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文人 지구촌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 말라르메
2017년 05월 24일 23시 51분  조회:6682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 1842. 3. 18, 파리
사망 1898. 9. 9, 프랑스 퐁텐블로 근처 발뱅
국적 프랑스

요약 말라르메는 프랑스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시인이며, 언어의 마술적 사용으로 당대 가장 저명한 프랑스 시인으로 널리 인정받았다.
가족들의 죽음을 겪으며, 시를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현실세계를 떠나 또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갈망을 표현했다.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 큰 영향을 받아 현실도피라는 주제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감각적이고 막연한 보들레르의 현실도피와는 달리,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 및 그 세계와 현실의 관계를 분석하고자 했고, 이는 <에로디아드>와 <목신의 오후>라는 2편의 극시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시인은 현실 너머의 공허 속에 존재하는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극도로 교묘하고 복잡하게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여생을 바쳤다.

 

폴 베를렌과 함께 상징주의 시운동을 창시·주도했다.

그가 안락하고 안정된 가정생활을 누린 것은 5년이라는 짧은 기간뿐이었으며, 그가 5세 되던 해인 1847년 8월 그의 어머니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에게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준 이 경험은 10년 뒤인 1857년 8월에 여동생 마리아가 죽고 1863년에 아버지가 죽었을 때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들은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초기부터 표현한 갈망, 즉 가혹한 현실세계를 떠나 또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갈망의 대부분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갈망이 오랫동안 그의 시의 주제로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어른이 된 뒤에도 비교적 가혹한 삶을 산 탓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1862년 후반과 1863년 전반을 영국 런던에서 보낸 뒤, 평생 동안 계속된 교사생활을 시작하여, 처음에는 시골학교(투르농·브장송·아비뇽)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파리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는 이 직업에는 타고난 소질을 갖고 있지 못했고, 이 일이 자신의 기질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그의 경제적 사정은 결코 풍족하지 않았고, 특히 1863년에 결혼하여 1864년에 딸 주느비에브가 태어나고 1871년에 아들 아나톨이 태어난 뒤로는 더욱 살림이 궁색해졌다. 그는 사태를 개선하기 위해 시간제로 부업을 했는데, 예를 들어 1874년말에는 몇 달 동안 잡지를 편집했고, 1877년에는 학교 교과서를 썼으며, 1880년에는 또다른 교과서를 번역했다.

그의 아들 아나톨은 6개월 동안 병을 앓다가 1879년 10월에 죽었다.

이런 시련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그는 시인으로서 꾸준히 발전했다. 1862년부터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한 초기 시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은 주로 현실도피라는 주제를 다루었는데, 그는 이미 이 주제에 사로잡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들레르의 현실도피는 본질적으로 감정에 호소하는 감각적인 종류의 것, 모든 '사치와 평온과 관능'뿐인 열대 섬이나 평화로운 풍경에 대한 막연한 꿈이었다. 반면에 그는 훨씬 더 지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고, 이상적인 세계의 본질 및 그 세계와 현실의 관계를 분석하겠다는 결심은 1864년에 쓰기 시작한 〈에로디아드 Hérodiade〉와 1865년에 쓰기 시작한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라는 2편의 극시에 반영되어 있다.

〈목신의 오후〉는 후에 클로드 드뷔시에게 영감을 주어 유명한 〈전주곡 Prélude〉을 작곡하게 했다(〈목신의 오후 전주곡〉).

1868년 무렵 그는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이 완전한 공허 속에 완벽한 형태의 본질이 숨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해 있었다. 시인이 할 일은 바로 그 본질을 감지하여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시인은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시의 형태로 바꾸어 기술하는 단순한 운문 작가 이상의 존재가 된다.

시인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그가 표현했듯이 독자들을 위해 '부재(不在)의 꽃' 즉 현실의 꽃밭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꽃을 마법으로 불러내는 진정한 신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존재하는 꽃을 묘사하는 대신, 이런 식으로 꽃의 본질을 명확하게 표현하고 꽃의 개념을 창조하려면 언어의 모든 자원을 극도로 교묘하고 복잡하게 이용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 '대작'(Grand Oeuvre) 또는 '책'(Le Livre)이라고 부른 작업에서 이 이론을 실천에 옮기는 데 여생을 바쳤다. 그러나 이 작업은 준비 단계에서 끝나버렸고, 지금껏 남아 있는 약간의 초안만 보고는 마지막 결과가 어떤 것이 되었을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미학).

