합니다.
사랑은 가로등이다. 왜냐 하면 당신에게 가는 길을 환히 밝혀주니까.
어때요? 이번에도 시원찮았나요? 자꾸 그렇게 구박하면 곤란합니다. 자, 여러분도 한 번 해보세요. 아무거나 갖다 붙이고서 그것을 설명해보는 겁니다.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좋습니다. 해보셨나요? 그러면 제가 생각나는 대로 한 번 나열할 테니 여러분은 그 뒤에다가 이유를 써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유리창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봄바람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느티나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이쑤시개다. 왜냐 하면, ~
사랑은 빵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폭탄이다. 왜냐 하면, ~
사랑은 참새다. 왜냐 하면, ~
자, 해보셨나요? 이 밖에도 여러분이 얼마든지 만들어서 설명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런 재치가 시를 잘 쓰는 바탕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비유를 활용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 비유의 성질을 좀 설명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국어시간에 시를 배우면서 이것에 대한 설명을 많이 들었을 거예요. 지루하겠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복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비유는 내 생각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에 따라서 다시 두 가지로 나눕니다. 그 두 가지는 다음입니다.
-직유:
-은유:
이 차이는 엄청난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을 말로 하다 보니 그것을 연결시켜주는 말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연결사가 있으면 직유, 없으면 은유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살펴본 대로 <사랑은 사닥다리>라는 생각을 한 번 보겠습니다. 이 생각을 나타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사랑은 사닥다리 같다.
-사랑은 사닥다리이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같다>와 <이다>의 차이지요? <이다>는 생략해도 됩니다. 이 차이를 두고 직유와 은유라고 합니다. 직유는 위에서 보듯이 <~같이>라는 연결사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연결사가 들어가지 않으면 은유라고 하지요. <직>은 <直>인데 곧장이라는 뜻이고, <은>은 <隱>인데 숨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직유는 문장의 겉으로 직접 드러난다는 뜻이고, 은유는 그런 연결사가 문장 뒤로 숨어서 안 보인다는 얘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직유 : ~처럼, ~같이, ~인 양, ~답게, ~하듯
-은유 :
이것이 교과서나 이론서에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를 창작하는 사람들 쪽에서 보면 이런 것은 굳이 구별하자고 따지지 않아도 됩니다. 결국 같은 발상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처럼>을 붙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시 쓰는 사람에게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이번에는 앞서 제시한 비유를 시의 모양으로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기억이 안 나요? 그러면 아래를 봅시다. 앞서
사랑은 사닥다리다. 왜냐 하면,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가게 해주니까.
라는 놀이를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만 놓으면 발상은 될지언정 시가 되지는 않습니다. 시가 되려면 이 생각을 좀 더 다듬어야 합니다. 다듬는다는 것은 이 엉뚱한 연결을 그럴 듯하게 생각하게끔 살을 붙이는 것을 말합니다. 어떻게 살을 붙여야 할까요? 한 번 살을 붙여보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늘 높은 곳에 계십니다.
나는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으로
높이 있는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당신이 나를 돌아보지 않아도
나는 내가 만든 사랑으로
당신에게 날마다 다가갈 것입니다.
내게 사랑은 사닥다리입니다.
당신에게 다가가는 사닥다리.
자, 이렇게 써놓으면 어떤가요? 잘 쓴 것까지는 못 되어도 그럭저럭 시라고 할 만큼은 되지 않았나요? 시가 아니라구요? 떼끼! 하하하.
웃지만 말고 발상법을 배우기 바랍니다. 이렇게 비유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알맞은 상황을 만들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시의 기초입니다. 알맞은 상황이라는 건 비유된 두 가지 사이의 닮은 점을 계속 찾아내는 겁니다. 그러면서 찾아낸 그것을 연관 지어 설명하면 묘한 긴장을 이루면서 시가 됩니다. 이건 시에 남다른 재주가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시에 조금만 관심이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당장 해보시기 바랍니다. 재주의 문제가 아니라 관심의 문제라고 방금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나 시인입니다. 방법을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지요.
앞서 제가 제시한 사랑에 대한 비유 가지고 한 번씩 시를 만들어보기 바랍니다. 사랑은 동전이라는 것 갖고 한 번 더 해볼까요?
사랑은 동전입니다.
내가 앞면이면 당신은 뒷면
그래서 완벽한 사랑을 만듭니다.
내가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당신이 향하고
당신이 향하지 못하는 곳으로 내가 향하여
당신과 내가 동그란 한 세상을 만듭니다.
둥글게 만든 그 세상으로
우리 사랑의 길을 갑니다.
만지면 만질수록 빛나는
우리 사랑은 동전입니다.
시는 이런 식으로 쓰는 것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지요? 어려운가요? 몇 번 연습하면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시인이 한 명씩 들어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시 머리를 식힐 겸해서 작품 한 편 보고 넘어가겠습니다.
할미꽃
할미꽃을 보면
우리 할머니 같다.
할머니를 보면
할미꽃이 생각난다.
내 친구 할미꽃은
장미보다 예쁘다.
할미꽃 내 친구
할미꽃이 좋다.
우리 할머니 같으니까…….
난, 할머니가 좋다.
할미꽃의 모습에서 자신을 친근히 감싸주는 할머니를 연상하고 이렇게 쓴 것이겠지요. 할미꽃을 할머니에 빗대어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여러분이 보기에는 어때요? 잘 썼나요? 못 쓴 것은 아니지만, 썩 잘 쓴 것 같지 않다구요? 제 눈에는 이것이 아주 잘 쓴 것으로 보입니다. 내막을 알면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학생은 한글을 잘 모르는 중학교 1학년 학생입니다. 초등학교 때 미처 한글을 떼지 못한 채 중학교로 올라온 것이지요. 특히 받침을 제대로 적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지금 열심히 배우고 있으니, 머지않아 다 깨우치겠지요. 그럼 어떻게 시를 썼느냐구요? 시화전을 할 테니까 시를 써보라고 하고 난 뒤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이 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에게는 시를 말로 쓰고 옆 학생에게 받아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말을 옆 학생에게 했고, 옆 학생이 받아 적어서 가져온 것입니다.
어때요? 그래도 못 쓴 시로 보이나요? 아주 잘 썼지요? 저는 이 학생에게 칭찬을 많이 했습니다. 시화전을 무사히 마쳤고, 아주 즐거운 시화전이 되었습니다. 이 학생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에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만, 굳이 이 얘기를 하는 것은, 시는 특별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그것을 일상 생활 속에서 즐기는 것이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임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시를 더 감상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공부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한 동안 고민했습니다. 비유와 관련하여 그 원리를 설명하는 일인데, 주로 이론가들이 즐겨 다루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이것까지 말하면 너무 어려워질 것 같아서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아무래도 그냥 지나치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생길 듯하여 일단을 설명을 해볼까 합니다.
비유는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내가 하려는 말이 있고, 그것을 표현해주는 대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은 동전>이라고 할 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랑이고, 그 사랑을 꾸며서 상대방이 쉽게 알아듣게 해주는 것은 동전입니다. 이것을 일러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 두 가지를 구별해야만 나중에 시가 어떻게 쓰이기 시작했는가 하는 원리를 설명할 때 아주 편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원관념이고, 동전이 보조관념이지요.
그런데 저는 이론서나 시 안내서를 읽으면서 늘 못 마땅하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뭐냐면, 뭐든지 서양에서 들어온 이론이라고 해서 전부 이상한 말로 번역을 하는 겁니다. 대부분 일본에서 쓰던 번역어를 그대로 베껴다 씁니다. 철학이니, 문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래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대부분 다 알아듣는 것이지만, 택배니, 구좌니, 하는 말들은 아직도 생소합니다. 우리가 만들어서 쓴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이 영어권에서 쓰는 것을 자기들 실정에 맞게 번역해서 쓴 것을 우리가 아무런 생각 없이 가져다 쓴 결과입니다. 학문에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자들이 쓴 논문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을 수 없는데,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초 용어의 낯섦 때문에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이 원관념과 보조관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마음에 안 드는 말들입니다.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번역하면 어디가 덧나는가요? 예를 들어 원관념은 원래 전하고자 하는 생각이란 뜻이고, 보조관념은 그것을 쉽게 전달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원생각>과 <도우미>라고 번역하면 안 되나요? <관념>이란 말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어려운 말인가를, 어른들은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생각>이라고 쓰면 우스워 보이죠. 참 이상한 관행이 어른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과연 지금 이 자리에서는 어떻게 할까 보통 고민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이 쓴 시 이론서를 보면 전부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나올 텐데, 나만 원생각, 도우미라고 쓰면 여러분들이 고생할 거란 말입니다. 이를 어쩌지요?
해서, 일단 여러분을 덜 고생시키는 방향으로 하겠습니다. 다른 책에서 쓰는 용어를 쓰는 것으로 하고 중간중간에 여러분이 어렵지 않게 제가 만든 용어를 쓰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겠습니다. 됐지요? 자, 그러면 시작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물건들이 있고, 생각들이 있습니다. 나무, 책상처럼 눈에 보이는 것도 있는가 하면 손으로는 만질 수 없는 사랑, 믿음, 꾸지람 같은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름 붙은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철수라는 학생이 있으면 그 김철수라는 이름은 그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시켜주는 노릇을 합니다.
꼭 사람의 이름만이 그런 건 아닙니다. 장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미는 다른 꽃으로부터 그 꽃을 구별시켜주는 일을 합니다. 장미란, 해바라기나 깨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름은 그 이름이 담는 내용을 다른 이름으로부터 구별해줍니다. 세상의 만사 만물을 구별 짓기 위해서 사람이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엔 다른 점만 있나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공통점도 많습니다.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이 구별하도록 이름을 지은 사람들의 생각을 반대로 이루어지도록 하는 방법입니다. 세상에 전혀 관련이 없는 사물들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방법이 비유입니다. 그래서 비유는 세상을 모두 같은 것으로 보는 철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변비>라는 시를 소개했을 겁니다. 꽃과 똥을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꽃과 똥이 같을 리 없지요. 이 둘은 서로 다른 것을 나타낸 말입니다. 구별을 하기 위해서 붙인 이름이죠. 그러나 그렇게 다른 것에서 공통점을 보는 것도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그 공통점이 남들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방향에서 이루어질 때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감동을 합니다. 그 감동의 원인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세상에 꽃을 똥과 같다고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그 공통점을 찾아내잖습니까? 남들이 미처 보지 못한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관련이 있고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시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한 형제고,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한 바탕 위에 있다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한 송이 꽃이라는 말입니다. 이쯤 되면 이제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거지요? 시의 철학. 우리는 지금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갔네요. 시를 많이 쓰다 보면 시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게 됩니다. 그 만큼 넓은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지요. 여러분에게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변비>라는 시를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변비
뛰어가 앉으면 나오지 않고
멫 방울 힘겹게 떨구고 나와도
뒤끝이 영 개운치 못한
내가 변비 환자라는 사실을 안 것은
요 며칠 전의 일이다.
그러고 보니 창밖의 꽃나무들도
심한 변비를 앓고 있구나.
겨우내 참고 참았던 것을 밀어내느라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버들강아지들
바야흐로 봄볕 아래서 끙끙거리고 있다.
힘겹게 밀려나온 꽃이 지자
파릇한 화장지까지 한 장씩 톡톡 밀어낸다.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제가 이 시를 인용한다고 해서 이 시가 잘 썼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깁니다. 잘 썼다던가 못 썼다던가 하는 평가는 어떤 관점과 믿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방법만을 보기 바랍니다.
꽃과 똥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 : 꽃
보조관념 : 똥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꽃이 피는 모습입니다. 그것을 똥이 나오는 상태와 비슷하다고 보고 똥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지요. 원생각은 꽃이고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해주는 도우미는 똥인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다른 것에 견주어서 표현하는 것이 시의 아주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 방법을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잊지 말고서 이제부터는 작품을 감상해보겠습니다. 먼저 직유부터 볼까요?
봄이 되면
김준옥(3-1)
방긋방긋 들녘 길가에 피어나는 진달래는 상진이의 얼굴을 닮았고
막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성식이의 흰머리를 닮았네.
들녘에서 농부들이 한해 농사가 잘 되기 기원하는 마음은
마치 노총각이 올해는 장가를 갈 수 있을까 하는 마음과 같고
밤하늘에 초롱초롱 떠있는 별들은 개나리를 꼭 닮았고
사람이 아기들을 낳듯 식물들은 싹을 틔운다.
한 행마다 비유가 나오지요? <닮았다, 같다, 낳듯> 같은 매개어로 다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면 원래생각과 그것을 전하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것들을 분류해보겠습니다.
원관념 |
상진이 얼굴 |
성식이 머리 |
농사꾼 마음 |
별 |
싹 |
보조관념 |
진달래 |
아지랭이 |
노총각 마음 |
개나리 |
아기 |
이렇게 되겠지요? 상진이가 누구인지 성식이가 누구인지 굳이 알지 않아도 이 시를 감상하는 데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몰라도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여러분들의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이름까지 써서 아주 특수한 사람을 끌어들인 것 같지만, 잘 살피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이름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보편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의 비유를 거꾸로 유추하면 상진이는 얼굴이 곧잘 벌게지는 사람이고, 성식이는 머리에 새치가 많이 있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지요. 나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다 아는 것들입니다.
이 시에서 생각할 것은 이 시가 어디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시골입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농사지을 사람이 부족하고, 쓸 만한 처녀들은 힘든 농사꾼에게 시집을 오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농촌에 사는 총각들은 장가도 못 갑니다. 이 학생이 이런 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이 시에는 그런 정경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농촌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솔직함보다 더 큰 힘과 감동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에서 억지로 꾸미려 하지 말고 솔직하게 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답습니까? 이렇게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이 쉽고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 작품은 특별한 기교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학생이 무슨 시의 대가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학생인데, 이렇게 빼어난 시를 쓴 것은 눈에 보이는 대로 정직하게 썼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시의 본성이 숨어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주변에서 눈에 보이는 것을 끌어다가 서로 연결시켜 본 것이 이 시의 원리입니다. 서로 다른 것을 연결만 시켜 놓아도 이렇듯 감동이 옵니다. 아주 쉬운 방법이면서도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적극 활용하기 바랍니다.
학생의 이름 뒤에 <내북중>이라고 나오지요? 제가 한 동안 근무한 학교입니다. 그런데 전화로 내북중학교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은 꼭 다음과 같이 되묻곤 합니다.
내복이요?
그러면 저는 웃으면서 다시 교정해줍니다. 내복이 아니라 내북이라고요. 그래도 잘 못 알아 들어서 몇 번은 다시 얘기하죠. 한자로는 <內北>이라고 씁니다. 내복은 <內服>이죠. 속옷이라는 뜻입니다. 그래도 내북은 낫습니다. 충북 단양에는 <대가리>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거기에 사는 학생에게
너 어디 사니?
하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가리요.
내북이라고 하면 어딜 가서든 이름 때문에 꼭 한 번씩 웃습니다. 내복이 연상되기 때문입니다. 전교생수는 32명(2004년 현재)이고 한 학급에 열 명 안팎입니다. 그래도 정말 내복처럼 따뜻한 학교입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국어시간에 학생들을 이끌고 뒷산에 올라갑니다.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오면 딱 한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는 그 다음 시간에 한 마디 하지요.
얘들아! 시 쓰자.
그러면 아이들은 괴성을 지릅니다. 그리곤 곧 잔잔해집니다. 지난 시간에 산에 가서 봄꽃을 본 풍경이 눈에 선해지기 때문입니다. 그 느낌이 선명하게 살아있기 때문에 10분이면 시 한 편을 씁니다. 그리고는 다시 떠들지요. 그래서 이렇게 쓴 작품으로 해마다 5월이 되면 시화전을 합니다. 자기가 쓴 시로 자기가 도화지에다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회를 하는 것입니다. 시는 미리 써놓았으니 작품을 만들기만 하겠지요?
이 책에서 소개되는 시들은 모두 그런 시화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입니다. 따라서 소속을 표시하지 않은 학생들은 모두 내북중학교 학생으로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의 작품일 경우에는 소속을 밝히겠습니다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닮았네 닮았어
김준석(2-1)
중국에서 날아온 황사는 제성이의 싹스를 닮았고
산에서 깝치는 토끼는 희성이를 닮았고
외양간에서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염소는 연호를 닮았네.
들판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는 영어선생님의 흰머리를 닮았고.
마당에서 뼝알거리는 병아리는 병덕이를 닮았고.
부엌에서 냄새나는 누룽지는 제성이를 닮았네.
비광에서 우산 들은 바보는 남주의 모습을 닮았고.
드라마에서 멋있는 원빈은 윤표를 닮았고.
김칫독에서 각이 진 깍두기는 봉진이를 닮았네.
“짱”에서 나오는 “현상태”는 영근이의 맞짱 실력을 닮았고.
학교에서 회장인 방제연은 국어선생님의 카리스마를 닮았고.
교실에서 주접떠는 정근이는 이성진을 닮았네.
학원에서 공부하는 현자는 조선시대 망나니를 닮았고.
학교에서 눈이 찢어진 순실이는 엽기토끼를 닮았고.
학교에서 잠자는 현진이는 호빵맨을 닮았네.
<닮았네> 투성이지요? 잘 보십시오. 어떻게 시를 썼는가를. 주변의 인물들을 모두 다른 사람이나 사물이 빗대어 나타내본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이 학생 주변의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생활하는가 하는 것이 눈에 잡힐 듯이 드러나지요? 여기에 나오는 이름의 주인공들이 어떤 사람들인가까지 알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비슷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한 번 비춰봄으로써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표현해보는 것입니다. 각 구절마다 얼마나 정겹고 새롭습니까?
병덕이가 뼝알거린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한다는 것인데, 병덕이라는 이름 때문에 뼝덕 뼝덕 하고 불렀겠지요. 그래서 종알거린다는 말을 변형시켜 뼝알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없는 말을 함부로 만들면 안 됩니다만, 여기서는 아주 정겹게 잘 쓰였지요. 방제연은 학생회 회장을 한 녀석인데, 늘상 머리에다 뭘 바르고서 폼 잡고 다녔습니다. 빳빳하게 선 머리 때문에 카리스마라고 별명이 붙었고, 방 카리스마가 줄어서 <방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온 표현입니다.
엽기토끼, 망나니, 호빵맨은 별로 좋지 않은 내용으로 이루어졌지요? 이걸로 보아 여학생들을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런 표현을 선택했겠지요. 남녀 합반이거든요. 얼마나 귀여운 발상입니까? 여기서 원관념이니 보조관념이니 하는 말을 떠들 필요는 없겠지요? 한 눈에 들어오는 일이니까요.
그러면 다음에는 나열이 아니라 좀 더 깊은 관찰을 담은 시로 넘어가겠습니다.
진달래 사스
박은범(2-1)
산에 사스가 유행한다.
진달래만 걸리는 사스
우리는 산에 문병을 갔다.
생각했던 것 보다 심한 사스 유행
모두들 사스가 무서워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어쩔 수 없이 나온 진달래꽃
사스 걸리기 전에 광놈 민호와 철한테 죽는다.
불쌍한 진달래꽃들.
산에 갔다가 진달래가 피어있는 모습을 보았겠지요? 붉게 핀 진달래에서 무엇을 연상했나요? 뜨거움을 연상했지요. 뜨거움에서 다시 자신이 감기 걸렸던 경험을 떠올렸을 겁니다. 그리고 좀 더 뻥을 치느라고 최근에 중국에서 유행한 유행성 괴질인 사스라고 한 겁니다. 감기에 걸리면 얼굴이 열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모습에서 진달래가 핀 것을 그것과 연관 지은 것입니다. 시의 발상 과정이 이해가 되나요? 지금 이렇게 조리 있게 설명하지만, 이 발상은 정말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친 것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그 즉시 받아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달래 핀 것을 감기 걸린 것으로 하고 나니, 산에 가는 것은 저절로 문병이 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연상 작용이 다른 연상으로 금방 넘어간 겁니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자기 체험을 적었습니다. 민호와 철이라는 친구가 진달래를 꺾었겠지요. 감기 걸린 데다가 그나마 꺾여 버렸으니,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불쌍한 진달래꽃>은 그래서 나온 결론입니다.
