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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 지키기와 한글 바로 세우기 그리고 한글 재통일하기...
2017년 10월 19일 22시 29분  조회:5348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글 바로 세우기에 온 정성을 쏟다...

우리 겨레는 세종큰임금이 만들어주신 세계 최고의 글자, 한글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처럼 자유자재로 한글을 쓸 수 있는 것은 한힌샘 주시경 선생과 일제강점기의 조선어학회 그리고 해방 뒤의 외솔 최현배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문제는 훈민정음이 반포된 지 480년(1926)이 넘도록 표기법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사람마다 소리 나는 대로 닿소리와 홀소리를 붙여서 쓴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한글학자들은 한글을 바로 세우는 것이 자주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일임을 깨닫고 준비합니다. 특히 1930년 12월 13일 조선어학회 총회에서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기로 결의하고, 권덕규·김윤경·박현식·신명균·이병기·이희승·이윤재·장지영·정인승·최현배를 포함한 위원 12명이 2년 동안 심의를 거듭한 결과 1932년 12월 원안을 완성했지요. 그 뒤 1년여 더 갈고 닦아 드디어 1933년 11월 4일 조선어학회는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발표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보면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 부록 1·2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총론에서는 표준어에 대한 기본원칙으로, 현재 서울의 중류사회에서 쓰는 말로써 한다는 규정과 맞춤법 원칙으로 소리 나는 대로 하되 어법(語法)에 맞도록 쓴다는 규정, 단어는 띄어 쓴다는 규정 들이 있지요. 한글을 쓰지 못하게 했던 일제강점기, 그럼에도 한글 지키기와 바로 세우기에 나섰던 조선어학회의 거룩한 뜻을 우리 후손들이 잊으면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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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와 조선어학연구회의 활동과 맞춤법 통일안

 

1. 당시의 국어연구

주시경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학회(1908)

지석영-국문연구회(1907

조선 학부국문연구소(1907)

 

2. 국어연구의 발전

주시경국문동식회(1896)- 국어연구학회(1908)-조선어학회-한글학회(한글)

지석영-국문연구회(1907)·국문연구소(1907)-박승빈·조선어학연구회(정음)

 

학회명

조선어학회

조선어학연구회

비고

참가자

· 주시경의 제자

· 김두봉(상해)- 울산출신

· 최현배장지영정인승유 렬,

정열모

· 이극로이희승

· 지석영 지지자

· 박승빈(변호사평양출신)

· 최남선오세창홍기문,

신남철윤치호최 린,

송진우민대식유응호,

영친왕

 

맞춤법(철자법)

· 형태주의-기본어미(-)

· 먹다-어간 ’, 어미-‘

· 값 사용

· 받침 사용,

· 음소주의-기본어미(-, - 으오)

· 어간 ’, 어미 로 나눔

· 값 사용 불가-갑으로 사용

· 받침 사용 불가-격음 가능

 

경음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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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점

· 조선어학회가 역사적 정통성이 있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 다.

· 신문사와 문인들이 성명을 통하여 지지를 해 주었다.

· 비전문가 우리말에 주제넘게 나선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다.

· 역사적 정통성이 없다.

 

대표 학술지

한글한글맞춤법 통일안 강의

정음-조선어학강의 요지조선어학간이조선어 문법

 

 

 

 

 

3. 일제시대의 국어 연구자와 저서 관계

⓵ 최현배우리말본-야마다 요시오(山田孝雄-1922)의 일본문법강의를 모델로 삼아 우리말 문법서를 기획했다고 보고 있다그러나 일본 문법서인 일본문법강의의 영향 관계를 근거로 우리말본의 의의를 깎아내리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면이 있다최현배가 정열모와 달리 자신의 문법론에 영향을 준 문법서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문제라 할 수 있지만 우리말본에서 아마다 문법을 전적으로 수용한 부분은 원론적인 설명이나 보충설명에 해당하는 부분이다우리말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틀을 선택적으로 수용하여 우리말 문법을 체계화한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토는 조사로어미는 단어로 인정하지 않았다.

 

⓶ 정열모-마쓰시타 다이사부로(松下大三郞-1926)의 표준일본어문법을 접했고 이에 따라 문법을 체계화 했을 것으로 보이는데이 연구 결과는 1927년부터 소논문으로 발표했던 것이다정열모는 조선어문법론의 서두에서 조선어문법론이 나의 독창적인 편견이 아니라 내외 문법학을 참와하여 그 합치된 정신을 취한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러한 사실을 암시했다이 문법 체계가 이후 신편고등국어문법-1946에 이르러 내용적으로 완결됐다토를 접사로 보는 견해를 제시했다.

 

③ 오구라 신페이경성제대에서 조선어학강의방언자료 및 고문헌 수집과 정리를 했다방언학향가 및 이두의 연구증보조선어학사』 등이 있다.

 

④ 고바야시 히데오(小林英夫)- 언어학의 일반이론에 치중함특히 소쉬르의 일반언학강의를 1928년에언어학원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였는데 이는 일본 언어학계가 구조주의 언어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됨을 의미한다.

 

⑤ 고노 로쿠로(河野六郞)-오구라 신페이의 제자이며오구라와 같이 진행했던 조선방언 연구에 심혈을 기울임한국어와 일본어의 계통적 공통성을 탐색함이 결과적으로 일본의 정책적 판단이 조선어연구의 방향을 결정지었음을 보여준다조선어방언학시고조선어 한자음 연구』 등이 있다.

 

⑥ 관념론과 실증론의 대립·

· 관념론-실용적 언어연구당시의 조선어학의 실천적 연구의 소임을 다함광복 후에는 한자폐지와 언문일치에 최선을 다함. - 조선어학회(한글학회)

 

· 실증론실증적 언어연구서구의 역사언어학의 영향을 받음조선어 정리와 교육에 철저하게 무관심함.광복 후 민족문화 단절을 우려해 한자 폐지에 반대함학교 문법 제정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함. - 경성제국대학교 조선어과(현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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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와 한글학회

 

 

 

 

 

 

조선어학회는 나라를 잃기 2년 전인 1908년 8월 31일 서울 봉원사에서 "말과 글은 홀로 서는 나라됨의 특별한 빛"이라며 "그 빛을 밝히자"는 주시경을 중심으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한 것이 그 시초가 되었다. 1921년 12월 임경재최두선장지영권덕규 등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되어 조직한 조선어연구회를 1931년 1월 총회 결의에 따라 조선어학회로 개칭한 한글운동 단체이다. 1926년 한글날의 전신이 되는 가갸날’ 첫 기념식을 거행하고,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조직해큰사전편찬에 착수하는 한편, <한글맞춤법통일안>(1933),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통일안>(1941) 등을 내놓으며 한글의 보급과 연구에 힘썼다조선교육협회회관 안에 사무소를 두었다가 1935년 7월 정세권이 제공한 화동 129번지 아담한 2층 양옥으로 회관을 옮겼다.큰사전편찬을 비롯한 사업을 추진하던 중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이 발생하자 활동을 중단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일제에 의해 모질게 억눌리고 시달렸으며이윤재한징 등 숱한 국어학자가 끌려가 고문을 받다가 죽임을 당했다이 무렵 수많은 자료를 빼앗겼고한국전쟁 때에도 숱한 자료가 불타거나 사라졌다이후에도 상황은 이후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한글전용운동국어순화운동한글말 펴기행사세종대왕 숭모행사 등을 꾸준히 진행해 왔지만 정부의 무관심 내지 외면 속에 시민모금으로 1977년에야 겨우 한글회관을 마련할 정도로 존재 자체가 힘겨운 투쟁 아닌 투쟁을 했었다나라를 지킬 때 그 얼을 지킬 수 있는 한 방법은 우리나라 언어를 지키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조선어학회는 우리나라 말을 온갖 탄압 속에서도 지켜왔다는 데에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조선어학회 사건(朝鮮語學會事件)은 일본 제국이 1942년에 한글을 연구하는 학회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및 관련인물들을 강제 연행재판에 회부한 사건이다.

 

1921년 창립된 '조선어 연구회'의 명칭이 바뀐 것으로조선어와 조선글을 연구하던 학회이다. 1941년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마련국어사전 편찬 등 말과 글의 표준화에 주력하였다현재는 한글 학회로 남아 있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였다.

1938년 '국어상용화(國語常用化)' 정책으로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한국어(조선어사용을 금지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다.

 

일제는 한국인들을 압박하기 위해 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하였다일제는 1939년 4월부터 학교의 국어 과목을 전폐하고 각 신문·잡지를 점차 폐간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을 공포하였다. 1941년 12월 하와이의 진주만을 습격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뛰어든 일제는 내부의 반항을 염려하여, 1942년 10월에 조선어학회에도 총검거의 손을 대었다조선어학회는1942년 4월부터 한국어 사전을 편찬 중이었다.

