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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봄에 관한 시 모음
봄 김기택
바람 속에 아직도 차가운 발톱이 남아있는 3월
양지쪽에 누워있던 고양이가 네 발을 모두 땅에 대고
햇볕에 살짝 녹은 몸을 쭉 늘여 기지개를 한다
힘껏 앞으로 뻗은 앞다리
앞다리를 팽팽하게 잡아 당기는 뒷다리
그 사이에서 활처럼 땅을 향해 가늘게 휘어지는 허리
고양이 부드러운 등을 핥으며 순해지는 바람
새순 돋는 가지를 활짝 벌리고
바람에 가파르게 휘어지는 우두둑 우두둑 늘어나는 나무들
봄 김광섭
얼음을 등에 지고 가는 듯
봄은 멀다
먼저 든 햇빛에
개나리 보실보실 피어서
처음 노란 빛에 정이 들었다
차츰 지붕이 겨울 짐을 부릴 때도 되고
집 사이에 쌓인 울타리를 헐 때도 된다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가장 먼 데서부터 시작할 때도 온다
그래서 봄은 사랑의 계절
모든 거리가 풀리면서
멀리 간 것이 다 돌아온다
서운하게 갈라진 것까지도 돌아온다
모든 처음이 그 근원에서 돌아선다
나무는 나무로
꽃은 꽃으로
버들강아지는 버들가지로
사랑은 사람에게로
산은 산으로
죽은 것과 산 것이 서로 돌아서서
그 근원에서 상견례를 이룬다
꽃은 짧은 가을 해에
어디쯤 갔다가
노루꼬리만큼
길어지는 봄해를 따라
몇 천리나 와서
오늘의 어느 주변에서
찬란한 꽃밭을 이루는가
다락에서 묵은 빨래뭉치도 풀려서
봄빛을 따라나와
산골짜기에서 겨울 산 뼈를 씻으며
졸졸 흐르는 시냇가로 간다
봄 반칠환
저 요리사의 솜씨 좀 보게
누가 저걸 냉동 재룐줄 알겠나
푸릇푸릇한 저 싹도
울긋불긋한 저 꽃도
꽝꽝 언 냉장고에서 꺼낸 것이라네
아른아른 김조차 나지 않는가
봄 서정주
복사꽃 피고, 복사꽃 지고
뱀이 눈뜨고
초록색 비 무처오는 하늬바람우에 혼령있는 하늘이여
피가 잘 도라...아무 병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 일좀 슬픈 일좀, 있어야겠다
봄 오탁번
소쩍새는
밤 이슥토록 울고
조롱조롱 금낭화
붉은 꽃잎이 짙다
너비바위 틈에 피어난
개미딸기
오종종 오종종
노란 꽃잎이 여리다
하늘 높이 뜬
솔개 눈씨에
참새도 오목눈이도
찔레넝쿨 사이로 숨는다
하느님이
수염에 묻은 황사를 턴다
붕어들이 알 낳느라
몸을 떨며 피 흘린다
봄날 생각
곽진구
저 조팝꽃 좀 봐라
봄이 왔다고
머슴 똥 싸듯이 흐드러지게
잔치 날 흰쌀밥 꽃 같은 꽃을 울타리에
고봉으로 쏟아내고 있다
저 꽃의 피는 모양새를 보면
아이 한 둘쯤을 낳고
사내의 성질도 적당히 다룰 줄 알고
인생의 아픈 때가 비껴가지 못해 살짝 살짝 껴 있는,
그래서 뭔가를 생각할 적마다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몰래 흘린 눈물이 한 됫박쯤 되는,
아직은 큰집 노릇을 톡톡히 하는
마흔 살 짜리 우리 집 질부(姪婦)의 눈빛 같기도 하다
나는 오늘 마루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저 꽃 앞에서 무수히 망설였을 홀로 사는 형수를 생각한다
자식 때문에 저 꽃울타리를 함부로 넘지 못하고
머뭇머뭇 돌아섰을
그 발걸음을 생각한다
봄 이성부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 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듣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 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봄 유안진
저 쉬임없이 구르는 윤회의 수레바퀴 잠시 멈춘 자리
이승에서, 하 그리도 많은 어여쁨에 흘리어 스스로 발길
내려 놓은 여자, 그 무슨 간절한 염원 하나 있어
내 이제 사람으로 태어 났음이랴
머언 산 바윗등에 어리운 보랏빛, 돌각담을 기어오르는 봄 햇살
춘설을 쓰고 선 마른 갈대대궁
그 깃에 부는 살 떨리는 휘파람
얼음 낀 무논에 알을 까는 개구리
실뱀의 하품소리, 홀로 찾아든 남녘 제비 한 마리
선머슴의 지게 우에 꽂혀 앉은 진달래꽃...
