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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은유적, 환유적 수사법으로 시적 세계를 보아야...
2017년 07월 24일 03시 45분  조회:2306  추천:0  작성자: 죽림


3-1. 등기된 언어질서 읽어내기

순수한 원형의 공간을 지향하면서 순수한 언어를 꿈꾸는 시인의 의식은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라는 점에서는 평가할 만하지만 자신의 관념속에서 언어와 삶을 추상화시켰다는 것은 현실의 음영을 틈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분히 문제적이다. 순수한 언어, 투명한 심상의 세계를 다루는 언어들은 추상적인 세계에서만 가능하며 현실의 구체적인 형상을 통한 인식이라는 문제가 자신의 관념속에서만 「위험하게」채색될때 한 개인의 삶은 표백될 수 밖에 없다.

세번째 시집 「王子가 아닌 한 아이에게」에서부터 시인은 일상의 구석 구석을 대상화시키면서 관념의 개념적 인식에서 탈피, 현실로 무게중심이 바뀌어가는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준다.

    楊平洞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永登浦. 永登浦에서 11시 열차로 사랑하는 서울을 떠남.    내 사랑은 두고 서울만 떠남. 좌석이 없어 입석을 구입, 맥주를 마시는 핑계로 식당차에     편히 앉음. 떠나며 돌아보니 속옷 바짓가랑이가다 나온 永登浦가 떠나는 나를 보더니 한    번 픽 웃고 돌아섬. 떠남. 역사의서울, 꿈의 서울, 여자의 서울                

                                          -「한 나라 또는 한 女子의 길」에서

시의 화자는 이제 양평동으로 영등포로, 거리로, 남산으로, 버스 정거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풀어 놓는다. 관념의 입김이 지배적인 초기시들과는 달리 시어선택이 상당히 대조적임을 눈치챌 수 있다. 기차의 식당차, 술집 뒷골목, 쇼핑센터같은 도시적인 삶의 공간들과 이에 수반되는 세목들이 시의 소재가 되고 시인은 현실속으로의 적극적인 진입을 시도한다.

시인은 「양평동」 연작을 쓸 무렵부터 시의 힘에 대해 확신하면서 시의 순수성이 마주친 현실을 시 안에 수용하기 시작한다. 그는 부정적인 세계의 모습, 일그러진 현실의 이면을 들추어내면서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태가 가장 고도화된 도시공간에 초점을 둔다. 무질서와 타락, 자본으로 넘실거리는 도시공간은 현대 산업사회의 기형적인 구조에 의해 획일성과 자동성을 고유한 존재방식으로 부여받는다. 시인은 이러한 부정적인 세계의 모습을 시의 현실로 시화(詩化)한다.

「커튼을 걷고 창밖을 내다봄. 거리는 오늘도 安寧함. 安寧한 거리에 하품나옴」(「나의 데카메론」)이라거나, 「어제 나는 술을 마셨고/마신 뒤에는 취해서 유행가/몇 가닥을 뽑았고/그래서 세상이 형편없어 보였고 또/세상이 형편없었으므로 안심하고/네 다리를 쭉 뻗고 잤다」(「빈약한 상상력속에서」)에서처럼 그가 몸담고 있는 도시속에는 수동적이고 사물화된 우울한 일상의 모습이 넘쳐 흐른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부정적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수락하지는 않는다.

   幻想. 흔들리는 나무 잎사귀. 실바의 펠리시아노 기사담 다시들다 팽개침. 등기되지 않    은 현실, 幻想. 등기되지 않은 현실속으로 뛰어듦. 갑옷,투구, 방패 손질함. 스스로 구속할    자기의 이름들을 구함.        -「등기되지 않은 현실 또는 돈키호테 略傳」에서

시인은 투구와 방패를 메고 「등기되지 않은 현실」속으로 뛰어드는 현대의 돈키호테이다. 그 환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등기된 현실만을 보게 될 때 시인은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는 획일적인 판단과 시각을 강요하는 제도화된 현실을 「등기된 현실」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정작 시인이 투시해야 할 것은 「당신의 눈에도 보입니까. 등기되지 않은 현실」이라고 되묻듯이 그 등기된 현실이 아니라 「등기되지 않은 현실」 -현실과 대립되는 환상, 꿈 이상같은- 환상극의 현실이다. 환상과 현실이 전도된 돈키호테의 희극적인 모습속에는 일그러져 있는 사회의 비극성과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 이제 시인은 그 모순된 현실속에서의 억압적인 삶을, 등기화된 언어질서를 날카롭게 지적하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시는 추상的이니 구상的은 오해마라. 시인은 病身이니 안 病身은 오해마라. 지금 한국은    散文이다. 정치도 散文 사회도 散文 시인도 散文이다. 散文的이기 위한 전쟁시대, 시인들    이 전쟁터로 끌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끌려가는 시인의 빛나는 制服, 끌려가지 못하는 病    身들만 남아 制服도 없이 아, 시를 쓴다.                          -「詩人들」에서