 

 

함흥 일출여고(또는 영생여고)의 학생이 한국어로 대화하다가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취조를 받던 중, 1942년 9월 5일 조선어사전 편찬원 정태진이 관련되었다며 정태진을 증인으로 불러가더니이를 빌미로 1942년 10월 1일에 와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단정한 뒤 관련자들을 일제검거하기 시작하였다.

10월 1일에, 1942년 10월 1일에 이윤재(李允宰최현배(崔鉉培이희승(李熙昇정인승(鄭寅承김윤경(金允經권승욱(權承昱장지영(張志暎한징(韓澄이중화·이석린(李錫麟이고루 등 11사람이 1차로 일제히 서울에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洪原)으로 압송되었다.

10월 18일에는 이우식(李祐植), 김법린(金法麟), 20일에는 정열모가, 21일에는 이병기(李秉岐), 이만규(李萬珪), 이강래(李康來), 김선기(金善琪) 4사람이, 12월 23일에는 서승효(徐承孝), 안재홍(安在鴻), 이인(李仁), 김양수(金良洙), 장현식(張鉉植), 정인섭(鄭寅燮), 윤병호(尹炳浩), 이은상(李殷相등 8사람이 각기 검거되었으며, 1943년 3월 5일에 김도연(金度演), 6일에 서민호(徐珉濠)가 각기 검거되어 모두 홍원경찰서에 유치되었다. 3월 말부터 4월 1일까지 신현모(申鉉謨)와 김종철(金鍾哲)은 불구속으로 심문을 받았다.

권덕규(權德奎)와 안호상(安浩相)은 신병(身病)으로 구속을 면하였는데, 19433월 말경까지 29명이 검거되어 대체로 1년간 홍원(洪原)경찰서 내 유치장에서 온갖 야만적 악형과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48명이 취조를 받았다.

33명 중 16명을 '조선민족정신을 유지한',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죄명으로 기소함흥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고 한다.

이윤재한징 미결감 옥중 사망

재판 또는 복역 도중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8월 17일 부 석방.

 

피고들에게 불리한 증언을 아니한다고 곽상훈(郭尙勳김두백을 유치장에 구금한 일도 있었으나이들 증인 중에는 어학회 사업을 운조협력한 저명한 문화인들도 많았다함흥 검사국에서는 범위 축소 지시에 따름인지 모르나어학회 관계자를 다시 조사하여 대부분은 석방하고이윤재·한징·최현배·이희승·정태진·이고루·김양수·김도현·이중화·김법린·이인·정현식 13명만 공판에 회부하였다.

 

1943년 1월 이윤재가이듬해 2월에 한징이 각각 심한 고문과 추위와 굶주림에 못 이겨 옥사(獄死)하였다그 나머지 11명은 함흥 지방재판소에 각각 징역 2년에서 6년까지 판결을 받았다그 중 정태진만은 복역(2)함이 더 빠르겠다고 하여 복역을 마쳤고장현식은 무죄로 석방되었다그리고 체형을 받은 이는 공소하였으나 8.15광복을 이틀 앞두고 공소가 기각되었다이 사건으로 어학회가 해산되고사전 원고는 증거물로 홍원과 함흥으로 옮겨다니다가 여러 부분의 원고가 없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원고는 광복후 1945년 9월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가 잃어버린 원고가 발견되어 추후 한글 대사전이 출판되었다.

 

 

한글 학회(學會)는 한글과 한국어의 연구를 위해 이루어진 학술 단체이다. 1908년 8월 31일에 김정진을 회장으로 하여 창립한 국어연구학회를 모체로 1921년 12월 3일 창립하였다.

 

한글 학회는 1926년에 한글날을,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제정하고한글을 보급하고자 노력했다해방 후학회는 한글 전용을 주장해 국한문혼용을 한글 전용으로 쓰는 것을 장려했다.

 

 

처음의 명칭은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로서 국문연구소(1907년 설치)를 계승하여 만들어졌다당시 회원은 장지영·김윤경·최현배·권덕규 등 15~16명이었다이들은 동호인들을 규합한 후 학회 활동으로 연구발표회를 가지는 한편, 1927년 2월 8일에는 기관지 한글을 발간했다. 1931년에는 학회의 이름을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고쳤고, 1933년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외래어표기법을 제정하고 우리말사전을 편찬했다. 1942년부터 회원들이 여러 차례 독립운동죄로 검거되었는데이것이 바로 조선어학회사건이다. 8·15 광복과 더불어 부활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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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은주 기자)
"오늘(10월 19일 2017년)은 조선 문화사상 잊지 못할 날이다. 사백팔십칠 년 전(세종 이십팔 년 서기 일천사백사십육 년) 오늘에 조선 문자가 세종대왕의 손으로 창정(創定)되어 처음으로 반포(頒布)되엇고 사백팔십칠 년 뒤인 오늘에 조선어의 철자법이 반포되게 되엇으니 조선사람된 자 다가치 영원히 기념할 오늘임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동아일보 1933. 10. 29. '철자법통일안 반포까지의 경과')

1933년 10월 29일 한글날. 당시는 한글날이 10월 29일이었다. 이날 조선어학회는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 487주년을 기념하여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정식으로 공표했다. 이 통일안은 1937년, 1940년, 1946년 세 차례 내용 수정을 거쳐 1948년 정부가 공식적으로 채택, 오늘날까지 올바른 한글 표기의 기준이 되고 있다.

한글맞춤법통일안(1953)
한글맞춤법통일안(1953)

 

1894년 11월 21일. 고종은 법률과 칙령, 공문서는 한글을 기본으로 하고, 필요에 따라 한문 번역을 붙이거나, 한글과 한자를 섞어 쓰도록 한다는 내용의 칙령을 내렸다. 이로써 한글은 창제된 지 450여 년 만에 우리나라의 공식 문자가 됐다. 고종은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헌법인 홍범 14조를 한글, 한문, 국한 혼용문 세 가지로 작성하여 발표했다.

당시 한글은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널리 쓰였으나 언문이라 불리며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글은 공식 문자가 되기는 했으나 맞춤법이 통일되어 있지 않아 사용이 제각각이었다. 맞춤법 통일안을 마련하기 위해 1907년 학부 내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고 주시경, 어윤적, 지석영 등이 연구보고서 '국문연구'를 작성했으나 1910년 국권침탈로 국문연구소가 해체되고 '국문연구'도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조선인 학자들과 일본인 학자들이 모여 1912년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만들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사용했다. 이 맞춤법은 사실상 일본인의 한국어 습득을 쉽게 하고, 조선인의 일본어 학습에 한글을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한글 표기를 일본어의 발음에 맞게 퇴보시켰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의 무단정치가 문화정치로 바뀌면서 조선인 학자들이 연구단체를 구성하고 맞춤법 통일안 제정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어학회는 1930년 12월 13일 열린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 것을 결의하고 최현배, 이희승 등 12인이 맞춤법제정위원이 되어 1932년 12월 원안을 작성했다. 이후 1933년 1월 4일까지 원안을 심의하여 수정안을 만들었다. 이어 같은 해 7월 25일부터 8월 3일까지 다시 독회를 거쳐 최종안을 마련해 그해 10월 19일 조선어학회 임시총회에서 이를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10월 29일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공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은 총론 3항, 각론 7장 63항, 부록 2항으로 구성됐다. 총론은 제1항, 표준말은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하고, 제2항, 표준말은 현재 중류사회의 서울말로 하며, 제3항, 각 단어는 띄어 쓰되 토는 그 앞 단어에 붙여 쓴다는 내용이다.

기관지 '한글'
기관지 '한글'

 

오늘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글맞춤법이 정비되기까지 실로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과 김정진 등이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했다. 1911년 9월 3일 '배달말글몯음'으로, 1913년 3월 23일 '한글모'로 이름을 바꾸어 1917년까지 활동하다가 활동이 중단됐다. 이 단체는 1921년 12월 3일 한글 연구와 보급을 위해 '조선어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10년 뒤인 1931년 1월 10일 이름을 '조선어학회'로 고치고, 해방 후 1949년 9월 5일 '한글학회'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는 한글을 지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훈민정음 반포 480주년인 1926년 음력 9월 29일을 '가갸날'이라 정했는데, 이것이 한글날의 시초이다. 1928년 '가갸날'을 '한글날'로 고치고 음력으로 기념하여 오다가 1932년 양력으로 바꿔 10월 29일로 정했다. 그러다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서문의 반포일 기록을 근거로 양력 10월 9일로 옮겼다. 해방되던 해 한글날이 10월 9일로 확정됐고, 1946년 정부는 한글 반포 500주년을 맞이하여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했다.