처음 나는 이 많은 신비에 넋을 잃었으나
그럼에도 자리잡지 못하는 내 그리움의 방황 아지랭이야, 어쩔 셈이냐
나는 아직 춥고 을씨년스런 움집에서 따순 손길이 기다려지니
속눈썹을 적시는 가랑비 주렴 너머
딱 한번 눈 맞춘 볼이 붉은 소년
내 너랑 첫눈 맞아, 숨바꼭질 노니는 산골짜기에는
뻐꾹뻐꾹 사랑노래 자지러지고
잠든 가지마다 깨어나며 빠져드는 어리어리 어지럼증, 산 아래
돌부처도 덩달아 어깨춤 추는,
시방 세상은 첫사랑 앓는 분홍빛 봄
봄 윤동주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도르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三冬을 참어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봄 정지용
외ㅅ가마귀 울며 나른 알로
허울한 돌기둥 넷이 스고
이끼 흔적 푸르른데
황혼이 붉게 물든다
거북 등 솟아오른 다리
길기도 한 다리
바람이 수면에 옴기니
휘이 비껴 쓸리다
<동방평론> 1호 1932년 4월호
봄 천양희
그 자리가 비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나 혼자 있어도 밖엔 봄이 충분하였다
충분한 봄으로 그 시간을 채웠다
<한 사람을 나보다 더 사랑한 적 있는가?> 작가.2003년
라일락
봄 홉킨스
봄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다
이름 없는 풀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파릇파릇 아름답게 자라고
티티새의 알은 낮은 하늘 갈아 티티새 자신은
메아리치는 숲을 노래로 울리며 귓전은 때려
그 소리를 들으며 벼락을 맞은 듯하고
윤기 도는 배나무 잎사귀와 꽃잎은
하늘을 닦아 내어 푸르름이 다가오는 풍요로움
뛰노는 어린 양들은 깡충 거리나니
이 생기 넘치는 활력과 기쁨은 무엇이던가
에덴 동산에서 비롯된 대지의 감미로운 흐름이니
그것을 차지하여라, 소유하거라, 그것이 죄 때문에
싫어지고 흐려지고 더러워지기 전에, 주 그리스도여
소년 소녀가 지닌 바 티 없는 마음과 5월의 날을
동정녀의 아들이여
당신이 선택하시고
그 무엇보다도 값어치 있는 것을 가지게 하라
Gerard Hopkins(1844-1889) 영국의 성직자이며 시인
봄 황인숙
온종일 비는 쟁여논 말씀을 풀고
나무들의 귀는 물이 오른다
나무들은 전신이 귀가 되어
채 발음되지 않은
자음의 잔뿌리도 놓치지 않는다
발가락 사이에서 졸졸거리며 작은 개울은
이파리 끝에서 떨어질 이응을 기다리고
각질들은 세례수를 부풀어
기쁘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나무로부터 한 발 물러나
고막이 터질 듯한 고요함 속에서
작은 거품들이 눈을 트는 것을 본다
첫 뻐꾸기 젖은 몸을 털고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고흐 ㅡ 복숭아꽃
봄날 김종길
골목의 흰 목련 꽃송이
수틀 위에서처럼
눈을 뜨고
한나절 젖빛 운애 속에
몸풀고 돌아누운
북한사
번데기처럼 나온 애벌레인가
나도 꿈틀거린다
눈을 뜬다
봄날 김기택
할머니들이 아파트 앞에 모여 햇볕을 쪼이고 있다
굵은 주름 가는 주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햇볕을 채워넣고 있다
겨우내 얼었던 뼈와 관절들 다 녹도록
온 몸을 노곤노곤하게 지지고 있다
마른버짐 사이로 아지랑이 피어오를 것 같고
잘만 하면 한순간 뽀오얀 젖살도 오를 것 같다
할머니들은 마음을 저수지마냥 넓게 벌려
한 철 폭우처럼 쏟아지는 빛을 양껏 받는다
미처 몸에 스며들지 못한 빛이 흘러 넘쳐
할머니들 모두 눈부시다
아침부터 끈질기게 추근대던 봄볕에 못이겨