<광놈>이란 말이 나오지요? 아마도 이것은 만든 말인 것 같은데, <광>은 미칠광(狂)자겠지요. 미친놈이란 뜻인데, 친구한테 미친놈이라고 하면 평상시야 그렇게 하겠지만, 그래도 시를 쓴다고 하는 마당에 그냥 미친놈이라고 하면 여러 가지로 민망하고 불편하니까 슬쩍 바꿔 표현한 것이겠지요.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냥 애교로 봐줍시다.
자, 광놈이라는 표현을 보면 민호와 철이가 진달래를 어떻게 꺾었을까요? 곱게 꺾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장난삼아 난폭하게 꺾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나이의 남학생들은 대개 그렇잖아요?
우리 학교의 봄
이순실(3-1)
봄이 되니
왕눈을 가진 홍석영 선생님처럼
큰 눈을 가진 개구리가 울어대고
봄이 되니
손 매운 과학 선생님처럼
매운 고추들이 밭에 심어지고
봄이 되니
우리학교 공주님 조경애 선생님처럼
꽃들이 예쁜 옷을 입고
봄이 되니
우리교실을 청소하시는 체육 교생 선생님처럼
우리들의 마음마저 깨끗해지고
봄이 되니
이 모든 것들을 미술 선생님께서
봄이라는 하얀 도화지에 그려 넣으신다.
재미있지요? 봄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을 학교의 선생님들에 비유해서 시를 썼습니다. 이 역시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서 썼다는 점에서 크게 칭찬 받을 일입니다. 위의 시에 선생님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역시 어떤 이름이든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학교에든 그와 비슷한 분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에 특수한 사실이 흔한 사실을 가리키는 기능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시에 나왔으니 재미 삼아 한 번 알아보고 갈까요?
시의 표현대로 홍석영 선생님은 눈이 큼지막합니다. 눈 크고 얼굴은 갸름하고 키는 작달막하고 살빛은 하얗고……. 어떤 모습이 떠오르나요? 아주 예쁜 선생님입니다. 게다가 처녀 선생님이고, 집은 서울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아주 좋아한다는 겁니다. 사회 과목인데 늘 아이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주려고 노력합니다. 시골의 아이들에게 인기 있지 않겠어요? 이 시에 등장한 뒤 1년쯤 지나서 결혼을 했고, 다시 1년 뒤에 아들을 낳았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에서 눈 큰 개구리를 연상하고 다시 눈이 큰 선생님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과학 선생님은 몸집이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리고 한시도 자리에 앉았지를 못하고 산으로 들로 돌아다닙니다. 수업시간에도 애들을 데리고 들로 나가서 나물을 캐곤 합니다. 산과 들을 얼마나 뒤지고 돌아다녔으면 학교 근처에서 새끼손가락만한 산삼을 다 캤겠어요? 또 학교 옆 공터를 삽으로 뒤집어서 밭을 만들었습니다. 상추도 심고, 고추도 심고, 하지요. 그런 선생님의 동작에서 봄을 연상한 것입니다. 손이 맵다는 것을 고추와 연결시켰는데, 고추가 맵기 때문이겠지요? 선생님은 몸집이 좋아서 손도 큽니다. 좀 뻥을 튀기면 솥뚜껑 만합니다. 그리고 그 손을 잘 활용하여 아이들을 통제합니다. 그 큰 손으로 떠드는 놈의 등을 쾅 내려치면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지요. 안 맞아본 학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매운 손맛에서 고추를 연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런데 덩치 큰 사람이 마음은 비단결 같은 법이어서 이 선생님도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여리고 좋답니다.
조경애 선생님은 메일 아이디가
입니다. 소리 나는 대로 읽으면 <왕공주>이지요. 어떤 분위기를 풍기는 선생님인지 금방 연상할 수 있지요? 나이는 마흔 안팎인데, 옛날에는 꽤나 공주병이 심했겠다 싶답니다. 발랄하고 자존심 강하고 아이들과 잘 어울리고, 나이 마흔 줄에도 곳곳에서 고운 자태와 애교 넘치는 마음씨가 엿보이는 분이랍니다.
고동춘이라는 교생 선생님이 한 달 동안 다녀갔습니다. 사춘기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학교가 작아서 아이들 수가 적다 보니 선생님은 아이들하고 매일 축구하고 과자 사주고 그랬습니다. 여러분들 말로 인기 짱이었죠. 그리고 교생 때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그래서 정말 아이들이 해달라는 것을 다 해주고 싶은 시절이지요. 그 열정과 사랑을 아이들은 느낍니다. 이 시에서처럼 아이들 교실 청소까지도 같이 하는 분입니다. 지금은 발령을 받아서 아마 어디서 훌륭한 선생님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주변에 있는 선생님들을 봄을 표현하는 데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친근하게 살아났습니까? 마지막 연에 이것을 미술로 그리는 동작으로 통합까지 했으니, 시로서는 완벽에 가깝게 마감 처리된 것이지요. 앞에서 비슷한 구조로 나열한 다음, 그것을 다시 통합시키는 발상입니다.
발가락
유제성(3-1)
다섯 명의
가족이 살고 있는 양말 속
발가락 중에
제일 큰 아빠 발가락
두 번째로 큰 엄마 발가락
그리고 아빠를 닮은 세 번째 발가락
또 네 번째 발가락은 엄마를 닮았네.
그럼 다섯 번째 발가락은
누굴 닮았을까?
그건 바로 아빠 발가락과 엄마 발가락을
모두 닮은 잘 생긴 막둥이 발가락이다.
가지런히 모여 있는 발가락의 모양을 보고 가족을 연상했지요? 그리곤 각각의 발가락을 가족구성원들에게 갖다 적용시켰습니다. 제일 큰 건 아빠, 그 다음 큰 건 엄마, 그리고 주욱 나가야겠지만, 이미 예측되는 것이기 때문에 생략하고, 마지막 새끼발가락으로 건너뛰었습니다. 전개와 생략이 잘 조화된 작품이지요.
대부분 학생들은 자신이 시를 써놓고서 그게 잘 쓴 건지 못 쓴 건지 판단을 못합니다. 이 학생도 상을 받을 때까지 자신의 이 시가 좋은 작품인지 모르고 있다가 시상식을 할 때 이름을 부르니까 놀라서 뛰어나간 경우입니다.
분필가족
정철(3-1)
분필가족이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우리가족의 가장은 아빠다.
아빠의 몸은 하얀 피부
엄마는 노랗게 뜬 피부
나는 뻘건 피부
동생은 파란 피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시끄러운지
아빠가 직장을 나가신다.
아빠가 다니는 직장 이름은 칠판
그런데 너무 시끄럽다.
그러다가 우리엄마가 나가신다.
우리엄마가 키 작은 여자선생님한테 잡히셔서 높이 들린다.
얼마 후 내가 그 선생님한테 잡혀서 높이 들린다.
아이들은 모두 벌을 받고 조용하다.
가족과 분필을 대비시켰습니다. 분필은 칠판 밑에 모여 있죠. 종이컵에 담겨있거나 바닥 홈에 나란히 누워있죠. 옹기종기 모인 그 모양에서 가족을 연상한 것입니다. 한 가지 색깔만이었다면 이런 상상은 어려웠겠죠? 그런데 분필의 색깔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 중에서 하얀 색 분필을 가장 많이 쓰지요. 하얀 색이 아빠가 된 사연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필이 움직이는 공간을 가족이 움직이는 공간으로 만들어놓고서 그 상황을 서로 이은 것입니다.
선생님이 앞에서 칠판에 글씨를 쓰는 동안 이 학생은 이런 엉뚱한 상상에 빠져서 혼자서 빙긋이 웃었겠지요. 그런데 그런 엉뚱함이 그냥 낭비가 아니라 이렇게 시를 만나서 좋은 결과를 만들었습니다. 여러분의 엉뚱한 생각이 시에서는 가장 중요한 글감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합니다. 이런 시들은 발상만으로도 반은 성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에서는 발상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얼마나 정겹습니까? 자기 주변에서 소재를 찾아 쓴 것도 칭찬 받을 일입니다.
나무는 청개구리
양영주(3-1)
나무는 나무는 청개구리
우리학교 운동장의 나무도 청개구리
산에 있는 나무와 모든 나무도 청개구리
더운 여름에는 벗고 있어야 할 옷을
가지각색으로 입고 있어서
나무는 청개구리
추운 겨울에는 입고 있어야 할 옷을
뼈만 앙상하게 벗고 있으니까
나무는 청개구리
청개구리처럼 거꾸로 행동하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자연의 하나이지요.
엉뚱한 생각이지요? 생각이 엉뚱할수록 그것을 연결시키는 논리가 많이 드러납니다. 이 시에서도 그렇습니다. 청개구리는 부모님의 말을 안 듣다가 나중에 후회하지요. 개구리 아들이 하도 거꾸로 행동해서 개구리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죽어서 자신이 물가에 묻힐까봐 걱정하면서 죽은 뒤 물가에 묻어달라고 하지요. 그러면 매번 거꾸로 행동하는 아들은 당연히 양지바른 언덕에 묻지 않겠어요? 아들의 그런 뒤잡이 심성을 미리 예측하고 남긴 유언이지요. 그런데 매번 아버지의 말과 반대로 행하던 아들이 이번에는 마지막 소원이라도 들어드리겠다고 진짜로 냇가에 묻었습니다. 비가 오면 어떻겠어요? 빗물에 쓸려가겠지요? 그래서 걱정이 돼서 개굴개굴 우는 거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나무는 추운 겨울에 옷을 벗습니다. 더운 여름에 옷을 입지요. 잎새가 나무에게 옷인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학생은 그렇게 생각한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거꾸로 된 겁니다. 이 거꾸로 된 것에서 개구리 이야기를 떠올린 것이고, 행동을 거꾸로 하는 청개구리의 특성과 나무의 행동을 연결시킨 것입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 비유의 방법에 실려서 시를 만든 경우입니다.
봄의 무도회
김이슬(3-1)
봄이 오면
산과 들에 무도회가 열려요.
여기 저기 노랑 옷, 분홍 옷 … 초록 옷.
알록달록 옷을 입고 기지개를 피며
얼굴을 내밀어요.
현진이네 뜰에서도
미란이네 마당에서도
정훈이의 마음에서도
봄이 오면
모두 색동옷을 입고 나와
온 세상이 무도회장이 돼요.
이슬, 이름이 참 예쁜 학생이지요? 실제로도 예쁩니다. 예쁜 애들은 예쁜 짓을 하느라고 운동을 잘 못하는데, 이 학생은 오래 달리기를 하면 꼭 전교 1등입니다.
간단한 원리가 눈에 보이나요? 봄이 오는 것을 무도회의 광경과 연관 지었습니다. 무도회는 춤추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다운 복장을 하기 마련입니다. 나무에게도 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요. 그래서 예쁜 차림으로 나서는 무도회의 상황에다가 연결시킨 것입니다.
1연에서 봄을 무도회라고 전제해놓고, 2연에서 그 이유를 말한 다음에, 3연에서 장소를 말하고, 마지막으로 그래서 무도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지요. 특히 3연에서 장소를 말할 때 1행과 2행에서는 실제 장소인 <현진이네 뜰>과 <미란이네 마당>을 말하다가 3행에서는 실제의 장소가 아닌 사람의 마음속을 말하는 것은 아주 기발한 방법입니다. 사물에서 관념으로 생각을 확산시키는 방법이지요.
물론 이 학생은 이 이론을 알고 쓰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씁니다. 이것은 시가 요구하는 어떤 아름다움의 질서가 사람의 마음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그런 질서를 알든 모르든 세상을 정직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보려고 하고 시를 쓰면 그것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비의 형제
김경수(1-1)
비는 여러 형제가 있다.
제일 큰 장마비
둘째 소나기
막내 이슬비
장마비는 말썽쟁이
아주 많은 비를 내여
많은 사람들을
아프고 힘들게 하는 비
소나기는 착한 둘째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가끔씩 내려주는 착한 비
이슬비는 소심한 비
사람들이 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
아주 조금만 내려주는 소심한 비
가끔씩 비가 와서
우리 마음이 우울할 때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빗방울과 이야기를 나누어요.
비의 다양한 모습을 형제에 빗대어 표현해본 경우입니다. 먼저 형제의 관계임을 설명한 뒤 각 비의 모습을 다시 사람에 빗대어 구체화시켰고, 다시 이것을 끝에서 종합해서 정리했습니다. 아주 논리 정연한 구조와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통해서 각 비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잘 보여줍니다. 비가 사람에게 미치는 관계와 영향을 평소에 체험하지 않으면 쓰기 어려운 시죠.
발상을 보면, 시를 쓰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비 온 날 창문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인상에 남았는데, 거기서 흘러내리는 비를 보다가 빗방울을 연상했고, 빗방울에서 다시 빗방울의 상태에 따라 여러 가지 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상상합니다. 그리고 같은 빗방울인데도 사람들의 반응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떠올립니다. 그래서 같은 형제이면서도 각기 다른 특징을 보이는 점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거기에 비유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발상의 과정이 이렇게 해서 정리됩니다. 결코 시를 쓰는 발상이 어려운 일이 아니죠.
빨래
김선영(1-1)
빨랫줄에 빨래가 걸려있습니다.
남자 빤스 여자 빤스
아우 민망해
남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여자 빤스가 말합니다.
맞아 사람들이 한 번씩 힐끔힐끔 보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가
무슨 물건이라도 된다고
아우 기분 나뻐.
그래도 우리는 뜨거운 햇빛 아래에서
썬탠을 합니다.
의인화시켰지요? 의인화란 사물을 사람에 비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에 비유한다고 해서 비유가 아닌 건 아닙니다.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원리입니다.
팬티는 가장 은밀한 곳을 감추는 옷이기 때문에 빨래가 널려있어도 사람들이 뚫어지게 쳐다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힐끔거리며 볼 것은 다 보고 가지요. 하하. 마음에 은근히 걸리면서도 피할 수 없는 그런 심리를 아주 잘 잡나냈습니다.
<빤스>는 <팬티>가 표준어겠지요? 그러나 시에서는 그런 것이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오히려 누구나 사용하는 빤스라는 말이 더 시를 살립니다. 시에서는 맞춤법이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분위기를 전하는 데는 오히려 사투리나 맞춤법에 안 맞는 말들이 더 잘 어울릴 때가 많습니다. <기분 나뻐>도 마찬가지죠. 틀린 표기이지만,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주차장
김경애(마산 무학여고 3)
흰 선으로 둘러싸인 바둑판에
고수인 아저씨의 흰 알
초보인 아빠의 검은 알이 놓여있다.
한참 헤맨 끝에 찾았는데
서툰 아빠…
흰 선 안에 바둑알을 놓는 게
여간 쉽지 않다. 아저씨는…
“뭐가 어렵냐”며 성화다.
날마다 늘어나는 한숨과
조여드는 삶의 공간에서
아빠는 흰 선과의 보이지 않는
사투를 벌이고 있다.
아빤 오늘도 바둑알을 놓을
바둑판을 찾고 있다.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차상1)
주차장에서 차를 대는 상황을 바둑판의 상황에 빗대어 표현했습니다. 가지런하게 그어진 하얀 주차 선은 바둑판의 선으로 보인 것이고, 그 위에 놓여있는 차들은 바둑알로 보인 것입니다. 바둑알은 흰 색과 검정 색 단 둘 뿐이죠. 그런데 차는 그렇지 않습니다. 다양한 색깔이 있는데, 주차 선을 바둑판으로 인식한 순간 나머지 색깔은 보이지 않는 것이죠. 이렇게 무리한 적용이 갑갑하고 어색한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시에서 필요합니다. 이미지를 단순화시키기 위한 것이죠. 초보 운전인지 주차에 서툰 자신의 아빠와, 숙련된 솜씨로 주차를 하는 아저씨를 비교하고서 바둑의 초보와 고수를 거기다 갖다 맞추었습니다. 전체의 시상이 바둑판의 상황과 주차장의 상황을 겹쳐놓는 방법으로 전개되고 있어서 비유를 활용한 시 쓰기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전에 무슨 운동을 하다가 목을 삐끗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는데 의사 선생님이 형광등을 켜고 사진을 달아놓으니까 신기하게도 나의 몸속에 들어있는 등뼈의 배열이 나타나더군요. 그때 처음으로 내 등뼈의 속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등뼈의 배열은, 내가 아기들에게 보여주던 공룡의 그림책에 나오는 공룡들의 뼈와 똑같더군요. 그때 ‘아하, 내가 짐승이구나!’ 하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그리고서는 문득 느낀 바가 있어 다음과 같이 써 내려갔습니다. 길어도 이런 시 쓰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습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마음속에서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여태까지 좀처럼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이라는 것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발상법을 알겠지요? 이 시에서 이야기하는 바는 인간의 탐욕성입니다. 자신의 내면에서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탐욕성이 들끓는데,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공룡을 떠올린 것이고, 그 계기를 엑스레이 사진을 본 것에서 얻은 것입니다.
먼저 공룡의 뼈와 나의 뼈가 같다는 것에서 출발해서, 공룡의 난폭한 성질과 탐욕성을 나의 그런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시상을 전개시킨 순서 역시 뼈의 모양에서 심리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겉모습의 동일성에서 성격의 문제까지도 이끌어냈다는 것입니다.
운명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별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서
이렇듯 아름답게 깜빡일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달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중심까지
이렇듯 인력으로 끌어당길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삶의 모든 곳을
이렇듯 환하게 비추어줄 리 없지요.
전생의 어느 먼 우주를 떠돌 때부터
당신은 내게 점지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 마음속에
이렇듯 힘차게 나부낄 리 없지요.
이번에는 사랑에 관한 시를 골라 봤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그냥 맺어진 것이 아니고 무언가 뗄 수 없는 어떤 질긴 인연이 운명처럼 엮여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절실할수록 사랑은 무언가 그럴 듯한 운명에 의해 연결되었다고 믿는 것이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삼신할미나 월하노인 같은 어떤 신이 맺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관한 시 중에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인 운명이 작용한다고 노래한 것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야만 감정이 아주 애절하게 잘 전달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는 누구나 그런 이상에 가까운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태까지 잘 따라온 학생은 이 시의 비밀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변치 않는 어떤 존재들에 잇따라 연결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한 것이죠. 따라서 원생각은 사랑하는 당신이지만 당신이라는 그 존재를 알리기 위해 도우미로 나선 말들은 별, 달, 해, 바람입니다.
비슷한 구절과 구조가 반복되면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익숙함을 느낍니다. 음악에서 아주 중요한 요인이죠. 시에서는 그것을 운율이라고 합니다. 일종의 가락인 셈입니다. 이 시에서도 별, 달, 해, 바람으로 바뀌어 나타나지만, 각 연의 구조는 똑같습니다. 읽으면서 속도가 붙기 마련이죠. 그 속도에 빨려들어 갑니다. 사람에게 시를 익숙하게 하는 방법 중의 한 가지입니다.
은행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가
무수한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활짝 편 당신의 가지에 내립니다.
받아주셔요. 내 고단한 사랑을.
당신이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당신이 아무리 먼 세월 뒤에 있어도
내 영혼은 꽃가루가 되어
당신의 사랑을 찾아갑니다.
받아주셔요. 전생의
쥐라기 하늘에서 당신께 띄운
내 영혼의 꽃가루를.
우리가 흔히 보는 은행나무는 참 독특한 식물입니다. 우선 오래 산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500년, 1000년도 삽니다. 청주에는 고려 때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아직도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장수하는 이면에는 병충해에 강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그런데 은행나무가 이런 장수를 누리는 데는 지구가 주는 시련을 몇 억 년째 이겼기 때문입니다. 은행나무는 공룡이 살던 시절에도 있던 나무랍니다. 놀랍지요? 공룡은 쥐라기, 백악기 때 최전성기를 누리지요. 그리고는 어느 순간 전멸하고 맙니다. 은행나무의 또 다른 특징은 암수가 서로 다르다는 점입니다. 물론 암컷 나무에서만 열매가 열립니다. 그러면 주변에 수컷 나무가 있어야 수정이 된다는 얘기겠죠. 어떻게 수정을 할까요? 암컷 나무에서 꽃이 피기 시작할 때 수컷 나무에서는 꽃가루를 뿌리는 겁니다. 그러면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암컷 나무에게 날아가서 수정되는 것이죠.