1927년 2월 10일 당시 조선어연구회는 기관지 '한글'을 창간했다. '한글'은 일제 당국의 탄압과 재정난으로 수차례 휴간됐다가 1946년 4월에 속간됐다. 한국전쟁으로 발행이 중단됐다가 1954년 4월 다시 발행에 들어가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29년 10월 31일 제4회 한글날 기념식에 모인 유지 108명의 발기로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돼 사전 편찬이 시작됐다. 1939년 원고가 3분의 1가량 완성되어 총독부에 제출, 다음 해 대폭 수정한다는 조건으로 출판허가를 받았다. 1942년 봄 조판이 시작되고 가을에 원고가 모두 완성되어 교정에 들어갈 무렵 조선어학회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편찬이 중단됐다. 해방 후 사전 편찬사업이 재개돼 1947년과 1949년, 1950년 '조선말 큰사전' 1권부터 4권까지를 출판하고 한국전쟁 이후 1957년 6권으로 완간했다.

1941년 외래어와 외국 인명 및 지명에 관한 표기를 통일하기 위해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발표했다. 해방 후에는 국어교육을 되살리기 위해 1945년 11월 '한글 첫걸음'을 시작으로 '초등국어교본,' '중등국어독본' 등의 교과서를 편찬했으며 대대적으로 한글강습회를 열었다. 1948년 '세종 중등국어 교사양성소'를 세워 국어교사를 양성했다.

'한글첫걸음' 교과서
'한글첫걸음' 교과서

 

조선어학회를 이야기할 때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1940년부터 각급 학교에서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했다. 특히 조선어학회를 주시해왔는데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이 어느 정도 결실을 보게 되자 일을 꾸몄다.

1942년 3월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 박영희의 일기장을 뒤져 국어(일본어) 사용 관련 내용을 트집 잡아 조선어학회 사전 편찬을 맡고 있던 정태진을 9월 5일 검거했다. 고문을 통해 조선어학회가 학술단체를 가장한 독립운동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고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 1943년 4월까지 회원 33명을 잡아 28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모진 고문과 수감생활로 이윤재, 한징 등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됐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재결성됐다.

큰사전 원고
큰사전 원고

 

일본이 패전한 직후 1945년 9월 8일, 서울역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의 산더미 같은 화물 틈에서 상자가 하나 발견됐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써내려갔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였다. 무려 원고지 2만5천500장 분량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 당시 10년 넘게 작성했던 '조선말 큰사전' 원고가 일제 경찰에 증거물로 압수됐으며 재판 중 함흥에서 경성으로 실려 왔을 것으로 추정됐다. 해방되자 감옥에서 풀려난 학자들과 경성제대 학생들이 창고로 몰려와 화물 더미 속에서 애타게 찼던 그 원고였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원고를 찾은 이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한글. 이를 지켜내기 위해서 긴 세월 여러 사람이 피와 땀을 흘렸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한글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의문이다. 무심코 사용하는 신조어, 은어, 비속어들의 범람이 우리의 언어생활을 해치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볼 문제이다. 외래어 오남용이 심각한 것은 물론이고 인터넷, 모바일 등에서 무절제하게 진행되고 있는 도를 넘은 언어파괴가 어느덧 일상적인 것으로 자리 잡아 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은 어떤 심정으로 단어 하나마다 맞춤법을 고르고, 한 장 한 장 공들여 사전을 꾸렸을까. 모진 고초를 당하고 감옥에서 풀려나 몸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한 채 서울역 창고로 달려와 화물 더미를 뒤졌을 그들의 절박한 마음, 그리고 마침내 원고를 발견했을 때의 환호를 생각한다면 우리는 좀 더 언어생활에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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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

 

표준어는 아주 새로이 만드는 말이 아니라, 이미 그 나라에서 쓰이는 말 중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고 또 사람들이 가장 좋은 말로 여기는 말을 바탕으로 하여 약간의 손질을 하여 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수도(首都)와 같이 그 나라의 정치·경제·문화·교통의 중심지의 말이 흔히 표준어가 된다. 이러한 중심지의 말이라야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기 쉽고, 또 국민들이 우러러보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도 역시 서울말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표준어가 공식적으로 정해진 것은 조선어학회에서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1936년에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을 펴내면서부터였다. 이들을 근거로 ≪큰사전≫을 비롯한 국어사전들이 편찬, 간행되면서 우리 나라 표준어가 비로소 정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표준어의 선정에 있어 원칙이 된 것은 <한글맞춤법통일안> 총론 제2항의 “표준말은 대체로 현재 중류사회에서 쓰는 서울말로 한다.”는 규정이었다. 서울말을 표준어의 근간으로 삼는다는 것이 여기에 명백히 밝혀져 있다. 다만 광업이나 어업 등에 쓰이는 단어들은 서울에서는 쓰이지 않을 수도 있으므로 서울말로만 표준말을 삼은 것은 아니며, 또 ‘돈’을 ‘둔’이라고 하는 것이 서울말이더라도 글에서 오랫동안 ‘돈’으로 써왔다면 ‘돈’을 표준어로 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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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배·이병기·현상윤·김두봉 등이 1908년 8월31일 국어연구학회를 만든 것이 한글학회의 시작이다.
이후 1921년에 조선어연구회, 1931년에 조선어학회, 그리고 1949년에 한글학회로 그 이름을 바꾸었다.

어쩌면 한글학회보다 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을 조선어학회. 조선어학회의 최대 성과는 바로 우리말 사전의 편찬이었다.
이하 포스팅은 절대적으로 <우리말의 탄생>(최경봉 지음, 2005년, 책과함께)에 의지하고 있다.

조선어학회의 <조선말큰사전> 제1권(ㄱ~깊)은 1947년 10월 9일 한글날을 맞이해서 출간되었다. 국가의 성립에 앞서 표준언어작업이 먼저 길을 열었던 것이다. 이 사전은 조선문학가동맹의 출판기념식(사회:정지용) 때 남북협상요인 편에 북한으로 보내자고 결의되었다. 북한에서도 1948년 6월 조선교육자협회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진은 국립중앙박물관 전시된 것을 찍은 위 블로그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사전은 1957년에 가서야 온갖 우여곡절을 겪고 완성된다. 그럼 시작은 언제였을까?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된 것은 1929년(위 책에는 1926년으로 잘못 적힌 부분이 있다) 10월 31일이었다. 총 108명의 발기인이 모였다. 

그럼 이 이전에는 사전이 없었을까? 조선어사전편찬회 취지서(이은상이 썼다고 한다)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조선민족에게 사전이 없다 함은 이미 상술한 바다. 그러나 서양인 선교사들이 예수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조선어를 학습할 목적으로 편성한 사전이 수 종 있으니, 서기 1880년에 불국 파리에서 출판된 <한불사전>이 그 하나요, 1890년에 미국 선교사 언더우드 씨의 손으로 일본 횡빈에서 출판된 <한영자전>이 그 둘이요, 1897년 영국인 선교사 게일 씨의 손으로 역시 횡빈에서 출판된 <한영자전>이 그 셋이다. 그리고 또 1920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일본어로 대역한 <조선어사전>이 출판되었다.

일본어로 대역한 <조선어사전>이라는 것은 표제어만 우리말이고 풀이는 일본어로 되어 있는 사전이었다. 이런 사전을 만드는 데만도 총독부는 10년을 소비했었다. 그런데 이 이전에 나온 조선어사전이 있기는 했다. 표제어 6,106개의 소사전 <보통학교 조선어사전>(1925)이 그것이다. 이 사전은 세간에 알려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데, 학교의 자습서처럼 만들어진 때문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 그 이유인 모양이다.

지은이는 심의린. 1894년생으로 1917년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부를 졸업하여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조선어연구회(1921)에서 활동 중인 사람이기도 했다.

조선어사전을 편찬하려는 움직임 또한 이때가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911년 주시경을 중심으로 우리말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었다. 주시경과 제자 김두봉, 권덕규, 이규영 등이 참여한 이 편찬작업은 불행히도 1914년 주시경의 사망, 1919년 김두봉의 상해 망명, 1920년 이규영 사망으로 진척을 보지 못했다. 