나무마다 푸른 망울들이 터지고
할머니들은 사방으로 바삐 눈을 흘긴다
할머니 주름살들이 일제히 웃는다
오오 얼마 만에 환해져 보는가
일생에 이렇게 환한 날이 며칠이나 되겠는가
눈 앞에는 햇빛이 종일 반짝거리며 떠다니고
환한 빛에 한나절 한눈을 팔다가
깜빡 졸았던가 한평생이 그새 또 지나갔던가
할머니들은 가끔 눈을 비빈다
봄날 김용택
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 잡고
매화꽃 보러 간 줄 알아라
봄날 송수권
앵두꽃이 피었다 일러라 살구꽃이 피었다 일러라
또 복사꽃이 피었다 일러라
할머니 마루 끝에 나앉아 무연히 앞산을 보신다
등이 간지러운지 자꾸만 등을 긁어신다
올해는 철이 일들었나 보다라고 말하는 사이
그 앞산에도 진달래꽃 분홍 불이 붙었다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죽한 뱃고동이 운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울고 야야, 쭈꾸미 왱병 ㅡ 식초병
배가 들었구나 , 할머니 쩝쩝 입맛을 다신다
빙초산 맛이 입에 들척지근하고 새콤한 것이
달기가 햇뻐꾸기 소리 같다
아버지 주꾸미 한 뭇을 사오셨다 어머니 고추장
된장을 버물 또 부뚜막의 왱병을 기울이신다
주꾸미 대가리를 씹을 때마다 톡톡 알이 터지면서
아삭아삭 씹히는 맛, 아버지 하신 말씀
니 할매는 이 맛을 두고 어찌 갔을거나
환장한 환장한 봄날이었다
집집마다 부뚜막에선 왱병이 오도방정을 떨고
앞대 개포가에선
또 나즉한 뱃고동이 울었다
봄날 송찬호
봄날 우리는 돼지를 몰고 냇가에 가기로 했었네
아니라네 그 돼지 발병을 했다 해서
자기의 엉덩짝살 몇 근 베어 보낸다 했네
우린 냇가에 철판을 걸고 고기를 얹어 놓았네
뜨거운 철판 위에 봄볕이 지글거렸네 정말 봄이었네
내를 건너 하얀 무명 단장의 나비가 너울거리며 찾아왔데
그날따라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더없이 향기로왔네
이제, 우리들 나이 불혹이 됐네 젊은 시절은 갔네
눈을 씻지만, 책이 어두워 보인다네
술도 탁해졌다네
이제 젊은 시절은 갔네
한때는 문자로 세상을 일으키려 한 적 있었네
아직도 마비되지 않고 있는 건 흐르는 저 냇물 뿐이네
아무려면, 이 구수한 고기 냄새에 콧병이나 고치고 갔으면 좋겠네
아직 더 올 사람이 있는가, 저 나비
십리 밖 복사꽃 마을 친구 부르러 가 아직 소식이 없네
냇물에 지는 복사꽃 사태가 그 소식이네
봄날 우린 냇가에 갔었네, 그날 왁자지껄
돼지 멱따는 소리 들리지 않았네
복사꽃 흐르는 물에 술잔만 띄우고 돌와왔데
봄날 신경림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이
늙은 소나무 아래서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판다
벚꽃잎이 날아와 앉고
저녁놀 비낀 냇물에서 처녀들
벌겋게 단 볼을 식히고 있다
벚꽃 무더기를 비집으며
늙은 소나무 가지 사이로
하얀 달이 뜨고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이 딸이
빈대떡을 굽고 소주를 파는
삶의 마지막 고살
북한산 어귀
온 산에 풋내 가득한 봄날
처녀들 웃음소리 가득한 봄날
봄날 심재휘
새들이 깃털 속의 바람을 풀어내면
먼 바다에서는 배들이 풍랑에 길을 잃고는 하였다
오전 11시의 봄날이 이렇게 무사히 지나가는 것은
저 작은 새들이 바람을 품으며 날기 때문인 걸
적막한 개나리 꽃 그늘이 말해줘서 알았다
이런 때에 나는 상오의 낮달보다도 스스로
민들레인 그 꽃보다도 못하였다
나를 등지고 앉은 그 풍경에
한엇이 귀를 기울이고 있는
나는 바보 같았다
봄날 이동순(1950 - ) 김천.