나무에게 암수가 있다는 사실과 마치 동물처럼 꽃가루를 날려서 수정을 한다는 사실. 무언가 신경을 탁 건드리는 바가 없나요? 나는 그런 은행나무에서 오래 된 사랑 법을 느꼈습니다. 천 년을 살고 수억 년 전부터 목숨을 버티어 오늘까지 살아온 은행나무의 특성을 이용해서 사랑을 노래한다면 무언가 절실한 느낌을 주겠지요. 그래서 쓴 것입니다.
1) 이재무 유성호 편, 전국고교백일장수상작품집, 천년의시작, 2003
이하 청소년백일장 작품들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자, 한 편을 더 살펴보고서 다음 단계인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수렵도
박윤배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아직도 푸르게 뛰는 수렵도의 사내처럼
펄떡펄떡 살아있기로 한다.
청년기가 지나더라도
포획된 용기와 젊음을 남기기 위하여
은밀히 은밀히 그려놓는……
부장품으로 남길 시를 쓰는……
내 스무 살의 수렵도.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불멸을 끌고 산 속을 달려
황산벌의 갈대숲 새떼들 날리며 달려
백두까지 오르고 있다.
그렇게 젊은 날을
살아있던 날의 함성을
부장품으로 남긴
한 사내의 수렵도.
이 작품은 1985년 어느 대학의 신문에 실린 작품입니다. 대학문학상의 수상 작품이죠. 상을 받았으니까 잘 썼다는 뜻이겠죠? 여러분이 보기에 어떤가요? 발상법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죠?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습니다. 수렵도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것이 유명합니다. 벽화 중에서도 무용총이라고 하는 벽화의 수렵도가 제일 유명하죠. 여러분도 많이 보았을 겁니다. 무용총은 벽화에 춤추는 인물들을 그려 넣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순 우리말 쓰기를 좋아하는 북한에서는 춤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수렵도는 어때요? 수렵도 역시 북한에서는 사냥그림이라고 합니다. 수렵도라는 말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사냥그림이라는 말이 어쩐지 좀 늘어진 듯한 느낌을 주지요? 말의 습관이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뭐, 어느 수렵도를 보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요는 시인은 수렵도를 보고 있고, 그 수렵도를 보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무엇인가요? 수렵도는 힘찹니다. 당연하지요. 짐승을 사냥하는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거기다가 화면에는 사슴과 범이 있습니다.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는 쉽지 않은 사냥이죠. 그런 힘찬 기상이 넘치는 그림을 보면서 무얼 떠올릴까요? 절망이나 우울함 같은 것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힘찬 기상과 관련이 있는 내용일 겁니다.
시를 읽어보면 시인이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젊은 날입니다. 수렵도는 힘찬데, 바로 저것처럼 자신의 젊은 날도 힘차게 살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면서 사는가요? 이 시인이 젊은 날에 이루고 싶은 꿈은 무엇인가요? 그것은 시를 쓰는 일입니다. 좋은 시를 쓰는 일이지요. 이것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발상은 이렇게 된 겁니다. 먼저 수렵도를 봅니다. 그림이 힘차지요. 거기서 무언가 강한 힘을 느낀 겁니다. 그 힘은 곧 젊음을 떠올립니다. 젊음이 이루는 것은 희망이지요. 그 희망 중에서 자신이 하고픈 것, 즉 시를 쓰는 일입니다. 그래서 먼저 수렵도의 사내 모습을 보여준 다음에 그 사내처럼 나도 힘찬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고 뒤이어 시를 쓰고 싶다는 욕심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시에서 정작 하고픈 말은 앞부분의 1연에 다 나옵니다. 뒷부분의 2연은 이러한 희망을 한 번 더 반복해서 보여준 것이 되겠습니다. <황산벌>과 <백두>까지 나아간 것은 용맹한 기상으로는 다 좋은데 너무 많이 나가서 좀 허풍스럽다는 생각도 조금은 듭니다. 그러나 전체의 흐름을 보면 허물이라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런 기상은 젊음의 특권이랄 수도 있으니까요.
자, 한 가지 문제를 내겠습니다. 맞춰보기 바랍니다. 이 시에는 문장 구조상 앞 뒤 문맥이 잘 맞지 않고 어긋나는 부분이 둘 있습니다. 어디 어디가 그런지 한 번 맞춰보기 바랍니다.
우리가 완벽한 시를 보고 많이 배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하면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시작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시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좀 허술하고 잘 정리가 안 된 작품들을 보는 것이 시의 원리를 배우는 데 더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약간 문제가 있는 작품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형편없는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작품은 발상만으로도 대단한 경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여러분이 확인할 수 있잖습니까? 다만 여기서는 그런데도 간간이 보인 허점을 찾아보자는 것입니다. 작품의 발상이 좋아도 때로 허물이 있는 법이고, 그것을 찾을 줄 알아야 시 쓰는 법을 빨리, 그리고 잘 배울 수 있습니다.
자, 찾아봤나요? 잘 안 보인다구요? 당연하지요. 잘 안 보여야 정상입니다. 이 시 속의 문제점을 찾아낼 정도이면 여러분은 정말 눈이 매우 날카로운 사람입니다. 평론가로 나서면 성공할 수 있습니다.
먼저 1연 1~3행에 문제가 있습니다. 뭐라구요? 다시 봐도 안 보인다구요. 하하하. 당연하지요. 이렇게 가르쳐 주어도 잘 안 보이는 것이 시 속의 단점입니다. 자, 보겠습니다.
달리는 흰 말의 안장 위에서
상반신을 뒤로 젖힌 채
작은 체구의 사내가 달리고 있다.
어때요? 밑줄을 쳐놔도 모르겠어요? 달리는 동작이 겹쳤지요? 달리는 말 위에서 사내가 달린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얘깁니다. 사내는 가만히 있고 말이 달리는 것입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또 달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분명히 틀렸지요? 지은이도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부분입니다.
또 한 군에 있는데 찾아보세요. 못 찾겠다구요? 4행에 있습니다. 그래도 못 찾겠죠?
우둔한 20대의 화살촉을 뽑아
그래도 못 찾겠어요? 그럼 가르쳐 주죠. <화살촉>이 문젭니다. 그래도 몰라요? 무얼 뽑았나요? 화살이 아니라 화살촉을 뽑았지요? 화살촉을 뽑으면 어떡하나요? 화살을 뽑아 쏘아야지 화살촉을 뽑아 쏘면 안 되잖아요? 그렇죠?
웃기죠? 전문가 시인들도 이따금 이런 실수를 한답니다. 그런 실수를 통해서 우리는 배우면서 날카로운 눈매를 길러 가는 겁니다. 그런 눈매를 갖추면서 자신의 작품에 생기는 실수를 줄여 가는 것이죠.
이 시인도 나중에 이런 실수를 깨닫고 시집에 실을 때는 고쳤습니다. 하하하.
시를 읽다가 참 잘 쓴 시를 만나면 오래도록 그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감탄에 감탄을 하다가 나중에는 질투가 납니다. 왜 나는 저런 시를 쓸 생각을 못했을까? 수렵도를 본 것은 이 시인만이 아니잖습니까? 나 자신도 맨날 수렵도를 보면서 왜 그것을 이 시인처럼 시로 쓸 생각을 못했을까 하고 탄식을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은근히 질투가 나서 그보다 더 좋은 시를 한 번 써보겠다고 벼르는 것이죠. 그래서 1985년에 이 시를 접하고는 마음속으로 언젠가는 한 번 수렵도를 소재로 이보다 더 좋은 멋진 작품을 쓰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은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시에서는 발상이 제일 중요합니다. 동일한 소재라고 하더라도 어떤 발상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수준이 천차만별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좋은 발상으로 쓴 시를 보면 질투가 나는 겁니다. 언젠가는 쓰고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1985년에 이 작품을 봤으니 실로 20년만에 저도 <수렵도>라는 작품을 썼습니다. 그러나 제 작품이 위의 작품보다 더 잘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발상을 먼저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한 번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발설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에 어느 작품이 안 좋다고 말한다면 박시인이나 저, 둘 중의 하나는 상처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속으로만 판단하고 한 번 빙그레 웃고 말기를 바랍니다.
수렵도
내 안에는 커다란 동굴이 있다.
컴컴한 그곳으로 들어가면
깊은 어둠에 익어 가는 속도로
개이는 눈앞에 벽화가 나타난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또 할아버지가
연꽃 하늘 위의 북두칠성에서 걸어나와
내 젊음의 뒷편에 그린 수렵도.
왼여밈 한 허리를 질끈 동인 사내가
디귿(ㄷ)자로 굽은 활을 가슴 가득히 끌어안고
굽이치는 산봉우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꽁지로 달겨드는 헛살 소리에
달아나던 범이 놀라 고개를 돌릴 찰라
이마 한 복판의 임금 왕짜 무늬에 꽂히며
나뒹군 포획물에서 부르르 깃을 떠는 대우전.
방금 넘어온 산봉우리들이 말발굽 아래 엎드려
등성이 너머로 새벽을 쏘아 올린다.
뭉툭한 명적(鳴鏑) 하나 가만히 산 너머로 날리면
어둠 속 곳곳에 박혀있던 젊은 날의 꿈들이
매화포처럼 와아 솟아오르고
반구비로 날아오르던 명적 소리,
어두운 밤하늘의 배경으로 올라가
지상의 길을 비추는 별이 된다.
그 별빛 속으로 영혼의 더듬이를 내밀며
비로소 중심을 잡는 청춘의 뼈.
세월은 흘러도 벽화는 남는다.
흘러간 세월의 길이만큼
동굴은 스스로 더욱 깊어져
지상의 덧없는 꿈들이 사위어갈 때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간을 꿈꾸던 첫새벽의 빛과
말발굽 소리로 지평선 저쪽을
발 밑까지 끌어당기던 할아버짓적 기상이
천장과 벽의 딱딱한 돌 속으로 파고든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나의 일은
가없는 화폭 속에 얼어붙은 꿈을 깨우는 것.
할아버지의 영혼이 새겨놓은 수렵도 속의 꿈을 불러
달리다 멎은 그의 말발굽을 지상에 옮겨놓는다.
그러면 시위처럼 팽팽해진 벌판 위로
동굴 벽에서 방금 살아난 꿈들은 쏜 살 같이 달려나가고
그 꿈을 타고 달려간 사내들과 함께
무용총의 벽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는 달리는 말의 안장 위에서
가슴 가득히 활을 당긴다.
그러면 상징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빗대어 쓰기의 두 번째 방법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론가들은 비유와 상징을 다른 것으로 설명합니다만, 시를 쓰는 쪽에서 보면 같은 원리에 해당합니다. 다만 시에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게 보입니다.
비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합니다. 즉
사랑은 사닥다리다.
라고 했으면 이 비유는 <사랑 : 사닥다리>의 대응이 쉽게 눈에 띕니다. 말하고자 하는 원생각이 사랑이라면, 사닥다리는 그것을 전해주기 위한 도우미이지요. <1:1>로 정확히 맞습니다.
그러나 상징은 그렇지 않습니다. 상징은 1:1이 아니라 <1:여럿>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나는 어려서 어렵게 자랐어. 그래서 내게는 어둠이 많아.
라고 했다고 칩시다. 여기서 <어둠>은 무슨 뜻인가요? 아픔? 돈 없음? 쪼들림? 마음의 상처? 아픈 추억? 괴로움? 가족이 없음? 이 중에 무엇일까요?
자, 이와 같이 이 어둠이라는 말은 한 가지 뜻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 문장 때문에 그렇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은 사실을 가리키는 말인데, 뒤의 어둠이란 말은 그것을 뭉뚱그려 나타내는 비유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직유나 은유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1:1로 대응하는 것도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1:1로 대응한다면 비유라고 하면 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안 되고 1:여럿이 되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그리고 원관념이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읽는 사람이 알아서 짐작할 뿐이죠.
이렇게 앞 뒤 정황을 참작해서 여러 가지 뜻을 한꺼번에 지니는 것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잘만 쓰면 시에서는 굉장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상징이란 말은 영어의 심볼(symbol)을 번역한 것입니다. 한자로는 <象徵>이라고 씁니다. 이 <象>은 원래 하늘에서 천체가 움직이면서 나타내는 조짐을 뜻합니다. <徵>은 천체의 움직임에 따라서 땅에 나타나는 기운의 양상을 말합니다. 하늘의 기운에 따라서 지상에 기후가 변하고 그에 따라 생물들이 나타내는 변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둘을 합쳐놓은 상징은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나타나는 조짐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죠.
그러면 앞서 말한 <어둠>이 내포하고 있는 것은 무슨 뜻일지 알아봅시다. 그런데 이것은 그 말을 한 사람 이외에는 이것이다, 라고 분명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그 뜻을 유추할 뿐이죠. 그러니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들이 안 좋게 생각하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보면 되겠죠. 예를 들면 가난, 불화, 굶주림, 이별 같은 것들이 이 범주에 들 것입니다.
이와 같이 상징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많은 뜻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비유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물론 잘못 쓰면 애매모호해서 오히려 시의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막 시를 배우려고 하는 여러분들은 함부로 아는 체하면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7월 중순에 3학년 교실에 수업을 하러 들어갔습니다. 보통 7월초에 기말고사를 보니 기말고사가 끝나면 방학이 코앞에 다가와서 대부분 분위기가 어수선합니다. 게다가 7월 중순이면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지요. 가만히 앉아 있어도 더워서 헉헉거리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수업이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제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한 학생이
선생님, 우리 물놀이하러 가요!
하는 겁니다. 그러자 마치 메아리라도 울리듯이 교실 전체가 떼를 쓰는 분위기로 변하더군요. 아무래도 이놈들이 작전을 짰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더군요. 관찰 수업한다고, 체험 학습한다고 학교 뒷산으로, 들로 몇 차례 데리고 나갔더니 저를 만만하게 보고서 그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게다가 그 전전달에는 애들을 데리고 학교 앞개울에서 물고기까지 잡은 적이 있거든요. 국어시간에 말입니다.
그러나 물놀이하러 가자는 것은 앞개울이 아닙니다. 한 20분쯤 걸어가면 꽤 큰 개울이 나옵니다. 거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멀리 가는 데다가 물놀이를 하면 위험까지 동반되기 때문에 관리자인 교장은 허락하지 않기가 쉽습니다. 이 일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마찰이 있어야 할 듯한 일입니다. 그래도 평상시에 수업에 관심도 없던 놈들이 무얼 하자니까 신이 나서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좋다. 가자! 총대는 내가 메지.
그러자 아이들이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그리고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나는 허락을 맡으러 교장실로 갔습니다. 아이들이 바깥에서 웅성웅성 거리니까 다른 학년 아이들이 밖을 내다보고는 물놀이 간다는 소리에 다른 선생님한테도 떼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전교 세 반 중에서 한 반이 물놀이 간다는데 다른 두 반의 수업이 제대로 되겠어요? 그래서 교장 선생님한테 허락을 받고 나오니, 전교생이 다 나와서 기다리고 있더군요. 그래서 전교생을 데리고 물놀이를 하러 갔습니다.
여기서 <총대>를 멘다고 할 때의 총대가 바로 상징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총대를 멘다는 것은 결과에 대해서 감당을 하겠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런 뜻을 갖는 데는 총대라는 말이 그 전부터 그와 비슷하게 쓰였기 때문입니다. 총대는 총을 얘기하는 것이고, 총은 전쟁에서 쓰는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총대를 멘다는 것은 전쟁터에 나간다는 얘기고, 전쟁터에 나간다는 것은 자신을 희생시켜 공동체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목숨은 하나인데, 누가 전쟁터에 나가서 목숨을 바치려 하겠어요? 올바른 일인 줄은 알지만 목숨을 바쳐가면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그래서 외부의 적이 쳐들어오는데 감히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총대를 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남을 위해서 적과 맞서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서 총대를 멘다는 뜻이 그와 유사한 상황에 적용되어 쓰이는 겁니다.
내가 총대를 메겠다는 것은 학생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학교 관리자는 막으려 들 것이고, 막으려는 학교 관리자와 불편한 관계를 감수하면서 그 일과 관련된 모든 책임을 진다는 얘기지요. 모든 책임이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렇게 총대란 말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한 가지 말에 여러 뜻이 담기는 경우를 상징이라고 하는 겁니다.
뒷이야기가 궁금하지 않은가요? 그렇게 돼서 전교생이 물놀이를 갔습니다. 장소는 도리비라는 곳입니다. 이름이 참 아름답지요? <도리비>라니! 이곳은 물길이 둥글게 돌아나가면서 만들어진 기슭에 동네가 들어섰고 그런 까닭에 동네 이름이 도리비입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본이름이 물도이동인 것을 보면 이 도리비도 물이 돌아나간다는 뜻과 관련이 있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6교시 두 시간 연이어서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했습니다. 애들끼리 서로 물속에 집어넣고 발버둥치는 여학생들까지 끌고 들어가서 온통 물귀신이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양복 입은 남녀 선생님들까지 붙잡혀서 몽땅 물에 빠진 새앙쥐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신나게 노는데 방송사의 차가 오더니 멀리서 촬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 무더위가 오니까 시원한 여름을 보낸다는 보도 기사의 화면으로 내보내려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속에서 손으로 V자를 그리며 흔들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는 무사히 물놀이를 마쳤는데, 물에서 나오면서 방송국 카메라가 찍은 곳에 가서 보니 무슨 표지판이 있고 그 표지판을 가만히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수 영 금 지
다음날 학교에 출근하니 학교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제 오후에 찍힌 그 화면이 텔레비전의 지방방송 뉴스에 나왔답니다. 물론 화면이 좀 흐릿하게 처리되어 사람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게는 했습니다만, 그 위치라든가 상황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게다가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익사 사고의 위험이 높아진다며 자료 화면으로 내보냈다니 기가 막힐 일이지요. 저 대신 애꿎은 일과계 선생님이 교장실에 불려가서 상황을 설명하고 꾸중 비슷한 넋두리를 들었답니다. 당사자인 저를 부르지 않은 것은 제가 그날 몇 분 늦게 간 탓도 있지만, 울뚝불뚝한 저보다는 고분고분한 여 선생님이 더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겠지요? 하여간 한 바탕 소란이 일면서 저보다는 일과계 선생님한테 불똥이 튀어(이 불똥도 상징입니다.) 덕분에 예쁘고 맘씨 착한 홍선생님이 애를 먹었습니다.
출근하는 나를 보더니 애들이 먼저 긴장을 하고서 어떡하느냐고 걱정을 하더군요. 그래도 사고 안 났으니 괜찮다고 교장선생님은 더 이상 문제를 확대시키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습니다. 그나마 학생들을 야외로 데리고 나가면서 하는 수업에 대해 나름대로 깊은 이해를 하고 있는 분이 교장으로 계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 소란으로 이어질 뻔한 일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교장 선생님의 이름을 밝히는 것도 괜찮겠지요? 그 분의 이름은 안응락입니다.
그러면 박윤배 시인의 <수렵도>에서 상징이 어떻게 쓰이는가 하는 것을 보겠습니다. 2연 앞부분에서 찾아보겠습니다.
나는 내 시대의 젊음을 위하여
수렵도를 그린다.
탄피 흩어진 이 터의 숲을 무너뜨리고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한숨뿐인 포획물을 끌고 돌아올지라도
저녁노을 뭉개는 어둠 자락을
빈 도시락 가득 채워올지라도
달아나는 노루와 사슴을 겨누고 있다.
여러분이 한 번 찾아보시죠. 어떤 것이 상징에 해당하는 말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겁니다. 모르겠다고 너무 절망하지 말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잘 알면 굳이 배울 필요도 없겠지요.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르면서도 아는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지요. 모르면 세 살배기 아이한테도 머리 숙이고 배워야 합니다.
답은 <어둠>입니다.
넝쿨로 기어드는 어둠 따위는 쏘아 넘기고
의 <어둠> 말입니다. 여기서 어둠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것은 이 시 전체의 상황을 전제로 해서 유추해내야 합니다. 이 시의 상황은 수렵도라는 그림을 보고서 내 젊음 역시 그처럼 우렁찬 기백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렵도의 사내처럼 우렁찬 모습의 시를 써야 하는데, 막상 살다보면 그게 안 되는 상황이 생길 겁니다. 그것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부의 조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있겠지요. 그런 모든 요인을 두루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내 젊은 날 좋은 시를 쓰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 전부가 이 어둠에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시간이 없어 쫓기는 것, 아니면 둔한 재주, 아니면 성실하지 못한 태도, 뭐 이런 모든 것들이 이 어둠에 다 포함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상징은 어느 한 가지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뜻을 안에 간직합니다. 그래서 잘만 쓰면 굉장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뜻을 많이 끌어안을 수 있는 만큼 자칫 잘못 쓰면 오히려 시 전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를 만큼 모호해지는 수도 있으니 어설프게 알고서 흉내 내면 안 됩니다.