다른 움직임은 최남선에 의해서 일어났다. 일찍이 광문회를 만들어서 주시경과 함께 <신자전>을 만들기도 했던 최남선은 1918년에 계명구락부를 만들어, 1927년 사전편찬을 위한 위원회를 결성했다. 최남선은 주시경이 만들고 있던 <말모이> 원고를 인수받아 그것에 기초해서 우리말 사전을 만들고자 했다. 정인보, 임규, 이윤재, 변영로 등이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업은 만만치가 않았다. 1929년이 되자 모두 나가떨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이 조선어사전편찬회를 주도한 인물은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따고 귀국한 이극로였다. 이극로는 1912년 20세 때 만주로 가, 박은식, 신채호 등을 만나 민족주의의 세례를 받고 1915년 고려공산당 영수 이동휘와 동행하여 모스크바로 갔다가 베를린까지 가서 경제학을 전공하여 박사 학위까지 딴 독특한 경력의 인물이다. 그는 1927년 제1회 세계약소민족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고, 귀국할 때 미국을 거쳐 이승만, 서재필도 만나고 돌아왔다. 해방 후 그는 김구 주석과 함께 북으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북한의 첫 내각 무임소상이 되어 북한 언어연구의 책임자가 되었다. 이극로의 제자 유열(한국전쟁때 월북)이 환단고기 식의 국수주의 사학에 빠져든 것도 사실 이극로의 민족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리라. 

사전 편찬이란 결국 말을 모으는 것이다. 조선어학회는 기관지를 통해 전국 각지의 말을 보내달라 했고 전 조선민의 호응 아래 사전 편찬 작업이 진행되었다. 또한 이를 위해서 맞춤법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일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개입했고 한글학자 장지영, 권덕규, 정열모, 최현배, 신명균 등이 모두 심의위원으로 참여했다. 총독부 산하 기관에 참여한 일로 국수주의자들에게 역사학계만 두들겨 맞는 일은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맞춤법이 정해지기까지는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다. 조선어학회와는 달리 발음나는 대로 표기하자는 조선어학연구회(박승빈 설립)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1934년 7월 9일 문인(조선문예가일동)들이 "한글 철자법 시비에 대한 성명서"를 냈다. 문인들이 조선어학회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어학연구소의 힘이 약화되었다. (성명에는 김동인, 전영택, 양주동,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오상순, 박태원, 피천득, 정지용, 모윤숙, 주요섭, 현진건, 채만식, 윤석중, 심훈, 이상, 임화, 노천명, 염상섭, 김광섭, 이은상, 이광수 등의 쟁쟁한 문인들이 포진했다.)

그런데 이때 한가지 사건이 일어난다.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 조선어학회가 아닌 한 개인의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다. 

저자는 청람 문세영. 이 사전의 출판에는 두가지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문세영이 조선어학회에 원고를 가지고 와 출판을 요청했으나 조선어학회가 이것을 거부하고, 원고를 기증하라고 했다는 것이 첫번째 이야기다. 문세영은 원고 기증을 거부하고 독자 출판을 감행했다. 1938년 10월. <조선어 사전> 출간.

그러나 일석 이희승은 이에 대해서 다른 증언을 남기고 있다. 문세영이 환산 이윤재의 작업을 도용하여 출간을 했다는 것이다. 이윤재는 이때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있었다. 이때 문세영이 이윤재가 거의 해놓은 작업을 낼름 가로챈 것이 아닌지 의심이 있다. 

문세영 역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 중 한 명이었다. 또한 조선어학회 안에서 표준어사정위원회 위원이기도 했다. 

1939년 조선어학회의 준비도 모두 끝났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검열도 받았다. 1942년 드디어 조판도 끝났다. 그러나 사전은 발간되지 못했다.

왜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을까? 그것은 자금 사정과 관련이 있었다. 일제의 문화정책 변화도 한 몫하고 있었다. 극도의 궁핍으로 자살하는 학자까지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난 시점에서 난데없는 사건이 터졌다.

조선어학회 사건. (사건의 내용은 한글학회 창립 100주년과 조선어 학회 사건 [클릭] 해명님 포스팅 참고) 

이 사건으로 사전 원고도 증거물로 압수되었다. 해방이 된 뒤에도 원고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1945년 9월 8일 경성역의 역장이 원고를 발견했다. 2만6천5백여장의 원고가 조선어학회로 돌아갔다. 지금은 이름모를 그 역장이야말로 우리말을 살린 숨은 공로자가 아닐까?

사전 각권의 발간 연월일 
첫째권 1947년 10월 9일 
둘째권 1949년 5월 5일 
셋째권 1950년 6월 1일 
넷째권 1957년 8월 30일 
다섯째권 1957년 10월 9일
어휘수 164,125


<우리말의 탄생>에는 지금 길게 정리한 글보다 더 풍부한 우리말의 비밀이 그려져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우리말의 탄생 - 10점
최경봉 지음/책과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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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1933-1988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 法統一案, 발표 당시에는 ‘한글 마춤법 통일안’)은 1933년에 조선어 학회(지금의 한글 학회)가 정한 한글 맞춤법이다. 이 맞춤법은 현재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쓰는 맞춤법의 바탕이 되었다. 여기서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초판)의 과정과 표기법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대한제국에서는 1894년 11월에 칙령 제1호 공문식을 공포하여, 공문서를 국문(한글)으로 적기로 결정한 후 1907년 학부에 국어 연구소를 설치하여 한국어 맞춤법을 정비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1910년에 대한제국이 일제의 지배를 받자 이러한 사업은 모두 중단되었고 그 사업은 조선 총독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1912년에 ‘보통학교용 언문 철자법’을 제정했는데 이는 그 때까지 사용되던 관습적인 표기법을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발족되고 1931년에 이름을 바꾼 조선어 학회는 1930년 12월 13일의 총회에서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을 결의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시경 등이 주도하는 ‘한글파’와 박승빈 등이 주도하는 ‘정음파’의 주장 간에 대립이 있었다. 한글파는 형태주의, 즉 으뜸꼴을 밝혀 적는 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정음파는 표음주의, 즉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방법을 주장하였다. 형태주의란 현재 대한민국의 한글 맞춤법 총칙에 명시되어 있듯이, ‘표준어를 소리나는 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뜻이다. 된소리의 표기에서 한글파는 각자 병서(ㄲ)를, 정음파는 ㅅ계 합용 병서(ㅺ)를 주장하였다. 결과적으로 통일안에는 대부분 한글파의 주장이 관철되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은 3년 동안의 논의를 거쳐 1933년 10월 29일(당시의 한글날)에 한글 반포 487돌을 기념하여 정식으로 발표하였다. 그 후 1940년, 1946년, 1948년, 1958년에 개정판을 냈다. (1958년은 용어 수정판)

 

한글 맞춤법 통일안의 초판은 총론, 각론, 부록으로 구성되며 각론은 7장 65항으로, 부록은 표준어, 문장 부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1.자모

 

자모자모의 종류와 순서는 현행 맞춤법과 같으며 합성 자모는 정식 자모로 삼지 않는다. 다만 합성 자모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실려 있다.

 

ㄲ, ㄸ, ㅃ, ㅆ, ㅉ, ㅐ, ㅔ, ㅚ, ㅟ, ㅒ, ㅖ, ㅘ, ㅝ, ㅙ, ㅞ, ㅢ

 

 

2. 표의주의의 반영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는 종전의 관습적 표기법을 수정하였으며, 주된 사항은 어중 된소리를 받침과 초성으로 나눠 적지 않고 된소리 자모로 적는 것, ‘ㄹㄹ’ 연속을 발음대로 적는 것, ‘이, 히’가 붙어 구개음화되는 경우에 원래 형태를 밝혀 적는 것, 어원이 뚜렷하지 않은 받침소리 [ㄷ]은 ‘ㅅ’으로 적는 것 등이 있다. 이들은 현행 맞춤법과 공통된 내용이다. 한자어 표기에서도 관용적인 표기법이 수정되었으며, 두음 법칙에 따라 어두의 ㄹ, ㄴ을 표기하지 않는 표기법을 이때 함께 정했다. 또 관용음이 통용되는 것에 관해서 관용음대로 적는 것도 현행 맞춤법과 동일하다.

 

오빠 (○) ← 옵바 (×)

걸레 (○) ← 걸네 (×)

밭이 (○) ← 바치 (×)

짓밟다 (○) ← 짇밟다 (×)

 

3.형태주의의 반영

 

또한 현행 맞춤법과 마찬가지로 체언과 조사, 용언 어간과 어미, 접미사를 분리 표기하는 형태주의적 표기법을 채택했다. 형태주의적 표기법은 1930년에 조선 총독부가 정한 ‘언문 철자법’에서도 채택되었으나 일부 표기가 아직 불완전했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는 철저한 형태주의로 일관했다. 다음은 현행 맞춤법과의 차이점이다.

