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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는 그 구조가 역시 탄탄하다...
2017년 07월 24일 03시 09분  조회:1952  추천:0  작성자: 죽림

좋은 시의 구조 


좋은 시는 역시 그 구조가 탄탄하다. 독자와 만나는 첫행이 우선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흡인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한 흡인력은 놀라움에서 발생된다. 놀라움이란 한마디로 말해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것이다. 독자가 전혀 예상치 못한, 그야말로 이럴 수가! 탄성이 나올 수 있는 첫머리라야 비로소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상투적인 도입부, 뻔히 아는 사실, 개인적인 감상, 시덥잖은 현실 비판, 관념적인 푸념 따위로 시작되는 작품은 그 구조상 도입부를 이어받아 증폭시킬 수 없는 취약점을 처음부터 부담으로 갖게 된다. 
좋은 도입부로 시작되면 그다음의 본문 내용도 순탄하게 확장이 되고 마무리를 자연스럽게 전환시켜 내용의 증폭을 이루게 된다. 이 경우는 하나의 작품이 곧 그 제작자인 시인의 개성과 맞물려 있으므로 별다른 요령이 있을 수 없다. 예시작품을 통해 한편 한편 직접 독자가 음미하기를 바란다. 

잠실 1단지에서 혜화동까지 
나를 태운 69번 버스는 
아파트 숲을 돌고 돌아 
자동차 숲을 달리고 

버스 뒷칸에 앉은 나는 
나의 집 
나의 직장 
나의 통장 
나의 입맛 
온통 나의 숲에 빠진다 

밤나무와 참나무 
엉겅퀴와 칡넝쿨이 엉켜 있는 숲 
그 건너편에 

박 철수씨 이 준태씨 
최 영자씨 김 정숙씨가 모여 사는 
우리 동네가 
있고 
숲은 
있는 그대로 그렇게 
밤나무는 여기 참나무는 저기 
이웃하며 사는데 

나무만 바라보는 나는 
허구헌날 이삿짐을 부린다 
당신을 외면한다 
내 언제 숲을 볼수 있겠나 
내 언제 숲이 될 수 있겠나 
-신술래 '숲' 

신술래의 시는 일상의 경험을 교묘하게 시에 녹여넣고 있다. 도입부부터 89번 버스노선을 삽입함으로써 자동차와 숲이라는 이질적인 단어가 한데 어우러진다.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결합인데도 거부감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조그만 놀라움으로 우리 앞에 다가선다. 또한 시의 
중반에 자연스럽게 이웃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사람들마저 밤나무나 참나무로 만들어 버리는 원숙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내가 왜 이 한밤에 빨래를 하는가- 
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쫓기듯이 

말이 말장난을 하다가 말을 놓치고 
말을 타고 
줄행랑을 놓는다. 
나는 사면에 벽을 쌓아 
하늘을 지붕 삼은 말의 집에 갇혀. 
벌떡 드러눕는다 

빨래가 밀리면 초조하다. 
말이 밀리면 불안하다. 
부걱부걱 거품내며 빨래를 하면 
말이 거품 속에 녹아 
물과 사귀고 
거품이 물에 녹아. 

달아난다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내가 왜 이 밤중에 빨래를 하는가- 
라고 생각한다. 

말의 때국물은 누구 차지인가- 
말의 깨끗한 입성은 정말 
누구 차지인가─ 
-전영주 '한밤에 쫓기듯 빨래를 하다가' 

전영주의 시는 앞의 신술래처럼 '빨래'라는 일상사를 한밤에 하는 것으로 바꾸어놓음으로써 호기심을 유발한다. 그러나 시인의 자문자답은 '말'이라는 관념으로 슬그머니 넘어간다. 독자의 기대를 끝까지 배반함으로써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나는 오른 팔에 청색 안료를 깊게 찔러 넣었다 바늘구멍에 물 
감 칠한 실을 꿰어 살을 떠 나갔다 내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괴로움이 있었다 내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미움이 있었다 내 
가 삶이라고 떠 나가는 곳에 몸부림이 있었다 
그것은 길 위에 길을 밟고 떠나는 순례자의 십자가 문신이었다 
십자가 속의 눈물이었다 수증기가 되어 사닥다리를 타고 끝없이 위 
로 올라가고 싶은 소망이었다 