그렇지만 주제나 언어 사용에 있어 자신이 계획한 '대작'과 관련되어 있는 시는 여러 편 완성했다.

그중에는 평생 동안 여러 번 주문을 받은 몇 편의 애가도 들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샤를 보들레르와 에드거 앨런 포, 리하르트 바그너, 테오필 고티에 및 폴 베를렌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였다. 그가 이런 작품을 써달라는 주문을 기꺼이 받아들였음이 틀림없다. 애가의 전통적 주제(사람은 죽었어도 작품을 통해 영원히 살아 있다는 것)는 시인인 그의 믿음, 즉 현실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시는 그 소멸을 초월하는 힘을 갖고 있다는 믿음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 자체에 대한 시를 써서, 자신의 목표와 그때까지 이룩한 성과를 재검토했다.

그는 '대작'과 관련된 이 두 부류의 작품 외에도 몇 편의 시를 썼는데, 이 시들은 이상적인 세계에 대한 그의 강박관념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역시 언어의 마술적 사용을 보여준다. 그는 그 부분에 이미 달인이 되어 있었다. 이 시들은 그가 1884~90년에 애인인 메리 로랑에게 바친 12편 정도의 소네트인데, 여기서 그는 현실에 대한 최고의 만족감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그는 생애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애인과의 관계가 만족스러웠을 뿐만 아니라, 1883년 베를렌이 발표한 〈저주받은 시인 Les Poètes maudits〉이라는 제목의 연재 평론에 실린 그에 대한 논평과 J.K. 위스망스가 장편소설 〈거꾸로 A rebours〉에서 그에게 아낌없이 퍼부은 칭찬 덕분에 당대의 가장 저명한 프랑스 시인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목요일 저녁마다 파리에 있는 그의 작은 아파트에서 열린 유명한 모임에는 당대의 유명 작가와 화가 및 음악가들이 참석했다. 이 모든 상황이 아마도 이상적인 세계 속에서 피난처를 찾아야 할 필요성을 경감했을 것이다. 죽기 전 해인 1897년에 발표된 〈주사위 던지기는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않을 것이다 Un Coup de dés jamais n'abolira le hasard, poème〉에서 그는 시에 진정한 창조 기능을 부여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생각 속에서 위안을 찾았다.

은퇴한 뒤 주로 거주했던 퐁텐블로 근처의 센 강 연안에 있는 발뱅이라는 마을의 오두막에서 1898년에 세상을 떠났다.
====================

 
 
스테판 말라르메

스테판 말라르메(Stephane Mallarmé ; 1842년 ~ 1898년)는 프랑스의 시인이다. 폴 베를렌아르튀르 랭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했다. 시인의 인상과 시적 언어 고유의 상징에 주목한 상징주의의 창시자로 간주된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 출신으로 에드거 앨런 포의 《갈가마귀》를 불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당대 파리의 문인들을 비롯 인상주의 화가들과 활발히 교류했으며, 폴 발레리앙드레 지드폴 클로델 등 20세기 전반 프랑스 문학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 시집으로는 《목신의 오후 (L'après-midi d'un faune)》(1877), 《주사위 던지기 (Un coup de dès)》(1897) 등이 있다.

////////////////////////////////
========================
////////////////////////////////
 

소네트 / 말라르메

 

순결하고 생기 넘치며 아름다운 오늘이야말로

그의 취한 날개를 한 번 쳐서

달아나지 못한 비상(飛翔)들의 투명한 얼음 덩어리가

흰 서리 아래 배회하는 이 얼어 붙고, 잊혀진 호수를 깨

  뜨려 줄 것인가!

 

지난 날의 한 백조는 회상한다. 그가 바로

황량한 겨울의 우수(憂愁)가 찬란할 때

자기가 살아야 할 곳을 노래하지 않았기에

화려한 생물이지만 이 구속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는 자임을.

 

그는 온 목을 흔들어 떨쳐 버릴 것이다.

공간이, 원치 않는 새에게 억지로 과하는 이 백색의 임

  종의 고뇌는,

그러나 그의 날개를 붙잡는 대지에 대한 공포는 없앨 수

  없다.