 

4.의문형 문제

 

의문형 어미 ‘-ㄹ까, -ㄹ꼬’를 ‘-ㄹ가, -ㄹ고’로 적었다(제8항). 그러나 이 기술은 제2판(1937년) 이후에 사라졌다.

 

5.두 글자로 된 받침 표기

 

두 글자로 된 받침 표기로 ‘ᇚ’을 인정했다(제11항). 이 표기는 옛말에 쓰는 것인데 현대 국어 표기에는 쓰이지 않았다.

 

 

5.사이시옷 문제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합성어의 사이시옷 규정은 현행 맞춤법과 동일하다. 다만 1940년 개정판에서는 된소리화와 [n] 삽입이 일어나는 합성어의 경우 ‘ㅅ’을 한 글자로 표기했는데(담배ㅅ대, 담ㅅ요), 1948년 개정판에서 종전의 표기로 다시 돌아갔다. 참고로 북조선에서 1948년에 제정한 《조선어 신철자법》에서는 1940년 개정판의 사이시옷을 사이표(’)로 부호화했으며, 1966년까지 유지되었다.

 

6.준말

 

준말의 경우 ‘하다’가 줄어서 격음화되는 경우의 표기법이 현행 맞춤법과 크게 다르다. 어간과 어미 사이에 한 글자로 ‘ㅎ’을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하면서 어간말에 받침으로 ‘ㅎ’을 적는 것을 허용했다. 그 한편 현행 맞춤법처럼 격음 자모로 적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

 

7.띄어쓰기

 

띄어쓰기 규정은 다섯 항목의 간단한 규칙뿐이다. ‘단어 단위로 띄어쓰되 조사, 어미는 붙여쓴다.’는 원칙은 현행 맞춤법과 마찬가지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현행 맞춤법과 차이가 난다.

 

8.문법

 

보조 용언은 바로 앞의 용언에 붙여 쓴다.

의존 명사(단위성 의존 명사 포함)는 바로 앞의 단어에 붙여 쓴다.

숫자는 10진법에 따라 띄어 쓴다.

보조 용언과 의존 명사에 관한 규정은 1948년 개정판부터 띄어 쓰도록 바뀌었다.

 

9.문장 부호문장 부호

 

구두점은 초판에서 ‘、。’만 인정했으나 1940년 개정판에서 가로쓰기에 맞추어 ‘, .’도 인정했다.

따옴표는 초판에서 꺾쇠(「 」, 『 』)만 인정했으나 1940년 개정판에서 가로쓰기에 맞추어 현행 맞춤법과 같은 따옴표 (‘ ’, “ ”)도 인정했다.

고유 명사에는 줄을 그었다(세로쓰기에서는 글자 왼쪽에, 가로쓰기에서는 글자 아래쪽에).

 

 

 

 

 

 

 

 

 

 

 

 

 

 

 

 

 

 

 

 

 

 

 

 

 

 

 

 

 

 

 

 

 

 

 

 

V. 현행 한국어 맞춤법

 

 

한글로써 우리말을 적는 규범으로 1933년 <통일안>이 만들어진 이후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50여 년 사이에 다른 사회적인 변화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말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간 이러한 변화에 따른 맞춤법의 부분적인 개정이 있어 왔음도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여기서는 그 동안 사용해 오던 <통일안>의 제정과 수정의 경위를 간단히 살펴보고, 아울러 <한글 맞춤법>이 확정되기까지의 사정을 알아본 다음, <통일안>과 <한글 맞춤법> 사이의 차이점을 대강 정리하여 봄으로써 <한글 맞춤법>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그간 사용해 오던 <통일안>은 1930년 12월 13일, 현 한글 학회의 전신인 조선어 학회 본회 총회의 결의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 경의에 따라 권덕규, 김윤경, 이병기,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정인섭, 최현배 등 12인의 위원이 2년 여의 심의를 한 결과 1932년 12월에 <통일안>의 원안이 작성되었고, 다시 김선기, 이탁 등 6인의 위원이 증선되어 모두 18인의 위원이 원안을 축조, 토의하여 제1독회를 마쳤으며, 그 내용을 권덕규, 김선기, 김윤경, 이희승, 이윤재, 장지영, 최현배 등 수정 위원 10인이 검토하여 약 6개월 후 제2독회를 마쳤다. 권덕규, 김선기, 이희승, 이윤재, 최현배 등 정리 위원 9인이 그 결과를 전체적으로 정리하여 그 해, 곧 1933년 10월 19일 임시 총회를 검쳐 확정했고, 그 해 10월 29일에 단행본으로 세상에 공표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제정된 <통일안>은 그 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1937년 3월 1일의 첫 번째 수정에서는 1936년 10월 28일(한글 기념일)에 <사정한 표준말 모음>이 발표되었으므로 부록에 실린 표준말 제7항과 제8항의 표준말 어례 전부를 삭제하고, <통일안>의 각 항 용어와 어례를 모두 사정된 표준말로 고쳤다.

 

1940년 6월 15일 두 번째의 개정에서는 본문 제19항 중의 ‘후’를 ‘추’로 고치는 동시에 <통일안>의 명칭 표기 중 ‘마춤법’을 ‘맞춤법’으로 쓸 것과, 제29항의 문구 수정과, 제30항의 ‘사이ㅅ’을 쓸 것 및 부록 <문장부호>의 증보 수정을 행하였다.

 

이후 1946년 9월 8일에 있었던 세 번째 개정에서는 ① 제10항에 ‘다만’ 줄을 넣고, ② 제30항을 고쳐 정하며, ③ 제48항에 ‘다만’ 줄을 넣고, ④ 제61항에 ‘다만’ 줄을 넣으며, ⑤ 제62, 63, 64항의 세 항을 없애고, 제65항을 제62항으로 삼으며, 새로 제63항을 두는 등의 여섯 가지를 종전과 다르게 고치게 되었다.

 

그 이후 있었던 네 번째(1948년 한글날)와 다섯 번째(1958년 2월 20일)의 개정은 엄밀하게 따져서 개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1948년에는 단지 1946년의 개정본의 전문을 순 한글로 바꾸었을 뿐이며, 1958년의 개정은 <통일안>의 본문 가운데의 문법 용어만을 문교부 제정의 문법 용어로 바꾼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통일안>은 약간의 수정이 있었으나 골격은 1933년에 제정, 공표된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공표된 직후부터 사회적 호응을 받아 우리 문자 생활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해방 이후부터는 문교부의 국정 교과서에 채택됨으로써 그 자리는 더욱 굳어져 <통일안>은 바로 정서법이라 부르게까지 되었다. 그러나 신문, 잡지 등 언론 매체는 물론이고, 심지어 문교부의 국정 교과서에서도 <통일안>의 표기에 따르지 않은 예가 나타나는 일이 있었다. <통일안>의 제정 이후 거의 반세기 동안 일어난 말의 변화와, 그 당시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자 생활에 맞추어 <통일안>에 대한 검토와 수정이 문제로 제기된 것이다.

 

이에 문교부는 1970년 2월에 국어 심의회의 건의에 따라 한글 학회를 주간으로 하여 6개 국어 연구와 관련된 학회의 대표들로서 국어 조사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 한글 맞춤법 재심 위원회를 두어 <통일안>을 수정하게 하였다. 그 재심 위원회는 2년여에 걸친 검토와 심의 끝에 작성된 수정안을 1972년 11월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이를 기초로 문교부에서는 여러 과정의 심의를 거쳐 1979년 12월에 <맞춤법안>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런데 약 10년에 걸쳐 마련된 <한글 맞춤법안>에도 상당한 문제점이 있어, 문교부는 이 안을 학술원에 이관하여 다시 연구, 검토하게 하였다. 학술원은 1982년 1월에 인문 과학부회 제2분과회 회원을 중심으로 어문 연구 위원회를 구성하고, 그 안에 맞춤법 소위원회를 두어 그 안을 수정한 <한글 맞춤법 개정안>을 1984년 12월에 문교부에 제출하였다.

 

문교부에서는 맞춤법의 개정 문제가 국가적인 사업일뿐 아니라, 국민의 문자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막대한 점에 비추어서, 학계와 언론계 등 국민의 여론을 다시 수렴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1985년 2월에 국어 연구소에 <맞춤법 개정안>의 검토를 위촉하였다.