중기로 접어든 오규원의 시는 「산문적」인 삶에 대해 예리한 시선을 보낸다. 70년대. 고도경제 성장과 산업화의 물결속에서 「잘 살아보자」는 자력갱생의 성장 이데올로기 깃발만이 맹목적으로 휘날리던 시절. 급속한 사회변동과 자본주의의 거센물결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개인의 실존은 위협받거나 위태롭게 흔들린다. 현실의 억압을 견디기에는 전통적인 시 양식이 무력할 수 밖에 없다는 일종의 좌절감이 깔려 있는 이 시는, 당시 오규원의 시적 입지점을 드러내주는 시론이기도 하며 이후의 시의 향방을 예고해주는 징표가 되기도 한다.

이런 삶 속에서 오규원의 시는 본격적인 「산문화」의 경향을 보이게 되는데,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시양식으로서는 도저히 현실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세계는 복잡하고 추악하게 뒤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조리하고 타락한 세계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시인의 지적인 양식은 점차 사회 비판력을 얻게 되며, 그는 어떻게 현실에 새롭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의식을 반어나 패러디 같은 양식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속하는 시들은 대부분 희화적인 어조와 본격적인 일상어를 채용하고 있는데, 이로써 현실과 세계에서 오는 갈등과 중압감에 대응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이제, 시인은 모든 「기교」를 동원해 현실과 맞닥뜨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3-2. 현실을 방법적으로 드러내기-시쓰기의 기교


사랑이 技巧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나는
사랑이란 이 멍청한 명사에
기를 썼다. 그리고
이 同義反復이 이 시대의 후렴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까지도 나는
이 멍청한 후렴에 매달렸다.                  -「사랑의 技巧. 2」에서


시인은 현실속에 침윤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고 인정하면서, 그러한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에 대해 반성적인 인식을 개입시킨다. 그래서 그에게는 「기교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사랑이 곧 기교라는 등식, 이 「멍청한 명사」에 매달린 화자는 사랑도 꿈도 시쓰기도 그 결과가 비참한 것임을 반어적으로 깨닫는다. 「슬픔의 기교」는 그에게 곧 시의 「패배」를 의미한다. 그러나 오규원은 기교 그 자체를 시화하거나 추구하는 시인이 아니다.

그가 기교를 시화한다면 그것은 그가 자신의 시작(詩作)행위에 대해 매우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즉 자신의 시작의 의미를 반어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방법적으로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 「방법적 긴장」은 그의 시작 행위의 숨겨진 원리이며, 현실에 대한 시적 주체의 인식을 심화시켜 주는 계기로서의 적극적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그에게 기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가 말하는 기교는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표현하기 위해 생겨나며 타락한 현실, 타락한 언어가 가진 허위의식을 드러내려는 전략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신을 규정짓고 있는 삶과 세계에 우회적인 태도, 즉 시는 언제나 「너의 패배가 아닌 나의 패배」라는 자조적인 진술을 통해 현실과의 의식적인 긴장된 거리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침묵의 상징시대, 동사가 없는 시대, 물먹이기 시대」(「물에 물먹이기」에서)의 한 복판에서 현실적으로 순수한 언어란 불가능한 것임을 고통스럽게 깨달으며 「아직도 서정시가 씌어지는」 현실을 「신기해」한다. 현실은 시인에게 부정적이고 대립적인 것이며 타락한 세계에서 왜곡되지 않은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태도는 현실과 시가 상호대립적인 관계에 놓여있다는 믿음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초기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오규원은 「배반을 모르는 시가 있다면 말해보라. 의미하는 모든 것은 배반을 안다. 시대의 시가 배반을 알 때까지 쮸쮸바를 빨고 있는 저 여자의 입술을 시라고 하면 안되나」(「버스 정거장에서」에서)라고 반문하면서 일상의 공간에서 시의 의미공간을 더 넓히고자 한다.

다시 말해,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시양식으로부터 탈피할 적극적인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편화된 현실을 파편화된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상상력과 현실의 긴장관계를 끝까지 견지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기존의 규범적 사고와 언어적 질서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인식과 지평의 전환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현실과 대결하는 시적 정신은 더욱 팽팽한 긴장을 수반하며, 그를 점점 더 「싸움」의 복판으로 나아가게 한다.