 

그는 순결한 빛이 이 장소에 부착시키는 환영(幻影)이

  되어

백조는 무익한 유배 속에서 그가 스스로 감싸는

경멸의 차가운 꿈을 안고 적연부동(寂然不動)이다.

 

* 백조는 그 아름다운 자태와 흰 빛깔로 예부터 많은 전설을 낳게 했다. 특히 그 새가 죽기 전에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이야기는 백조와 순수한 시인을 동일시하는 풍조가 생기게 하였다. 이 소네트는 백조를 빌어 말라르메 시인 자신의 고뇌와 심경을 읊은 것이다.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 중 언어와 음악성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시일 뿐 아니라 그의 시풍(詩風)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시의 하나로 꼽힌다.

 

 차가운 기운이 넘치는 청명한 겨울날, 우리 눈앞에는 흰 서리롸 얼음 덩어리가 배회하는 황량한 풍경이 펼쳐진다. 얼어 붙은 호수에는 백조 한 마리가 얼음에 갇혀 이를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린다. 날개를 한 번 쳐서 천상(天上)으로 향하고 싶으나 이 구속에서 빠저나갈 희망이 없다. 또한 이미 여러 번 실패를 하였다. 그에게는 순결하고 고독한 이상만이 있을 뿐 현세나 현실과의 타협이 없기 때문이다. 현세(공간)가 그에게 부과하는 종말의 고뇌는 뿌리칠 수 있으나 결국 백조는 얼음의 호수 속에 하나의 하얀 환상이 되어 부동의 자세로 조용히 죽어 간다. 그의 마음 속에 현실과 자신에 대한 부정(否定)과 멸시를 품은 채---

 

 이것이 이 시의 내용이며 개요이다. 의미상, 백조는 물론 시인 자신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것은 말라르메가 자주 시적 무력감에 빠졌고 백조가 얼음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는 것과 같이 그 자신도 전혀 시를 쓰지 못하던 시기가 있어 자주 고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순수하고 난삽한 시 정신은 백조와 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나 일반 독자나 사람에게는 이해되지 않고, 그의 생활도 지극히 평범하고 가난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자연히 무익한 유배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러한 유배를 죽어가는 백조와 같이 차가운 경멸감을 가지고 감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시를 지향하는 말라르메는 이 시로 위와 같은 정경(情景)이나 시인의 심경-사상-도덕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시인으로서 상징-암시-연상을 통한 추상적 이미지와 순수한 언어가 가지는 음악성을 배치-조화시킴으로써 미적 세계와 시적인 미를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이 때에 언어는 그가 가지는 뜻이나 문법적 기능보다 악보와 같이 음(音) 부호의 구실을 많이 한다고 보겠다. 따라서 이 시의 바른 감상을 위해서는 논리적 분석보다 음과 리듬의 연구가 더욱 필요하다.

 우선 이 "소네트"는 전 14행이 모두 (i)나 (ui)음으로 끝나는 데 주목하여야 한다. 또한 이 (i)음은 마지막 3행시절의 끝 두 절 안에서도 반복된다. 그런데 알베르 티보데니 그 외의 여러 비평가에 의하면 (i)음은 이 시에서 방대하고 단조로운 흰 공간과 추위를 환기시킨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 시를 장조(長調)의 소네트라고도 부른다. 그 외에도 첫쩨와 둘째 4행시절에서의 장중한 (v)음의 호응, 그리고 전체 시 위에 떠 있는 환상적인 신령스러운 기운, 추상적 언어에 의한 최후의 백조(Cygne)를 대문자로 써서 하늘의 백조 별자리를 환기시킨 점 등등으로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학의 표본을 이루고 있다.

 

창(窓) / 말라르메

 

음침한 병실과 허름한 흰색 커튼을 쫓아

향불 연기가 빈 벽에 지루하게 달린 큰 십자가상을 향해

올라가며 풍기는 빈사의 병자는 늙은 허리를 펴,

 

몸을 이끌고 썩은 육체를 따스하게 하려기보다

돌 위에 비치는 햇빛을 보기 위해 창가로 가

흰 수염과 여윈 얼굴의 뼈를

아름답고 맑은 햇살이 들이쬐는 유리창에 대고,

 

그리하여 열띠고 푸른 창공에 허기진 입으로

따스한 금빛 유리창에 오랫동안쓴 입술을 댐으로써 흔적을

  묻힌다.

