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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교정] = 룡정의 자랑,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알아보기
2018년 03월 25일 21시 25분  조회:5236  추천:0  작성자: 죽림
김혁 소설가, 연변1중학생들에게 '한락연 인생' 특강
(ZOGLO) 2018년3월25일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인생 조명한 대형 특강 연길서

(흑룡강신문=하얼빈)렴청화 연변특파원=
21일, 조선족의 훌륭한 아들이며 룡정의 자랑인 한락연의 생애가 연변1중에서 집중 조명되였다.

  올해는 한락연 탄생 12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연변1중의 400여명 사생과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한락연 평전'의 저자이며 청소년을 위한 인물 시리즈로 '한락연의 이야기' 위인전기를 펴낸 김혁소설가가 <한락연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한락연(1898-1947)은 걸출한 정치가, 혁명가, 예술가, 고고학자로 룡정에서 태여났다. 그는 '중국의 피카소'로 불린다. 조선족으로서는 맨 첫 사람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당조직 건설에 기여했고 국내 최초의 미술학교인 상해미술전문학교(현재 남경미술학원)를 졸업하고 조선인으로서는 가장 일찍 해외류학을 다녀왔으며 심양미술전문학교를 설립했다. 또한 중국 조선족으로서 국제반파쑈투쟁에 참가한 첫 사람, 중국 조선족으로서 첫번째 장군으로도 기록된다. 그외 서역의 고고학연구에서도 획기적인 성과를 올려 중국예술사에 진귀한 유산을 남겼다.

  연변1중 1학년 9반 최유경학생은 "전에는 한락연에 대해 잘 몰랐다"고 밝히고 나서 "그의 특이하고도 전기적인 인생, 그중에서도 이름에 락(乐)자를 새겨넣을 만큼 긍정적인 성격에 감동받았다. 한락연의 사진과 그림들을 꼭 찾아보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특강을 마친 김혁소설가는 "한락연에 대해 알고있는 사람들이 적다. 그러나 강연중에 적극 호응해주는 아이들을 보면서 보람과 더불어 이런 특강을 계속 조직해가야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밝혔다.

 

 

  한편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룡정 윤동주연구회 회장 등 직책을 맡고 있는 김혁소설가는 급변을 겪고 있는 조선족사회에 민족의 위인을 알리는 작업이 절실하다고 판단, 다년간 조선족의 걸출한 인물들을 글로 조명하고저 노력해왔다. 한락연, 윤동주, 주덕해, 김염 등 위인들의 사적이 그의 필끝에서 돋을새김되여 독자들과 만나왔다.

  연변1중, 연길시고령사회교육문화원에서 이날 행사를 주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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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덤으로 더 참고하기...





흑룡강 치치할시 룡사공원에 있는 격언정, 한락연이 격언정을 설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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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색화가” 한락연 (10) 
 
                                  /김 혁
 
치치할(齐齐哈尔)의 격언정(格言亭)
 
할빈에서의 한락연의 자취는 치치할로 이어졌고 그 족적을 따라서 우리는 혹한속의 려정을 강행, 할빈에서 360키로메터 떨어진 치치할시로 향했다.
 
치치할, 흑룡강성의 서부에 위치한 오래된 공업도시로서 인구는 553만 명, 면적은 4만3000km2이다. 일반적으로 이곳의 주민은 한족이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만주족, 조선족, 몽골족, 다우르족도 거주한다.
황량한 겨울의 들을 기차는 질주했다. 유명한 공업도시 대경을 경과, 석유를 걸러올리는 펌프들이 벌판에서 군무라도 추는듯 렬을 지어 서있었다. 부지런히 “팔 다리”를 휘젓는 풍경이 그 무슨 춤에 신들린 사람처럼 퍽 인상적이였다. 그리고 무연한 목초지가 이어졌다. 전국에서도 가장 큰 목초지의 하나라고 한다. 치치할이라는 뜻도 다우르족의 언어로서 목초지대를 가리켜 말한다고 한다. 눈이 닿지못할 정도로 아스라하게 펼쳐져 바람에 쓸리는 억새풀의 파도를 보면서 당년에 자그만 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 태여나 뜻을 품고 동북의 광활한 들을 누볐을 우리의 선각자- 한락연을 떠올려보았다.
 
할빈에서의 한락연의 행동은 주의를 불러일이켰고 그의 신변에 위험이 닥침을 예감한 당조직은 그에게 할빈을 떠나도록 지시를 주었다. 한락연의 학생의 아버지가 흑룡강성 공안국의 국장 량빈이였다. 량빈의 도움으로 한락연은 치치할로 향했고 치치할 룡사공원의 감리(监理)로 취직하게 되였다.
 
