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kim631217sjz 블로그홈 | 로그인
시지기-죽림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조글로카테고리 : 블로그문서카테고리 -> 문학

나의카테고리 : 詩人 대학교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소낙비
2018년 06월 30일 00시 17분  조회:4012  추천:0  작성자: 죽림
소낙비




                       윤동주 / 시인


번개, 뇌성, 왁자기근 뚜다려
머ㅡㄴ 도회지(都會地)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짱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庭園)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湖水)되기 일수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敬虔)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1937년 8월 9일




오늘은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며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 
윤동주 시인의 『소낙비』라는 시를 
읽어 봅니다.

 

스티커 이미지

 



 

윤동주 소낙비

 

 

번개, 뇌성, 왁자지근 두다려

머언 도화지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벼룻장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마음같이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내 경건한 마음을 모셔드려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

 

 

이 시는 화자의 마음이 소낙비가 내려 정원이 흐린 호수가 된 것처럼 흐려서 홍수 뒤에 노아가 희망했던 하늘인 희망을 경건한 마음으로 그 희망을 몸속에 모셔 들인다는 내용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소낙비가 내린다. 번개가 치고, 뇌성이 울린다. 소낙비가 왁자지근 두드린다, 머언 곳이 도화지처럼 보인다. 그곳에는 낙뢰가 있어야할 것만 같은 마음이 든다. 벼룻장을 엎어놓은 듯한 하늘로 화살 같은 비가 화살처럼 쏟아진다. 소낙비가 내리면 손바닥만 한 나의 정원은 여차하면 흐린 호수가 된다. 그 모습이 내 마음과 같다. 바람이 팽이처럼 돌며 분다. 그래서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나는 나의 경건한 마음을 모셔 들여 노아 때에 노아가 홍수가 지난 뒤에 찾은 푸른 하늘을 한 모금 마셔 몸속에 간직한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소낙비>는 소낙비로 인해 흐린 호수가 된 화자의 정원을 말하면서 화자의 마음이 흐리다는 것을 말하게 하는 소재이다.

 

 

‘번개, 뇌성, 왁자지근 두다려 / 머언 도화지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 // 벼룻장 엎어논 하늘로 /살 같은 비가 살처럼 쏟아진다. //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이 / 마음같이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는 소낙비가 오는 모습과 소낙비로 인해 화자의 손바닥만한 정원이 흐린 호수가 된 것을 말하면서 화자의 마음이 흐리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머언 도화지에 낙뢰가 있어만 싶다.’에서 ‘머언 도화지’는 비가 내리는 풍경의 먼 곳은 ‘벼룻장 엎어논’ 것처럼 검은 ‘도화지’로 보이고 그 ‘도화지’에는 ‘뇌성, 왁자지근 두다’리는 소리는 멀기 때문에 들리지 않고 오직 ‘낙뇌가 있어’ 낙뇌만 있는 것 같다는 화자의 생각을 말한 것이다. ‘낙뇌가 있어만’은 화자가 만든 독특한 표현으로 ‘낙뇌가 있어’에 ‘만’을 붙여 ‘낙뇌’ 이외는 없는 것 같다는 화자가 만든 표현이다. ‘싶다’는 ‘낙뇌만 있는 것 같다’는 것이 화자의 불확실한 추측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벼루장’은 먹을 가는 도구로 안이 오목하게 파여 있고 대체로 그 색이 검은 편이다. 그러므로 ‘벼룻장 엎어논 하늘’은 벼룻당을 엎어 논 것 같이 소낙비를 내리는 검은 구름으로 덮인 하늘을 말한다. ‘살’은 ‘화살’의 준말이다. ‘손바닥만한 나의 정원’은 작은 정원을 말한다. 작아서 소낙비가 내리면 물이 고여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은 ‘마음같이 흐린 호수 되기 일쑤다.’이다. 이는 화자의 ‘마음’이 ‘흐린 호수’와 같이 흐린 상태라는 것을 말한다. 화자는 소낙비가 내린 화자의 작은 정원의 모습을 말하면서 화자의 마음이 흐리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화자가 말하려 하는 것이 소낙비가 아니라 화자의 흐린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 /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 // 내 경건한 마음을 모셔드려 /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시다’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의해 팽이처럼 도는 데 이는 화자의 머리가 바람이라는 외부적 시련에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희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아 때에 노아가 40일 동안 내리는 계속되는 비로 온 세상이 잠기는 홍수 속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가졌던 희망인 하늘을 화자의 마음에 하늘의 일부분을 모셔 들여왔다는 것이다. ‘바람이 팽이처럼 돈다.’는 회오리바람이 분다는 말이다. 이 회오리바람이 나무를 흔들어 ‘나무가 머리를 이루 잡지 못한다.’고 했다. 나무의 형태는 크게 보면 사람의 머리처럼 생겼다. 그래서 화자는 나무전체가 흔들리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러면서 회오리바람에 휘도는 나뭇가지를 ‘이루 잡지 못한다’고 하여 화자의 머리가 회오리바람에 흔들리듯이 몹시 흔들리고 안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화자의 마음은 소낙비가 온 정원처럼 흐리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처럼 어지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자신의 흐리고 어지러운 마음을 ‘내 경건한 마음을 모셔’ 들여 마음을 경건하게 하고 ‘노아 때 하늘을 한 모금 마’셔 마음을 맑게 하고 진정시키는 것이다. ‘노아 때 하늘’은 바이블에 창세기에 나온 홍수설화의 주인공인 노아가 40일 동안 내리는 계속되는 비로 온 세상이 잠기는 홍수 속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가졌던 희망을 말하는 것이다. 노아는 40일의 비로 인한 세상 멸망의 상화에서 가졌던 하늘(희망)이므로 화자의 ‘흐린 마음’은 소낙비와 같이 작은 비로 인하여 흐려진 것이므로 노아가 경건한 마음으로 가졌던 하늘을 화자는 경건한 마음으로 ‘한 모금 마시’는 것으로 화자의 마음을 맑게 하고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비와 바람이 준 시련을 희망을 가짐으로서 이겨낸다는 의미를 지닌 시이다.