마치 그의 입이 젊은 시절 그의 보물인양

옛날 한때 순결했던 한 살갗을 들이마시려 하였듯이,

 

도취 속에 그는 살았다. 임종시의 성유(聖油)의 두려움도

탕약(湯藥)도 벽시계도 피할 수 없는 병상도 기침도 잊고;

그리하여 저녁 노을이 기왓장 사이에서 피를 흘릴 때

그의 눈은 빛으로 가득 찬 지평선 위에,

 

백조같이 아름다운 황금색의 범선(帆船)들을 본다.

이들은 보라와 향기의 강 위에 떠서 추억 가득한 한가

  로움 속에

현란한 황갈색의 반짝이는 선(線)들을 본다.

이들은 보라와 향기의 강 위에 떠서 추억을 가득 실은 한가

  로움 속에

현란한 황갈색의 반짝이는 선(線)들을 흔들면서

잠자고 있었다.

 

이리하여 냉혹한 영혼의 소유자인 인간

단지 식욕만으로 먹는 행복 속에 뒹굴며

자기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는 아내에게 바치려고

이 오물(汚物)을 찾아 광분하는 인간이 끔찍해,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나는 생(生)에 등을 돌리는

모든 창문가에 매달린다. 그리하여

영원한 이슬에 씻기고 무한의 청결한 아침이 금빛

  으로 물들이는

창문 유리알 속에 축복받은 내가 비춰지고

 

내가 천사임을 본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유리창이 예술이기를, 신비이기를-- 그리하여

나는 내 꿈을 면류관으로 삼고 미(美)가 꽃피는

전생의 하늘에서 재생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어찌하랴! 속세가 주인임을: 이 고정 관념은

때로 안전한 내 은신처까지 쫓아와 나를 메스껍게 하고

어리석음의 불결한 구토는

나로 하여금 창공 앞에서 코를 막게 한다.

 

오오, 인생의 고뇌를 아는 나는

괴물에게 멸시받는 수정문(水晶門)을 깨뜨리고 들어가

털 없는 내 두 날개를 펴 달아날 방법이 있는 건가?

-영원한 시간 동안 떨어질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말라르메는 중등 학교 영어 교사 자격증을 얻기 위해 1862년 11월 부터 1년간 영국에 체재하였다. 이 시는 이 기간에 쓰여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그의 극히 초기의 것으로 그가 21세 때의 창작이다. 그는 이 시와 그 외 몇 편의 작품을 1863년 6월 영국 런던에서 그의 친구이자 후견인인 카잘리스에게 보냈다.

 그의 영국 체재는 불행한 것으로 그가 말한 바대로 고뇌-절망-가난에다 장차 그이 아내가 될 마리 제라르와의 사랑의 갈등이 뒤범벅이 된 시기였다. 또 그가 런던에 도착한 직후 발병하여 병상에 누운 일도 있다. 이 경험이 작품 "창"에 나타나는 음울한 병실과 빈사의 병자를 상상케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 시의 줄거리는 속세와 현실 세계를 혐오하는 병자가 병상에서 일어나 창가로 가 창문 유리를 통해 빛나고 아름다운 바깥 세계를 몽상한다. 이 때 유리창은 그를 병실(현실)에 가두어 두는 벽인 동시에 열려진 세계(이상)로 통하는 문이요 길의 상징이다. 병자의 욕망은 일격으로 유리창을 깨뜨리고 열린 세계로 자유로이 비상하려고 하나 결국 자신의 무력(無力)으로 갇혀진 세계의 운명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현실과 이상의 갈등과 자신의 무력감이라는 이 주제는 이후, "창공(1884)"과 위에 수록된 백조의 "소네트" 등으로 이어진다.

 

 

목신(牧神)의 오후(발췌) / 말라르메

 

 

목가

 

목신:

나는 이 요정들을 영원하게 하고 싶다.

                               그녀들의 연분홍 살빛은

너무 깨끗하여, 무성한 잠에 졸고 있는

대기 속을 떠돈다.

 

                         내가 사랑했던 것은 꿈이었나?