다음의 짧은 시를 보겠습니다.
맹수
①맹수가 사라진 곳에
②맹수가 산다.
온갖 ③맹수들 다 쫓아내고
④맹수인 줄도 모르는 채
저희들끼리 으르렁거리며
⑤맹수로 산다.
이 시를 보면 맹수란 말이 모두 다섯 번 나옵니다. 번호는 제가 임의로 붙였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같고 어떤 것이 다를까요? 한 번 짝을 지워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①의 맹수는 그냥 사나운 짐승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범, 사자, 악어 같은 짐승들 말이지요. 그 맹수가 사라졌으니, 그 다음에 나오는 맹수는 틀림없이 ①의 맹수는 아니겠네요. 그러니까 ②의 맹수는 우리가 아는 그런 사나운 짐승을 쫓아버린 존재들을 나타내는 것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들까지 쫓아내는 그런 짐승이 무엇이 있을까요? 현재 지구상에는 인간들 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짐승들과 공존을 꾀하지 않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서 다른 짐승들의 멸종을 생각지 않는 그런 인간세계를 비꼰 것이라고 볼 수 없을까요? 그렇다면 ③은 맹수지만, ④의 맹수는 그냥 짐승이 아닙니다. ⑤역시 ④와 같지요. 그러면 이 시 속의 맹수라는 말은 단순히 그냥 사나운 짐승을 가리키는 뜻이 있고, 사나운 짐승이 아닌 무언가를 암시해주는 뜻이 있습니다. 이상의 논의에 따라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사나운 짐승의 맹수 : ① ③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 : ② ④ ⑤
그러면 다른 존재를 암시하는 맹수는 무엇일까요? 위에서는 그냥 인간이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이 이 맹수 속에 다 포함될까요? 잘 생각해보면 다른 종류의 맹수와 공존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서 다른 종족의 멸종을 전혀 생각지 않은 탐욕스런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포함된다고 보기는 좀 어렵겠죠? 그렇습니다. 이 맹수는 인간들 중에서 탐욕에 찌든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탐욕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 이상은 아마도 읽는 사람이 알아서 추측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특정 범위를 정해주지 않고 읽는 사람이 무한정 추정해 들어가야만 그 뜻이 확연히 정리가 됩니다. 이런 방법을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이러한 방법을 활용할 수 있을까요?
비유는 앞서 보았듯이 1:1로 대응을 시킵니다. 어떤 것을 보니 무엇을 닮았더라, 하는 생각이 들면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서 설명해주면 됩니다. 닮은 그것과 원래의 그것을 연결시켜주면 되지요.
그러나 상징은 1:1이 아니기 때문에 조금 달리 해야 합니다. 원리는 비유와 같습니다. 그러나 원관념을 정하는 방향이 조금 다릅니다. 상징 수법을 활용할 때의 원관념은 한 가지로 정리되지 않는 생각으로 정해서 그것을 잘 나타내줄 수 있는 어떤 대상을 찾습니다.
예를 들면 젊은 시절에 저는 무언가 세상과 자신에 대한 불만과 분노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존심이 아주 강해서 남들이 싫은 소리 하는 것을 싫어했고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옳지 않은 일로 저에게 강요를 하면 한 판 붙었습니다. 절대로 물러서지 않고 대들어 싸웠습니다. 싸움은 승산이 있어서 이길 때 해야 하는데, 젊어서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다치고 내가 죽더라도 싸웠습니다. 내가 죽더라도 저 놈은 다칠 것이고, 그러면 아플 것이니 내가 죽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생각이었지요. 죽기 살기로 산 것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저를 볼 때 어떻겠어요? 어느 정도 분위기가 험악해지면 한 발 물러서는 것이지요. 자, 이렇게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사소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이 불끈거리는 심사를 무어라고 하면 좋을까요? 불평불만? 정의? 분노? 화? 신념? 열등감? 치기? 어느 것으로 갖다 붙여도 적당한 것이 없지요? 그렇다고 관련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은 다 관련이 있어요. 그렇지만 딱히 이거라고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딱 부러지게 이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머릿속에는 복잡한 감정이 들어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을 표현할 때 상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복잡한 심사를 나타내줄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찾아서 설명하는 겁니다.
저는 위에서 말한 그런 저의 심란한 심뽀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느 날 그 감정이 송곳이나 뿔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을 찔러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그런 도구를 떠올린 것이지요. 송곳이나 뿔은 얌전한 것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뿔은 그렇지요. 그래서 ‘야, 바로 이것이구나!’ 하고는 다음과 같은 시를 썼습니다.
뿔
한창 때 내겐 뿔이 하나 있었다.
그 뿔은 젊음만큼이나 영롱한 빛을 냈고
우람한 그 만큼
무엇이든 들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세상 어느 구석에도
그 뿔보다 더 크고 드센 뿔이 있으리라는 가정을
전혀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내 뿔은 최고였다.
어쩌다 호락호락치 않은 뿔이 나타나면
그 뿔보다 작을지언정
섬뜩한 점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 때까지
뾰족하게 갈고 또 갈았다.
지금도 그 뿔이 있다.
어쩌다 난폭한 말을 함부로 내뱉으며 스쳐 가는
나보다 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오랫동안 잊고있던 그 뿔이
기억의 퇴적층을 뚫고 불끈 돋는다.
그러나 삼십대란
뿔의 상처를 헤아릴 줄 아는 나이
어르고 다독거려서
잠시 돋은 뿔이 가라앉을 때쯤이면
곰곰이 생각한다. 이 뿔을
좀 더 따스한 곳에 쓸 수 없을 것인가를.
이곳의 뿔은 어떤가요? 사람에게는 뿔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자신에게 뿔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뿔은 짐승의 뿔은 아니겠지요. 그러니까 무언가 다른 것을 나타내주는 그런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만약에 이 뿔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한 가지여서 뿔과 그 한 가지가 1:1로 대응하면 무엇이 되나요? 그렇죠! 비유죠. 만약에 1:1 대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건 무엇이라구요?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상징인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그 뜻을 찾아보겠습니다.
이 시의 뿔은 크고 드셉니다. 그리고 뾰족하기도 하지요. 섬뜩합니다. 난폭한 말을 뱉는 사람들을 보면 사라졌던 뿔이 돋아납니다. 다독거려서 달래면 또 가라앉기도 합니다. 자, 이렇게 해놓으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요? 어쨌든 딱 한 가지 뜻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마음속의 어떤 복잡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상징으로 봐도 되지 않을까요?
그렇습니다. 상징으로 봐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잘 읽어보면 뿔은 용도에 따라서 무례한 젊은 친구들을 무찌를 수도 있고, 또 방향을 바꾸기만 하면 따뜻한 곳에 쓸 수도 있습니다. 남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좋은 뜻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고 돋았다 가라앉는 것으로 보아 몸 안에 있으면서 감정에 따라서 생기고 말고 합니다. 무엇일까요? 틀림없이 감정과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정의감이나 혈기왕성함, 나아가 못 마땅한 것을 참지 못하는 어떤 심리상태를 가리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뜻을 파악하면 되지 않겠어요?
이 시에 대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대신에 어떤 방법으로 이런 상징을 쓰는 것인가 하는 것은 한 번 더 앞으로 돌아가서 확인해두기 바랍니다.
소 망
장미(3-1)
저 깊은
숲 속을 걷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이리저리
미처 보지 못했던 곳까지
바라본다.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는
작은 꽃이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 속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작은 소망들이 담겨있다.
열매라는 말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언뜻 보면 그냥 열매일 것 같은데, 앞의 상황이 약간 다릅니다. 늘상 보던 곳에 있던 열매가 아니라 평상시에는 바라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열매입니다. 시에서는 이쯤 되면 아 무언가 있구나 하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한 꽃이 피운 열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낸 열매 속에 무엇이 들었나요? 소망이 들었다고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무엇인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천상 지은이에게 물어보던가 아니면 내 체험을 바탕으로 그것을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은이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상황을 염두에 두고서 읽는 사람이 재구성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의미를 해석하여 재구성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바로 상징입니다.
열매는 꽃과 관련이 있습니다. 꽃은 화려하지만 속이 없지요. 반면에 열매는 화려하지는 않지만 알찹니다. 꽃의 화려함은 결국 이 알찬 열매를 맺기 위해서 식물이 취한 동작입니다. 열매의 가장 큰 임무는 종자를 퍼뜨리는 것이지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꽃이 맺는 열매는 희망을 안으로 가진 것일 수밖에 없지요. 그 희망은 여건이 주어지면 곧 싹을 틔워서 아름다운 꽃을 보여줍니다. 희망은 곧 소망입니다.
평상시에 보지 못하던 것을 이 학생은 숲에 와서 바로 그런 새로운 것을 자신도 모르게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 학생이 이러한 생물의 순환 과정까지 계산을 하고서 이 시를 쓴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굳이 그렇게 의도하지 않더라도 우주의 섭리 속에서 살기 때문에 사람의 관찰 속에는 뜻밖으로 우주의 깊은 섭리가 담기는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멋을 억지로 부리려는 허황한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바라보는 자에게 우주는 자신의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겨울밤
이윤정(포항 유성여고 3)
할머니는 화롯가에 앉아
내 스웨터를 짜셨다.
한 올은 나뭇꾼 이야기로
한 올은 선녀 이야기로
돌리고 빼고 엮으면
밤은 숯칠 한 채 익어 가는 소리만
투둑투둑
할머니 무릎을 울리고
입혀주신 옷은
낮게 웅성이는 말들로 엮여
진눈깨비 졸음을 가렸다.
까치밥으로 남은 감이
마당가에서 쉬쉬거리며
겨울 바람을 쫓고 있을 때
따뜻한 베갯머리 맡에서
우리 할머닌 내 겨울을 짜고 계셨다.
2003년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 대상
여기서는 스웨터를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스웨터는 그냥 옷이 아닙니다. 할머니와 관련된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스웨터는 두꺼운 겨울옷입니다. 추위를 막아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스웨터를 손수 짜 줄 때는 사랑을 전제로 합니다. 그런데 추위를 막는다는 것은 단순히 온도가 차갑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세상의 추위까지도 함께 한다고 읽어야 합니다. 할머니는 나에게 스웨터를 짜주는데 그것은 곧 추위에 노출될 손주를 생각하는 할머니의 마음이 아니고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직접 짜는 스웨터는 단순히 겨울바람만을 막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늑한 사랑과 그 스웨터를 짜는 할머니를 바라보던 나의 추억까지도 입혀주는 기능을 합니다.
할머니는 스웨터를 짜면서 나무꾼 이야기를 해주었겠지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곤 했습니다. 할머니와 맺은 좋은 추억이지요. 따라서 스웨터를 보면 할머니의 추억이 떠오르고 그런 옷을 입으면 단순히 가게에서 산 옷과는 다른 느낌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추위라든가 하는 것은 누구한테나 같은 조건이지만, 추위를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따스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추위를 덜 느끼겠죠. 추억에는 그런 힘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의 스웨터는 그냥 추위를 막는 장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추억을 돌이켜 주는 그런 기능까지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뜻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분위기를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에 스웨터는 상징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와 비슷한 발상을 시인의 작품에서 보겠습니다.
궤짝에서 꺼낸 아주 오래된 이야기
송찬호
우리 집에는 아주 오래된 얼룩이 있다
닦아도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는
누런 냄새, 누런 자국의,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그 건망증이다
바스락바스락 건망증은 박하 냄새를 풍긴다
얘야 이 사탕 하나 줄까, 아니에요, 할머니,
할머닌 벌써 십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버릇이나 행동 특성이 세대를 넘어서 이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우렁손톱이 자식에게 연결되고 손자에게 이어지는 경우가 있지요. 이와 같이 습관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건망증 같은 경우도 그렇죠. 이 시에서는 집안 내력으로 건망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건망증은 노망든 할머니에게서 나타났겠죠. 그런데 그것이 얼룩, 박하 냄새, 냄새, 자국에 비유되었습니다. 분명히 이것은 비유를 사용한 시입니다. 그런데 그 건망증이 나나 식구들에게 나타난다면 그것은 할머니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 노릇을 합니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이나 혹은 다른 식구들이 겪은 건망증을 보면서 할머니를 떠올린 것이고, 건망증에 걸린 할머니와 맺었던 추억까지 아울러 떠올린 것입니다. 여기서 건망증은 나와 할머니를 이어주는 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징이죠. 그러니까 비유와 상징이 동시에 들어있는 시입니다.
아버지의 휴대폰
임태운(전주 영생고 3)
태양처럼 붉은 벽돌에
자식의 하루를 짊어져야 하는
아버지의 허리 같이
안테나가 휘어진 그 핸드폰은 언제나
꽃씨를 날리지 못하는 꽃잎이었다.
벌떼들처럼 온갖 소리들이
금 간 안전모 사이로 촉수를 뻗는 공사 현장도
하루살이 같은 내 희미한 목소리로는
닿을 수 없는 모래 화단이었고
찢어진 꽃잎처럼 깨어진 액정은
방향을 잃은 문자 메시지만이
먼지처럼 쌓여 있는 아버지의 휴대폰에는
동그란 종료 버튼만이
잎맥을 지운 채 닳아 있었다.
귓가에 와 닿는 몇 개의 구멍 너머
아버지의 낡은 생은
내 플라스틱 버튼으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 어느 수신 지역에 피어 있는 것일까.
질 때를 알고 고이 지는 꽃잎처럼
아버지의 휴대폰은 늘
기본요금을 넘어서는 법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휴대폰이 더 짙은 향기를
뿜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나는
오늘도
나만이 특수문자로 나비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송신해본다.
그 작디작은 나비의 더듬이를
아버지가 볼 수는 없을 테지만
아버지의 핸드폰 안에 피어있는
꽃잎 속에서만큼은
힘차게 날갯짓할 수 있도록.
2003년 인하대 제9회 인하백일장 운문 장원
아주 재미있는 발상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휴대폰을 통해서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휴대폰의 사용법을 잘 모르는 아버지와 휴대폰 없이는 살 수 없는 나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나는 휴대폰 속의 이미지나 언어를 잘 활용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에 익숙지 않아서 휴대폰을 끄고 켜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말하자면 보통 전화기의 용도 이외에는 활용할 줄을 모르는 것이죠. 그런데 그런 아버지는 나의 삶을 책임집니다. 그런 책임을 맡은 아버지의 노력 위에서 나는 휴대폰을 사용하는 세대죠. 그래서 아버지에게 휴대폰으로 내 생각을 전달하지만 아버지는 그것을 볼 줄 모릅니다. 세대 간의 단절된 거리를 휴대폰의 상황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단절을 다시 휴대폰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의지가 아버지에게 문자메시지를 날리는 노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휴대폰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잇고 갈등을 해결하는 구실을 합니다. 당연히 상징입니다.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뚱 그곳에 간다.
이를테면 빗방울과 장난을 치는 저 거위는
식탁에 오를 나날 따위엔 관심이 없다
다는 안다, 가는 비……는 사람을 선택하지 않으며
누구도 죽음에 쉽사리 자수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랴,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리는
가는 비……오는 날, 사람들은 모두 젖은 길을 걸어야 한다.
여기서 <가는 비>가 나타내는 바는 무엇일까요? 죽음이라고 재빨리 대답한 사람들은 앞의 설명을 아주 잘 이해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앞으로 시에서 얼마든지 이 상징 기법을 활용할 수 있습니다. 짝짝짝!
그렇다고 무슨 특별한 눈이 있어서 쉽게 알아본 건 아닐 겁니다. 앞의 시를 읽어보면 그렇게 해석하도록 상황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시를 쓰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태어납니다. 그때부터 그 사람의 시간이 흐르죠. 그 시간의 흐름은 언뜻 보면 한 방향입니다. 자, 여러분은 지금 16세 안팎일 겁니다. 한창 나이죠. 16세라면 여러분들은 한 살이라도 더 살았노라고 제 나이를 속일 나이죠. 그러니까 여러분은 16년을 살아왔다고 말할 겁니다. 그러면 시간으로 환산해보겠습니다. 16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면 한 번 묻겠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70세까지 산다고 가정을 하면 이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54년이겠죠. 그러면 살았다고 대답한 이 16년은 시간을 줄여온 것인데, 산 게 맞나요? 아니면 죽어온 건가요? 시간이 줄어들었으니, 분명히 명줄이 짧아진 겁니다. 그러면 그게 죽은 것이죠. 어때요?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한 사람은 이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러니 이대로 가다가는 저절로 다음을 알 수 없는 컴컴한 구멍으로 빨려들겠죠?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들이 위 시에는 여러 가지 나옵니다. 떨어지는 낙엽, 인질극, 식탁에 오를 나날에는 관심이 없는 거위……. 이렇게 무심한 듯이 묘사하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작용하도록 시인이 배치한 이미지들입니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소낙비나 장마비는 굵기 때문에 바깥에 나가면 금방 젖는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안개의 경우는 어떤가요? 또 안개보다 입자가 조금 더 굵은 는개는 어떨까요? 만약에 는개 속에 있다면 옷이 눅눅하다고 생각할 뿐, 비에 젖는다고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가랑비도 마찬가지죠. 신경 쓰지 않고 나돌아 다니면 어느 새 젖어있는 것이 가랑비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요? 16년을 살아온 줄 알았는데, 조금씩 조금씩 시간은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드디어 죽음이 다가오죠. 이렇게 죽음으로 젖어 가는 것이 삶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뿐인 입들을 막아버>린다고 직접 말까지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랑비가 곧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빌리러 전당포로 간다고 표현하고 있으니 이 정황은 분명한 것입니다.
이 시의 <가는 비>는 존재하는 것을 무로 바꾸어버리는 어떤 존재를 나타냅니다. 거기에는 죽음도 있고 시간도 있고 허무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징입니다. 이 중에서도 죽음이 가장 중요한 의미로 들어있죠.
대답 없는 바람
조수현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굳어있는 바위처럼
또 내가 바람에게 물어 보았다.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그러나 바람은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무로 만든 인형처럼
다시 또 내가 바람에게 물었다.
바다 건너 들을 질러 산을 넘는 동안
무엇을 얻었으며, 잃었느냐고
그리고 이 세상 다 휘돌고 난 끝에
무엇을 얻겠으며 잃겠느냐고.
그러나 바람은 이미 내게서
보이지 않을 만큼 들리지 않을 만큼
멀리 멀어져 가고 있었다.
여기서는 바람을 잘 살펴보기 바랍니다. 이 시의 바람이 무엇일까요? 우선 나는 삶에 대해서 궁금하게 여기고 있지요? 바람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이 이와 같지요. 그래서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람이 답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 시인은 누구에게 묻는 것일까요? 아마도 자신에게 묻는 것이 분명합니다.
시의 끝에서 바람이 멀어져 가는 것으로 봐서는 답을 얻었나요? 못 얻었지요. 원래 얻을 수 없는 답입니다. 그런데 답을 얻지 못해도 궁금한 것이 삶의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끝없이 되묻는 것이 그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궁금해 하는 질문에 대해 답을 해줄 수 있는 어떤 가상의 존재일 것입니다. 신일 수도 있고, 자신의 내면에 깃든 본성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질문하는 사람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딱히 어떤 존재라고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렇고 저렇게 보면 저렇습니다. 그렇지만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죠. 분명히 무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을 상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1989년의 일입니다. 한 후배가 찾아와서 부탁을 하나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네 동네에 어려서 소아마비를 심하게 앓은 사람이 있는데, 거동조차 불편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시를 쓰곤 한다는 거예요. 시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답답하다는 겁니다. 혹시 주변에 시를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부탁을 받은 후배는 나한테 와서 그 사람에게 시 쓰는 법도 알려주고 실제로 시를 봐달라고 당부하는 겁니다.