그것은 푸른 들판을 질주하는 뿔 달린 손 저주의 문신이었다 
붉은 혓바닥 날름거리는 뱀이었다 어둠이었다 무엇이든 내던지고 
싶은 초특급 태풍 미어리얼 제19호였다 

스키타이 황금전 전시회 벽에 나란히 체중이 실려 걸려 있다 
4세기 오른쪽 팔 옆 20세기 나의 오른쪽 팔 
가랑잎 소소히 밟고 찾아온 박물관에서 
흐물흐물 흐물어진 내가 다시 태어나는 찰나 
아그배 열매는 더욱 붉어졌다 
-한리나 '문신' 

한리나는 문신이라는 조금은 낯선 소재를 도입하고 있다. 그 동기는 역으로 마무리에 보여주는 스키타이 전시회이다. 그럼으로써 문신에 관한 그의 상상력에 대해 타당성과 설득력을 얻는다. 다만 두 번째 연의 십자가와 눈물의 대비가 약하다는 게 흠이다. 

산 그늘에 숨어 살던 쑥부쟁이의 웃음소리 
빙벽에 달라 붙어 있다 

눈을 크게 뜬다 
눈이 활짝 열린다 
하반신이 썩어 시꺼멓게 흐르던 물줄기들 
은빛으로 아름다이 갇혀 있다 
상처 투성이의 위벽들도 비장하게 꿈틀댄다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다 용서하는구나) 
산비탈 저쪽에서 쫓겨온 바람들이 
꽝꽝 꽝 못을 친다 
못을 밟고 올라선다 
새 숨소리 손끝에 묻어 난다. 

물이면서 불, 불이면서 물인 
이 우주의 먼지 사이로 
빙벽에 달라붙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미세한 가루가 된 내 물소리. 
-하영 '빙벽 혹은 화엄' 

하영의 빙벽은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시다. 하반신이 썩은 물줄기라는 섬뜩한 표현과 상처투성이의 위벽들을 대비시킴으로써 그의 영혼이 겪고 있는 고통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흰 빛은 모든 빛의 죄를 용서하는구나'라는 잠언투를 활용함으로써 고통을 순명으로 바꾸는 화엄을 이루어내고 있다. 시예술이란 이래서 묘미가 있는 것이리라. 

마음 하나 바꾸면 되는 일이다. 베보자기 펼쳐 놓고 약탕관 옆 
에 놓고 다짐한다. 평생 허덕이는 몸살이는 네 탓도 아닌 일. 탕약 
을 밤낮으로 달여 보아도 마음 스스로 졸이는 일. 

내 지닌 것은 죄다 내어 주마. 그렇게 맛배기로 순하게 진국만 
술술 빼어주면 될 일. 허전한 껍데기. 히나리같이 가벼운 찌끼를 
아무 데나 뿌렸다. 고단히 썩어지면 될 일을 웬지 바둥댔다. 뭔지 
버텼다. 부둥켜 안고 뒹굴었다. 

(죄다 거두어 들이시지요. 흙의 색깔을 삭혀 새김질하시지요. 
짙은 유록색 푸성귀의 마른 열매도, 익모초의 쓰디쓴 원뿌리 저 싱 
싱함도 은행빛의 투명함 쌉쌀함도, 몹쓸 것 그 안에 죄다 우려져 
보이는데요. 
노여움의 빛 서러움의 빛깔을 진하게 거두고 저 깊은 속내 이 
야기 아구리를 봉한 채 뜨거운 옹관 속 거뜬히 건너 가시지요.) 

물기란 물기는 물에게 자리를 비워주는 일(베보자기를 뒤집어 
썼다.) 잣대로 목 질끈 동여매었다. 목줄을 조였다. 비틀었다. 