옛 밤에 축적된 내 의혹은

많은 작은 나뭇가지 같이 끝나 버렸는데 이들이

그대로 진정한 숲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오호라!

나 혼자만이 장미꽃들에 대한 상상적 유린을 승리로 돌리

   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그대가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여인들이란

그대의 상상적 감각이 원한 것의 형상이라면!

목신이여, 그 환상은 가장 정숙한 여인의 푸르고

찬 눈에서 나오듯 울고 있는 샘물 소리에서도 나온다

그러나 한숨에 싸인 다른 여인에 대해선 반대로

그대 가슴털에 스치는 낮의 더운 미풍에서라고 할 것인가?

아니다! 더위는 부동(不動)의 권태로운 무력감으로

살아나려는 신선한 아침의 목을 죄고

속삭이는 물이란 단지 화음(和音)으로 젖은 숲 위에

내리는 내 피리 소리뿐이요, 다만 한 줄기 바람이란

소리를 메마른 빗속으로 흩뜨려 버리기도 전에

피리의 두 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날라 버리는 숨결뿐,

이 바람은 주름 하나 없이 평평한 지평선상에

하늘로 되돌아가는 영감(靈感)의 눈에 보이는

평온하며 인공적인 숨결이다.

 

*

오, 태양빛과 겨루려는 내 헛된 욕망이 유린하는

섬광(閃光)의 꽃다발 아래 묵묵히 누운

고요한 늪의 시칠리아 기슭이여, 이야기하라

"나는 이 곳에서 숙련으로 길들인 빈 갈대를 꺾고 있었다.

이 때 포도 덩쿨을 샘들 위에 드리우고 있는

아득히 보이는 초록의 녹색 금빛 위에

쉬고 있는 생물(生物)의 흰 모습이 잔물결친다.

그리고 풀피리가 살아나는 느린 서곡(序曲)에

이 백조의 무리, 아니! 요정들의 무리는 혹은 달아나고

혹은 물 속으로 뛰어든다----"

 

              만물은 무력하게 황갈색 시간 속에 타고

'라'의 화음을 찾는 연주자가 바라던 너무나 많

    은 결혼이

어떠한 계략으로 일제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지

그 때 나는 고대의 빛 물결 아래 홀로 우뚝 서

나의 첫 정열에 눈뜨리라

백합이여! 순결함에 있어 나는 너희 모두들 중 하나이다.

 

저들의 입술이 퍼뜨리는 이 달콤하고 실없는 일

속삭여 사랑의 배신자를 안심시키는 이 입맞춤과는 달리

완전무결하게 순결한 내 가슴은

어느 고귀한 이(齒)가 물어 생긴 신비로운 상처의 흔적을

    증언한다;

그러나 좋다! 이러한 신비로운 흔적은 그의 마음을 들어 줄

    친구로

창공 아래서 굵은 두 개의 갈대를 골랐다.

갈대는 빰의 동요를 자신에게 돌려

긴 독주(獨奏)로 주위의 아름다움과

우리들의 소박한 노래를 거짓 혼동케 함으로써

주위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해 주었다고 꿈꾼다

또 갈대는 사랑의 노래를 힘껏 높여서

하나의 낭랑하고 공허하고 단조로운 선율이

내가 눈 감고 쫓는 등과 순결한 허리의 통상적인 환상을

사라져 흩어지게 한다고 꿈꾼다.

 

도주(挑走)의 악기여, 오 심술궂은 신(神)의 피리여.

네가 나를 기다리는 호수에서 다시 꽃피어나도록 하라;

나는 내 자랑스런 목소리로 여신들의 이야기를 오랫동안

   말하리라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의 그림으로

저들의 어두운 부분에서 또 다시 허리끈을 풀리라;

그리하여 내가 거짓으로 위장에 물리쳤던 미련을 떨쳐 버

   리기 위해

포도알들의 광명을 빨았을 때

웃으며 나는 그 빈 포도 송이를 여름 하늘에 쳐들고

빛나는 껍질 속에 내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도취를 갈망하며 저녁때까지 나는 그 속을 투사한다.