꽃은 피었다가
왜 이다지 속절없이 지고 마는가
봄은 불현듯이 왔다가
왜 이다지 자취없이 사라져버리는가
내 사랑하는 것들도
언젠가는 모두 이렇게 다 떠나고
끝까지 내 곁에 남아 나를 호젓이 지키고 있는 것은
다만 빈 그림자뿐이려니
그림자여
너는 무슨 인연 그리도 깊어
나를 놓지 못하는가
이 봄날엔 왜 그저
모든 것이 아쉬웁고 허전하고 쓸쓸한가
만나는 것마다
왜 마냥 서럽고 애틋한가
봄날 이수지
기타를 치고 싶었다 日語도 배우고 싶었다
잘래희망 란에는 언제나 디자이너라고 적어넣었다
우리집 가장은 소주병과 약봉지였다
삼청교육대에서 씀바귀 같은 절망을 키우고 돌아온 아버지는
어느 날 소주병이 되어 세상 밖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정부 보조금으로는 뇌종양에 걸린 엄마의 약값조차 보조하기 힘들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빨아 널은 체육복, 하얀 체육복이 벌써 말라기네 ...
봄날이 오긴 왔네, 팔락팔락 ...자꾸 잠이 오네. 운동화는 오래 전에 닳아버렸네...
돈꾸러 갔던 엄마가 때가 훨씬 지나 돌아왔을때
전기밥솥엔 저녁밥이 그득했다
밥은 식어 있고, 전기 코드가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불 꺼진 방문 앞에 한참을 목발처럼 서 있었다
피자마자 시들은 꽃무리처럼 누렇게 흔들리는 저녁밤
아무도 밥을 퍼먹지 못한 그 밤
꽃잎 같은 밥알들이 흩어지며 소리 없이 강물로 흘러 들어갔다
강바닥에 강물 위에 밥주걱처럼 꽂혀 있는 달빛
바람이 불때마다 수면 위로 무심히 퍼올려지는 밥 냄새 ...같은 봄꽃들
아무리 퍼먹어도 퍼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봄밤
벚꽃이 훌훌
- 나태주
벚꽃이 훌훌 옷을 벗고 있었다
나 오기 기다리다 지쳐서 끝내
그 눈붓니 연분홍빛 웨딩드레스 벗어던지고
연초록빛 새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봄이 올 때까지는 - 안도현
보고 싶어도
꾹 참기로 한다.
저 얼음장 위에 던져놓은 돌이
강 밑바닥에 닿을 때까지는
봄은 고양이로다 -이장희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의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 봄은 전쟁처럼
산천은 지뢰밭인가
봄이 밟고 간 땅마다 온통
지뢰의 폭발로 수라장이다.
대지를 뚫고 솟아오른, 푸르고 붉은
꽃과 풀과 나무의 여린 새싹들.
전선엔 하얀 연기 피어오르고
아지랑이 손짓을 신호로
은폐 중인 다람쥐, 너구리, 고슴도치, 꽃뱀---
일제히 참호를 뛰쳐나온다.
한 치의 땅, 한 뼘의 하늘을 점령하기 위한
격돌,
그 무참한 생존을 위하여
봄은 잠깐의 휴전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의 포문을 연다.
(오세영·시인, 1942-)
+ 봄을 위하여
겨울만 되면
나는 언제나
봄을 기다리며 산다.
입춘도 지났으니
이젠 봄기운이 화사하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도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다'고 했는데
내가 어찌 이 말을 잊으랴?
봄이 오면
생기가 돋아나고
기운이 찬다.
봄이여 빨리 오라.