룡사공원은 광서33년(1907년)에 세워진 공원으로서 청나라정부가 세운  첫 공원이며 그 면적이 64헥타르나 되는 가장 큰 공원이다.
룡사공원에 있는 동안 한락연은 신분을 감추고 혁명활동에 종사하는 한편 화가로서의 본분을 잊지않았다. 그 감출수 없었던 예술가의 장끼는 이 삭막한 치치할의 들에서 다시한번 빛을 발했다.
 

격언정앞에서의 필자
 
 
한락연은 공원내의 정자며 루각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청나라건물들의 고전풍격을 띄고있음을 발견했다. 이에 그는공원내의 단일화를 깨고 독특한 개성을 띈 구라파식 정자 하나를 설계해 냈다.
높이 10메터가량 되는 정자는 백옥같은 8개의 원주형 기둥이 떠받치고 있고 삼각형의 루각우에 시계 하나를 떠이고 있다. 8개의 원주형 기둥에는 흠상하고있는 사람들의 신심을 정화시켜주는 격언들이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이름을 “격언정”이라고하였다. 시계를 떠이고있었기에 한때는 이곳을“종정(钟亭)”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새로운 풍격 독특한 조형의 이 건물은 천편일률이 란무하던 공원내에서 “군계일학”으로 단연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격언정”은 룡사공원의 하나의 새로운 경관으로 되였다.
한락연의 관리에 따라 룡사공원에는 커다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룡사공원의 공회주석 류려려(刘莉莉)녀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에 따르면 격언정은 세월의 부침을 이겨내지 못해 붕괴의 위험에 처한데서 일찍  1990년대말에 허물었다가 시정협위원들의 건의로 2004년에 그 자리에 꼭 같은 모습으로 복원되였다고한다.
 

30년대말 룡사공원을 찾은 유람객들, 그 뒤 배경으로 격언정이 또렷이 보인다.
 
 
류려려 녀사는 한락연의 고향에서 온 우리를 반겨 맞아주면서 진귀한 사진 한 장도 제공해 주었다. 1930년대 말, 유람객들이 격언정앞에서 찍은 사진, 그 색바랜 사진에서 우리는 한락연이 세운 격언정의 원 모습을 고스란히 찾아볼수 있었다.
 
이시기 한락연은 룡사공원 감리의 신분으로 활동하면서 치치할뿐아니라 수분하(绥芬河)에도 중국공산당 련락소를 건립했다.
 


 
종합신문” 12 27
[출처] “홍색화가” 한락연 (10)|작성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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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동아일보에 실린 한락연의 기사

성경시보에 실린 한락연의 미술활동 관련 기사

조기 공산주의 간행물인 향도


최초의 개인 유화전을 했던 곳

할빈 보육중학교, 한락연은 할빈에서 보육중학교 미술교원의 신분으로 활동했다

한락연이 꾸린 락천사진관이 있었던 곳

흑룡강 치치할시 룡사공원에 있는 격언정, 한락연이 격언정을 설계했다


한락연(한행지)를 시정국 공정과 과원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
 
 

프랑스 류학시절 작품활동을 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거리에서 사생하고있는 한락연

빠리 개선문의 부조 유화(한락연)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양호성장군 등과 함께 귀국하는 배에서(뒷줄 좌로 다섯번째가 한락연), 이 사진은 온가보 총리의 백부 온붕구가 수장한 사진이다

 
홍색화가” 한락연 (32)
 
                                /김 혁
 
 
예술가로서 한창 성숙된 작업을 선보일 나이에 당한 한락연의 조난 소식에 중국 문화계는 커다란 슬픔에 빠졌다.
얼마후 수색대가 비행기의 잔해를 발견했으나 그의 시신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사고현장에 대한 상세한 보도가 없었고 또 한락연의 아무런 유물도 찾지 못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믿기 어려워했고 또 그의죽음에 대해 많은 의난점을 제기했으며 그의 죽음은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남게 되였다. 그를 알고 있던 사람들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일말의 기대를 버리지 않았으나 그는 끝내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
 
한락연은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그가 사랑했던 고비사막의 한줌의 먼지로 스러졌다. 실크로드에 남아 있는 바람에 유린당하고있던 고대 유적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돼 그 발굴 작업에 혼신을 쏟아부으며 선구적 업적을 보였던 그는 자신의 념원대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고비사막에 영원히 묻힌것이다.
 