 

* 위의 시는 "목신의 오후"의 일부 발췌시이다. 이 시는 그가 일생 탐구한 절대시(絶對詩)가 어떤 것인지 보이기 위한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문학도들에게도 난해하고 신비로운 이 시의 감상은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이 시를 이해-감상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드뷔시의 교향시 "목신의 오후 서곡"을 듣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그러나 그동안 많은 학자-연구가-시인들의 계속적인 연구와 해설, 주석들로 인해 과거보다는 훨씬 시에 대한 이해도 분명해지고 시인의 의도도 밝혀졌으나 시에 대한 해석과 주석도 너무 구구하여 어떤 것이 정통적이며 정확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실정이다.

 이러한 난해-난삽의 평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말라르메의 시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또 그의 대표작으로 통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그가 새롭고 아름다운 시를 얻기 위해 주야로 악전고투하여 쓴 것이며, 10년 동안 닦은 각고(刻䇢)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독창적인 시가 그의 시를 늘 게재해 오던 <현대 파르나스 총서> 제 3집에 편짐위원회, 특히 아나톨 프랑스로부터 거부를 당하였다. 그 이유는 "만일 이 작품이 게재되면 독자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목신의 오후"는 그 다음 해 단행본으로 당대 유명한 화가 마네의 목판화를 곁들인 호화판으로 출판되어 다시금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그 후 마네에 이어 마티스-피카소 등의 화가들이 시를 주제로 그림을 그렸고, 1894년에는 말라르메 찬양가이던 드뷔시가 이 시를 주제로 한 교향시를 써 유명해졌다. 더우기 1912년에는 러시아의 무용가 니진스키가 발레로 안무-상연함으로써 이 시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이 목가는 18세기 프랑스 화단의 거장인 부셰의 그림에서, 또는 그의 선배 시인인 방빌의 한 연극에서 시상(詩想)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출발점, 대강의 줄거리에 지나지 않고 그 내용이나 분위기-상징은 전적으로 말라르메의 꿈과 환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이다. 그는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이 세상 것이 아니며 완전히 만들어 내야 한다. 꿈만이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이 시의 줄거리를 말한다면 대략 다음과 같다.

 전반부: 목신이 잠에서 깨어난다. 간밤의 정사(情事)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는 스스로 묻는다. 그가 본 못가에서 미역을 감던 이 요정들은 실제의 인물이던가 혹은 그가 꿈을 꾸었던가? 그의 기억 속에 두 요정이 떠오른다. 하나는 정숙하고 차갑고, 다른 하나는 한숨만 쉬는 요정이었다. 그는 이 요정들의 육체를 범했던가? 그러나 그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자연 가운데 혼자 있었다. 그는 피리를 만들어 불며 기억을 더듬는다. 혹은 그들의 존재를 의심도 하고 혹은 사실을 낱낱이 회상도 하며--- 그러나 그는 피리를 불음으로써 사랑의 신비로운 잇자국을 잊어버리고 영감(靈感)의 기쁨을 맛본다.

  참고로 여기 싣지 않은 후반부의 개요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후반부: 이 영감은 다시 목신이 욕정을 일으킨 장면을 상세히 보여 준다. 몸이 얽힌 두 요정이 잠들어 있다. 목신은 이 들을 하나씩 겁탈한다. 그러자 두 요정은 서로 떨어져 도망쳐 버린다. 허망에 빠진 그에게 또 다른 요정 비너스가 에트나 산에 나타난다. 그는 사랑의 여신을 포옹한다. 그러나 이 또한 환상으로 그에게서 사라진다. 이제 목신은 뜨거운 오후의 열기 속에 굴복하여 목마른 모래 위에서 다시 잠이 든다. 꿈에서 님프들을 다시 만나 보기를 바라면서---

 이 시에 대한 해설도 구구하다. 말라르메에 대한 명쾌한 해설가 피튀로는 이 시는 우아한 상징 속에 격렬한 에로티시즘을 감추고 있다고 했고, 어떤 학자는 이 시는 말라르메의 집념인 사랑과 시, 욕정과 영감, 꿈과 현실의 갈등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러나 말라르메는 시가 어떤 사상이나 도덕, 또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에서는 단지 목신의 전설을 빌어 감각적이며 우아하고 몽환적인 세계의 분위기를 나타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짙은 육체의 향기와 원색적인 이미지, 추상적이면서도 관능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음악과 회화와 시의 종합적인 공예 작품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시의 길에서 이 시만큼 멀리 간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스테판 말라르메(1842~1989): 말라르메는 문학 사조에서 상징파에 속하는 시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상징주의적인 시를 썼다기보다 순수시, 시의 이상적 형태를 위해 일생 생각하고 찾고 쓴, 시의 수도사(修道士)와 같은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의 양적으로 많지 않은(단 한 권의 시집) 시는 난해라는 장애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추앙자를 내었다. 그가 죽은 지 100여 년이 된 지금에도 계속 많은 추종자들이 배출되어 그의 작품을 연구-해석하고 그의 교리에 따라 시를 짓고 있다.