3-3. 기능화 된 언어를 전복시켜 해석하기-방법적 인용

♀♀ 중간생략 ♀♀


시인이 한창 원기왕성한 시절, 광고문구나 CF를 방법적으로 인용한 일련의 상품 광고시는 도구화된 사회에서 기존의 시 언어가 아닌 도구화된 형태의 글쓰기, 즉 새로운 미학적 모험이라는 전략으로 맞선다는 점에서는 가히 선구자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시적인 탐구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문학적 언어」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순수한 문학적 언어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계와 자아 사이의 긴장된 갈등을 첨예하게 보여주는 문제가 더 절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4. 현상의 시학적 탐색-「날(生)이미지」로

1991년에 출간된 『사랑의 감옥』과 1995년에 출간된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에서 시인은 다시 「문학」으로 되돌아온다. 다시 문학적 언어의 문제가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는 것이다.

오규원의 반어적 어법이나 광고 패러디시는 시의 의미공간을 보다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와 정치적인 억압을 날카롭게 풍자,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당대적인 의미를 얻었지만, 고도로 다원화되는 혹은 변화되는 현실 사회에 광고형식의 기능적인 언어로는 더이상 맞설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언어화된 현실의 힘을 빌려 세계의 허구성과 절대적 의미를 해체하고자 하는 중기의 문명비판시들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비전을 확보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이미 광고라는 기능화된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에게 그것은 비슷한 방식의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바로 그로 하여금 다시 「언어」의 문제로 돌아가게 만들었을 것이다.

시쓰기와 시적 방법론에 유난히 예민했던 오규원은 파편화된 형태로 파편화된 사회에서의 시쓰기란 더 이상 적절한 방법이 아님을 쉽게 간파했을 것이다. 도구화된 자본주의 사회의 언어를 「해석과 환원」의 방식으로 재구성하던 오규원의 시들은 이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하게 되는데, 시인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자신의 관념으로 해석해 오면서, 우리의 삶에 새로운 의미와 새로운 실재를 창조하는 기제가 다름아닌 은유의 원리라고 파악했다.

그러나 은유적인 해석은 일종의 명명(命名)행위이며 어느 정도 정형화된 사고의 틀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세계를 왜곡할 수 있는 모순과 위험을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삶의 다양한 양상을 획일적으로 재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를 왜곡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현실의 세목을 개념화시켜 해석하고 나열해오던 기존의 은유적인 방법론을 반성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시선과 현상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그 질문과 반성은 초기시에서 던져지던 관념적인 형태, 혹은 중기시에서 던져지던 도구화된 형태의 것이 아니라 보다 실체화된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


한 남자가 가운데가 접힌 식단표 사이로
머리를 박는다 한 여자가 즐거운 얼굴로
남자의 세계를 건너다본다 건너다보는
세계는 아름답다-고 누가 말했다면 나는
이 순간을 위해 믿고 싶다 그 사이 벽을 타고
기어내려 오던 ··고고한 가락은 힘에
부치는지 여자의 목을 잡고 늘어진다 오오
나는 당신께 사랑을 원하지 않았어요-
……
남자는 다시 식단표 사이로 고개를 처박고
여자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톡톡친다
세상이 저렇게 가볍게 톡톡 울린다고 누가 말했다면
이 순간을 위해 내가 믿지 못할 이유를 누구에게 물어보랴? 

                        -「세계는 톡톡 울리기도 한다」에서


우리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즐겁게 연상할 수 있다. 손가락으로 식탁을 가볍게 「톡톡」치는 여자의 이미지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마주 앉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투명한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이 두 시집에는 유난히 의성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톡톡」이나 「툭툭」 「척척」 「쭐쭐」이라는 의성어마저 일종의 부피감을 느끼게 한다. 일상의 삶을 가볍게 흐르도록 만드는 시인의 감수성은 「톡톡」이라는 의성어에까지도 생기를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물과 현상 그 자체를 보다 투명하게 인식하려는 태도와 깊이 맞물려 있으며, 시인은 이런 시선으로 아름답고 선명한, 그러면서 유의미한 삶의 한 장면을 인식의 선반위에 진열하고 있다.


뱃속의 아이야 너를 뱃속에 넣고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 엄마는
털옷을 고르고 있단다 털옷도 사랑만큼
다르단다 바깥 세상은 곧 겨울이란다.
……
오 그래 그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리고 가려 한단다 그렇게 한동안
견뎌야 하는 곳에 엄마가 산단다
언젠가는 털옷조차 벗어야 한다는 사실을
뱃속의 아이야 너도 태어나서 알게 되고
이 세상의 부드러운 바람이나 햇볕 하나로 너도 울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게 되리라 되    리라만                          -「사랑의 감옥」에서


시인은 길 위에 펼쳐진 소박한 삶에서 의미의 공간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난장의 리어카에 붙어서서」엄마는 뱃속의 아이에게 「어찌이 추운 세상을 다 막고 가릴 수 있겠느냐. 구멍 숭숭한 사랑의 감옥으로 너를 데려 가」겠다고 말한다.