중국인민해방군이 서북지역에 해방의 붉은 기를 꽂을때 주은래가 보낸 사업일군의 배치로 류옥하녀사는 일가를데리고 전란을 겪는 란주를 떠나 해방구로 오게 되였다. 그는 한락연이 남긴 200여폭의 회화 유작을 정리하고 두자녀를 데리고 란주를 떠나 귀양을 거쳐 광주에 도착하였다.
해방후 류옥하녀사는 유엔의 초청도 마다하고 조직의 배치에 따라 북경에 정착하였다.
 

한락연의 미망인 류옥하
 
1950년, 북해공원 단성(团城)에서 해방후 미술계의 첫 유화전시회인 한락연 유작전시회가 열렸다.
류옥하녀사는1951년부터 1953년사이 문화부의 요구에 따라 한락연의 대부분 유작을 국가에 기증했다. 그리고 일부 간단한 유작은 기념으로 자녀들에게 물려주었다. 유작 대부분은 서북지역의 인물풍토를 제재로 한 그림들이였다.
 
한락연이 창작한 많은 회화와 촬영작품들은 그 대부분이 분실되여 전해 내려온 작품은 165폭밖에 안된다. 지금그 대분분이 중국미술관에 보존되여있다.
 
유가족의 상봉 
 
1988년 12월 북경에서 한락연 유작전시회가 열렸다.
 
사후 40여년만에 열린 전시회는 한락연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던중 뜻밖에도 한락연이20년대 룡정에서 전부인 최신애(崔信爱)와의 사이에서 태여난 딸 한인숙(韩仁淑, 당시 70세)녀사가 유작 전시회 회장에 나타났다. 1919년에 한락연이 일제의 검거를 피해 고향 룡정을 떠날때 최신애는 딸 한인숙을 임신중이였던것이다.
 
최신애의 행적은 북경 민족출판사에서 사업하던 김룡욱(金龙旭)선생에 의해 밝혀졌고 그 주선으로 한인숙이 아버지의 전시회장으로 찾아온것이였다. 어느 간행물에 실린 한락연에 관한 글을 보고 김룡욱선생은 한락연의 사연이연변에 계시는 어머니가 찾고있는 친척의 사연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것을 발견하였다. 이를 단서로 찾게 된것이곧 한인숙녀사엿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1 6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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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지역반일유적지 순람 9

 

 

“중국의 피카소” 한락연 (하)

 

김 혁

 

 

 

1945년 10월, 한락연은 돈황을 찾았다.

돈황에서 한락연은 서구 렬강들이 중요 문화재, 문화적 전통의 중요한 자산을 략탈해간 사례들을 화가로서의 한락연은 뼈아프게 접했다. 이런 략탈행위는 단 예술진귀품의 손실이라는 아픔보다는 더 크게 한 나라와 민족 전체의 력사적 감성에 가해진 상처와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1946년 4월 한락연은 어렵게 구한 자금과 탐사팀을 이끌고 우루무치로 갔다.  

키질의 천불동에 묵으면서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다. 천개의 불상이 있어서 천불동이라 불리는 석굴이였다.

이때부터 한락연은 본격적으로 탐사와 발굴에 나섰다. 한락연은 커다란 소명의식을 가지고 석굴 벽화의 복원작업에 착수했다  

 

 

 

 

 

석굴은 거개가 층암적벽에다 판것인데 지진과 풍화작용으로 하여 석굴안으로 통하는 길이 없어져버렸다. 그들은 절벽에 한층한층 홈차기를 파놓고 가까스로 오르내렸다. 어떤 때는 바줄 한가닥을 타고 오르내려야 했는데 절벽에서 떨어져 생명을 잃을 위험도 있었다. 하지만 한락연은 그 층암절벽에 매달려 작업을 견지했다.  

고달픈 작업에 한락연은 륵골통으로 몹시 고생했지만 통증을 누르고 벽화를 모두 그려내고야말았다.  

돈황 막고굴의 수백개 석굴과 신강과 쿠처(庫車) 등지의 석굴 및 고분 벽화가 그의 탐사팀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였다. 한락연은 또 자신의 발굴결과를 “신강문화보물고의 새발견- 옛 고창국 예술탐사기”라는 글로 정리해 “신강일보”에 발표했다. 이 글은 중국에서는 최초로 신강의 고대문화 유적지인 고창국의 문화유물을 체계적으로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한락연은 그림에서 예술과 과학의 통합을 이루었으며 그림과 고고학을 융합시켜 고대문명을 보호하는데 개척적인 의의를 갖게 하였다.  

