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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시집은 무엇일까요? 지난 2012년 한 문학잡지에서 시인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1위는 백석의 시집 《사슴》이었습니다.
백석은 스물다섯 살이던 1936년 1월에 시집 《사슴》을 100부 한정판으로 발간했습니다. 워낙 적은 부수라 당시에도 희귀본이었는데, 신경림 시인은 대학시절 청계천의 고서점에서 백석의 이 시집을 발견했을 때 느낀 환희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사슴》을 처음 읽던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실린 시는 40편이 못되었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도 더 컸다는 느낌이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저녁밥도 반 사발밖에 먹지 못했으며 밤도 꼬박 새웠다. 그 뒤 《사슴》을 가방에 넣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꺼내 읽고는 했으니, 실상 그것은 내가 시를 공부하는 데 교과서가 되었던 셈이다.”
그런가 하면 끝내 백석의 시집을 구하지 못해 손수 필사본을 만들어 밑줄까지 그어가며 탐독했고 ‘그림 같다’, ‘걸작이다’ 등의 메모를 남긴 대학생이 있었습니다. 바로 윤동주입니다. 백석과 윤동주, 이름만으로도 벅찬,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들이지요. 그런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백석과 윤동주의 시에는 공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1982년도 출판본입니다. 그리고 1,800원이었네요.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될 일이지만 굳이 이 옛날 옛적의 시집을 찾아 꺼내든 까닭은 인터넷에 나오는 앞서의 구절이 어쩐지 원본과 다른 것 같아서였습니다. 그리고 역시나, 달랐습니다. 어느 부분이냐 하면, ‘프랑시스 짬’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입니다. 이 부분을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로 바꾸었더군요.
누군가는 그냥 ‘이름’일 뿐이잖아, 할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획 하나도 손대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설령 그것이 오타라고 할지라도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가 불렀던 이름 그대로 불러보고 싶고, 백석과 윤동주가 썼던 대로 읽고 싶어서입니다. 흥미롭게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경우에는 두 시인 모두 ‘라이넬 마리아 릴케’라고 불렀으나 프랑시스 잠에 대해서는 각각 다르게 불렀습니다. 백석은 ‘쨈’으로, 윤동주는 ‘잼’으로 말이지요. 백석과 윤동주는 일본어로 번역된 릴케와 쨈, 혹은 잼의 시집을 곶감 빼먹듯 두고두고 아껴 읽으며 시를 향한 꿈과 사랑을 키웠을 것입니다.
백석과 윤동주에게 서울은 타향이었습니다.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 윤동주는 만주 간도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지요. 먼 북쪽에 고향을 둔 둘은 1930년대에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기도 했지만 교류를 나눴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윤동주보다 다섯 살 위인 백석은 이미 유명한 시인이었고, 윤동주는 백석의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석이 1940년에 만주로 떠나면서 인연이 이어질 기회는 영영 사라졌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이 일제의 식민통치와 남북분단의 비극 속에서 어떻게 희생됐는지는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이 시대에 남은 독자로서 두 시인의 시에 프랑시스 잠과 마리아 라이너 릴케가 똑같이 등장하는 구절을 읽으며 이처럼 닮은 취향을 가진 둘이 만났더라면 서로 얼마나 좋아했을까, 하루가 멀다 하고 무릎을 맞대고 마주 앉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꽃과 당나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텐데, 하는 슬픔을 느낄 뿐입니다.
백석이 프랑시스 잠을 어떻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북한의 시인’으로 억류됐던 영향이 크겠지요. 대신 윤동주가 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북간도 친구였던 문익환 목사의 회고 덕분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가 연희전문대학 시절에 잠의 시집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읽었노라 하면서 시집의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냈는데 바로, 《밤의 노래》입니다. 이 시집은 나중에 《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됐는데 서문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백석이 나타샤와 함께 그토록 사랑한 ‘흰 당나귀’가 어떤 당나귀인지 투명하게 그려지지요. 프랑시스 잠의 삶이 그런 당나귀와 같았습니다. 그는 19세기 말에서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이어진 ‘벨 에포크(belle époque)’의 시인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일상은 화려했으며 미술과 음악, 문학이 활짝 피어나 훗날의 사람들은 그 시절을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불렀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공허하고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잠은 이 모든 것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파리의 풍요로움과 화려함으로부터는 물론, 공허와 불안으로부터도 등을 돌려 평생 피레네 산맥 근처에 은거하며 단순하고 현실적인 삶, 자연과 종교에 뿌리를 둔 시를 썼습니다. 그 덕에 잠의 시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하며 다정합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서양의 시를 읽을 때면 쉬이 느끼는 난해함 없이 친숙하게 다가옵니다. 일상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온 덕입니다.