그래서 나는 어려울 것 없으니, 그리 하겠다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이 움직이기 어렵기 때문에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이야 인터넷으로 대화도 하고 사진도 보내고 하지만 1989년에는 286컴퓨터가 막 나오는 시점이었고, 컴퓨터를 접하기가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편지로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주소를 받아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몇 가지 마음가짐과 시 쓰는 방법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분한테서 답장이 오고, 그 때부터 편지로 하는 시 창작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책의 창작법이 대부분 그때 뼈대가 잡힌 것입니다.
열흘에 한 번 정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 그에게서 두세 번에 한 번씩 답장이 왔고, 그때 자신이 쓴 시를 한두 편 보냈습니다. 그러면 저는 그 시를 평해서 고칠 점을 다시 써 보냈죠. 이렇게 한 1년 남짓 편지 강의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시점부터인가 편지가 끊겼습니다. 아마도 제 쪽에서는 시 창작 강의의 중요한 부분을 거의 다 했기 때문에 저절로 편지를 중단한 것으로 기억납니다. 그리고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을 즈음에 다시 그 후배를 만났습니다. 반갑게 만나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 사람 소식을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오래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면서 윙윙 소리가 들리더군요. 저와 편지를 나누기 시작한 1년쯤 뒤에 작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는 저한테 답장을 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것을 모르고 계속 편지를 썼던 것이고, 답장이 오질 않자 제 풀에 꺾여 그만두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맨 막바지에 보낸 편지 몇 장은 그가 아니라 그의 영전으로 배달되었겠지요.
이 이야기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습니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여 혹시 그를 욕되게 하는 일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와서 시 한 편이라도 남긴다면 그것은 그가 이 세상에 드리운 아름다운 인연의 자취일 것이고, 그런 인연을 저버린다면 또한 그를 영원 속으로 묻어버리는 것이라는 생각이 한편으로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이렇게 이야기를 꺼낸 것입니다. 이 책의 첫 출발은 그에게서 비롯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남긴 시와 함께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인연의 마지막 결산이라고 믿고 15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뒤늦은 명복을 빌면서 시인의 이름을 밝힙니다. 조수현 씨. 이승에서 못 다 이룬 시인의 꿈을 저승에서는 꼭 이루기를 빕니다.
2)그리듯이 쓰기 : 이미지
지금까지 비유를 활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제부터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쓰는 방법을 배우겠습니다. 이것은 이미지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이미지가 무엇인가 하는 것부터 알아야겠지요?
이미지는 물론 영어입니다. 라고 쓰지요. 이것을 심상(心象)이라고 번역하여 씁니다. 심상이란 마음속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이미지가 중요해진 것은 서양에서 20세기 들어 일어난 시의 한 유파 때문입니다. 즉 시에서 이미지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활용하여 쓰기를 주장한 사람들이 이미지즘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습니다. 에즈라 파운즈, 흄,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엘리어트 같은 시인들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여러 이미지 중에서도 특히 눈에 보이는 시각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이미지즘이라는 시사의 중요한 문예사조가 등장하는데 영향을 끼친 것은 동양의 시들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세력이 한참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의 시인들에게 일본의 시가 많이 알려졌습니다. 거기에 중국의 한자 문학이 가세를 한 형편이지요. 서양의 시인들이 일본의 시와 중국의 시를 보니까 희한하게도 깔끔하게 풍경묘사가 된 거예요. 그러면서도 아주 절제된 풍경 묘사만으로도 주제를 잘 전달합니다. 그 원리가 무엇일까를 골똘히 연구하고 고민한 결과 그들은 일본과 중국의 옛 시인들이 이미지를 아주 잘 활용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곧 그 방법을 시에 적용시켰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이미지즘이라는 문예사조입니다.
그러면 이미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자, 제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젓가락!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들은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젓가락이 한 짝 떠오를 겁니다. 안 떠오르는 사람은 졸았거나 딴 짓 하던 사람이죠. 하하하. 바로 이렇게 말을 듣고서 머릿속에 떠올린 그것을 바로 이미지라고 합니다. 이것을 심상이라고 번역한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말을 듣거나 글을 읽고서 머릿속에 떠오른 사물이나 상황을 이미지라고 하는 겁니다.
이해 다 했지요? 그러면 한 가지 묻겠습니다. 방금 제가 젓가락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의 머릿속에 젓가락이 떠올랐는데, 그 젓가락은 옆에 앉은 친구의 머릿속에 떠오른 젓가락과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를 겁니다. 다를 수밖에 없지요. 자기가 평소 쓰는 젓가락이 쇠젓가락인 사람은 쇠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거기에다가 황금을 입힌 금젓가락이면 금젓가락을 떠올릴 것이고, 일본에 자주 가는 사람은 네모난 나무젓가락을, 중국에 자주 여행하는 사람이면 길다란 대나무젓가락을 떠올릴 것입니다. 짜장면을 자주 시켜먹은 사람은 두 개가 들러붙은 배달용 나무젓가락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에서 여전히 두 가닥을 짜개고 있을 것이고요.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체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똑같은 이미지를 제공해도 그것에 반응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독자의 체험이 시의 감상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뜻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즘 시인들은 이러한 개인차를 최대한 극복하고 상황을 가장 효과 있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선택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주로 느낌을 말로 전하는 그 전의 시에 대해서는 객관성이 부족하다고 비판했습니다. 사실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후로 이미지는 시에서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미지가 체험에 의존하여 해석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암시합니다. 내가 이렇게 시를 써도 그것을 읽는 사람은 내가 의도한 대로 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엘리어트는 ‘의도의 오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죠. 독자에게는 그렇게 읽을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생각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이 독자에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 것인가 하는 것까지 감안을 해서 써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남겠지요. 그렇지만 시를 쓰면서 오해의 소지를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시를 써야 한다는 교훈은 남습니다. 그래야만 자신의 의도를 정확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점점 개발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시인에게 남겨진 숙제입니다. 그리고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어긋남 현상을 최대한 자극하여 이미지가 부릴 수 있는 최대한의 효과를 추구하는 방법이 있기도 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여러분들이 시를 많이 접하고 쓰면서 점차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번에는 이미지의 종류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이건 뭐 그토록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지에는 다음과 같은 종류가 있습니다.
-시각 이미지
-청각 이미지
-후각 이미지
-촉각 이미지
-공감각 이미지
이것은 감각을 어디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결정한 겁니다. 무슨 필연성 때문에 한 것이 아니라 편의상 나누어본 것이죠.
시각 이미지는 눈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말합니다. 청각은 듣는 것으로 인식하는 이미지를, 후각은 냄새와 관련된 것을, 촉각은 접촉과 관련된 것을 말하고, 공감각 이미지는 이상의 이미지가 둘 이상 결합한 경우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시각 이미지 : 빛나는 아침 햇살
-청각 이미지 : 짹짹짹 참새소리
-후각 이미지 : 고소한 누룽지 냄새
-촉각 이미지 : 꺼끌꺼끌한 마룻바닥
-공감각 이미지 : 수정처럼 빛나는 목소리
어려운 것 없으니 공감각 이미지만 설명하겠습니다. 공감각 이미지는 두 가지 이상의 이미지가 결합한 것입니다. <수정처럼 빛나는 목소리>를 보면 빛난다는 것은 눈으로 인식하는 것이고, 목소리는 귀로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각과 청각이 결합한 것이죠.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중요합니다만, 이 중에서도 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시각 이미지입니다. 다른 것과 다르게 시에서는 시각 이미지만으로도 한 편의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다른 이미지들은 하나만으로 시를 쓰기가 쉽지 않습니다. 청각 이미지인 소리만으로 시를 쓰려면 참 어렵겠지요. 그러나 시각 이미지는 그림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묘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지에 의한 시 쓰기라고 하면 시각 이미지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단원의 제목을 <그리듯이 쓰기>라고 한 것입니다.
작품을 보겠습니다.
강아지
배형준(2-1)
얼마 전 태어난
새끼 강아지
9 마리의 강아지가
와글와글 북적북적
젖 달라고 우는 소리
깨갱깨갱
제일 귀여운 새끼 강아지
쓰다듬어 주고 만져주는데
내 손가락을 쪽쪽 빤다.
간지러운 가운데 손가락
그러다 내 손가락 깨물면
한 대 때려준다.
9 마리의 귀여운
새끼 강아지.
이 시를 읽고 나면 그림 같은 장면이 떠오르지요? 갓 태어난 강아지들이 꼬물꼬물 움직이고 있고, 한 아이가 거기서 강아지들을 만집니다. 사람과 강아지가 어울린 한 폭의 풍경화가 연상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눈에 보이듯이 그리는 것도 아주 중요한 시의 방법입니다.
그런 걸 누가 못 쓰냐고 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한 번 해보세요. 어떤 풍경을 눈에 쏙 들어오도록 묘사한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절감하게 될 겁니다. 먼저 무엇을 그려야 할지 선택하기가 참 애매합니다. 선택을 해도 어떤 것을 그리고 어떤 것을 빼야 할지 선택하기가 힘들어요.
예를 들면, 이 시에서도 무슨 강아지인지 알 수가 없지요. 그냥 똥개인지, 사냥개인지, 시베리안 허스키인지, 불독인지, 발바리인지 알 수 없어요. 그런데도 강아지를 귀여워하는 한 소년이 장난치는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요. 만약에 불독이라든지 해서 강아지의 종류를 밝혔다면 오히려 더 어색해질 수 있는 상황입니다. 또 개집은 어떤 모양인지 전혀 안 나타나 있어요. 그래도 상황을 이해하는 데 불편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꼭 필요한 부분만 선택해서 보여주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물론 이 시를 쓴 학생이 일부러 이렇게 계산해서 썼을 리는 없습니다. 그냥 강아지가 귀여우니까 생각나는 대로 보인 대로 쓴 것이겠지요. 꼭 이론을 공부하지 않아도 아주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절묘한 감각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잃어버립니다. 그리고서 어른이 된 뒤에 한 번 시를 써보라고 하면 엉뚱한 묘사만 잔뜩 하다가 괴상망측한 시를 내지요. 이런 감각을 잃지 않고 되찾는 일이 시인이 되는 길입니다. 그걸 배우는 것이 창작법이고요.
사실 배우지 않아도 순수한 마음으로 본 세상을 정직하게 적으면 그게 감동을 주는 시가 된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무슨 엄청난 기술을 배워서 시를 쓰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가지고 있던 깨끗한 영혼을 회복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가장 좋은 기술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합니다.
병아리
김은지(2-1)
어미 닭 쫓아다니느라, 나들이 나가느라,
정신없는 병아리.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때지어 쫓아다니고,
까만 눈 속에 흑진주
박은 듯이 반짝거리며,
합창하듯이 ‘삐약’거리는
귀여운 병아리.
노란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유치원 아이들처럼
노란 옷이 잘 어울리는
사랑스런 병아리.
비유가 일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이 작품의 전체 흐름은 병아리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있습니다. 연노란 색 털이 보송보송한 병아리를 보면 누구나 귀엽다는 생각을 합니다. 병아리들이 돌아다니는 모습을 아주 잘 잡아내고 있지요. 봄에 눈에 잡힌 한 풍경을 그렸는데, 바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병아리를 보면서 감탄했던 순간으로 안내합니다. 딱히 병아리가 어때서라기보다는 그런 상황에 처한 자신의 체험을 떠올리기 때문에 감동하는 것이죠. 그런 순간은 아주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으로 독자를 끌어들였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이렇게 어떤 상황을 깔끔하게 그려놓기만 해도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을 이 시는 보여줍니다.
부처님 오신 날
장미(2-1)
지금 목탁소리가
들린다.
스님들이
부처님 앞에서
절을 하고 있다.
불경소리가 들린다.
불경을 외우는
스님 옆에서.
사람들이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어린아이에서부터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두 부처님께
절을 하고 있다.
부처님은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지.
우리 모두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신다.
절에 간 체험을 간략하게 잘 요약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은 미소를 짓고 있지요. 부처님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서 그 미소의 의미를 나름대로 제시했습니다. 부처님이 왜 미소를 짓고 있는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그 사람의 설명일 뿐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날 사람들이 많이 가서 소원 비는 것을 보니까 그런 마음을 부처님이 아시는 거라고 추측한 것입니다. 그 추측이 생뚱한 것이 아니라면 시에서는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해석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석한 장면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건이나 사물에서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면을 찾아내어 노래하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이 시는 그런 방법에 충실한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의 절터 풍경이 손에 잡힐 듯이 떠오르지요? 이렇게 생활의 느낌을 보이는 대로 그리듯이 쓰는 것도 시의 한 방법입니다.
요즘 나는
정해남(제천상고 3)
친구들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하면
난 힘없이
고개를 돌리고 맙니다.
친구들이
자기 집안 얘기를 하면
난 무척 바쁜 양
딴청만 피웁니다.
친구들이
심술궂은 내 짝 이야기를 하면
난 어디를 가는 척
슬며시 뒤로 물러 나와버립니다.
친구들이
조기 취업 이야기를 하면
난 나와 무관하다는 듯
하품만 해 버립니다.
무언가에
속하지 않으면
딴 세상 사람이 되어야 하는
세상의 법칙.
요즘 나는
이렇듯
모든 것에서 예외인 아이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톨이가 되어 가는 학생의 모습이 아주 깔끔하게 묘사되었지요? 정말 군더더기 하나 없습니다. <조기 취업>이란 말이 나오네요. 이 말은 실업계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얘깁니다. 실업계 학생들은 3학년 2학기 때 현장실습이라는 것이 있어서 공장이나 회사에 취업을 나갑니다. 이때 각 업체에서 추천해달라고 주문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성적을 보거나 생활 태도를 보고서 점수에 따라 순서대로 취업을 내보냅니다. 못 나가거나 늦게 나가면 전에는 못난이 취급을 하곤 했습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요.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학생의 심리와 행동을 아주 잘 묘사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이 학생만의 이야기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당시의 이런 환경에 처한 학생들은 열에 아홉은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니 마치 자기 얘기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것을 읽는 사람은 마치 자기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해도 남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시입니다.
이 시에서 보듯이 그리듯이 쓰는 방법은 어떤 것을 그릴 것이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노릇을 합니다. 남들이 별로 공감할 수 없는 것을 아무리 충실하고 빼어나게 그린들 사람들이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요. 그래서 시인들은 고민을 하는 겁니다. 과연 어떤 부분을 그릴 것인가? 정답은 늘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에게 절실한 것은 남에게도 절실한 것입니다. 그런 부분을 흥분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려주는 것이 좋은 작품을 쓰는 비결입니다.
5연에는 <세상>이란 말이 두 번 나오는데, 이 중에 하나는 다른 말로 바꾸어주는 것이 좋겠죠? 불필요한 반복은 시에서 단점으로 봅니다
농무
신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서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조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꺼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꺼나
농무는 시골에서 농사꾼들이 상모를 돌리면서 한 바탕 추는 춤을 말합니다. 물론 장구라든가 북 같은 도구들이 따라 나오지요. 이 시는 그런 시골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이 시를 쓰던 상황의 시골을 보면 농사를 지어도 비료 값도 안 나오죠. 사는 게 답답하고 고달픕니다. 시골 살림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 어려움에 찌든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꺽정이>나 <서림이>는 조선 중기 사람들입니다. 벽초 홍명희가 소설 <임꺽정>을 썼는데, 거기에 나오는 인물들이죠.
답답하고 살기 어려운 시골의 정경이 잘 요약되었습니다. 그런데 하고 많은 풍경 중에서 하필 사람들이 버리고 떠나는 시골을 상대로 이렇게 세세하게 묘사를 했을까요? 여기에 시인의 의도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농촌은 날로 피폐해졌습니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그 속도는 점점 빨라졌지요. 우리나라는 농사를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고 하늘처럼 떠받들며 살아온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어요.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농사는 이제 사람을 먹여 살리는 기능을 도시에 떠넘긴 겁니다. 그러면서 점점 사람들이 시골을 떠나지요. 이렇게 되면 수 천 년 동안 이어져온 농촌이 파괴됩니다. 그러나 거기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잘 살 수 있을까요? 그 반대입니다. 떠나지 못해서 하는 수 없이 삽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래도 농촌을 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사람들의 애환을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린 것입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동정심을 겉으로 드러냈다면 이 만큼의 감동을 주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한 감정을 살짝 감추고서 안타까운 풍경만을 슬며시 그려서 제시했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미지로 그림 그리듯이 쓴 시가 어떤 효과를 내려고 하는 것인지 잘 알겠죠? 감정이 직접 드러나지는 않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그 그림 전체를 머릿속에 그린 후에 한꺼번에 감동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주막
백석
호박잎에 싸오는 붕어곰은 언제나 맛있었다
부엌에는 빨갛게 질들은 팔모알상이 그 상 위엔 새파란 싸리를 그린 눈알만한 잔이 보였다
아들아이는 범이라고 장고기를 잘 잡는 앞니가 뻐드러진 나와 동갑이었다
울파주 밖에는 장꾼들을 따라와서 엄지의 젖을 빠는 망아지도 있었다
제목이 주막입니다. 나그네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는 옛날 숙박업소를 말합니다. 백 시인은 평안북도 사람입니다. 해방 전에 자신의 고향집 풍경을 그린 것이죠. 풍경만 그려놓았을 뿐 가타부타 무슨 말이 없습니다. 이렇게 풍경만 제시해도 그것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그림이 떠오르면서 어떤 감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친구 엄마가 운영하는 주막에서 친구가 호박잎에다가 잘 고은 붕어를 가져다준 모양이죠? 장꾼들이 망아지를 끌고 와서 밥을 먹고 가는 그런 추억의 풍경들이 고스란히 살아나서 그런 정황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묘한 향수를 자극하게 됩니다. 이렇게 풍경을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시를 쓸 수 있습니다.
불국사
박목월
불국사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바람소리
솔소리
범영루
뜬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달빛
자하문
바람소리
물소리.
이 시는 묘사의 극단까지 나갔지요? 불국사에 대해서 시를 쓰는데, 자신의 의견을 모두 버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적었습니다. 그것도 거의 명사만을 썼습니다. 어떻습니까? 불국사의 분위기가 잘 전달이 되나요? 읽는 사람은 이 명사들이 나타나는 대로 불국사의 정경을 떠올리면서 따라갑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불국사의 정경이 그림처럼 나타나겠지요?
사실 절에 대해서 시를 써보면 만만찮습니다. 절이란 부처님이 사는 곳인데, 그곳에 대해서 섣불리 말했다가는 망신만 당하기 일쑤입니다. 불교의 사상이나 철학이라는 것이 쉽게 접근해서 얻기 어려울뿐더러 설령 얻었다고 해도 문자 밖의 세계이기 때문에 말로 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놀러왔다는 듯이 묘사를 해 가지고는 또 절의 그 신성한 모습이 담기지를 않거든요. 그래서 아주 절제된 감각으로 불교의 신앙체계와 관련이 있는 이미지들을 끌어들이기가 쉽습니다. 그런데도 설명을 자꾸 하게 되어 짧은 지식을 드러내곤 하지요. 이렇게 명사만 나열해서 시 한 편을 이루어야겠다고 판단한 것 자체가 굉장한 고수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듯이 쓰기의 극치를 보여주는 시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때때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나 상황을 마주치는 수가 있습니다. 예컨대 5.18 광주항쟁 때 열 살 안팎의 한 아이가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안은 채 제 품에 안은 사진틀에 턱을 괴고 앞을 바라보는 사진 한 장이 신문에 실려 전 세계인의 가슴을 찡하게 만든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광주 사태를 떠올릴 때 그 사진이 먼저 떠오릅니다. 한 장면이 그대로 한 사건의 인상을 결정해버린 것입니다. 비단 이런 커다란 사건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이런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장면은 특별한 설명 없이 제시만 해주어도 큰 울림을 갖습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떤 전형이 될 만한 사건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기에 가장 좋은 시의 방법이 바로 <그리듯이 쓰기>입니다.
디지털 세대인 여러분들이 이런 효과를 가장 많이 그리고 쉽게 접하는 것은 광고일 것입니다. 10초의 미학이라는 말이 있듯이, 광고는 가장 짧은 순간에 시청자의 뇌리로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옛날식으로 물건의 쓰임새나 효과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했다가는 당장 리모콘이 다른 번호를 눌러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장면을 제시해주는 방법을 많이 씁니다. 바로 이 광고식 보여주기 수법을 연상하면 시에서 쓰는 이 방법을 이해하기 좋을 듯합니다. 시를 오래 쓸수록 이 방법의 위력을 점점 더 느낍니다.