추위와 가난, 고통으로 얼룩진 이 척박한 세상은 견고한 감옥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마가 고르는 「구멍 숭숭한 털옷 안의 집」이야말로 삶의 고통과 갈등을 무화시킬 수 있는 사랑의 공간인 것이다. 그곳에는 아무리 갇혀 있어도 힘들거나 외롭거나 고통스럽지 않기에 뱃속의 아이는 세상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구멍 숭숭 뚫린 남루한 털옷,- 「사랑의 감옥」은 삶의 긍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해방의 이미지 공간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여성의 모성애를 세계에 대한 희망과 사랑으로 변주시킨 이 작품에서 우리는 삶의 긍정과 희망이야말로 감옥같은 현실을 넉넉히 감싸안을 수 있는 동력이 된다는 시인의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 중간생략 ♀♀

   버스 정거장 푯말이 하나 있다 쇠기둥과 나란히 선 한 사내의 얼굴도 팻말처럼 동그랗    다 동그랗고 차다 차들이 다니는 길 안쪽 경흥공업 주식회사 건물은 사철 푸른 나무 울타    리가 꽉꽉 지키고 있다. 스포츠형 머리의 학생이 휘파람을 불며 사철나무 아랫도리를 구    둣발로 내지르고 있다.         --「외곽」에서

시인은 풍경의 한 장면과 사물을 단편적이면서도 기계적으로 나열하고 있다. 앞의 작품들에서는 객관적인 익명의 정조만이 감돌뿐 시인의 존재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의 언어는 이제 관념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런 언어를 그는 「대체관념」이라는 용어로 부르기도 한다.

재해석이나 재구성이 아닌 의미가 정해져 있는 형태가 아닌 다른 어떤 것. 명명하거나 해석되기 이전의 알몸의 사물과 현상. 이것을 시인은 「날(生)이미지」라고 밝히고 있다.

시인은 명명하고 해석할때 중심축으로 쓰는 은유적 수사법을 버리고 사물을 묘사할때 쓰는 환유적 수사법을 중심축에 두면서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일체의 관념을 거부하고 시를 쓰겠다는 이유는 언어가 이데올로기에서 파생된 의미로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의미는 존재의 진실을 은폐하며 사물과 세계를 훼손시키고 파편화시킨다. 「의미를 규정하는 것은 독재라는 정치적 메타포와 같다. 여기서 시인과 독재가는 근본적으로 만난다」(「네 개의 노트」)고 한 산문에서 이미 시인 자신이 밝혔듯이 이데올로기적인 의미가 지배하는 세계에서 그 허구성을 파기하는 방법은 자신과 세계를 구속하지 않는 살아있는 현상을 지향하는 것이다.

언어로부터 혹은 인간의 일정한 시각으로부터 의미의 개입을 배제하는 것은 이분법적 사고에 대한 회의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획일적인 의미의 공간을 지워나가고 언어에 자유를 불어넣을 것. 그것이 최근의 오규원이 보여주고 있는 작업이다.


5. 나아가면서:언어가 창조한 「해방의 이미지 공간」

우리는 언어의 관념성에서 출발한 오규원이 그의 시작 과정에서 어떻게 그 관념성을 반성하고 물신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나아갔으며 또 끊임없는 방법론의 갱신에 따라 현상의 탐구로 나아가게 됐는지를 살펴보았다.

시종일관 「언어」라는 문제를 중심축에 두고 70·80년대 자본주의의 기능화된 사유구조와 파편화된 현실에 맞서는 대결의지를 보여주던 시인이 90년대의 변모를 거쳐 최근 시집에서 관념과 의미를 배제한 「날(生)이미지」를 운용(運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날(生)이미지」는 시인의 언급을 빌리자면 「정해져 있는 의미가 아니라 활동하는 이미지」일 뿐이므로 세계를 함부로 구속하거나 왜곡하거나 파편화시키지 않는다.

사물이나 현상 그 자체가 가지는 한 순간의 이미지를 환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세계의 현상을 획일적인 관념의 틀속에 가두지 않으려는 시인의 노력은 초기부터 탐구해왔던 죽은 관념이나 죽은 언어와의 싸움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관념의 껍질을 벗겨나가는 것.

사물이나 현상을 내쪽으로 끌어당겨 해석하기보다는 시인 스스로 현상을 향해 자신을 열어 보이고 수용하는 것. 그리고 의미의 세계보다는 실체의 세계를 지향하는것. 이것이 오규원이 도달한 시적 여정의 한 결론이다.

그 살아있는 의식속에는 시인 스스로 「톡톡」치면서 열어보인 우주의 공간이 꿈틀거리는 삶이 스며들어 있다. 나도 그 「톡톡」두들긴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언어가 창조한 시원(始原)의 공간속에서 새롭게 열린 사물과 세계를 꿈꾸고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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