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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실 고르키(1905—1948)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본명은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Vosdanig Manoog Adoian인데 그는 아실 고르키란 예명을 사용했다. 아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Achilles에서 유래된 말이고 고르키는 러시아말로 ‘냉혹한 사람 the bitter one‘이란 뜻이다. 고르키란 이름을 러시아 작가 막심 고르키Maxim Gorky에서 따왔다. 고르키는 1904년 아르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고르키와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인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는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르키는 여동생을 데리고 난민 틈에 끼여 1920년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주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르키는 프로비던스와 보스턴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21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그만두고 나중에 교사로 부임했다. 1925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술 공부를 하였다. 초기에는 피카소의 영향으로 입체파 경향의 그림을 그렸으나, 호안 미로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공공 건물의 대형 벽화를 추상 양식으로 그렸다.
1940년대에 브르통(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이고 이론가로서 1941년에 뉴욕으로 왔다)을 만나서 그의 영향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호안 미로의 작품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을 보여주는 추상 형식을 만듬으로 자신의 양식을 정립하였다. ‘소치의 정원(1941)이 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21세기 시각예술의 p222에) 1941년에 재혼 후에 버지니아 풍경 속에서 서정적인 추상 소묘의 연작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 화실에 불이 나서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었다. 그 해에 암이 발생하였고,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고통스러워 하다가 1948년에 자살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혼합 모방하는 작업을 하였으나,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고르키는 폴록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폴록과 함께 그로부터 수학한 필립 페이비어는 “고르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고르키로부터 수학한 휘트니 대로우는 “고르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고르키는 자신의 강의실에 헝가리아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데리고 와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연주하게 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감성을 작품에 이입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로부터 수학했는데 로드코의 말에 의하면 고르키는 엄격한 교사였다. 가르치지 않을 때는 그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의 별명은 ‘워싱톤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구했다. 고르키는 동갑내기 드 쿠닝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 쿠닝은 고르키를 가리켜서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고르키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인정받은 예술가였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37년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고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고르키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썼다.고르키는 1944년에 제작한 <아티초크의 잎은 올빼미이다 The Leaf of the Artichoke Is an Owl>도 이때 소개했다.브르통은 “고르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적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한다면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고르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다. 칠레 사람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b. 1911)이었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자네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네”라고 했다. 마타는 그때 자신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타는 1939년에 뉴욕으로 왔고 젊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해 이내 미국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마타의 아파트에 모여 자동주의 드로잉을 배웠는데 예를 들면 불, 물, 대지,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로버트 머더웰과 폴록도 그의 아파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 화재가 나서 고르키의 그림 27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사라졌고, 이튿날 암이란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1948년 6월 26일에는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졌고,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르키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의 자신의 화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고통 Agony>을 그렸는데 피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 <고통>을 보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사용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왼쪽을 향한 것은 치과 의자를 의인화한 것이며 의인화한 기계 중앙에 발기한 자지처럼 생긴 것은 털이 달린 원시인들의 숭배물처럼 보인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고르키는 식물에서 주로 형태들을 가져왔다. 브르통은 “고르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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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자화상 작품은
아쉴 고르키 자화상 / Arshile Gorky Self-Portrait
나는 미술을 통해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인식,
바로 나의 세계관과 소통한다
- 아쉴 고르키 -
자신의 자화상과 상상 속 아내라니..
표현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아실고르키의" 예술가와 그의 어머니"는 아르메니아 학살의 생존자이다. 왼쪽 사진은 1912년 전 어린 시절의 유일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안녕,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여...
아쉴 고르키는 작업실 화재, 암 수술, 교통사고, 아내의 사망, 불운이 겹쳐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44세의 나이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폴록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자살한 아실 고키
아실 고키와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새 교사로 부임했다. 고키는 마흔네 살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가 뉴욕파 예술가들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았고, 폴록은 그로부터 미학적 도움을 직접 받았다. 고키는 1904년에 아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고키와 그의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키와 여동생은 난민들 틈에 끼여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배에 승선했는데 아버지는 그때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키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로비던스와 보스톤(Boston)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에 그만두었지만, 나중에는 교사로 재직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중요한 예술가이며,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Color-Field)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는데 로드코는 고키가 아주 엄격한 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로드코의 개인전람회가 열렸을 때 고키는 화랑으로 와서 그림들을 아주 진지하게 들여다보다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해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다고 회상했다.
고키는 처음에 세잔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 회화방법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은 ‘워싱턴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그리니치 빌리지 중앙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는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의 정원과도 같은 곳으로서 지금도 대학생들뿐 아니라 무명예술가들이 한가롭게 스케치를 하거나 행위예술가들이 이벤트를 벌이는 정감있는 장소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기자 프랑스의 이브 탕기와 앙드레 마송, 칠레의 로베르토 마타, 그리고 피카소와 같은 나라 스페인의 호앙 미로의 그림들을 연구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는 친구 예술가들을 화실로 초대한 후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점일세”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피카소가 회화의 모든 가능성들을 실험했다는 의미였다. 이때는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의해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을 예사로 할 때였다.
폴록과 다른 학생들은 고키와 데이비스가 학교식당에서 미술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폴록은 벤턴의 소개로 학교식당 탁자를 청소하는 일을 했으므로 고키가 식당에서 미인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인 고키는 육 척 장신에 검은 머리칼을 앞이마에 떨어뜨린 매력적인 모습이었고, 수염을 길렀으며, 숙고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소유자였다. 학교식당에 자주 와서 미인들에게 그의 특유의 우수에 찬 음성으로 “나의 화실로 와서 애인이 되어준다면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유혹하곤 했다. 미술학교에 재학했던 필립 페이비어는 “고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1930년 여름부터 재학중이었던 휘트니 대로우(Whitney Darrow)는 “고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1934년 고키의 첫 개인전이 필라델피아의 멜론(Mellon) 화랑에서 열렸으며, 이 시기에 그는 드 쿠닝과 우정이 두터웠는데 드 쿠닝은 고키를 가리켜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그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1937년에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했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에 줄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전람회 카탈로그를 앙드레 브르통이 쓰기도 했다. 브르통은 “고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기술하였다.
고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고, 고키의 아내는 고키와 마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에 화재가 나서 고키의 그림 스물일곱 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분실되었고, 다음달에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1948년 6월 26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이 부러졌으며, 그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그와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키는 우울증으로 번민하며 지내다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에 있는 화실에서 자살하여 세상을 버렸다. 브르통은 “고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그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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