 

국어 연구소에서는 맞춤법 심의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안>을 비롯하여 위의 여러 개정안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전국의 각계각층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심의에 반영하였다. 국어 연구소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7년 4월에 <한글 맞춤법 개정안>이 완성되자, 국민의 여론을 들을 필요가 있다고 하여 세상에 발표하였다. 이와 동시에 맞춤법에 식견이 높은 각계각층의 인사들의 검토를 받고자 각 관계 기관의 추천을 받아 맞춤법 심의 의원회 위원과 합동으로 맞춤법 검토 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에서 최종안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검토 위원회와 약간의 미진한 문제의 조절을 위한 조절 위원회 및 보완 심의회를 거쳐서 1987년 9월에 국어 연구소의 <한글 맞춤법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어 문교부에 제출되었다.

 

문교부에서는 곧바로 국어 심의회에 회부하여 그 안을 다시 심의 검토하게 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확정된 맞춤법은 1989년 1월 19일 <한글 맞춤법>으로서 ‘문교부 고시 제88-1호’로 공포되었는데, 그 부칙에 따라 1989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되었다. 이로써 약 20년에 걸친 <통일안>의 개정 작업은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한글 맞춤법>은 <통일안>의 개정이라 하기보다는 부분적인 보완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안>의 근본적인 개정을 주장하는 의견도 없지 않았지만, 문자 생활의 변혁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필요한 부분만 손질한 결과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글 맞춤법>과 <통일안>의 적절한 개정이라 할 것이다.

 

 

1.한글맞춤법 통일안(1933)과 현행 맞춤법(1988년)과의 차이점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한글 맞춤법》과의 비교를 통한 변화 조항 및 그 이유와 문제점에 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33년의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1988년 《한글 맞춤법》으로 바뀌면서 달라진 표기는 그리 많지 않다. 분철을 하며 기본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대원칙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사문화된 규정이라든가 미비한 규정, 언어 변화를 따르지 못한 규정, 일관되지 못한 처리 등에 대해서는 정비를 하였고 이에 따라 표기가 달라진 예가 일부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전면 개정이라기보다 보완의 성격을 띤다.

 

이제 <한글 맞춤법>과 종전의 <통일안>의 각 항을 비교하여 보기로 하자. 그러나 여기서의 비교는 대강의 내용에 국한하고 구체적인 내용의 비교는 각 항을 찾아가서 보도록 하였다. 다음의 도표에 보인 관련항의 제시는 그에 대한 도움이 될 것이다. 두 가지 맞춤법안을 다음과 같이 큰 틀로 정리할 수가 있다..

 

<한글 맞춤법>과 <통일안>의 비교

 

*은《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한글 맞춤법》에는 없는 조항임

 

내용

<통일안>

<한글 맞춤법>

체제

총론, 각록 7장 63항

부록(표준말, 문장부호)

본문 6장 57항

부록(문장부호)

원칙

총론

제1장 총칙

맞춤법

1.

제1항

띄어쓰기

3. :토에 대한 언급

제2항

외래어 표기

각론 제60항:원칙 제시

제3항 <외래어 표기법>으로

 

각론

 

한글 자모

제1장 자모

제2장 자모

자모

제1항:수, 순서

제2항:이름

제4항:수, 순서, 이름

※사전에 올릴 적의 순서 명시

소리

제2장 성음에 관한 것

제3장 소리에 관한 것

된소리

제1절 된소리

제3항:환경 구분 안함.

제1절 된소리

제5항:된소리 환경 구분 구체화

구개음화

제3절 구개음화

제5항 [붙임1]과 일치

제2절 구개음화

제6항:구개음화 인정

‘ㄷ’ 소리 받침

제6항:관용의 인정, 유형 구분

제3절 ‘ㄷ’ 소리 받침

제7항:관용의 인정, 유형 구분 안함.

모음

제4장 한자어

제36항:‘ㅖ’

제39항:[의, 희]

제4절 모음

제8항:[ㅖ, ㅔ]→‘ㅖ’

제9항:[ㅢ, ㅣ]→‘ㅢ’

두음 법칙

제42항:[ㄴ]

제43항:[ㄹ]

제44항:[ㄴ]

제5절 두음 법칙

제10항:[ㄴ]

제11항:[ㄹ]

제12항:[ㄴ]

겹쳐 나는 소리

*

제6절 겹쳐 나는 소리

제13항:한 낱말 안에서의 음절의 중복

형태

제3장 문법에 관한 것

제4장 형태에 관한 것

체언과 조사

제1절 체언과 토

제7항:원형을 밝혀 적음

제1절 체언과 조사

제14항:구별하여 적음

어간과 어미

제2절 어간과 어미

제8항:구별하여 적음

제2절 어간과 어미

제15항:구별하여 적음

cf. ‘-오’와 ‘-요’ 포함

어미

‘-아/어’, ‘-요’

*

*

제16항:‘-아’와 ‘-어’의 구별

제17항:어미 뒤의 ‘-요’

불규칙 용언

제10항

제18항:cf.18.4의 ‘ㅜ, ㅡ’가 줄어질 적 보완

※18.6 단음절 어간 뒤의 ‘-아’만 ‘-와’로, 그 밖에는 모두 ‘-워’

파생 명사,

파생 부사

제6절 어원 표시

제12항:‘-이’, ‘-음’;‘-이’

제13항:‘이’, ‘음’ 이외의 모음

제3절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

제19항:‘-이’, ‘-음/ㅁ’;‘-이/히’

cf.19.4[붙임]

명사+‘-이’

제14항:품사 전환 여부로 구분

제15항:‘-이’ 이외의 접미사

제20항:부사와 명사로 구분

cf.[붙임]

자음 접미사

제16항:명사와 어간 경우 구분

제21항:명사와 어간의 경우 구분

피․사동,

강세 접미사

제9, 17, 18, 19, 20항:유형별로 구분

제25항:용례 많음

제22항:접미사의 기능 구분 안함

22.1 ‘다만’ 규정:어원에서 먼 것

‘-하다, -거리다’

제21항 2. cf 1은 부사

제22항 유형별로 구분

제23항:‘-하다, -거리다’→‘-이’ 파생 명사

cf.[붙임]‘-하다, -거리다’가 붙지 못하는 것

‘-이다’

제24항:‘-이다’

제24항:‘-거리다’→‘-이다’

‘-이/히’

제21항 1. cf 2는 명사임

제25항:‘-이/히’ 부사

‘-하다, -없다’

제23항:‘-하다’만

제27항 [붙임]:‘-없다’

제26항:1. ‘-하다’

26.2. ‘-없다’

합성․파생어

제7절 품사 합성

제28항:[붙임3]의 ‘이(齒, 虱)→니’는 없음

제4절 합성어 및 접두사가 붙은 말

제27항:합성어, 접두 파생어의 원형

cf.[붙임3]‘이(齒, 虱)→니’

‘ㄹ’ 탈락

제29항:‘ㄹ’→∅

제28항:‘ㄹ’→∅

‘ㄹ’→‘ㄷ’

*

제29항:‘ㄹ’→‘ㄷ’

사이시옷

제30항:윗말의 끝소리가 모음일 때에 된소리로 발음되면 사이시옷 사용

제30항: 순 우리말 합성어, 순 우리말과 한자어의 합성어, 두 음절로 된 한자어(6개만)

ㄱ.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는 것

ㄴ. ‘ㄴ’ 소리가 덧나는 것

‘ㅂ’, ‘ㅎ’

제31항

제31항:‘ㅂ’이나 ‘ㅎ’ 소리가 덧나는 것

모음 탈락

제52장 준말

제52항

제5절 준말

제32항:단어 끝 모음 탈락→앞음절의 받침

체언과 조사

제53항

제33항:체언과 조사의 축약→준대로 적음

모음 축약

제56항 2.

*

*

제56항 2.

*

*

제56항 4.

제56항 1. ‘ㅡ’+‘-이-’

제56항 3. ‘ㅗ, ㅡ’+‘-이어, -이었’

*

제56항:‘ㅎ’을 그 자리에 두거나 윗음절의 받침으로

*

*

제57항

제34항:‘ㅏ, ㅓ’+‘-아/어’;‘-았/었-’

cf.[붙임1]:‘애, 에’+‘-어, -었-’

[붙임2]:‘하여’→‘해’

제35항:‘ㅗ, ㅜ’+‘-아/어’;‘-았/었-’

cf.[붙임1]:‘놓아’→‘놔’

[붙임2]:‘외’+‘-어, -었-’

제36항:‘ㅣ’+‘-어’→‘ㅕ’

제37항:‘ㅏ, ㅕ, ㅗ, ㅜ, ㅡ’+‘-이-’

제38항:‘ㅏ, ㅗ, ㅜ, ㅡ’+‘-이어’

제39항:‘잖’, ‘찮’

제40항:‘하’의 ‘ㅏ’ 탈락→거센 소리로

cf.[붙임1]:‘ㅎ’을 어간 끝소리로

[붙임2]:‘하’의 탈락

[붙임3]:부사의 경우

띄어쓰기

제7장 띄어쓰기

제5장 띄어쓰기

조사

제61항:용언의 어간과 어미 포함

cf.‘다만’:의존 명사 붙여쓰기 허용

제1절 조사

제41항:‘명사, 부사’+‘조사’

의존 명사

*

제2절 의존 명사, 단위를 나타내는 명사 및 열거하는 말 등

제42항:띄어 쓴다

단위

제61항:‘다만’

제61항 ‘다만’:띄어쓰기 허용

제43항:띄어 쓴다

cf.‘다만’:붙여 쓰기 허용

제62항:십진법에 따라

제44항:만(萬) 단위로

연결어

*

제45항:띄어 쓴다

단음절 단어

제61항:‘다만’

제46항:붙여 쓰기 허용

보조 용언

*

제3절 보조 용언

제47항:붙여 쓰기 허용

성명, 호칭어

제63항:띄어 쓴다

제4절 고유 명사 및 전문 용어

제48항:성과 이름, 성과 호는 붙여 쓴다.