평생 얽히고 설킨 그물줄기를 갈가리 찢어 던졌다. 감탕을 쳤 
다. 텁텁한 떫은 삶이라니 어둠의 진흙떼기 그 바닥을 한 입에 한 
치씩 떼어내 꿀걱 받아 삼킨다. 
-노혜봉 '더늠' 

노혜봉은 '더늠'이라는 판소리 용어를 제목으로 차용함으로써 시의 오브제로 삼은 탕약이 실은 삶 그 자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는 시인의 의도대로 시를 읽을 수밖에 없는 자력에 끌리게 된다. 
시의 제목이 충분한 효과를 거둔 예이기도 하다. 하나의 오브제가 갖고 있는 정보는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필요한 것만 골라 쓰는 노혜봉의 기교는 범상한 것이 아니다. 

사랑니가 쑤셔올 땐 매운탕을 끓인다 
찬바람에 제 살을 다독이며 꼼지락대는 가을게를 사다 
얼큰하고 구수한 매운탕을 끓인다 

날씨가 추워지면 사랑니는 아려오고 
가을게는 살이 찌고 
뼛속 깊이 
관절 마디마디 샛바람소리 들리고 
방풍막이를 못한 가슴에선 창틀이 흔들리고 
닫아 걸고 잠그어도 걷잡을 수 없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는 흙바람 모래바람 

흐린 하늘은 눈발을 준비하고 

난 
펄펄 끓는 뜨거운 국물로 뚫린 가슴을 달래고 채우고 
덥혀준다 
-이섬 '가을게 사랑니' 

이섬의 시는 미소를 띄게 한다. 가을게로 끓이는 맛있는 매운탕도 시로 쓸 수 있다니...... 그리고 그것을 좋은 작품으로 매만져내다니 참으로 훌륭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시란 것은 따지고 보면 따질수록 어렵고 우리와 전혀 무관한 괴물로 느껴질 때가 많다. 그러나 이섬의 이런 시를 읽다보면 그런 우리의 무섬증은 괜한 현학이 아닐까. 

오늘도 봉은사 대웅전 뒤 몇 개의 계단을 오르면 주목숲 속 단 
정히 앉은 북극보전北極寶殿, 저녁 예불을 드리고 백팔 참회로 찬 
숨을 돌리며 나를 찬찬히 꺼내 보는 곳,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소 
리를 즐겨 듣는 곳, 더러 치밀어 오르는 홧덩이를 슬그머니 꺼내놓 
고 오는 곳, 오늘 이 곳에서 다른 날은 몰랐던 풍경 속에 매달린 
물고기, 산 속에 있다는 생각도 버리고 공중에 매달려 있다는 생각 
도 없이 그저 무심히 흔들릴 뿐 그 맑은 소리를 들으면 더더욱 날 
수 없는 물고기 몸이라는 생각마저 없이 무심히 매달려 있다 유정 
有情한 삶 속에 말 한마디 눈짓 하나에도 태산이 하나 왔다갔다하 
는 내 가슴속을 생각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그 나를 한동안 세워 
놓고. 
-안정환 '北極寶殿' 

안정환은 절과 절 중에서도 북극보전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제시함 으로써 기대감을 갖게 한 다음 절의 풍경에 매달려 있는 물고기를 오브제로 불러들임으로써 시의 효과를 높였다. 시에 소도구로 사용하는 오브제란 이렇듯 간단한 것이면서도 의미를 확대할 수 있는 것이 좋다. 시란 사실 시인의 관념이 아닌가. 그러나 그 원관념을 그대로 제시한다면 푸념으로 그칠 공산이 크다. 안정환은 불교적인 오브제를 갖다 씀으로써 자연스럽게 삶에 대한 그의 견해에 힘을 불어넣는다. 