 

 

 

 
================================


독립운동가 윤동주 -동족의 비애를 가슴에 안았던 식민지 청년의 순결한 희망

 

--------------------------------------

윤동주는 독립투쟁의 일선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투사도 아니었고당대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도 아니었다그러나 인간을 떠나서 도를 닦는다는 것은 한낱 오락에 불과하고공부나 시도 생활이 되어야 한다며자신의 시와 삶을 일치시키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그의 시 정신은 어느 투사 못지 않게 치열한 바가 있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서시>의 구절처럼그는 모진 풍파 속에서도 독립한 나라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죽음의 나락에 빠진 민족을 사랑했고자신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며 한 몸을 민족의 제단에 제물로 바쳤다.

------------------------------

 

신앙과 민족 정신의 마을 만주 명동촌에서 자라나

 

 

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는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에 대한 사랑과 독립의 절절한 소망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견주어 노래한 민족시인이다시인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중국 길림성(吉林省화룡현(和龍縣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尹永錫, 1895-1962)과 어머니 김용(金龍, 1891-1947)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1899년 2월 함경북도 종성 출신의 문병규(文秉奎), 김약연(金躍淵), 남종구(南宗九)와 회령 출신의 김하규(金河奎네 가문의 식솔 140여명이 집단 이주해 세운 한인마을로북간도 한인 이주사에 이정표를 마련한 곳이었다.

 

 

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이주는 증조부 되는 윤재옥(尹在玉때로 거슬러 올라간다윤재옥이 43세 때인 1886년 부인과 4남 1녀의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본래 살던 함북 종성군 동풍면 상장포를 떠나 두만강 건너편 자동(紫洞현재의 자동(子洞))에 처음 자리잡으면서윤동주 집안의 북간도 생활은 시작되었다북간도 이민 초창기에 자동으로 이주한 윤재옥은 부지런히 농토를 일구어 주변에서 부자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수성가하였다그리고 1900년 조부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 때 명동촌으로 이사하여 명동 한인마을의 한 식구가 되었다.

 

 