호칭어, 관직명:띄어 쓴다

성명 이외

제63항:띄어 쓴다.

제49항:붙여 쓰기 허용

전문 용어

*

제50항:붙여 쓰기 허용

‘-이’와 ‘-히’

*cf.제12항 2. 제14항 1. 제21항 7. 부록 5 참조

제6장 그 밖의 것

제51항:‘이’로 발음되는 것만 ‘-이’로

본음․속음

제47, 48, 49, 50, 51항

제52항:소리에 따라

어미

보유 첫째:구분은 따로 하지 않음.

제53항:예사소리로 표기하는 경우와 된소리로 표기하는 경우

접미사

*

제54항:된소리 표기 접미사

어휘

*

보유 둘째:‘-든’으로 통일

제55항:‘맞추다, 뻗치다’

제56항:‘-더라, -던, -든지’

동음 이의어

*

제57항

부록

부록:문장부호

부록:문장부호

문장부호

39개 항의 나열

규정 보완, 불필요한 부호 삭제

 

 

1. *표는 <통일안>에는 없는 조항임.

2. <통일안> 총론 2의 표준어에 관한 규정은 따로 <표준어 규정>이 마련됨으로써

삭제됨.

3. <통일안>에 있던 제33, 34, 37, 38, 40, 41, 45, 46, 47, 48, 50, 51항 등은

<한글 맞춤법>에서 제외됨.

4. <통일안>에 항 표시만 한 것은 <한글 맞춤법>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음을 의미함.

 

 

2. 현대 표기법의 기본 원리

 

1) 주시경 선생의 本音 이론

 

1906 대한국어문법에서는 예외없는 본음 표기를 적용하였고, 1910 국어문법에서는 기본 원리는 본음 표기이지만, 몇 가지 경우의 예외를 인정. 변칙 용언 어간, 어미와 조사, 예외적인 파생어 본래 어법 자체가 예외이므로, 표기에서도 예외를 인정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겼다. 1914 ‘말의소리’에서는 '본음' 판단에 변화(혼란)가 일어나 '높'과 '놉'을 모두 본음으로 인정했다. 1933년의 한글맞춤법통일안은 1910년 국어문법 당시의 원리를 적용하였다. 한글맞춤법의 규범이나 설명에서 본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양이론의 용어와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맞춤법의 원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어려워짐.

 

단어나 형태소의 음가를 '본음/임시의음'으로 구별하고, 표기에서는 '본음'을 적어야한다. 형태음소적 원리를 따른다.

 

예)밭, 높고, 곶 놓삽고 (표의적 표기법)

예) '높-'의 경우 '높'과 '놉' 두 가지로 발음이 되지만, '높'을 본음으로 봄.

 

 

3.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이러한 띄어쓰기는 문장의 중의성을 피할 수 있다.

 

예) 나물좀다오 >나 물 좀 다오/나물 좀 다오

 

4. 가로쓰기

 

최초 가로쓰기 문헌으로는 '예슈 셩교 누가복음 전셔'로 추정된다. 이는 영국 성서 공회에서 기증한 것으로 최초의 한글 성서이다. 1950년대 들어서는 주시경과 지석영 등 한글 보급에 힘쓰는 학자들이 가로쓰기를 주장하며 '신정국문' , '자전석요'등을 발표했다.

 

위 내용은 교재에서 다루는 중세국어 표기법과 근대국어 표기법 그리고 현대국어 표기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더 나아가 중세국어의 문법상의 특징과 어휘상의 특징, 음운상의 특징,

 

 

 

 

 

 

 

 

 

 

 

 

 

 

 

 

 

 

 

 

 

 

 

 

 

 

 

VI.현행 맞춤법의 문제점

 

1. 총칙에 나타난 문제점

 

 

한글 맞춤법의 총칙은 한글 맞춤법의 세부 규정을 모두 포괄하는 대원칙으로 3개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항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제1항은 한글 맞춤법의 대원칙으로, 무엇을 어떻게 적을 것인가를 규정한 조항이다. 그러면 여기서 제1항에 나타난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어법에 맞도록’이라는 개념은 문제가 있다. 일반 언중의 입장에서 ‘어법’이라는 개념은 너무 포괄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총칙이 갖는 포괄성이란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제1항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겠지만, 임홍빈(1997: 36~7)이 제시한 언어규범이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요건을 고려해 볼 때 명료성의 원리와 자족성의 원리에 맞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한글 맞춤법 해설(1998: 38)에서는 ‘어법’의 개념을 ‘언어 조직의 법칙, 또는 언어 운용의 법칙’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어법에 맞도록’ 한다는 것은 결국 뜻을 파악하기 쉽도록 하기 위하여 각 형태소의 본 모양을 밝히어 적는다고 하면서, 정작 명료해야 할 규정 전문에는 그 규정 자체로 설명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점에서 한글학회의 맞춤법 규정 총론1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총론 1: 한글 맞춤법은 표준말의 각 형태소를 소리대로 적되, 그 원형을 밝힘을 원칙으로 한다.

 

이 조항은 두 가지 면에서 현행 맞춤법 규정과 다른데, 첫째, ‘형태소’라는 개념이 도입된 것이고, 둘째, ‘어법에 맞도록’이 ‘원형을 밝힘’으로 대치된 것이다. 즉 현행 맞춤법 규정의 ‘어법에 맞도록’이 한글학회 안에서는 ‘형태소의 원형을 밝힘’과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형태소’라는 언어학적 용어를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규정에 도입하는 것이 타당한 일인가 하는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형태’라는 개념이 한글 맞춤법에 들어 와 있다는 점을 참고하면,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에서 그 형태소를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 용어 자체는 낯설지만, 언어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고, 한글 맞춤법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문법 지식이 필요한 상황에서 ‘형태소’라는 개념을 도입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연규동, 1998: 17)

 

또한 ‘형태소’라는 개념을 도입하면 한글 맞춤법의 여러 부분이 훨씬 설명력 있고 간단해진다. 즉 제1항에서 ‘형태소의 원형을 밝히어’라고 적는 것이 명시적으로 규정되면, 현행 한글 맞춤법의 다음과 같은 조항들은 원칙적으로 필요 없게 된다.

 

제14항 체언은 조사와 구별하여 적는다.

제15항 용언의 어간과 어미는 구별하여 적는다.

제19~26항 접미사가 붙어서 된 말은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제27항 둘 이상의 단어가 어울리거나 접두사가 붙어서 이루어진 말은 각각 그 원형을 밝히어 적는다.

 

이들은 모두 형태소가 결합할 때에 소리가 바뀌는 일이 있더라도 그 바뀐 소리대로 적지 않고 언제나 기본 형태를 밝혀 적는다는 조항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첨가하자면, 북한의 조선말 규범집 총칙에 제시되어 있는 ‘관습을 따르는 것을 허용한다.’는 표현을 참고할 만하다(연규동, 1998: 24). 이는 현행 한글 맞춤법 제7항과 같은 조항들에 적용되는 표현이다. ‘한글 자모의 음가대로’의 원칙도 아니고, ‘원형을 밝히어’의 원칙도 아닌 관습에 의한 표기도 있으므로, 이 같은 것을 밝히는 것이 더욱 명시적인 총칙의 역할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한글 맞춤법은 ‘한글 자모의 음가대로’, ‘원형을 밝히어’, ‘관습에 따라서’의 세 가지 원리에 의해 표기된다고 할 수 있다.

 

 제2항 문장의 각 단어는 띄어 씀을 원칙으로 한다.