특히 〈식당〉이라는 시는 그냥 우리 시라고 해도 믿길 정도로 친숙해서 윤동주가 왜 ‘짬’의 시는 구수해서 좋다고 했는지 알 수 있는데요. 어느 늦은 오후, 석양이 비쳐드는 방 안에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즈넉하게 앉아 천천히, 아주 천천히 세월의 태엽을 뒤로 돌려봅니다. 새삼 오랜 세월 내 곁에 말없이 있어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떠오른 것은 어머니 방에 있는 30여 년 된 장롱처럼 오래된 사물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어느 날 잃어버린,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고 잃어버린 물건과 기억이었습니다. 가졌을 때는 이렇게 쉽게 잃어버릴 줄, 잊어버릴 줄 몰랐던 것들 말입니다. 그와 같은 사물, 그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을까요. 잠은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런 프랑시스 잠을, 백석과 윤동주가 좋아한 또 다른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도 좋아했습니다. 릴케의 유일한 장편 소설 《말테의 수기》에는 덴마크 귀족 출신의 젊은 무명 시인 말테가 파리의 국립도서관에서 한 행복한 시인의 생활을 접하고 그 시인처럼 글을 써봐야겠다고 다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행복한 시인이 프랑시스 잠이었습니다. 그러나 말테의 생활은 파리라는 화려한 도시에서 불안과 소외로 비참하기만 했지요.
이런 말테를, 아니, 릴케를 일으켜 세운 또 한 명의 예술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오귀스트 로댕입니다. 둘의 인연은 1902년, 릴케가 출판사의 의뢰를 받아 로댕의 평전을 쓰면서 시작됐습니다. 1905년부터 이듬해까지는 로댕의 비서로 일했지요. 로댕은 릴케에게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데 있어 ‘바라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줬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관찰뿐 아니라 미학적 성찰까지 아우른 것이었습니다. 릴케가 《말테의 수기》에 쓴 구절이 있습니다
릴케의 문학론이자 예술가의 기본 자세라고 할 수 있을 이런 깨우침은 로댕으로부터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보다 전에 로댕에 대해 이런 글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로댕과 릴케가 천재이기 전에 얼마나 대단한 노력가였는지 깨닫게 해주는 글이지요. 로댕은 릴케가 예술가로서 힘든 순간에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으냐고 조언을 구했을 때도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제아무리 철인 로댕이라 해도 한 순간도 멈추지 않는 삶이 힘들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로댕이 릴케를 만났을 때가 60대, 릴케에게 매일 해준 말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힘내라고!”였습니다.
두 사람의 그 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젊은 시절에 로댕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나 곁에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서입니다. 그래서 젊은 날의 자신에게 필요했던 것을 젊은 시인 릴케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힘내라고!”는 격려의 말이지요. 그리고 그 기운이 릴케에게로, 또 릴케에서 백석과 윤동주에게로 전해졌을 것입니다. 로댕의 묵직하고 따뜻한 두 손이 어깨를 쓰다듬는 것 같은 이 말을 당신에게도 전합니다. “힘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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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색과 바람의 결과 별의 빛마저 예사롭지 않다. 시인의 언덕에서는 딛는 걸음마다 청초한 감성이 운율처럼 스민다. 그가 별을 헤며 북간도의 어머니를 그렸듯,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사랑하리라 다짐했듯, 언덕마루에서 누상동 시인의 옛집을 바라본다.
청운동길을 올라 부암동과 청운동의 경계에서 멈춘다. 머리 위로 고가가 지난다. 인왕산길과 북악산길을 잇는 아스팔트다. 옛날에는 인왕산 줄기가 그 길을 따라 창의문과 잇댔겠지. 그리고 다시 북악산으로 이어졌으려나. 서울성곽도 나란했겠지. 아주 먼 시절이다. 그럼에도 부암동과 청운동은 서울에서 가장 고전적인 동네다. 아련한 그리움을 품은 마을이라지. 대변하듯 저만치에 ‘클럽 에스프레소’다. 부암동의 오래된 카페다. 진한 에스프레소향이 걸음을 부른다. 시인의 언덕 앞에서 잠깐 망설인다. 시(詩)와 커피다.
걸음을 돌려 계단을 오른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은 최규식 동상을 지나 왼쪽으로 첫 번째 길이 난다. 너른 아스팔트를 따라 청운공원의 진입광장에 이른다. 하지만 부암동을 앞둔 고가 아래 두 번째 길을 택하는 것이 낫다. 첫 번째 길은 청운공원과 시인의 언덕 가운데를 가른다. 두 번째 길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올라 청운공원으로 내려가는 행로가 자연스레 이어진다. 물처럼 흐르는 동선이다. 산책에 알맞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은 매혹적이다. 곱게 써내려간 붓글씨는 시의 운율처럼 걸음을 이끈다. 계단을 내려올 때는 한눈에 들어온다. 사뿐히 즈려밟고 내려설 이유가 없겠지. 여운과 은유가 없는 시어(詩語)라니. 계단을 올라갈 때는 숨은 그림처럼 한 구절씩 차례로 고개를 내민다. 한 걸음에 한 줄의 시구(詩句)다. 하지만 거꾸로 읽어가는 시다. 그것이 또한 묘미다. 몇 계단 올라서 한 편의 시가 끝나면, 그제야 지나온 걸음을 돌아본다. 계단을 걷는 한 편의 시 위로 긴 그림자가 발자국처럼 남는다.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다던 「자화상」 같은 풍경이다. 시인의 길에서는 시처럼 걸어도 나쁘지 않겠지.