3)직접 말하기
위의 두 가지 방법은 무엇엔가 의탁해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만큼 어느 정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에는 이런 것을 전혀 몰라도 쓸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각나는 것을 정리해서 수필 쓰듯이 쓰는 것입니다. 체험하면서 느낀 점을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직접 말하기>라고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 방법은 가장 흔하게 쓰이는 방법이고, 또 가장 쉬운 방법입니다. 생각나는 것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시는 언어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상대에게 전해주는 기능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의 본래 속성대로 내 생각을 전해주는 수단으로 여기고 자신의 생각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어는 사람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인데, 막상 글을 쓰면 이상하게도 생각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생각을 말로 적을 때의 감정까지도 전달됩니다. 시는 바로 이 점을 노린 겁니다. 생각을 전달하되, 거기에다가 최대한 많은 감정이 실리도록 쓰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글을 쓰는 사람이 그렇게 감정이 잘 실리도록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 자체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언어가 감정을 최대한 갖고 가도록 쓰는 방법에 시의 속성이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방법을 잘 터득할 수 있는가? 그건 딱히 어떻다고 말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말로 설명하자면 너무 어려워집니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왼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 오른쪽 신발을 먼저 신었던가를 말하라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 쓰면서도 왜 그렇게 썼느냐고 물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시입니다.
다만,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이 읽고, 또 많이 쓰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쓰는 요령은 이렇습니다. 자신이 겪은 일 가운데서 새로 깨달은 부분을 과장되지 않고 솔직하게 적으면 됩니다. 그런 일을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점차 숙련이 됩니다.
그러면 작품을 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안의 적
김민지(3-1)
이번만은 꼭 하겠다고
이번만큼은 해 내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말일뿐이다.
생각일 뿐이다.
몸과 마음은 서로 적이다.
그래서 인지 마음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상한 현상이다.
진실하게 말하자면
나도 몸이 하는 행동을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지 모른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몸과 마음을 구별할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다.
자, 이 시에 앞서 배운 어떤 표현이 있나요? 없지요? 특별한 기교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 학생이 현재 고민하고 있는 생각의 질서만이 나타날 뿐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갈등을 아주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런 간략한 정리 역시 생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생각의 질서를 아무런 꾸밈없이 드러내는 것 역시 시의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직접 말하기>라고 제목을 붙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직접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학생의 작품을 한 편 더 보겠습니다. 겉모습은 많이 다른 것 같지만 원리는 같은 시입니다.
나들이 가던 날
김민지(3-1)
어미 닭과 그 뒤를 졸졸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우리도 선생님 뒤를 따라
쫑쫑거리며 봄나들이를 간다.
우리가 나들이 왔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곤히 자던 잠을 깨고 눈을 비비며
서로서로 먼저 나올려고 발버둥을 친다.
할미꽃은 허리 많이 아픈지 고개를 들을 생각도 않는다.
진달래는 우리를 환영하기 위해 줄지어 서서
바람을 따라 산들산들거린다.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우리는 ‘아야’ ‘아야’ 하며, 화를 내지만
우리는 알 수 있다.
샘이 나서가 아니라
관심을 끌기 위해서란 걸…….
중간 중간에 비유도 나오지만 이 시를 잘 보면 선생님을 따라서 산으로 봄나들이 간 체험을 말하고 있습니다. 봄나들이야 누구나 다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도 이것이 시가 되는 것은 이 학생이 경험한 느낌을 적었기 때문입니다. 체험은 같을지 몰라도 그것을 느끼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선생님을 따라갔기 때문에 이 학생만 간 건 아닙니다. 다른 학생들도 다 갔지요. 그런데 이 느낌은 이 학생만의 것입니다.
앞서 자신의 느낌을 적으라고 했던 것 기억날 겁니다. 자신의 느낌이라는 것을 유달리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 다르고 시에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그런 느낌을 존중합니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 같다면 시라는, 나아가 문학이라는 예술이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예술은 독자성이 그 생명입니다.
가는 도중에 꽃도 구경하고, 바람도 느꼈고, 나무들에게 찔렸습니다. 그리고 그 나무들이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샘을 냈다고 썼습니다. 아마 그 날 산에 가서 본 것은 이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구름도 봤을 것이고, 동네도 봤을 것이고 무덤도 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시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시에서 자신의 체험을 쓸 때 모든 것을 다 쓰는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몇 가지만 추려서 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경험 중에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요약해서 제시하는 방법이 바로 지금 우리가 세 번째의 방법으로 제시한 <직접 말하기> 방법입니다. 어떤 다른 표현법을 사용하지 않고 체험을 추려서 중요한 부분만 직접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는 비유도 들어있지만, 전체의 흐름은 자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라고 미리 말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말하기>의 범주에 넣은 것입니다.
4연 첫 행의 <나올려고>는 <나오려고>가 맞는 것이겠지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시에서는 그런 거 너무 골치 아프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중에 말하겠지만, 그런 거 시시콜콜 따지다가는 정작 생각이 끊겨서 시를 잘 못 씁니다. 그리고 이런 틀린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생활에서 그렇게 발음하고 쓰면 그게 오히려 더 시의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시에서는 맞춤법보다 어감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아래 5연을 보면
진달래가 샘이 났는지, 소나무와 다른 나무들은
우리를 막아서서 못 가게 가시를 이용해 마구 찔러댄다.
<못 가게>는 굳이 없어도 되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없어도 앞 뒤 의미 연결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있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을 경우에는 없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합니다.
계속해서 작품을 보겠습니다.
시 쓰는 친구들
김봉진(2-1)
지금은 국어시간.
노는 시간이라 착각하고
놀고있는 친구들
병덕이는 나무에 매달리고.
광섭이는 돌아다니며 시를 자랑하고.
연호는 노래를 리매이크를 하고.
제연이는 “방카”의 카리스마를 자랑하고.
팔장 끼고 돌아다니는 윤표.
시를 쓰고 들어오는
정근이와 희성이 춤을 추며 들어오고.
우리 반은 시 쓰는 시간이 체육시간보다 쬐금 재미있다.
시를 쓰라고 시간을 주면 얌전히 앉아서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꾸 떠들려고 하지요. 한 번은 시상을 떠올려야 한다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야외수업을 하자는 겁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하고 허락을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시 쓸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한 장난만 하면서 놀더군요. 그래도 그냥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들이 해놓은 말이 있으니까 뒤가 켕겼는지 집에서 써왔습니다. 이 시도 그 중의 하나죠.
국어 시간에 시 쓰는 친구들의 모습이 자세히 묘사돼있죠? 여기서 병덕이니, 광섭이니, 연호니 하는 학생들이 누구인가를 굳이 알 필요는 없겠지요? 왜냐하면 여러분의 경험으로 보아 어떤 상황인지 모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름은 특수한 명사이지만, 이렇게 독자로 하여금 연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 쓰이면 보통 명사처럼 쓰인답니다.
이 시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어떤 상황을 잘 요약한 겁니다. 특별히 화려한 표현도 없고, 재미있는 표현도 없지만, 시 쓰라고 준 시간을 활용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눈에 잡힐 듯이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이 살고 행동하고 느끼는 것을 잘 요약하여 옮겨놓으면 그것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입니다.
맨 마지막 줄에는 재미있는 심리가 드러나 있지요? 남학생들에게 체육시간보다 더 재미있는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도 국어시간이 <쬐끔>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투영된 것이겠죠? 앞부분에서 제시했듯이 시를 쓴다고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하는 데도 혼내거나 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으니까 일종의 아부를 한 것이겠죠. 그런 순수한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 시의 장점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애개개! 이런 정도는 누가 못써? 이런 생각을 하는 학생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 학생들은 여태까지 약간 잘못된 고정관념에 빠져있던 것입니다. 시는 무언가 그럴 듯한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그런 고정관념 말입니다. 그런 고정관념은 틀림없이 교과서의 시에서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학생들처럼 자신의 생활을 노래하는 과정을 충분히 거쳐서 그런 시에서 시의 재미를 느끼게 된 다음의 일입니다. 시는 결코 특별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소박하게 담는 훌륭한 그릇입니다. 바로 이 점을 깨닫는 것이 시를 잘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무시무시한 놀이터
이세호(1-1)
놀이터는 위험을 주는 곳
항상 조심해야 할 곳.
시소는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엉덩이가 다칠 수도 있다.
그네도 무척이나 재미있다.
하지만 뒤에 있다가
부딪칠 수도 있으며 떨어질 수도 있다.
미끄럼틀도 재미있다.
하지만 굴러 떨어질 수 있다.
놀이터는 언제 다칠지 모르는
위험한 곳.
재미있지요? 놀이터를 재미있는 곳으로만 생각했지, 위험하다고 노래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나 내막을 살펴보면 정말 그렇지요. 누구나 놀이터에서 다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이터라는 머릿속의 개념 때문에 그런 위험을 노래한다는 생각을 미처 못 한 것입니다. 이 학생은 놀이터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자신이 처했던 위험한 경험을 시로 쓸 생각을 했습니다.
이와 같이 남들이 흘려버리기 쉬운 것을 한 번 깊이 생각해서 옮겨 놓는 것도 좋은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너무나 많지요.
시작과 끝 부분에 비슷한 말을 반복하면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냅니다. 물론 이 학생이 그러한 시의 이론을 알고 썼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잘 정리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는 명쾌히 몰라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이 시를 잘 짓는 것입니다. 시의 이론을 배운다고 해서 시를 잘 쓸 수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이 움직이는 방향을 면밀히 살피면 복잡한 시의 이론에서 설명하는 효과를 나도 모르게 시에서 발휘하게 됩니다.
봉진이
김준석(2-1)
우리 반의 실장
우리 반의 덩치
얼굴에는 여드름 꽃.
얼굴에는 하얀 미소를 띠고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부르네.
내가 놀리면 도끼눈을 뜨고
나는 도망을 가네.
잡히면 죽으니까.
사람의 특징을 아주 짧게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도 시의 좋은 방법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무수히 만나면서 살고 사람 사이에서 감정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그런 감정들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위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서 그들의 특징을 노래하는 것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맨 끝에 보듯이 장난을 많이 치는 관계인가 봅니다. 잡히면 죽는다는 표현은 좀 과장된 것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표현하는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만큼 친하게 지낸다는 뜻입니다. 장난치고 도망가고 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게 상황을 아주 잘 요약했습니다.
내 필통
채희성(2-1)
내 필통은 갈곳 없는 볼펜들의 종착점
갈곳 없는 볼펜은 다 내 필통으로 온다.
교실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복도에 굴러다니는 볼펜도……
내 눈에만 띠면 전부 다 내 필통으로 모여든다.
그래서 내 필통에는 내 볼펜 조금.
줏은 볼펜 하나 가득.
우리가 자랄 적에는 연필도 귀했고 볼펜은 더더욱 귀했습니다. 그래서 보통 잉크를 펜촉으로 찍어서 썼지요. 그런데 잉크는 병에 담겨서 가지고 다니면 아주 불편합니다. 깨지는 수도 있고 엎질러지는 수도 있고, 또 펜촉은 너무 날카로워서 찔리는 수도 있습니다. 연필 같은 경우에는 쥐고 쓸 수 없을 정도로 짧게 닳으면 볼펜깍지에 끼워서 썼습니다. 종이도 그렇습니다. 그때는 질도 나빴고 귀했습니다. 교과서도 몇 해를 건너면서 빌려다 보아야 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요새는 물자가 너무 흔해서 탈입니다. 연필은 절반도 쓰기 전에 잃어버리기 일쑤이고, 볼펜 종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가고 난 교실에 가보면 볼펜이나 공책 따위는 쉽게 주울 수 있습니다.
이 학생은 볼펜을 줍는 버릇이 있는 모양이지요? 자신의 그런 습관을 잘 묘사한 작품입니다. 옛날 같으면 남의 볼펜을 주워서 자기 필통에 넣기 쉽지 않습니다. 도둑놈으로 몰릴 테니까요. 그런데 요즘이야 물자가 흔한 세상이니 설사 다른 사람이 가져간다 해도 그거 돌려달라고 할 사람 거의 없을 것입니다. 흘린 것이니 말이죠.
이와 같이 자신의 습관을 소재로 표현하는 것도 중요한 재미입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버릇이나 생활을 꼼꼼히 살피는 것이 시를 잘 쓰는 지름길입니다. 시는 주변에 대한 관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3년 마지막 행의 <줏은>은 <주운>이 맞겠지요? 그러나 이런 거 함부로 따지면 안 된다고 아까 말했죠? 그 사람의 말버릇이라고 봐도 되기 때문입니다. 시에서는 개인의 그러한 소소한 버릇까지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우유
길영근(2-1)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 매일 나오는
매일 우유
화요일엔
정근이 얼굴처럼
검은 초코 우유
금요일엔
소풍을 가고 싶던지
피크닉 우유
우리 학교엔
언제나 3가지 맛!
우유가 찾아온다.
요새는 학교마다 거의 우유를 먹습니다. 옛날에는 상상도 못하던 일이지요. 면장 아들이라든가 아니면 최소한 양조장 주인의 조카쯤은 되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유 역시 흔한 것이 돼놓으니, 이젠 잘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학생들이 돌아간 뒤에 교실에 가보면 교탁에는 꼭 우유가 몇 개씩 남아있습니다. 그 만큼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각 학교에서는 성장기에 있는 학생들이 우유를 먹도록 갖가지 꾀를 냅니다. 그 중에 좋은 것이 입맛을 당기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흰 우유를 주다가 어떤 때는 딸기 우유, 초콜렛 우유같이 다른 맛이 나는 우유를 주기도 하지요. 어떻게든 먹여보려는 선생님들의 노력입니다.
이 시는 그렇게 해서 배달되는 우유를 보며 장난삼아 쓴 것입니다. 매일 우유, 초코 우유, 피크닉 우유. 이렇게 오는 우유 이름을 갖고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본 것이죠. 매일 오니까 <매일 우유>, 초코 우유는 밤색이니까 친구의 얼굴색을 닮아서 <초코 우유>, 피크닉에서는 소풍을 연상하고는 <피크닉 우유>, 모두가 친근하고 엉뚱한 생각입니다.
발상이 참 재미있지요? 그런데 잘 보면 비유도 있어서 시 전체의 균형을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흐름은 매일 공급되는 우유에 대해서 쓴 것이기 때문에 비유에서 다루지 않고 이 단원에서 다룬 것입니다. 이렇게 재미를 느끼면서 시를 쓰다 보면 나중에 저절로 훌륭한 작품을 쓸 수 있게 됩니다. 그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이렇게 생활 주변에서 재미있는 시의 소재를 찾는 일입니다.
처마 밑 고드름
노은희(1-1)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누가 더 키 크나, 누가 더 뚱뚱하나
대결하기 바쁘다.
제일 큰 고드름은 뽐내다가
어느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지고
두 번째로 큰 고드름도 뽐내다가
두 번째 개구쟁이의 손에 떼어진다.
이렇게 처마 밑의 고드름들은
개구쟁이 손에 하나 둘씩 떼어져 간다.
언제 녹아서 고드름이 되었는지
처마 밑엔 고드름이 줄지어 서있다.
이 시에도 역시 비유가 나오지요? 그렇지만, 비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고드름을 보고서 그것을 관찰했다는 것이 이 시의 장점입니다. 고드름은 추녀 끝에서 땅 쪽으로 자라지요. 추울수록 굵기도 굵어지다가 햇빛을 받으면 물을 뚝뚝 흘립니다. 아이들이 이것을 신기하게 여기고서는 똑똑 떼어서 먹기도 하고 차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을 눈에 보이는 대로 정리하여 적은 것이지요. 어른들의 눈에는 보일 리 없는 현상입니다. 세심한 관찰이 이룬 일이지요.
그림
정윤섭(3-1)
하얀 백짓장 위에
색색깔로 그림을 그린다.
살색으로 얼굴을 그리고
검은색으론 머리를 그리고
파랑색으로는 옷을 그리고
회색으로 바지를 그리면 나의 모습 완성
옆에서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을 그리고
그 사람을 향해서 빨간색을 날린다.
누군 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보고 웃는다.
그 사람이 누굴까?
다음 장으로 넘기고 그림을 한 장 더 그린다.
이번엔 그 사람이 보인다.
누구지?
아직 내가 모르는 사람
그 사람이 나에 사랑에 상대
그 사람의 색깔을 모르겠다.
나는 사람에 색깔을 모르는 아직 애송이다.
사춘기 학생이면 누구나 이성에 대해서 사랑을 느낍니다. 대부분 그것이 부끄러운 것인 줄 알고 숨기지요. 그리고는 혼자서 끙끙 앓습니다. 표현력이라도 좋고 배짱이라도 좋으면 과감하게 자기감정을 표현하면 되는데,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그래서 속을 속 태우지요. 그런 감정을 시로 쓴 것입니다. 그것을 그림에다 비유를 했고, 그림을 보면서 완성하고픈 사랑을 노래한 것입니다. 사춘기의 섬세한 감수성이 아주 잘 나타난 경우가 되겠습니다.
시험
김영주(2-1)
시험은 나에게 어려운 문제
시험을 보면 틀릴까봐
마음이 콩닥콩닥.
풀고도 걱정되어 또다시 풀어보고
수학시험을 보면
내 마음은 긴장하듯
시험은 왜 어려울까?
아이들은 고민하네.
틀린 문제 싫어
시험을 부모님께 보여 주면
부모님이 나에게 하시는 잔소리.
자, 이 시는 학생들의 절실한 고민을 담은 시지요? 무슨 기법이나 기술을 가지고 쓴 시가 아닙니다. 성적을 두고 걱정되는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그저 시험 때문에 애간장 타는 심정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심정을 직접 말하듯이 쓰는 방법이 있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시는 감동을 줍니다. 아주 많은 시들이 이 방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모기향
엄유진(안양예고 1)
초등학교 1학년 정식이,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친구들과 얼음땡을 하고 들어와서는
얼굴과 손, 발에 물만 대충 묻히고 잔다
땀냄새 때문에 극성을 부리는 모기 소리에
찡얼대며 일어난 준식이는
미색바탕에 백합 무늬가 그려져 있는
이빠진 접시 위에 모기향을 피워
동생 머리맡에 놓는다.
그래도 형이라고.
2003년 경남대 제32회 전국고교생 한마백일장 운문 장원
이 시의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한 형이 동생을 위해 모기향을 피우는 사연을 동작이 이어지는 대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시답게 해주는 것은 마지막 구절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맨 마지막에 제시함으로써 앞에서 무심한 듯이 묘사해온 구절들을 한 순간에 시로 만들어줍니다. 그럼으로써 동생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을 아주 잘 나타냈습니다.
이런 시를 보면 좋은 시를 쓰는 것은 글재주가 아니라 주변의 사소한 일들에 대한 관심과 관찰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시에서도 특별히 엄청난 기교나 재주가 사용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생을 생각하는 한 아이의 행동을 관찰하여 그것을 시로 써볼 생각을 한 계기가 좋은 시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이 학생이 시를 쓰는 재주가 부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겠죠? 이 상황을 이만큼 간략하면서도 필요한 말들만 골라 쓸 줄 아는 것도 아주 대단한 능력입니다. 그리고 오랜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죠.
앞서 살펴본 두 방법, 즉 1)빗대어 쓰기와 2)그리듯이 쓰기는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세 번째 방법인 직접 말하기 수법은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살아가면서 느낀 점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면 됩니다. 물론 어떻게 쓰면 시가 단단해지고 군더더기 없이 자기의 생각이 잘 전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익히고 연습하는 숙제가 남아있습니다만, 달리기 연습을 많이 한 학생이 잘 달릴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많은 작품을 쓰면서 조금씩 숙달시켜 가면 될 일입니다.
금강산
글 깨나 한다는 사람치고
읊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림 깨나 그린다는 사람치고
그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런 작품을 위해 나도
기꺼이 절망의 순간을 맞고 싶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것은
조화옹의 손길 앞에서 절망한 나머지
시 한 구절 읊조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이 너무 긴 나머지
막상 보았을 때 조화옹의 솜씨가
그 동안 꿈속에서 그려낸
내 작품만 못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순전히 생각만으로 썼습니다. 비유도 없고 상징도 없고 이미지도 없습니다. 그냥 금강산을 생각하는 마음뿐입니다.