 

1947년 8월 6일부 “감숙민국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소식이 실렸다.  

“7월 30일 적화로부터 출발한 군용기는 이날 점심 하미에 도착한후 계속 동쪽으로 비행하다가 두시간후 지면과의 련락이 끊겼다… 군용기는 가욕관상공에서 추락되였다.”

이 소식은 삽시에 중국 미술계를 놀래웠다. 이 비행기에는 다름아닌 한락연이 탔던것이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크게 진동하였다. 그의 죽음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사를 통하여 전국에 알려졌다. 영국의 유명한 “타임스” 지도 지면을 할애하여 한락연 서거소식을 실었다. 한락연이 불의의 사고로 숨졌다는 소식을 접한 주은래도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어버렸다”며 아쉬워했다.

한락연은 49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그가 사랑했던 고비사막의 한줌의 먼지로 스러졌다. 실크로드에서 유린당하고있던 고대 유적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매료돼 그 발굴 작업에 혼신을 쏟아부으며 선구적 업적을 보였던 그는자신의 념원대로 자신이 사랑하던 그 고비사막에 영원히 묻힌것이다.

 

한락연은 서방의 회화예술을 본받은 선구자이고 20세기전반기 민중에 접근한 유화가이며 중국에서 커즐석굴을 발견하고 연구한 첫사람이며 조선족가운데서 처음으로 중국미술계에 진출한 화가이자 첫 공산당원이다. 또 세계반파쑈전사로 중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대륙을 넘나들면서 풍부한 예술유산과 고고학의 성과들을 쌓아올려 이루다 헤아릴수 없는 예술정신을 후세에 남겼다.

 

(끝)

 

"연변일보" 20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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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사고로 조난
 

1947년 봄, 한락연은 두번째로 키즐천불동을 고찰하였다. 고찰임무를 완성한후 한락연은 우루무치로 돌아와 그림전시회를 개최하였다. 7월 30일, 한락연일행이 탄 우루무치-란주행 257호 비행기(국민당군용기)는 오후 2시 가욕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3-4000메터 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선회하다가 기련산에 추락했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진동하였다. 그의 조난소식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은 물론 영국의 타임스지를 포함한 큰 신문들에서도 취급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건국후 한락연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1970년대 주은래총리는 한락연의 20여년 지기였던 염보항의 아들인 염명복을 불러 《왜서 한락연을 쓰는 사람이 없소? 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참 애석하오.》라고 환기시킨바 있다.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과 전반 동방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공산주의전사로 성장,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 서방예술기법과 동방예술의 정수를 교묘하게 접목시키고 소중한 중화문화를 발굴, 보호하는 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인민예술가 한락연,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은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될것이다.       
                                              뉴스래원: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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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한락연이 민족예술을 구제하고 고양하려는 마음을 안고 더 큰 정력으로 고고(考古)와 예술 사업에 종사하려 할 때 그가 탄 국민당 군용비행기가 우룸치에서 란주로 가는 도중 사고가 생겨 젊은 목숨을 잃게 되였다.

한락연의 죽음은 많은 의문점이 있다. 지금까지 아무런 물증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행기 파편이나 유체도 발견하지 못했는바 연구해야 할 일이다. 새 중국이 설립된후 한락연을 혁명렬사로 추인하고 모주석께서 직접 혁명렬사영광기념증을 수여했다. 이는 지하사업에 종사하는 인원들 가운데서 58번째인바 중국공산당내부에서의 그의 숭고한 지위를 증명할수 있다.

한락연의 일생은 전기적인 색채로 충만되여있으며 그의 신분 또한 극히 복잡하고 그의 사업도 도전으로 충만됐다. 그는 중국혁명에 참가한 조선족으로서 그의 인생은 조선, 중국의 력사와 밀접하게 교차되여있다. 그는 예술가이고 혁명가이며 또한 소장이기도 하다. 그의 사적은 많은 연구가치가 있다.