윤동주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북간도 명동촌은 일찍부터 신학문과 기독교를 받아들인 선구자의 마을이었다북간도 최초의 신교육기관은 1906년 10월경 이상설(李相卨등이 용정(龍井)에 설립한 서전서숙(瑞甸書塾)이었는데이듬해 4월 이상설이 헤이그 특사로 떠난 지 몇 개월 안돼 문을 닫고그 뒤를 이은 것이 명동촌의 명동서숙(明東書塾)이었다명동서숙은 앞서 김하규김약연남위언이 한학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세 군데 서재를 하나로 합치고서전서숙 교사 출신의 박무림(朴茂林)을 초대 숙장으로 모셔와 1908년 4월 문을 열었다명동서숙으로 출발한 명동학교는 1909년 신민회 회원 정재면(鄭載冕)이 교사로 부임해 교장 김약연교감 정재면의 체제를 갖추면서 신학문과 민족의식을 가르치는 신교육기관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명동학교에서 정재면은 학생들에게 신학문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고 함께 예배를 드렸다그리하여 부임 첫 해에 명동교회가 설립되고이후 마을사람 거의 모두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커다란 변화가 있게 되었다. 1910년 명동학교에 중학교 과정이 만들어지고이듬해 여학교가 설립되면서 명동촌은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으로 떠올랐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15세 나이로 명동학교에 들어가 신학문을 배우기 시작한 것은 정재면이 교사로 부임해 마을에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온 1909년이었다이듬해 명동학교 교장 김약연의 이복 누이동생인 김용과 결혼한 윤영석은 1913년 3월 문재린 등과 함께 중국 북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돌아와 모교인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윤동주가 태어날 당시 그의 집안은 명동촌에서도 벼농사를 하는 몇 집 가운데 하나로 넉넉한 가세를 자랑하였다그가 태어난 집은 학교촌 입구 자그마한 과수원에 둘러싸인 큰 기와집으로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기슭 교회당 앞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인 명동소학교 입학손수 <새 명동>이라는 잡지 펴내

 

윤동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큰 마을 명동촌에서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아름다운 자연을 벗삼아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키워나갔다이와 관련해 한가지 눈 여겨 볼 것은 그의 어린 시절 아명이다윤동주의 아명은 해처럼 빛나라는 뜻으로 아버지가 지어준 해환(海煥)이었다아버지 윤영석은 자식들 이름에 ’ ‘’ ‘을 차례로 붙여윤동주의 아우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는 아명을 지어주었다윤동주라는 이름 석자를 세상에 널리 알린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렇게 그의 아명 속에서 이미 잉태되고 있었던 것이다더불어 윤동주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독교의 영향이다명동교회의 장로로 도량이 넓었던 할아버지 윤하현과 집안의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윤동주는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 적부터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의 기독교정신을 배우며 자랐다또 1912년 결성된 북간도 최초의 한인자치단체 간민회의 회장을 역임하며 한인사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한 외삼촌 김약연의 영향 아래 일찍부터 민족의식에 눈뜰 수 있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자연과 기독교신앙그리고 민족주의가 삼위일체로 어우러진 기름진 토양 속에서 풍요롭게 자라난 시인 윤동주는1925년 만 8세의 나이로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3.1운동 이후 북간도 대한국민회가 조직되고국경선 일대의 봉오동청산리 등지에서 치열한 독립전쟁이 벌어지는 과정에서 명동학교 출신들이 보여준 활약상에 잘 나타나 있듯이그가 다닌 명동학교는 수많은 민족지사를 배출한 북간도 민족교육의 거점이었다그래서 1920년 10월 간도 대토벌에 나선 일본군에 의해 1918년 신축된 양옥 벽돌교사가 불타는 수난을 겪기도 하였다불탄 교사는 1922년 원상복구가 되었지만윤동주가 입학할 무렵 명동학교의 형편은 썩 좋지 않았다. 1920년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가 북간도 교통의 요지인 용정에 은진중학교명신여학교를 세워 교육의 중심이 용정으로 이동한 데다갑자년 가뭄으로 인한 경영난까지 겹쳐 윤동주가 입학하던 1925년 명동중학교가 문을 닫은 때문이다명동소학교도 1929년 교회학교에서 공립으로 넘어갔다.

 

명동소학교 시절의 윤동주는 유순하고 눈물 많은 소년이었다동기동창으로 윤동주 집에서 석 달 먼저 태어난 동갑내기 고종사촌 송몽규(宋夢奎)와 김약연의 조카로 윤동주와 외사촌간이었던 김정우그리고 문재린 목사의 아들인 문익환 등이 있었는데모두 문학 방면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서울에서 발행되던 <<아이생활>> <<어린이>> 등의 잡지를 구독하며 문학소년의 꿈을 키우던 윤동주와 동기들은 5학년 때인 1929년 손수 원고를 모아 편집해서 <<새 명동>>이라는 잡지를 등사판으로 발간하기도 하였다. 1931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송몽규 등과 함께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 소학교 6학년에 편입해 1년을 더 다녔다대랍자는 명동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떨어진 화룡현 현청 소재지였는데윤동주와 송몽규는 명동에서 대랍자까지 십 리 길을 날마다 걸어서 통학했다고 한다.