첫 계단에 다가서는 시가 「자화상」은 아니다. 그 마지막 행은 ‘내 마음은 코스모스의 마음이요, 코스모스의 마음은 내 마음이다’라고 적혔다. 한 번에 써내려간 일필휘지(一筆揮之)의 거침없는 글씨체도 시성을 담았다. 시인의 마음처럼 흐른다. 한 걸음 더 내디디니 ‘코스모스 앞에서 나는 어렸을 적처럼 부끄러워지나니’란다. 윤동주 시인의 「코스모스」다. 1938년 9월 20일에 쓴 시다. 그는 시마다 쓴 날짜를 적었다지. 그리고 계단의 끝자락에서 「별 헤는 밤」과 마주한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라는 첫 구절이다. 시인은 이 언덕에서 밤하늘의 별을 헤아렸을까.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멀리 북간도에 계신 어머니를 그렸을까.
계단을 지나 언덕배기로 향하는 길에는 나무 난간이 가지런하다. 난간마다에도 시인의 시구들이다. 손끝으로 담으며 걷는다. 길가로는 코스모스가 하늘거린다. 시인은 저 꽃들의 마음이 ‘내 마음’이라 했던가. 기억에 남은 몇 구절의 시가 코스모스를 따라 아른거린다. 언덕 한가운데는 자그마한 반원의 무대가 마련됐다. 주변으로는 자연스레 쉼터들이다.
그 곁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섰다. 앞면에는 「서시」가 새겨졌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마음이다. 「서시」는 누상동 하숙 시절에 쓴 시다. 그는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 기숙사를 나와 옥인동 아래 누상동에 하숙집을 얻었다. 소설가 김송의 집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청운공원의 제일 높은 자락에 자리한 것도 그런 까닭이다. 언덕에서는 청운동과 옥인동, 누상동을 잇는 풍경이 차례로 이어진다. 반대로 시비의 뒤편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첫 해에 쓴 시다. 「슬픈 족속」이다. 각 2행 2연으로 쓴 짧은 시는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하다. 서정을 배제한 의기다.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가슴 아린 현실이 서렸다.
한 편 한 편 시를 읽으며 시인의 언덕을 걷는다. 부암동 쪽으로는 서울성곽이 지난다. 성곽 쪽 길 끝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시인의 눈인 양 언덕을 굽어본다.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장소다. 길의 난간에는 그의 시 「눈」이다. ‘지난밤에 눈이 소복이 왔네’라는 시구다. 눈 쌓인 겨울날 이 언덕에 걸음을 내도 좋으련…. 소나무 아래 서서 풍경을 바라본다. 부암동의 전경이다. 가까이에는 초록지붕의 동화 같은 집이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배경이다. 「찬란한 유산」도 찍었다지. 그리고 인왕산과 북한산까지 내달리는 풍경이다. 높게 솟은 빌딩이 없으니 동네가 산세에 포근히 안긴다. 사람의 집이 소박하므로 자연은 장대하다. 가까운 북악산 쪽으로는 창의문 지나 서울성곽이 오른다. 그 또한 장관이다.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생기기 전부터 조망 명소로 사랑 받던 이유를 알겠다.
반대쪽 서울 시가의 풍경도 곱다. 먼발치 남산의 N서울타워에서 종로 일대까지 퍼져나가는 전경이다. 가까이로는 청운벽산빌리지다. 주황색 지붕들이 층층이 자리해 마치 유럽의 어느 마을인가 싶다. 이색적인 풍광이 매력 있다. 서울 시가지는 윤동주 시비 옆이나 언덕 아래 전망대 정자에서 보는 풍경이 좋다. 정자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레 공공미술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에도 눈길에 닿는다. 청운공원 진입광장의 랜드 마크다. 높이 2.6미터에 긴지름이 4.86미터에 이르는 타원형 철구조물이다. 작품 위로 시민들이 소망을 담은 돌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2008년 10월 경복궁 고궁박물관 뜰에서 옮겨왔다. 지금도 진행형이다.
청운공원은 「인왕산에서 굴러온 바위」에서 출발해 바닥분수까지 이르는 산책로로 이루어져 있다. 두 갈래로 갈라져 다시 만난다. 여름날에는 분수가 더위를 씻겨준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전망도 좋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위태한 아파트 단지였다. 1970년대 초에 지어진 청운시민아파트가 있었다. 안전상의 문제로 철거한 후 2006년 청운공원으로 조성했다. 그후로는 동네 사람들만 알음알음 찾아들었다. 서울의 전경을 조망하고 서울성곽의 길을 걸었다지.
윤동주 시인의 언덕이 생기고서는 시인의 자취 덕에 찾는 이가 늘었다. 하늘과 별과 바람의 부름이겠지. 그래도 아직은 환한 낮의 걸음이다. 하지만 밤이어도 좋다. 연인과 다정히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을 노래할 수도 있겠지. 별이 바람에 스치우는 소리도 들을 수 있으려나. 별빛 같은 도시의 밤 풍경인들. 청운공원은 야경도 아름답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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