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알고싶다]-윤동주 비석에 새겨진 비문을 알아보다...
윤동주 비석에 새겨진 글 (비문)
* 한문으로 쓴 것을 조선문식으로 훈독하면 다음과 같다.
아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대 명동 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면서 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무 이미 이루었으어도 그 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 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앗다.
그러나 어지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서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 때 나이 스물 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스일만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만했는데
춘풍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를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현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여 배우기를 즐긴데다 신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5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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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묘소 앞에 세워진 묘비입니다. 묘비 왼편에 보이듯이,
이 묘비는 1945년 6월 14일에 세워진 것입니다.
비석을 세운 윤동주의 동생들(일주, 광주)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요.
그런데 해방이 되기도 전에 세워진 이 묘비에 '詩人尹東柱之墓'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윤동주의 가족들은 이미 그때 윤동주가 뛰어난 시인임을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시집 한 권 펴내지 못하고 죽은 윤동주를 가족들은 미리 '시인'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또 그 옆에 해사(海史) 김석관(金錫觀) 선생의 이름이 보입니다.
해사 선생은 윤동주의 부친인 윤영석 선생의 친구분입니다.
두 분은 북경 유학도 함께 했고, 명동학교에서 같이 교편을 잡기도 했습니다.
해사 선생은 친구의 아들을 위해 비석에 새긴 글씨도 쓰고 비문도 지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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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되던 해 유월십사일 동생 일주, 광주 세우다
1945년 2월 16일 29세에 돌아가니
재주는 당대에 쓰일 만하고 시는 이 사회를 울릴 것이나
춘풍에 무정한 꽃 떨어지고 열매 없으니 안타깝도다
시인이라는 것이 그의 모든 것이다
정확한 시신은 찾지 못한듯 누이와 조카의 아쉬움이 돌로 남았다
돌아서며 다시 뒤돌아보는 시인의 묘소. 평안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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