(천상병·시인, 1930-1993)
+ 이른봄의 서정
눈 속에서도
봄의 씨앗은 움트고
얼음장 속에서도
맑은 물은 흐르나니
마른 나무껍질 속에서도
수액은 흐르고
하나님의 역사는
죽음 속에서도
생명을 건져 올리느니
시린 겨울밤에도
사랑의 운동은 계속되거늘
인생은
겨울을 참아내어
봄 강물에 배를 다시 띄우는 일
갈 길은 멀고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렸어도
겨울이 지나면
봄은 오게 되어 있나니
서러워 마라
봄은
겨울을 인내한 자의 것이거늘
(김소엽·시인, 1944-)
+ 그 해의 봄
새벽에 나와
밤에 기어들고
때때로 외지에 나가
내 전심전력 쏟으며
영토를 넓히고 있을 때
울안의 나무란 나무
풀씨란 풀씨 모두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느니
바람 불면 손을 흔들거나
눈 쌓이면 어깨를 늘어뜨려
평온을 위장한 채
거사를 획책하고 있었으니
그때 일신상의 화급한 문제로
집을 비웠다가 돌아온 날 정오
울안에서 일제히 함성이 터졌느니
철쭉꽃 애기사과꽃 새싹이란 새싹
모두가 일제히 발을 굴러
그 해의 봄은
둑 터진 강물이었느니
(주근옥·시인, 충남 논산 출생)
+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조병화·시인, 1921-2003)
+ 봄 주의보
보드라운 손길이 쓰다듬고
응축된 눈물이 대지를 적셔야만
새순이 솟아나온다
화사한 능선에 얼핏 현혹되어
섣부르게 치마 올리고
옷고름 풀지는 말았으면
가슴을 열고
오롯한 씨앗을 품어주는 것은
투명한 햇살과 초록숨결뿐이다
(임영준·시인, 부산 출생)
+ 봄 편지
하얀 민들레 꽃씨 속에
바람으로 숨어서 오렴
이름 없는 풀섶에서
잔기침하는 들꽃으로 오렴
눈 덮인 강 밑을
흐르는 물로 오렴
부리 고운 연둣빛 산새의
노래와 함께 오렴
해마다 내 가슴에
보이지 않게 살아오는 봄
진달래 꽃망울처럼
아프게 부어오른 그리움
말없이 터뜨리며
나에게 오렴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꽃 먼저 와서
횡단보도 신호들이 파란불로 바뀔 동안
도둑고양이 한 마리 어슬렁어슬렁 도로를 질러갈 동안
나 잠시 한눈팔 동안,
꽃 먼저 피고 말았다
쥐똥나무 울타리에는 개나리꽃이
탱자나무에는 살구꽃이
민들레 톱니진 잎겨드랑이에는 오랑캐꽃이
하얗게 붉게 샛노랗게, 뒤죽박죽 앞뒤 없이 꽃피고 말았다
이 환한 봄날
세상천지 난만하게
꽃들이 먼저 와서, 피고 말았다
(류인서·시인, 경북 영천 출생)
+ 새봄·3
겨우내
외로웠지요
새봄이 와
풀과 말하고
새순과 얘기하며
외로움이란 없다고
그래 흙도 물도 공기도 바람도
모두 다 형제라고
형제보다 더 높은
어른이라고
그리 생각하게 되었지요
마음 편해졌어요
축복처럼
새가 머리 위에서 노래합니다.