 

이 항은 단어를 기준으로 하여 띄어 쓸 것을 규정하고 있는 조항이다. 그런데 이 조항에서 ‘문장의’라는 말은 불필요한 표현이다. 만약, 이러한 표현에 중점을 둔다면 ‘문장 속에서 사용되지 않는 단어의 띄어쓰기는 어떻게 하느냐?’도 규정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문장 안에서나 문장이 아닌 경우나 그 둘을 구별할 필요도 없으므로 굳이 ‘문장의’를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또한, 제5장(제41항~50항)에 따로 띄어쓰기 규정이 세부적으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제2항이 과연 총칙에서 따로 규정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총칙에서는 제1항만을 다루고 이 띄어쓰기에 관한 조항은 제5장으로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북한의 조선말 규범집이 아예 ‘맞춤법 총칙’과 ‘띄어쓰기 총칙’으로 나뉘어 있음에 주목할 만하다.

 

 제3항 외래어는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적는다.

 

우리말을 크게 고유어, 한자어, 외래어로 나눈다면, 우리말을 이루고 있는 모든 어휘에 대해 맞춤법이 규정되어야 한다. 고유어와 한자어는 대부분 맞춤법으로 표기가 가능하지만, 외래어의 경우 각 언어가 가진 특질이 고려되어야 하므로 ‘외래어 표기법’을 따로 두기로 한다는 규정이다.

 

그런데 현행 규정이 고유어 표기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지만, 한자어 표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외래어 표기를 위해 맞춤법에 한 조항을 배려할 정도라면 외래어보다 훨씬 더 많은 한자어 표기에 대한 언급이 한글 맞춤법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은지 이해할 수 없다.

 

혹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외래어도 한글 맞춤법이 표기해 내야 할 우리말의 일부임을 선언하고 있다고 하겠지만, 우리말에는 외래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글 맞춤법에서 외래어가 언급된다면, 한자어는 물론이고 역시 한글로 주로 적히는 방언, 옛말 등도 언급되어야 형평에 맞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조항은 삭제해도 무방할 것이라는 생각이다(연규동, 1998: 27).

 

또한 “한글 맞춤법”과 따로 정해지는 규정을 매번 그 총칙에 명시해야 하는 것이라면 “표준어 규정” 혹은 “표준어 사정 원칙”이나 “표준 발음법”에 대해서도 동일한 대우를 해 주었어야 한다고 할 수 있다(임홍빈, 1997: 51).

 

총칙 제3항 외래어 표기법은 한글 맞춤법 총칙에서는 다루지 않아도 될 것을 다루고 있다. 외래어 표기법은 한글 맞춤법의 제1장에서 6장까지와 부록의 문장부호의 항 중 어느 곳에서도 언급이 없다. 이처럼 한글 맞춤법 규정 전문에 전혀 해당되지 않는 항을 총칙에 두고 있는 것은 일관성의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

한글 맞춤법 규정에 해당 사항이 있으면 한글 맞춤법 규정 전문에 외래어 표기에 해당하는 항을 삽입시키든가 아니면 외래어 표기에 관한 사항을 총칙에서 제외시켜야만 총칙과 본 규정간의 일관성이 있다고 하겠다.

 

따라서 외래어 표기는 한글 맞춤법 총칙에 두지 말고, 외래어 사정 문제, 외래어 표기와 발음 문제 등 여러 문제를 고려하여 외래어 표기법의 항에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 제2장 자모에 관한 규정의 문제점

 

 

 제4항 한글 자모의 수는 스물넉 자로 하고, 그 순서와 이름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ㄱ(기역) ㄴ(니은) ㄷ(디귿) ㄹ(리을) ㅁ(미음) ㅂ(비읍) ㅅ(시옷) ㅇ(이응)

ㅈ(지읒) ㅊ(치읓) ㅋ(키읔) ㅌ(티읕) ㅍ(피읖) ㅎ(히읗)

ㅏ(아) ㅑ(야) ㅓ(어) ㅕ(여) ㅗ(오) ㅛ(요) ㅜ(우) ㅠ(유) ㅡ(으) ㅣ(이)

 

[붙임 1] 위의 자모로써 적을 수 없는 소리는 두 개 이상의 자모를 어울러서

적되, 그 순서와 이름은 다음과 같이 정한다.

 

ㄲ(쌍기역) ㄸ(쌍디귿) ㅃ(쌍비읍) ㅆ(쌍시옷) ㅉ(쌍지읒)

ㅐ(애) ㅒ(얘) ㅔ(에) ㅖ(예) ㅘ(와) ㅙ(왜) ㅚ(외)

ㅝ(워) ㅞ(웨) ㅟ(위) ㅢ(의)

 

[붙임 2] 사전에 올릴 적의 자모 순서는 다음과 같이 정한다.

 

자음 ㄱ ㄲ ㄴ ㄷ ㄸ ㄹ ㅁ ㅂ ㅃ ㅅ ㅆ ㅇ ㅈ ㅉ ㅊ ㅋ ㅌ ㅍ ㅎ

모음 ㅏ ㅐ ㅑ ㅒ ㅓ ㅔ ㅕ ㅖ ㅗ ㅘ ㅙ ㅚ ㅛ ㅠ ㅝ ㅞ ㅟ ㅠ ㅡ ㅢ ㅣ

 

이 조항은 아주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온 자모의 순서와 이름을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한글 자모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순서도 지금의 것과는 달랐다. 자모의 이름이 지금과 같은 식으로 불리게 된 것은 <훈몽자회>(1527)에서부터이다(연규동, 1998: 30). <훈몽자회>에서는 초성종성통용팔자(初聲終聲通用八字)와 초성독용팔자(初聲獨用八字)라는 이름으로 배열하고 있는데, 조금 차이는 있지만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글 자모의 순서와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한 듯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ㄱ, ㄷ, ㅅ’의 이름으로 ‘이으’ 유형의 명칭을 기본으로 하는 전체의 흐름에 벗어나 일관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의 명칭이 일관성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하고, 일일이 기억해야 한다는 부담감으로 작용한다는 측면에서 이와 같은 이름은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기역, 디귿, 시옷’처럼 예외 명칭이 생긴 이유가 <훈몽자회> 당시 ‘윽, 읃, 읏’에 해당하는 한자어가 없어 부득이 유사음 ‘역, 귿, 옷’을 찾아 이에 해당하는 한자어 ‘役, 未, 衣’를 음독 또는 훈독하여 차용한 궁벽한 조치의 결과로 볼 때 한자 문화가 지배하던 옛 시대 상황의 산물이므로, 한자 문화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오늘날의 상황에서 불균형하고 혼동과 불편을 주는 일탈된 명칭을 계속 고집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특히 이것을 ‘기윽, 니은, 디읃……’ 방식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는 이유는 한국어의 세계화와 관련지어서도 그러하다. 자모 명칭부터 헷갈리게 하느니 간결하게 통일하여 주는 것이 낫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는 북한 방식이 참고할 만하다. 북한의 조선말 규범집에서는 자모 명칭을 두 종류로 하여 ‘기윽, 니은, 디읃……’ 식으로 통일하고, ‘그, 느, 드……’ 방식도 허용하는데 외국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때 ‘그, 느, 드……’ 방식이 ‘<ㄱ+ㅏ>가’와 같은 음결합을 설명할 때 ‘ㄱ+ㅏ>그아>가’처럼 설명하면 음절 발음 이해가 훨씬 수월하다고 한다.

 

다음에 자모의 수를 각 자모 형태가 단일 자형으로 된 것 24자를 들고 복합 자형으로 된 것을 [붙임 1]에 추가하는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자모음자를 단일 자모 24자(자음 14+모음 10), 복합 자모 16자(자음 5+모음 11)로 하여 도합 40자로 규정하는 방식도 고려함직하다. 이 부분도 북한의 규정을 참고할 만하다 하겠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으로 이 규정은 한글 맞춤법과 관련된 조항이기에 음운의 명칭이나 배열순서보다는 초성, 중성, 종성이 모여 음절을 이루는 부서법을 중심으로 기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본문 규정에는 받침에 대한 내용이 빠져 있는데, 받침 27자도 본문에 추가하여 명시함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외래어 규정에는 7종성의 받침으로 제한한다는 받침 규정이 있으면서 ‘한글 맞춤법’에 받침 규정이 빠져 있는 것은 불균형하게 보일 수 있다.

 

 

첨부파일 한국어 어문 규범의 변천사에 대한 이해[1].

 

출처 :한국다문화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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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터

                                 Original site of

                            the Joseon

                          Language Society

 조선어학회는 1921년 주시경(周時經: 1876~1914)의 제자들이 한글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발족한 조선어 연구회의 후신이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활동이 중단되었다가 광복 후 한글학회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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