물이 되어 떠나자면 
노래도 할 줄 알아야지 
춤도 출 줄 알아야지 
강이 되어 흐르자면 
모래성 허물 줄도 알아야지 
어지간한 자갈쯤 둥글릴 줄 알아야지 

기슭에 잔뜩 자라 있는 잔가지 덩굴 밑둥 베어내고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길을 내며 
바다에 닿아 
칼을 버리는 빗줄기들 
바다가 되어 지축을 떠받치자면 
기암절벽, 무수한 섬을 품을 줄 알아야지 
발이 푹푹 빠지는 땅끝 뻘밭에 
철썩, 끊임없이 끓는 혀를 올릴 줄 알아야지 

다가가 건드려 보면 
한때의 모래성 
하나의 섬으로 벗어 놓고 
단단해져만 가는 긴 잠의 껍질 속을 
빠져나가는 물방울 몇 개 보인다 
-곽정례 '새우' 

곽정례는 퍼스나를 숨겨놓은 채 새우를 오브제로 설정함으로써 새우와 관련된 분위기를 마음대로 갖다 쓸 수 있는 자유와 새우를 통해 하고 싶은 말, 새우에게 하려는 말이라는 이중적인 구조를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세밀하게 보면 자칫 차질이 일어날 것같은 과장된 상상력이 오히려 작품을 흥겹게 읽을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먼 바다 파도 싱싱한 날 
파도는 절지도 않아 
간이 잘 밴 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해 물에 풀리지 않아 
죽어도 썩지 않아 
섬들의 뿌리는 소금기둥일까 
어느 날 흩어져 섬들이 둥둥 떠다니지 않을까 

물좋은 배추 한 접 칼집 꽂아 
바다 한자락에 담그면 
밤새 출렁이머 골고루 절여 짐. 
바다가 들어박힌 배추김치는 어떤 맛일까 

뭍으로 처음 올라온 생명체는 제 몸이 마르자 
두 눈을 뜰 수 있었다. 

짭짤한 눈물. 눈물주머니는 바다로 향한 
마지막 그리움 
-고옥주 '즐거운 상상' 

고옥주의 시는 단아하면서도 그 깊이에 치열한 시정신을 갈무리하고 있다. 예컨대 '파도는 절지도 않아/간이 잘 밴 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해/물에 풀리지 않아'와 같은 시귀에서 보여주듯 사물의 정수를 한 눈에 꿰뚫어 보는 직관과 그것을 동시에 담담하게 연출해내는 능력이야말로 비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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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
―이용악(1914∼1971)

아들이 나오는 올 겨울엔 걸어서라도
청진으로 가리란다
높은 벽돌담 밑에 섰다가
세 해나 못 본 아들을 찾아오리란다

그 늙은인
암소 따라 조밭 저쪽에 사라지고
어느 길손이 밥 지은 자췬지
그슬린 돌 두어 개 시름겹다


시집 ‘오랑캐꽃’에는 이용악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쓴 시들이 수록돼 있다. ‘강가’는 그중 하나다. 1939년이면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해 전쟁이 태평양으로 확대된 때가 1941년 말. 그러니까 전쟁은 나라 밖에서 벌어졌지만 식민지에 대한 수탈이 극도로 치닫기 시작한 시기에 쓰인 시다.

노인은 암소한테 물을 먹이러 강가로 몰고 나왔을 테다. 그 김에 등짝이랑 뱃구레랑 엉덩이에 말라붙은 오물도 씻어주고 있었을 테다. 누가 먼저 말을 걸었는지, 어느새 노인은 초면의 화자에게 속에 담긴 말을 털어놓는다. (노인의 떳떳한 발설로 짐작건대)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 갔을 아들, 청진까지 갔다 올 차비를 마련하기 힘겨운 가난. 갈 때는 혼자 겨울 삭풍을 헤치고 걷겠지만, 아들과 함께 돌아올 때의 차비는 꽁꽁 여퉈 놓으셨으리라.

 

 

조밭은 어쩐지 논이나 밀밭보다 풍요롭지 않게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암소도 비쩍 말랐을 것 같다. 시 전편에 쓸쓸한 가난과 시름겨운 유랑의 기운이 자욱하다. 어느 길손인가 이 적빈한 마을의 강가에서 돌 두어 개 모아 불 지피고 밥을 지어 먹고 지나갔구나. 노인도 청진 가는 길에 어느 길섶에서 밥을 지어 드시게 될 테다. 화자도 정처 없이 떠도는 중이었을 테다. 그런데 시 속의 ‘그 늙은이’는 어머니일까, 아버지일까? 어머니일 것 같다. 이 늙은이의 결기는 간절한 모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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