 

말라르메는 파리 태생으로 하급 공무원 가정 출신이다. 5살 때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재혼하여 일종의 고아와 같은 처지로 외할아버지-외할머니의 손 아래에서 자라났다. 학교 시절부터 심약한 그는 고독하였으며 야유하는 동료들을 피하여 혼자 몽상과 노트에 시를 쓰는 것을 좋아하였다. 성인이 된 말라르메는 시골 중학교 영어 교사가 되어 이후 일생 동안 계속(약 30년 동안) 주로 지방 중고등 학교의 영어 교사로 빛 없는 평범하고 가난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교사란 직업은 생활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의 참다운 생은 시에 대한 사색과 탐구와 각고로 일관했다.

 그가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경부터인데 때때로 산문시나 소네트를 문학 잡지 등에 기고하였다. 1866년 <현대 파르나스 파>라는 문학지에 10편을 써서 발표한 것이 문단의 주목을 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세상에 잘 알려진 "창문", "창공", "바다의 미풍" 등이 이 가운데 들어 있다. 이것은 그의 20대 때의 시이다. 그가 그의 온 정력을 다 쏟아 쓴 독창적인 시는 시극(詩劇) "에로디아드(1868)"와 "목신의 오후(1876)"이다. 이 2편의 시는 그가 오랜 시일에 결쳐 갈고 다듬은 것으로 특이한 사상과 정밀한 시적 언어를 구사한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두번째 작품은 후일 드뷔시가 같은 이름의 교향시 서곡을 써서 더욱 유명하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모두 극히 난해하여 전체적인 이해와 통일된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난해성과 과작(寡作)으로 인하여 그는 1884년경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시인이며 그의 작품은 경원시되어 왔다. 그의 유명한 "목신의 오후"는 원래 <파르나스 시집> 제 3집에 싣기로 되어 있었으나 심사 위원회에서 부결되어 게재되지 못하였다. 온화하고 누구에게도 친밀한 그도 이 일에는 격분하여 반대의 주동자 아나톨 프랑스에게 일생 원한을 가졌다 한다. 극소수의 시인들만이 그를 추앙했고 말라르메 자신 또한 대중적 명예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1884년 베를렌느가 그의 시인론 <저주받은 시인들> 가운데 말라르메의 시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게재하였고, 같은 해 위스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 말라르메의 시 "에로디아"에 압도되었다는 대목이 널리 전파되어 그의 이름이 갑자기 유명해지고 이어서 젊은 상징파 시인들이 그를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다.

 그는 1871년 가을 파리로 올라와 계속 영어 교사로 지내면서 로마 가(街)의 작은 그의 아파트에서 '화요회'를 주재했다. 그의 탁월하고 깊이 있는 시와 예술론에 힘입어 1880년대에는 당신의 유명한 시인과, 문인 라포르그, 레니에, 바래스, 클로델, 지드, 발레리 등이 참석-경청하여 그의 작품 못지않게 시단에 영향을 주었고 그의 이름을 높이었다. 그가 파리에 정주한 시기는 비교적 안정되고 평화로운 시기로 창작에 있어서도 일종의 휴식 시기였다. 생활을 위해서인지 <영어 단어집>-<영어의 아름다움> 등의 어학 서적과, 그리스 신화의 해설팜인 <고대의 신들>을 출판하였고, "최신 유행"이라는 유행 잡지의 편집을 맡는 등 상당히 세속적인 활동도 하였다.