금강산은 우리나라, 아니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이지요. 그런데 분단으로 인해서 남쪽에서는 가볼 수 없는 땅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금강산에 다녀온 옛날 분들한테 금강산 칭찬을 들으면서 나름대로 금강산을 머릿속에 그려봅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가장 아름다운 형상으로 금강산을 마음속에 만들었습니다. 분단의 세월이 깊어가면서 그 그림 역시 화려해지지요. 한 사람의 상상력을 최대한 가동해서 그렸으니까요.
그러다가 몇 해 전부터 북한 금강산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가기도 하고 얼마 전부터는 육로로도 가지요. 그래서 지금은 갈 수 있는데도 이제는 겁이 나는 겁니다. 만약에 ‘내가 생각한 금강산보다 실제 금강산이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엉뚱한 생각이 나는 겁니다. 오랜 분단이 사람의 마음속에 만들어놓은 상처지요. 이런 상태를 있는 그대로 생각 따라 적은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만을 적어도 시가 된다는 것을 말하려고 이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이 작품은 비유나 이미지가 없이 생각으로만 썼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이 꼭 순수하게 생각만으로 쓰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생각을 직접 말하는 방법으로 시를 쓰더라도 그 안에 이미지도 나타나고 비유도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더 흔한 방법입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가족이 서울 나들이를 간 적이 있습니다. 방학을 이용해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롯데월드를 가서 놀다 오자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려서 잠실 가는 지하철을 탔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아내, 그리고 아이 둘, 해서 모두 넷이었습니다. 낮이어서 그랬는지 자리가 비는 바람에 우리 넷은 나란히 앉았습니다. 몇 시간 기차에 시달리다 보니 피곤했는지 옆에 앉은 아내가 꾸벅꾸벅 졸다가 제 어깨에 머리를 대는 겁니다. 곧 이어서 아이들도 엄마 옆구리에 끼여서 졸더구만요.
그런데 저는 졸 수가 없는 겁니다. 넷 중에 행선지를 아는 사람은 저뿐이고 만약에 제가 졸다가 역을 지나치면 낭패를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졸음이 쏟아지는데도 저는 졸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마음속으로 내려야 할 역을 꼽으면서 기다렸지요.
그런데 그 순간 묘한 생각이 떠오르는 겁니다. 이거 상황이 꼭 제가 살아가는 것과 똑같은 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남편이라고 아빠라고 한 가족이 저를 따라나섰는데, 저 자신도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잘 알 수 없고, 그러면서도 한 가족을 이끌고 그들을 어디론가 데려가는 제 처지가 생각난 겁니다. 순간 순간의 내 결정에 따라서 이들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묘한 상황입니까? 사는 게 뭔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이 내 인생인데, 그런 인생에 또 다른 인생 여럿이 딸려서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히면서 막막해지더구만요. 눈시울이 뜨거워졌지만, 나이 마흔 아저씨가 어디 울 수가 있나요? 한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머릿속에서 갑자기 시의 회로가 작동하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담담히 속으로 이 시를 썼습니다. 그리곤 집에 와서 정리했지요.
지하철에서
그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 운이 좋게도
우리 식구 넷이서 나란히 앉았다.
잠시 후 아이들이 졸고,
양쪽 옆구리에 아이들의 몸을 받친 아내도 존다.
롯데월드 가는 길,
나는 잠이 오질 않는다.
우리 식구가 누릴 한 때의 즐거움을 향하여
지하철이야 잠실에서 끝나겠지만,
그곳에서 끝나지 않을 또 다른 길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다.
살아갈수록 길은 험하고 흐려지는데
방향을 물어도 분명해지는 건 없고
캄캄한 창 밖은 불빛이 번뇌처럼 스쳐간다.
종착점과 방향을 분명히 모르는 한 가장과
그 가장을 철썩 같이 믿고 따라나선
곤한 식솔들을 태우고 지하철은
덜컹거리는 어둠 속을 달린다.
롯데월드 가는 길
간간이 서는 간이역을 잊은 채
식솔들은 곤히 잠들고
나는 잠이 오지 않는 지하철에서.
비유도 나오고 이미지도 나오지만 시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은 지하철을 타고 롯데월드를 찾아가던 체험입니다. 이 체험의 과정에서 깨달은 내용을 독자들이 알기 쉽게 설명해준 것입니다. 이렇게 직접 말하기의 수법으로 시는 써집니다.
<직접 말하기>라는 창작 방법을 마치기 전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하기는 누군가 듣는 것을 전제로 하고 속삭이듯 쓰는 것입니다. 산문 중에서 그러한 방법으로 쓰는 것이 바로 <편지>입니다. 따라서 편지의 어법을 시에서 활용하면 아주 좋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예를 보겠습니다.
해바라기의 사랑
최희정(제천상고 2)
당신의 뒷모습에서
빗물이 묻어납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형태를
흐리게 하고
내 마음을 흐리게 합니다.
언제나
뒷모습만을
바라보며 서 있는
기다림의 마음을,
그것만으로도
행복과 슬픔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해바라기의 사랑을
당신은 모르십니다.
바람이 세차어도
꺼지지 않을
촛불 하나 가지고 있지만
당신에게서
묻어나온 빗물에
내 가진 촛불 하나
슬픔으로 가물거립니다. 이젠
돌아서서 날
보아주지 않으시렵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쓴 편지의 투를 흉내 낸 시입니다. 누군가에게 말하는 형태로 쓰였지요? 물론 이 시의 원리는 비유를 활용한 방법입니다. 해바라기는 해를 바라보면서 삽니다. 해와 해바라기의 관계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관계로 바꿔놓고서 쓴 시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비유가 아니라 말투입니다. 편지에 쓰이는 말투로 쓰면 시를 쓰기가 굉장히 편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시를 써야 할지 막막할 때는 편지투를 사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신혼 초에 주말부부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일요일 날 새벽에 떠나서 토요일 날 오후에 오는 것이죠. 사랑하니까 함께 살자고 하는 것이 결혼인데, 결혼을 하자마자 떨어져서 일주일에 한 번 보니 얼마나 애절하겠어요? 월요일마다 아내는 눈물바람입니다. 그런 아내를 보는 저의 심사는 어떻겠어요. 감정이 북받칠 밖에요.
그런데 현실이 현실이다 보니 아내를 위로해야 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가끔 편지를 썼지요. 그런데 감정이 애절하다 보니 써놓은 편지를 읽어보면 시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참에 시를 쓰자 마음을 먹고 그날 그날의 느낌을 시로 썼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그것을 엽서에 적어서 보냈습니다. 아내가 무척 감동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어렵던 시절을 건넜습니다. 옛날에 냈던 시집에서 두 편만 소개합니다.
완행열차
좌석표가 이미 매진이 되어
하는 수 없이 완행열차에 올랐습니다.
긴 의자 두 줄뿐인 맨 뒷칸으로 가니
텅 빈 것이, 속도에 떠있는 것은
덜컹거리는 고요와 나 혼자 뿐입니다.
느긋한 마음에 늘어질 대로 늘어져
긴 의자에 네 활개를 펴고 누웠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편할 수 없습니다.
당신에게 가는 길은 언제나
이렇게 마음 편하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허리띠를 한 칸 늘여놓고
돌아갈 그 어떤 곳이 있다는 것은
이 각박한 세상에 당신이 내게 내린
커다란 축복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투명한 햇살과 시원한 봄바람이
열린 창으로 손뼉 치듯 쏟아집니다.
이 시는 정말 편지 그대로지요? 일요일 날 아내를 헤어져서 돌아오다가 기차를 타고서 느낀 것을 있는 그대로 적은 것입니다.
꽃
아름다움이란
개나리, 튜울립, 장미 같은 꽃들을 염두에 둔 말이지요.
그러나 복숭아, 살구 혹은 사과나 배꽃도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들임을
이 아침 과수원 길에 잠시 서서 깨닫습니다.
목적에 가려진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인지 삶의 그늘에 가려진 아름다움을
어느 날의 당신에게서 문득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듯이
아름다움이 목적인 꽃나무들보다 더 아름다운
과일나무의 꽃들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아침입니다.
꽃이 지면 그저 풀일 뿐인 꽃들과
가지마다 풍성한 가을의 예감을 매달고 있는
과일나무의 아름다움을 잠시 생각하곤 이 시간
생활의 먼지 속에 가려져 있을 당신의 빛과
풍성한 당신의 사랑을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비유가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 얘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편지투로 된 방식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점을 살펴보기 바랍니다.
자, 이렇게 해서 시를 쓰는 원리 세 가지를 다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시를 이렇게 분류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일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한 것입니다. 이것이 칭찬 받을 일인지 비난 받을 일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읽고서 실제로 시 쓰는 데 도움을 받으면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고 저러고,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를 했는데, 그냥 이렇게 설명만 해놓으면 좀 무책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방법에 대해 간단한 이름을 한 번 붙여볼까 합니다.
세 가지 방법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제일 먼저 <빗대어 쓰기>는 내 생각을 다른 것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비유라고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같은 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과 같은 것을 골라내는 것이지요. 따라서 이것은 서로 다른 사물의 사이에서 동일점을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에 ‘동일시의 시학’이라고 이름 붙이면 어떨까요?
두 번째 <그리듯이 쓰기>는 이미지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지로 말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그림을 그린다는 얘깁니다. 따라서 쉽게 ‘그리기의 시학’이라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직접 말하기>는 자기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쓰는 데는 듣는 사람을 전제로 합니다. 말하자면 이야기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야기의 시학’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이렇게 해서 서툴지만 나름대로 이름을 붙여봤습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빗대어 표현하기 - 동일시의 시학
②그리듯이 쓰기 - 그리기의 시학
③직접 말하기 - 이야기의 시학
4)변형과 종합
시를 쓰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라는 것이 여태까지 말해온 지론이었습니다. 방법상으로 보면 분명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을 섞어서 쓰는 또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이 방법을 둘 또는 세 가지를 모두 섞어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원칙은 세 가지이지만, 이 섞어 쓰는 정도에 따라서 다시 몇 가지로 더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변형과 종합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변형의 방법에 대해 한 번 훑어보고 가겠습니다. 그냥 참고로 하기 바랍니다. 어차피 위의 세 가지 원칙만 알면 나머지 변형은 그 세 가지를 가지고 적당히 섞은 것이기 때문에 다 알아볼 수 있습니다.
먼저, 순수하게 위의 방법 한 가지만으로 쓴 시들이 있을 것입니다.
[1] 순수한 동일시의 시학
[2] 순수한 그리기의 시학
[3] 순수한 이야기의 시학
여기에다가 두 가지를 섞어서 쓴 것이 있을 수 있으니, 그 경우의 수를 만들어보면 다음 네 가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1+2]
-[1+3]
-[2+3]
-[1+2+3]
관찰력이 민감한 학생은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1+2]와 [2+1]은 다른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그런데 수학에서는 맞는데 시에서는 이 두 가지가 섞인 양상이 거의 비슷합니다. 물론 동일시의 시학을 주로 하고 그리기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과, 그리기의 시학을 주로 하고 동일시의 시학을 곁들이로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것이지만, 막상 그 정도로 정확하게 구별해서 섞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섞이나 저렇게 섞이나 다 비슷한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것은 [3]을 뼈대로 하고 거기에 [1]이나 [2]를 추가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접하는 시의 한 7~80% 가량이 이런 형태에 속합니다. 자신이 살아가면서 느끼거나 깨달은 것을 담담히 서술하면서 거기에다가 신선한 비유와 상징, 또는 이미지를 곁들여 쓰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자세한 구별이 필요하다면 더 자세히 나누어도 됩니다. 다만 그렇게 너무 세세히 구별하면 시 쓰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법이 섞인 시를 보겠습니다.
유성음
-야학일기 3.-
강규선
저무는 날. 처음부터 우리들은
흔들림이었고.
Ⅰ
비틀대는 수업을 가로지르며 네가 다가왔다. 썬생니, 수업을
하노라면 흐르는 시간 따라 떠돌던 마음도 문득
깨어나, 그렇지 너도 읽어야지, 국어 책을
읽히고, 순간
깜빡이는 불빛으로 불안하던 눈동자들.
저무는 바람 속.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사이를 더듬으며
비틀대는 반신불구, 네 혀 주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보았다. 종결어미 없이 스러지는 너의 말
끝으로 부끄러이 스며드는 한 얼굴을
보았다. 견고하게 아름답던 세상 풍경마저
비스듬히 돌아누워 아 우 어 우
으, 으, 으.
결국은 소리죽인 울음으로 끝나가던 책 읽기.
끝없이 응고하며 주저앉는 너의 침묵이
크낙한 말의 벽으로 일어서는 역설 앞에서
웅웅대며 흩어지던 시야 끝
돌연 반신불구처럼 뒤틀며
키득이던 아이들.
Ⅱ
모든 우리들은 어디에도 없어. 오늘 국어시간. 하루의 안전을 확인하듯 조심스레 출석을 부르면,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사실 산다는 것은 흔들림 이외에 또 무엇인가. 살아있는 우리들은 잠시 역설일 뿐이라며 교탁을 후려치는 불빛.
그러나 이제 책을 펴야지. 가진 것 너무 많은 우리여서 서글픈 확신 하나, 아는 것이 힘. 어둠 저 너머로 별 하나 흐르듯 자 찔끈 두 눈 감고 오늘은 유성음을 공부할 차례. 저…… 선생님. 유성음(流星音)이란 우리들처럼 어디에도 없는 소리인가요. 아 아니야 유성음(有聲音)은 떨려, 떨리는 음. 코를 잡고 발음해 봐, ㄴ-ㄹ-ㅁ-ㅇ- 그래 너희들처럼 코가 울리지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야학일기 3.>이라는 부제가 달린 것으로 봐서는 연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야간학교 생활을 다룬 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은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내용을 추려보면 야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발음을 잘 못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발음이 잘 안 되니 국어시간에 곤란하겠지요. 그 때문에 아이들은 웃고요. 당사자는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을 바라보는 교사의 마음은 너무나 아프고 게다가 그런 상황을 어찌 해줄 수 없다는 무력감이 교사를 괴롭히고 있는 상황입니다.
야간학교는 일반 학교를 갈 여건이 못 돼서 다니는 학교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배우고자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은 사람이 있는 겁니다. 이와 같은 체험이 시의 중요한 줄기를 이루고 있지요. 직접 말하기를 택하는 <이야기의 시학>입니다. 그런데 섬뜩하면서도 날카로운 표현들이 들어있습니다.
무심히 드러누운 활자
말의 벽
반신불구처럼
너의 번호 위에서 언뜻 비틀대는, 붉은 두 줄의 확고함
유성음(流星音) - 유성음(有聲音)
울리는 너희들이 유성음.
이런 표현들은 비유에 바탕을 둔 표현들입니다. 의인화도 들어있고요. 또 자세히 보면 상징도 들어있습니다. 다음이 그런 구절들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들은 / 흔들림이었고
우뚝 솟아오르는 한 어둠을
꿈꾸듯 걸어온 나의 실족들을, 꼭꼭 디디며 이어서는 너의 빈자리.
의인화니 상징이니 하는 것들은 빗대어 쓰기의 수법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이야기의 시학>에 <동일시의 시학>이 결합된 경우입니다.
이렇게 시는 어느 한 가지 방법으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방법이 결합하면서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학생의 작품을 보겠습니다.
대망석재
박미라(옥천고)
바닥에 널린 돌조각들
밟고 선 아버지의 신발 속으로
불편한 시간이 들어가 있다
아버지는 돌을 깎는다
살점 떨어져나갈수록
더 선명한 눈물자국 보여주는 대리석에
형의 숨소리 박아넣는다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간 형은
석재상의 간판
주름처럼 거미줄이 생기고
색 바래가도 돌아오지 않는다
아버지는 형을 기다리며
날마다 무딘 망치소리 사이에
흐느끼는 신음 채워넣는다
전기톱이 살을 뚫고 오는 소리에
톱날을 물어버리는 대리석
돌가루 날리는 허공에
물 뿌려보지만
뿌연 그리움은 쉽게 진정되지 못한다
아버지의 닳은 옷소매에
채워지는 기다림
털어도 헤진 자리 깊숙이 파고 들어가
털어지지 않는다
망부석처럼 말이 없는 석상 앞에서
아버지는 굳게 다문 입으로
바람 드나드는 것 허락하지 않은 채
구름도 멈춰선 하늘을 오래 바라본다
신발 속에서 뒤척이는 돌조각들
서로 부딪혀 모서리 헐어내고
2003년 배재대 청소년 소월문학상 운문부 우수
이 시는 석재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삶을 요약한 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거의 묘사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을 깎아서 석물을 만들면서 이루어지는 동작을 동원시켜서 말을 하고 있지요. 그런데 거기에 할 말이 사이사이 끼어들어서 읽는 사람에게 설명을 해줍니다. 돈벌이가 안 되는지 형은 돈을 벌어오겠다며 뛰쳐나갔습니다. 그 만큼 아버지는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런데 시인은 아버지의 생활이 힘들고 어렵다고 쓰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을 석재상의 여러 도구와 작업으로 대신 묘사를 하면서 중간 중간에 자기가 하고픈 말을 곁들인 것입니다. 묘사와 할 말이 적당히 배합된 작품입니다.
시의 형식을 보고서 발상법을 구별하자면 한이 없습니다. 예컨대 비유를 사용하는 동일시의 시학에서도 가짓수를 무제한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동일시의 시학은 비유이기 때문에 비유하는 것과 비유 당하는 것 두 가지가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그것을 원관념과 보조관념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내느냐에 따라서 시의 모습이 많이 달라집니다. 원관념만 많이 드러내고 보조관념은 조금만 드러낸 시와, 원관념은 조금 드러나고 보조관념이 많이 드러난 시는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아주 조화를 이루어서 균형 잡히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를 구별하면 다음과 같이 되겠지요.
-원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비슷하게 드러난 시
-보조관념을 더 많이 드러낸 시
이렇게 하면 셋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사이사이에도 무한정으로 종류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무지개는 일곱 색깔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 사이사이에 무수히 색깔이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식이지요.
-원관념 10% + 보조관념 90%
-원관념 20% + 보조관념 80%
-원관념 30% + 보조관념 70%
-원관념 40% + 보조관념 60%
……………
-원관념 90% + 보조관념 10%
물론 이 사이에도 계속 숫자를 잘게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게 현실 속에서 정확히 그숫자만큼 달아서 시를 판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요. 이론상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게다가 이것을 위의 분류와 결합시키면 시의 가짓수는 무한대에 가깝게 많아집니다. 그것을 다 다루어 볼까요? 어때요? 머리가 딱딱 아프지요?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있습니다. 앞서 말한 세 가지 방법만 기억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황에 따라서 섞여서 나타난다고 보면 간단합니다.
5)퇴고하기
시에서 이미 써놓은 작품에 손을 대거나 고치는 것을 퇴고(推敲)라고 합니다. 물론 한자말이죠. 이 말은 중국의 한 고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아니! 이 어려운 말은 쉬운 말로 바꿔 쓸 생각을 안 하셨나요? 더욱이 남의 것을 갖다 쓰는 것은 더 싫어하시면서. 이렇게 물을 사람이 있을 법도 합니다. 없다구요? 없으면 말구요. 하하하.
사람이 하는 일이 전문화가 이루어지다 보면 불가피하게 어려운 용어가 등장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입니다.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말을 쓰지 않고 전문용어를 쓴다고 해서 내용이 달라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그렇게 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일반인들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자기들이 하고 있다는 식의 권위를 세운다든지, 그것을 바탕으로 일반인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서 자신들의 영역을 확보한다든지 하는 것 말입니다. 법률 용어나 의학 용어를 보면 이런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가피한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영어나 한문 같은 어려운 말을 써서 일반인들이 따라가기 참 어렵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언뜻 보면 이 퇴고라는 말도 그렇게 보입니다. 어려운 말이지요. 그 말이 생겨난 사연까지 알아야 하는 경우니까요. 그런데 이 말에 작품을 고치는 어떤 아름답고 인간미 넘치는 사연이 들어있다면 어떨까요? 그런 사연으로 인해서 시 쓰는 사람들 사이에 관습으로 전해졌다면, 그 아름다운 사연을 기억하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어요? 그런 말들은 좀 어렵더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그 사연을 좀 보겠습니다.