[출처] 북경조선족대학생, 박건일교수의 한락연 관련 특강 청취 - 모이자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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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한락연은 1947년 7월 30일, 신강일보사 대강당에서 키즐석굴 벽화 모사화를 위주로한 그림전시를 마치고 키즐석굴 탐색작업에 함께 했던 일군들과 함께 란주로 돌아가는 길에 하미비행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는 필경 국민당에 의해 피살된것이다. 취재팀은 하미비행장의 녹쓴 쇠고리 하나에서도 눈길을 떼지 못하고 그 의문의 죽음을 확인이라도 할듯 굳어서 있었다. 그들은 기승부리며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속에서 한락연의 억울한 죽음의 울분을 듣는듯싶었다.//연변위성TV 4부작 다큐멘터리”한락연”취재팀에서


키즐석굴은 남강요충지로서 인도불교예술이 동쪽으로 이동한 첫 문호이다.한락연은 당년 키즐석굴 발굴과정을 10번동굴에다 적어놓음으로써 이는 중화문화유산임을 명확히하였다. 후세인들은 한락연의 필치가 남아있는 10번동굴에 한락연의 사진과 그가 모사한 벽화사진을 진렬해놓고 한락연의 공적을 기리고있다.
1947년 한락연은 키즐석굴에서 색채가 선명하고 스찔도 참신한 완벽하게 보관된 벽화를 발견하고 그 벽화 전체를 모사하였다. 그의 빛나는 성과들은 69번동굴에 있었는데 취재팀이 마주한 69번 석굴은 개봉되지 않았고 자물쇠가 잠가져있었다. 취재팀의 진지한 촐영자세에 감동된 연구소일군들은 만리밖에서 온 연변취재팀에게 특혜를 베풀어 한시간만에 녹쓴 열쇠를 열고 촬열을 하도록 허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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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사고로 조난

1947년 봄, 한락연은 두번째로 키즐천불동을 고찰하였다. 고찰임무를 완성한후 한락연은 우루무치로 돌아와 그림전시회를 개최하였다. 7월 30일, 한락연일행이 탄 우루무치-란주행 257호 비행기(국민당군용기)는 오후 2시 가욕관상공에서 악천후를 만나 3-4000메터 상공에서 방향을 잃고 선회하다가 기련산에 추락했다.

한락연의 조난소식은 서북 각계를 진동하였다. 그의 조난소식은 국내의 여러 큰 신문은 물론 영국의 타임스지를 포함한 큰 신문들에서도 취급하였다. 주은래는 《그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중국 미술계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잃었다》고 아쉬워했다. 건국후 한락연은 혁명렬사로 추인되였다.

1970년대 주은래총리는 한락연의 20여년 지기였던 염보항의 아들인 염명복을 불러 《왜서 한락연을 쓰는 사람이 없소? 그를 잊지 말아야 하오. 참 애석하오.》라고 환기시킨바 있다.


 

2010년 9월에 룡정시락연공원 공원비에 새겨진 한락연의 략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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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 "평범함"의 낡은 건축이 "탁월함"의 새로운 건축으로 탄생하기 2018-03-23 0 3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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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 [타산지석]-우리 연변에도 "전통조선민족칼전승인" 있었으면... 2018-03-23 0 4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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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0 [고향자랑] - 연변사과배의 대변신... 2018-03-22 0 4097
2099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아기 곰들아, 맘껏 뛰여 놀거라... 2018-03-22 0 5134
2098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지구상 최후",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3-22 0 5059
2097 [그것이 알고싶다] - "축구"의 기원?...4 2018-03-21 0 2959
2096 [그것이 알고싶다] - "축구"의 기원?...3 2018-03-21 0 3813
2095 [그것이 알고싶다] - "축구"의 기원?...2 2018-03-21 0 3304
2094 [그것이 알고싶다] - "축구"의 기원?...1 2018-03-21 0 3340
209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5도, 6도",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3-20 0 4614
2092 [그것이 알고싶다] - "축구"의 유래?... 2018-03-20 0 5303
2091 [축구와 연변] - 조선민족 축구명장 = 안원생 2018-03-20 0 5184
2090 [고향자랑] - 우리 연변에서 "랭면문화축제"가 있었으면... 2018-03-20 0 3025
2089 [축구와 연변] - 조선민족 축구명장 = 리주철 2018-03-20 0 5284
2088 [쉼터] - 중국 현대축구 발원지... 2018-03-20 0 4315
2087 [축구와 연변] - 조선민족 축구명장 = 장경천 2018-03-20 0 4644
2086 [축구와 연변] - 조선민족 축구명장 = 박익환 2018-03-20 0 5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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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4 [그것이 알고싶다] - "엉뚱한 과학"과 "엉뚱한 진실" 2018-03-19 0 4551
2083 [그것이 알고싶다] - 령하 70'c에서도 사용 가능한 배터리... 2018-03-19 0 3057
2082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동물원 동물 관람, 조용조용... 2018-03-19 0 3233
2081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생태보호, 남의 일이 아니다... 2018-03-19 0 4711
2080 [그것이 알고싶다] - 비행기 탑승 전에 피해야 할 음식... 2018-03-19 0 3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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