(김지하·시인, 1941-)
+ 저 못된 것들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이재무·시인, 1958-)
+ 어느 봄날
청소부 김씨
길을 쓸다가
간밤 떨어져내린 꽃잎 쓸다가
우두커니 서 있다
빗자루 세워두고, 빗자루처럼,
제 몸에 화르르 꽃물 드는 줄도 모르고
불타는 영산홍에 취해서 취해서
그가 쓸어낼 수 있는 건
바람보다도 적다
(나희덕·시인, 1966-)
+ 봄볕, 환한
교양학관 뒷편 잔디밭 꽃그늘에서
재잘거림이 나뭇잎 깨워 연푸른 빛을 띄게 한다거나
덩그라니 큰 사무실에서 컵라면 먹으며
창 밖 분수대로 외로움을 끌어올린다거나
중앙시장 먹자골목 한 줌 들어오는
하늘빛에 아줌마들 욕지거리 더 높아진다거나
바람이 바람이게
그늘이 그늘이게
눈물이 눈물이게 할 수 있는
저 부끄러운 봄의 속살
우리를 하나로 묶는 무언의 힘
(김형진·시인, 1949-)
+ 순서
맨 처음 마당가에
매화가
혼자서 꽃을 피우더니
마을회관 앞에서
산수유나무가
노란 기침을 해댄다
그 다음에는
밭둑의
조팝나무가
튀밥처럼 하얀
꽃을 피우고
그 다음에는
뒷집 우물가
앵두나무가
도란도란 이야기하듯
피어나고
그 다음에는
재 너머 사과밭
사과나무가
따복따복 꽃을
피우는가 싶더니
사과밭 울타리
탱자꽃이
나도 질세라, 핀다
한 번도
꽃 피는 순서
어긴 적 없이
펑펑,
팡팡,
봄꽃은 핀다
(안도현·시인, 1961-)
+ 봄이 오는 소리
가지마다 봄기운이 앉았습니다.
아직은 그 가지에서
어느 꽃이 머물다 갈까 짐작만 할 뿐
햇살 돋으면
어떻게 웃고 있을지
빗방울 머금으면
어떻게 울고 있을지
얼마나 머물지
어느 꽃잎에 사랑 고백을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둠 내리는 시간에도
새로움 여는 봄의 발자국 소리에
마음은 아지랑이처럼 들떠만 있습니다
돌...돌...돌...
얼음 밑으로 흐르는 냇가
보송보송 솜털 난 버들강아지
이 봄에 제일 먼저 찾아 왔습니다
(최원정·시인, 1958-)
+ 약속의 봄
키를 조금 낮추고
아니, 쪼그리고 앉아서 보면
봄이 왔네 봄.
논둑 길 돌아 밭으로 가는 길가로
벌써 봄이 와 있네.
우리 아베 쉰 머리카락 마냥
듬성듬성하게 헝클어진 빛 바랜
풀들 속에서
쑥이랑 냉이 씀바귀 잡풀들이
겨우내 땅속에서 쓴 물 빨아먹고
비죽비죽 돋아나네, 이 어린 것.
살아있었노라고 눈 틔우네
봄은 참으로 고마운 약속
씨앗을 품고 온몸으로 겨울을 견뎌낸 대지와
거짓말처럼 씨앗이 밀어 올려낸 약속
보면 볼수록 눈물겨운 약속
대지가 어지러운 열로 몸이 붓기 시작하는 이유를
내 이제 알 것도 같네.
(성낙일·시인, 1973-)
+ 참 좋은 봄날
실비는 오지요.
꽃밭은 젖지요.
이제 보니 달팽이 한 마리가
꽃밭에 심은 옥수수 줄기를 타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어갑니다. 기어가서 마침내
오를 수 있을 만큼 올라간 것일까요
이제 그만 하는 걸까요. 그쯤에서
알맞게 휘어진 잎사귀 하나
초록빛 꽃 붙들고 앉아
하루 종일 있을 모양입니다.
제 한 몸
잠적하기에는
참 좋은 봄날입니다.