 그러나 말라르메가 또다시 난해무쌍한 장시(長詩)를 쓰기 시작한 것은 1885년 "데 제생트를 위한 산문"을 발표한 이후이다. 데 제생트란 앞서 나온 위망스의 소설 <거꾸로>의 주인공이다. 이 시는 시인을 위한, 시인의 이상을 노래한 시의 본보기라고 하나 이 시의 해석은 난해한 일 중의 난해한 일로서 일반인에게는 접근이 단절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상징주의자와 그의 주석자(註釋者)들에게는 일종의 경서(經書)가 되었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산문이나 소네트 형식으로 시인의 입장과 사명감 같은 것을 내용으로 한 시를 많이 썼고 또한 보들레르-베를렌느 등의 시인, 바그너-샤반느와 같은 예술가, 바스코 다 가마와 같은 항해사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써서 그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이제 그의 이름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퍼지고 그의 작품도 세계 각국에서 번역-출판되었다. 그의 화요회는 유럽의 가장 유명한 문인 인사들이 참가하는 모임이 되었고 1896년에는 젊은 시인들에 의하여 베를렌느에 뒤이어 시왕(詩王)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전생애를 통하여 방랑가인 베를렌느나 반항아인 랭보와는 정반대의 성품으로 우아하고 절제 있고 다른 불행한 시인들을 따뜻하게 돌보아 주는(베를렌느도 보호 받은 사람 중 한 사람) 인정 있고 고귀한 성격의 소유자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시론에 있어서 그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도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1897년 1월 그의 예술론인 <여담>과 같은 해 5월에 국제적인 잡지, <코스모폴리스>에 시 "한번의 주사위가 우연을 없앨 수는 없으리라"가 발표되어 소수의 그의 동조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다음 해 9월 8일, 파리 근교 발랑에 있는 시골 집 서재에서 일하던 중 갑자기 후두 경련을 일으켜 다음 날 아침 절명했다. 그의 나의 56세였다.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2283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283 김파 / 최룡관 2015-03-27 1 4070
282 아방가르드/ 시론 2015-03-27 0 4002
281 심상운 시와 기호 2015-03-23 0 3893
280 문덕수 현대시론 2015-03-23 0 4411
279 강경애 문학비 2015-03-23 0 3746
278 김창걸 문학비 2015-03-23 0 4304
277 초현실주의와 앙드레 브르통 2015-03-21 0 4951
276 초현실주의 혁명 2015-03-21 0 3850
275 초현실주의 요약자료 2015-03-21 0 4122
274 첫수확 노래비 2015-03-18 0 3960
273 류연산 문학비 2015-03-18 0 4826
272 최룡관 시비 2015-03-18 0 3909
271 김문회, 리근영, 박화, 최룡관 시비 (화룡 선경대) 2015-03-18 0 4374
270 심련수 시비 2015-03-18 0 3880
269 김파 시비 2015-03-18 0 4570
268 정몽호 시비 2015-03-18 0 3928
267 김학철, 김사량 문학비 2015-03-18 0 5082
266 김학철 문학비 (도문 장안 룡가미원) 2015-03-18 0 4427
265 조룡남 시비 2015-03-18 0 4414
264 최문섭 시비 2015-03-18 0 4013
263 김례삼 시비 2015-03-18 0 4305
262 채택룡 시비 2015-03-18 0 3904
261 윤정석 시비 2015-03-18 0 4556
260 동시인 - 강려 2015-03-18 0 4023
259 정판룡 문학비 2015-03-18 0 4410
258 연변 문학비 순례 2015-03-18 0 4076
257 리태수 시비, 조룡남 시비 (룡정 일송정 내) 2015-03-17 0 4656
256 선구자의 노래은? 2015-03-17 0 4210
255 윤동주 시비 ㄴ 2015-03-17 0 3714
254 윤동주 <서시>의 새로운 해석 2015-03-17 0 4873
253 윤동주 시비 2015-03-17 0 3916
252 김성휘 시비 2015-03-17 0 4248
251 詩碑의 是非 2015-03-17 0 3911
250 리욱 시비 2015-03-17 0 4279
249 시평 절록/ 김관웅 2015-03-15 1 4898
248 "시지기 - 죽림"의 詩와 관련하여ㅡ(김관웅 평론) 2015-03-15 1 4451
247 시인 - 최룡국 2015-03-15 0 4283
246 시인 - 리련화 2015-03-15 0 4296
245 시조시인 - 최혜숙 2015-03-15 0 4355
244 시인 - 박룡철 2015-03-15 0 3971
‹처음  이전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