옛날 당나라 말기에 가도(賈島)라는 중이 있었습니다. 이 중이 나귀를 타고 가다가 기가 막힌 시 한 구절을 얻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새는 연못가 나무에 깃들고,(鳥宿池邊樹)
중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어때요? 길을 가다가 저녁때가 되면 시인으로서 이런 생각을 할 법하지 않은가요? 그런데 써놓고 나니 이 <敲>자가 문제였습니다. 중이 문 앞에 서서 인기척을 낼 때 두드린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민다고 하는 것이 더 좋을까 잘 판단이 서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귀 위에서 직접 동작을 해보았습니다. 미는 동작을 했다가 두드리는 동작을 했다가, 이렇게 혼자 움직이고 흥얼거리며 어떤 글자를 쓸까 골똘히 고민하는 사이 나귀는 등에 탄 사람이 방향을 가르쳐주지 않자 엉뚱한 곳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간 곳은 공교롭게도 경윤의 행렬이었습니다.
경윤(京尹)은 요즘으로 치면 서울시장쯤 됩니다. 당시 서울을 관리하는 최고 책임자가 호위군사를 대동하여 지나가는 행렬로 밀고 들어간 것입니다. 당연히 소란이 일었지요. 으리으리한 원님 행차가 지나가는데 그 위에 탄 사람은 어디에 온 줄도 모르고 밀고 두드리는 동작을 하면서 흥얼거리고 있으니 미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겠어요? 시위들이 당장 붙잡아서 경윤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자 그 경윤은 어찌 된 사연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시 구절에 들어갈 말을 고르지 못해서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그랬다고 사연을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윤은 어떤 구절이냐고 물었고, 가도는 앞의 두 구절을 말해주었습니다. 그 구절을 한참 생각하던 그 경윤은 <敲>가 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 경윤은 누구냐 하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유명한 한유라는 선비였습니다. 다행히도 그 나귀는 가도라는 이름 없는 한 중을 당시의 대학자이자 높은 벼슬아치에게 데려가 소개를 해준 셈입니다. 아주 묘한 인연이지요. 사정이 이쯤 되니 이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겠어요? 당연히 친해졌겠지요? 이 사연을 전해주는 이야기책의 끝 구절이 ‘드디어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여 돌아갔다’(遂與竝轡而歸)고 하는 것으로 봐서는 그 뒷이야기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한유의 권유로 이 중은 환속하여 나중에 벼슬생활을 합니다. 이 사건으로 한유의 명성 덕분에 단숨에 유명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 지닌 경향은 다소 달랐습니다. 한유는 당나라 말기의 시 풍조가 화려한 표현을 좋아하는 쪽으로 흘러가자 그것을 비판하면서 꾸밈이 없는 옛날 한나라 때의 순수한 분위기로 돌아가자는 쪽이었고 가도는 당시 화려한 재주를 한껏 뽐내며 멋을 부리는 쪽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친다는 뜻으로 쓰는 <퇴고>라는 말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가도가 <퇴>로 할 것이냐 <고>로 할 것이냐 고민하듯이 정성 들여서 고친다는 뜻이 담긴 말이지요. 이 정도면 아름다운 일 아닌가요? 그래서 <고쳐쓰기>라는 말보다는 <퇴고>라는 말을 쓰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시를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퇴고를 하는 방법에 무슨 왕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그리고 많이 쓰다 보면 저절로 고치는 요령이 생기는 법입니다. 이런 일에 수학 문제 풀 듯이 어떤 방법이 있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이죠. 시는 이 세상에는 없는 마음속의 느낌을 언어에 담아서 질서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이 쓰다 보면 저만의 어떤 원칙이 생기는 것이고, 그것을 창작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무언가 기댈 언덕은 있어야겠죠? 먼저 시를 쓸 때는 발상을 메모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메모를 마친 다음에 그 시에서 무엇을 말할 것인가 하는 것을 찾아봅니다. 쉽게 말하면 주제를 찾는 것입니다. 처음 시상이 머릿속에 떠올랐을 때는 주제가 분명하게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냥 상상만으로도 존재하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대부분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나머지 표현 방법들은 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동원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표현은 이 시의 주제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 작용한다고 보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상을 메모했으면 주제를 한 번 더 생각하고, 그 주제에 맞는 내용을 보충합니다. 이 때의 내용이란 주제를 보충해주는 할말도 포함되고 거기에 필요한 표현이나 장식도 포함됩니다.
이렇게 하고 나서는 다시 처음부터 읽어가면서 주제를 전달해주는데 잘 어울리는 이미지들은 놔두고 나머지는 과감하게 잘라버립니다. <과감하게>라고 하는 것은, 표현이 아깝다고 그대로 두지 말라는 얘깁니다. 시를 쓰는 사람들은 표현을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평상시에도 이런저런 좋은 표현들을 머릿속에 담아두었다가 시에 필요할 때 쓰죠. 좋은 표현을 얻는 일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써 얻은 구절들은 버리기 아까워하죠. 그렇다고 그대로 두면 바로 그 아까운 구절 때문에 시 전체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버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버린다고 해서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나중에라도 다시 쓰는 날이 생기니 염려 말고 지금 당장은 과감하게 버리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서는 다시 읽어가면서 부족한 부분은 표현이든 주제든 추가시킵니다. 그리고 다시 읽어 가면서 다듬으면 됩니다. 그리고 반드시 소리 내어 읽어야 합니다.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읽어가면서 가락도 생기고 눈으로 볼 때와는 또 다른 단점들이 눈에 띕니다.
이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① 발상부터 재빨리 적는다.
② 초고를 보면서 시의 주제를 명확히 정한다.
③ 그 주제를 중심으로 이미지를 재배치한다.
④ 불필요하거나 조금 거리가 먼 이미지나 표현은 과감하게 잘라낸다.
⑤ 다시 읽으면서 부족한 주제나 표현을 보충한다.
⑥ 세밀한 부분을 다듬는다.
⑦ 몇 차례 소리 내어 읽는다.
그러면 퇴고의 과정을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비유로 쓰는 동일시의 시학을 소개하면서 <공룡>이란 작품을 소개했습니다. 그 작품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목이 삐끗해서 정형외과에 가서 엑스레이 사진을 찍었고 내 몸 속의 뼈가 드러난 그 사진을 보면서 쓴 시입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어떤 할 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을 대충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흉측한 모든 뼈대를 살가죽으로 덮고
헝겊으로 잘 싸기까지 한
저 백악기나 쥐라기의 한 공룡이다.
정형외과에서 찍은 엑스레이 사진에
내 본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등뒤로 살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지만
목뼈부터 등뼈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 뼈들의 나열.
엑스레이 앞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니까 이제야 풀린다.
옷으로 덮어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밖으로 치솟던 공격성과 난폭함
이런 것들은 공룡한테 당연한 것이다.
어디서 말미암은 것인지 분명해진다.
수 억 년이 지났는데도 완전히 퇴화하지 못한 채
내 살과 가죽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먼저 형광 사진에서 본 뼈를 통해서 나를 공룡으로 규정을 하고, 그 모습의 실상을 제시한 다음에, 내 속의 난폭성이 공룡에서 왔음을 말한 다음에, 그런 공룡이 내 몸 속에 들어있다고 제시하고자 한 방법입니다. 그 순서대로 정리됐죠.
그런데 좀 거칩니다. 이렇게 제시하면 뭐 시라고 못 할 것까지는 없지만 잘 썼다고 보기는 힘들겠죠. 이렇게 네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독자가 아무런 불편도 느끼지 못하고 저절로 따라가게 하려면 이 비약과 비약 사이를 좀 더 매끈하게 연결시켜주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제입니다. 이 정도에서도 주제가 분명하기는 합니다. 육식공룡의 탐욕성이 내 안이 있다는 것이죠. 그 탐욕성에 대한 설명이 그냥 뼈대만 나와 있어요. 그래서 공룡과 인간의 탐욕성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한 추가설명과,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표현하는 것이 이번 퇴고의 목적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쳤습니다.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약육강식이 판을 치던 저 쥐라기나 백악기의
한 지층에서 살아온 한 마리 육식공룡임을
정형외과에 와서 알았다.
엑스레이선이 통과한 뒤
형광불로 밝혀진 벽에 드러나는 나의 본모습.
비록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듯한 헝겊으로 덮기는 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이 흑백으로 밝혀주는
나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살에 가려서 거울로는 볼 수 없었지만
목에서부터 등을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루스의 화려한 뼈들이
엑스레이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내 마음속엣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탐욕과
옷으로 덮어도 송곳처럼 밖으로 치밀던 공격성,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는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어디서 왔는지 불분명하던 것들이
질서정연한 뼈와 뼈 사이로 가지런하게
이제야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의 뿔은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사라졌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내 살과 살갗 속에서 으르렁거리며
한 마리 공룡이 깃들어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연을 없앴다는 겁니다. 연은 의미와 이미지를 구성하는 한 매듭입니다. 대개는 연을 넘어갈 때 상상력의 비약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상상력의 비약이라고는 두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몸의 뼈 배열이 공룡의 뼈와 같기 때문에 공룡의 탐욕성이 내게도 남아있다는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두 상황을 설명하려면 시가 길어질 것이고, 시가 길어진 것에서 굳이 연을 나누어야 좋은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본 것이죠. 차라리 설명하듯이 끌고 나가면서 두 가지를 서로 대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연을 없애고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놓고 나니까 좀 더 상황이 자세하게 설명되었고, 또 이 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주제도 명확히 잡혔습니다. 그런데 너무 길어졌고, 또 설명이 너무 많아졌습니다. 앞쪽의 <정형외과에 와서 알았다>든가 <약육강식이 판을 친다>든가, <형광불로 밝혀진>다든가, <질서정연한 뼈와 뼈 사이>라든가 하는 것의 거의 산문 수준입니다. 그래서 산문 투의 문장을 없애고 군더더기를 조금 덜어내는 작업이 남았습니다. 아래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차이가 드러날 것입니다.
공룡
나는 내가 여태까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오늘 알고 보니 공룡이다.
살가죽으로 뼈대를 싸고
그럴 듯한 헝겊으로 몸뚱이를 덮었지만
정형외과의 형광벽에 비친 나는
쥐라기나 백악기 어느 한 지층 속에 납작하게 박혀있어야 할
한 마리 공룡.
목에서부터 등마루를 거쳐 꼬리까지
날개처럼 돋친 스테고사우르스의 화려한 뼈들이
흑백의 필름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수억 년 내력의 탐욕과 난폭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그 뼈들의 행렬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니
이제서야 모든 의문이 스르르 풀린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은데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던 물욕과
옷 밖으로 송곳처럼 치밀던 공격성, 그리고
약자한테 강하고 강자한테 약한 비굴함까지 도대체
내 마음 어느 구석에서 말미암는지 알 수 없던 것들이
공룡의 뼈들 사이로 분명히 드러난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큰 코 다칠 것임을 예고하며
등줄기 따라 톱날처럼 뻗어간 우람한 뼈들.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꼬리 끝의 뿔은
엉덩이 밑의 꼬리뼈 속으로 완전히 감추었지만
수십 억 년이 지난 지금에도 전혀 진화하지 못한 채
한 마리 공룡이 내 몸 안에서 으르렁거리고 있다.
문장의 배열 구조가 바뀌고 위치가 바뀌면서 좀 더 단정해졌다는 느낌이 올 것입니다. 형광벽에서 공룡의 뼈를 연상하고 그것을 정신세계까지 연장하여 욕망과 탐욕에 시달리는 나, 나아가 인간의 속성을 고발하고자 한 작품이 된 것입니다. 큰 뼈대는 변하지 않았지만, 중간중간의 말투나 문장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바뀐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시를 고치는 방법에 대한 암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많이 써나가는 과정에서 이런 점들을 터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부터 시에 천재가 없다고 자꾸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같은 과정 때문입니다. 발상은 천재성으로 얻는 것일 수 있지만, 이런 것은 천재성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지 않으면 천재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충북 보은에 가면 장안이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인내천을 기치로 내건 동학의 출발점이 된 곳이죠. 원래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은 경주사람이었습니다. 창시자 최제우의 후계자였죠. 그런데 동학을 혹세무민하는 종교로 규정한 관청의 탄압을 피해 깊은 산중으로 숨었습니다. 북으로 올라가서 소백산 기슭의 마을에 숨었다가 다시 백두대간 줄기를 타고 내려오다가 보은의 깊은 산 속에서 오랜 세월 동안 숨어 지냅니다. 교세가 확장되자 신도들은 억울하게 죽은 그들의 초대교주 최제우의 죄를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을 합니다. 초대교주 신원운동을 하려면 2대교주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러려면 그가 사는 곳으로 모여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각 지역의 동학 지도자들은 최시형이 살던 보은으로 모여듭니다. 그리고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해 논의를 하게 됩니다. 바로 그곳이 장안입니다.
이 신원운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한국의 근대사는 벌집을 쑤셔놓은 모양으로 요동을 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동학농민전쟁이 그것입니다. 정부는 백성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탐관오리들은 날뛰고 하니 참을 수 없는 백성들은 무기를 들고일어납니다. 그리고 청나라와 일본군까지 가세한 정부군을 상대로 몇 년에 걸쳐 전쟁을 하지요. 그리고는 쫓기고 쫓긴 농민군이 다시 보은의 북실이라는 곳에 와서 마지막으로 궤멸 당하고 맙니다. 이 북실이라는 곳은 장안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습니다. 동학농민전쟁의 시작과 끝이 충북 보은이라는 곳에 있는 셈입니다.
지금 북실에는 종곡초등학교가 있습니다. 종곡은 한자로 <鐘谷>이라고 쓰는데 북의 골짜기라는 뜻이죠. 당연히 <북실>을 한자로 번역한 것입니다. 동네 이름도 종곡리입니다. 이 학교에 볼 일이 있어 들렀다가 그곳이 바로 그 북실임을 알고는 머릿속이 텅 비면서 한 가지 시상이 문득 스쳤습니다. 북실, 북처럼 생긴 동네. 그런데 북은 소리를 내서 무언가를 알려주는 도구입니다. 그렇다면 그 북은 천지개벽을 알리는 것으로 볼 수 있고, 그것은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동학의 의미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동학은 잠든 백성들의 마음속에 천지개벽의 기쁨을 알리는 종교였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죽은 곳이 북실이라면 그들의 행동과 사상을 북이라는 도구에 상징화 시켜서 시로 쓴다면 아주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퍼뜩 스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서 재빨리 그 발상을 메모지에 썼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를 내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100년 전의 자취 찾아볼 수 없어도
어디선가 쇠북소리 들리네.
지나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들리고
여인의 소맷자락에서 들리고
소달구지, 뛰노는 아이들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렇게 썼습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 전체를 북으로 묘사하고 그 북을 천지개벽을 알리는 어떤 상징물로 활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점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북을 상징물로 사용하되 거기에 어떤 주제를 넣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동학농민전쟁은 백성들의 자신들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일어선 것이고, 그것은 곧 민주주의를 뜻할 것입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도 백성들은 관료들과 정치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삽니다. 완전한 민주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죠. 입으로는 백성들의 심부름꾼으로 자처하면서도 국회의원이 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뇌물 받아먹다가 검찰에 붙잡혀가고, 대통령이 되고 나면 공약은 기억도 하지 못합니다. 이런 일들이 소란스럽게 일어나는 꼴을 우리는 매일 안방의 텔레비전에서 봅니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도 당시의 실패한 혁명을 얘기하면서 우리가 진정으로 이루어야 할 민주주의 내지는 백성들의 나라에 대해서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방향으로 내용을 대폭 추가시켰습니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네.
새로운 시대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저 어두운 세상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도 듣게 하기 위하여
온 신명으로 소리를 내려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네.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만장의 물결 따라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박동소리 같다가
한 사람의 한 발자국 모으고
두 사람의 두 발자국 모아서
조금씩 커진다.
개벽을 알리기 위해 기꺼이 깨진
100년 전의 북이 공명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하늘을 모신 마음속에서 둥 두둥 운다.
마음의 골짜기에서 큰 북이 울다가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이 정도 되면 일단 주제는 확정됐고, 발상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셈입니다. 2000년에 보은에서 작은 행사가 열렸습니다. 동학군들의 넋을 추모하는 행사였습니다. 그러니 거의 100년만에 보은에서 죽은 동학군들을 위로하는 행사가 열린 것이지요. <여기까지 오는데 100년이 걸렸다>는 것은 그것을 암시하기 위해 집어넣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시에서는 꼭 그 사건이나 행사를 얘기하는 것만은 아니고, 이 시를 쓰거나 읽는 사람들의 현재와 연결시켜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어딘가 좀 산만하지 않은가요? 할 말만 제시되어 그렇습니다. 이 산만함을 없애려면 상상해간 방향을 뚜렷이 드러내야 하고 그에 따라 주제를 아울러 더 드러내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시상의 전개 방법과 순서를 좀 더 뚜렷이 하는 것입니다.
북실에서 천지개벽을 알리는 북을 떠올렸습니다. 그 북소리를 사람들은 듣기도 하고 못 듣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나 들어야 할 내면의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들으러 북실에 왔고, 민주주의의 의미를 기억하는 현재의 시점으로 보면 100년만에 그들을 그런 의미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그렇게 보겠죠. 현재 북실에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볼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상황도 아울러 말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는 얘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설득하면 안 되고 북이라는 상징물에 실어야 하지요.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마지막으로 북이라는 사물을 묘사해주면 됩니다. 앞의 글도 그런 방향이 어느 정도 잡혀있지만, 조금 불투명하지요. 그래서 시가 좀 산만한 겁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좀 더 자세하게 정리하면서 이렇게 완성했습니다.
북실
천지개벽을 알리는 커다란 쇠북이
이 골짜기 어딘가에 묻혀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새 세상 밖에
누군가 남아있을까 두려워
귀머거리라도 들을 큰 소리를 내려고
온 신명으로 부딪다가 깨진 북.
그 북소리 다시 들으려
만장의 물결 앞세우고
여기까지 오는데 1백년이 걸렸다.
솔잎죽창이 삭풍과 싸울 뿐
백년 전의 자취 찾아볼 길 없어도
한 번 열린 세상은
다시 닫히지 않는 법이니
눈을 감고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북소리 들린다.
처음엔 두근두근 심장 소리 같다가
모여드는 발자국들 따라
공명을 일으키며 커지다가
마침내 세상을 삼켜버리는 큰 울림.
개벽을 알리기 위해 백년 전에
깨어진 북이 묻힌 마음의 골짜기에서
북이 운다. 큰 북이 울리며
골짜기 전체가 큰 북이 된다.
한결 단정해졌음을 느낄 것입니다. 이런 뼈대를 만들어 가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오랜 훈련을 거치고 연습을 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자꾸 반복하다 보면 저절로 요령이 생깁니다. 여러분은 갑자기 천재가 되려 하지 말고 꾸준히 연습해서 좋은 시를 쓰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송나라 때 적벽부라는 유명한 시를 쓴 소동파라는 선비가 있습니다. 이름은 식이고 동파는 호죠. 그런데 이 사람은 평소 자기가 시의 재주를 타고났다고 큰소리 쳤던 모양입니다. 하루는 친구들이 찾아갔는데, 시를 보여주더랍니다. 그게 저 유명한 적벽부라는 시입니다. 삼국지의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그 적벽인데, 그곳을 유람하고 난 뒤의 소감을 시로 쓴 것입니다. 친구들이 명작이라고 모두 찬탄을 했습니다. 그런데 소동파는 그것을 단 한번의 가감도 없이 한 달음에 써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천재성을 자랑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은 더욱 감탄했습니다. 그러는 벗들을 바라보며 우쭐거리는 소동파의 모습에 눈앞에 선합니다. 잠시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소동파가 다른 일로 잠깐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 사이에 친구들이 혹시 다른 글이 없나 하고서 소동파가 앉았던 자리를 살펴보니 방석 밑으로 무슨 종이가 삐죽 나와있는 겁니다. 꺼내보니 거기에는 방금 보여준 적벽부를 고친 흔적이 역력한 글들이 수북이 쌓여있더랍니다. 적벽부를 고치다가 친구들이 오자 얼른 방석 밑으로 숨긴 것이죠. 소동파 역시 자기 재주를 한껏 자랑하고픈 마음을 지닌 평범한 사람임을 이런 데서 깨닫습니다.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고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말로 퇴고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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