(구종현·시인, 1943-)
+ 씨앗 하나가
꼼틀 꼼틀 태기가 있었나보다
햇볕의 담금질로 해산할 모양이다
어둠을 꼬박 지새운 길에서
산통 때문에 이리저리 몸을 가누고 있다
은하수 같은 꿈을 왈칵왈칵 쏟아 놓고
꽃밭인 듯 가슴 졸인 머리를 빠끔히 내민다
해산의 꿈들이 어둠을 헤엄쳐와
줄줄이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탄생
꽃잎 하나 살며시 열고 햇살이 내려와 앉는다
가슴으로 빨려들 듯 봄이 반짝인다
(문근영·시인, 대구 출생)
+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봄이 꽃나무를 열어젖힌 게 아니라
두근거리는 가슴이 봄을 열어젖혔구나
봄바람 불고 또 불어도
삭정이 가슴에서 꽃을 꺼낼 수 없는 건
두근거림이 없기 때문
두근거려 보니 알겠다
(반칠환·시인, 1964)
+ 봄날
얼음장 밑으로
시냇물이 실뱀처럼 스르르
몸을 푼다
버들강아지
금빛 은빛 햇살 모아
보송보송 하얀 솜털 고른다
새싹이
목 길게 빼고 두리번두리번
늘어나는 가족 얼굴 익힌다
대문 옆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개나리 으스스 추운지
햇볕 치맛자락을 끌어다 덮는다
(조미선·시인, 경남 진주 출생)
+ 아름다운 곳
봄이라고 해서 사실은
새로 난 것 한 가지도 없다
어디인가 깊고 먼 곳을 다녀온
모두가 낯익은 작년 것들이다
우리가 날마다 작고 슬픈 밥솥에다
쌀을 씻어 헹구고 있는 사이
보아라, 죽어서 땅에 떨어진
저 가느다란 풀잎에
푸르고 생생한 기적이 돌아왔다
창백한 고목나무에도
일제히 눈펄 같은 벚꽃들이 피었다
누구의 손이 쓰다듬었을까
어디를 다녀와야 다시 봄이 될까
나도 그곳에 한 번 다녀오고 싶다
(문정희·시인, 1947-)
+ 우리나라 꽃들엔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명수·시인, 1945-)
+ 봄에 소박하게 질문하다
몸 풀린 청량천 냇가 살가운 미풍 아래
수북해서 푸근한 연둣빛 미나릿단 위에
은실삼단 햇살다발 소복하니 얹혀 있고
방울방울 공기의 해맑은 기포들
바라보는 눈자위에서 자글자글 터진다
냇물에 발 담근 채 봇둑에 퍼질러앉은 아낙 셋
미나리를 냇물에 씻는 분주한 손들
너희에게 묻고 싶다, 다만,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산자락 비탈에 한 무더기 조릿대
칼바람도 아주 잘 견뎠노라 자랑하듯
햇살에 반짝이며 글썽이는 잎, 잎들
너희들에게도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폭설과 혹한, 칼바람 따윈 잊을 만하다고
꽃샘추위며 황사바람까지 견딜 만하다고
그래서 묻고 싶다, 살아 기쁘지 않느냐고
(엄원태·시인, 1955-)
+ 그대 생의 솔숲에서
나도 봄산에서는
나를 버릴 수 있으리
솔이파리들이 가만히 이 세상에 내리고
상수리나무 묵은 잎은 저만큼 지네
봄이 오는 이 숲에서는
지난날들을 가만히 내려놓아도 좋으리
그러면 지나온 날들처럼
남은 생도 벅차리
봄이 오는 이 솔숲에서
무엇을 내 손에 쥐고
무엇을 내 마음 가장자리에 잡아두리
솔숲 끝으로 해맑은 햇살이 찾아오고
박새들은 솔가지에서 솔가지로 가벼이 내리네
삶의 근심과 고단함에서 돌아와 거니는 숲이여
거기 이는 바람이여,
찬 서리 내린 실가지 끝에서
눈뜨리
눈을 뜨리
그대는 저 수많은 새 잎사귀들처럼
푸르른 눈을 뜨리
그대 생의 이 고요한 솔숲에서
(김용택·시인, 1948-)
+ 봄은
굳었던 관절이 부드러워지듯
봄은 가까이 더 깊숙이 들어왔다
걸음이 빨라지고
얼굴 가득 미소가 번져나는,
꿈꿀 준비가 되어 있는 자와
나눌 준비가 되어 있는 자에게는
욕심 없이 건강해질 수 있는 계절이다 봄은
오,
그 누가 첫사랑 같은 설렘 가득한 봄날에
희망으로 가는 통로를
행복으로 가는 첫 계단을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집중할 수 없는 순수와 열정은 가라
거짓사랑도 가라
(이희숙·시인, 1964-)
+ 봄날과 시
봄날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시가 씌어지기나 하나
목련이 마당가에서 우윳빛 육체를 다 펼쳐보이고
개나리가 담 위에서 제 마음을 다 늘어뜨리고
진달래가 언덕마다 썼으나 못 부친 편지처럼 피어있는데
시가 라일락 곁에서 햇빛에 섞이어 눈부신데
종이 위에 시를 써서 무엇해
봄날에 씌어진 게 시이기는 하나 뭐
(나해철·의사 시인,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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