 

 

만주 용정 은진중학교에선 축구 선수로잡지 편집자로웅변 1등상 수상자로 활기찬 생활

 

 

윤동주가 대랍자 소학교에 다니던 1931년 늦가을 윤동주의 집은 명동에서 북쪽으로 30리쯤 떨어진 해란강 하류의 소도시 용정으로 이사했다만주사변이 일어나고 무장단의 출몰이 잦아지자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신변안전이 보장되는 도회지로 이주한 것이다용정은 한인들이 모여 사는 거점도시로 일본 간도 총영사관이 위치해 있었다중국 관청이 밀집한 연길(延吉)과 더불어 북간도의 양대 거점을 이루었던 용정에서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인쇄소를 차리고 도회지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그러나 이내 실패하고 그 뒤 포목점을 비롯한 다른 사업에도 손을 대어 보았지만 부진을 면치 못했다고 한다집도 과수원이 딸린 큰 기와집에서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의 20평 정도되는 초가집으로 바뀌어 옹색한 생활을 해야 했다.

 

 

용정에서 윤동주는 1932년 4월 명동소학교 동창인 송몽규문익환과 함께 은진중학교에 진학하였다. 16세 때의 일인데이름을 아명인 해환 대신 윤동주로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은진중학교는 영국덕이라 불린 용정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미션스쿨로 명신여학교제창병원과 함께 캐나다 장로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던 학교였다윤동주가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1932년은 앞서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청조(淸朝)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명목상의 통치자로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세운 해였다그리하여 북간도는 만주국의 영토가 되었고그 실권은 일본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였다그러나 영국덕의 학교와 병원들은 일종의 치외법권적 혜택을 받아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다.

 

 

동생 윤일주의 회고에 따르면 은진 중학교에서 윤동주는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교내 잡지를 내느라 밤늦게까지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고또 옷맵시를 내느라 혼자 재봉틀을 돌리기도 하면서 활기찬 학창생활을 보냈다교내 웅변대회에 나가 1등 상을 받기도 하고문학적 취향에 걸맞지 않게 기하학에 흥미를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자신이 지은 시에 날짜를 적어 보관하며 작품활동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34년 12월 24이라는 날짜가 적혀 있는 <초한대>를 비롯한 세 편의 시가 그것인데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던 명희조 선생에게서 받은 감화였다명 선생은 학생들에게 불굴의 독립의지와 치열한 역사의식을 일깨워주는 한편으로중국 군관학교 등에 입교를 주선하기도 했다. <초한대>에 나오는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는 시 구절은 그 같은 가르침에 대한 나름의 응답이었다민족의 제단에 바쳐진 깨끗한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던 윤동주 자신 또한 뒤에 그 제물로 바쳐졌으니시인의 범상치 않은 예지를 읽을 수 있다.

 

 

정지용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 세계 열어

1935년 봄 고종사촌 송몽규가 낙양군관학교 한인반 2기생으로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떠나고문익환이 상급학교 진학에 대비해 5년제인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해 가자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한 윤동주는 집안 어른들을 설득해 그 해 여름 숭실중학교 가을학기 편입시험을 보았다그러나 뜻밖에도 한 학년 아래인 3학년으로의 편입자격밖에 얻지 못하는 좌절을 맛보아야 했다. 1935년 9월 숭실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윤동주는 객지생활 7개월 동안 시 10동시 5편 해서 무려 15편의 시를 쏟아냈다숭실중 학생청년회에서 발행하던 <<숭실활천>>(1935. 10)에 실린 <공상>은 그의 시 가운데 최초로 활자화된 작품이었다이 무렵 윤동주는 정지용(鄭芝溶)의 시에 심취해 쉬운 말로 진솔한 감정을 표현하는 새로운 시세계를 열어나갔다. 1935년 12월에 쓴 <조개 껍질>을 시작으로 1938년 연희전문 1학년 때까지 계속된 그의 동시 쓰기는 그러한 변화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였다.

 

 

그런데 윤동주의 숭실중학교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1936년 1월 일제 총독부 당국이 신사참배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윤산온(尹山溫, George S. McCune) 선교사를 교장 직에서 파면하자 일어난 학생들의 항의 시위로 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간 때문이었다. 1936년 3월 문익환과 함께 용정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용정에서 광명학원(光明學院중학부 4학년에 편입하였다. “솥에서 뛰어내려 숯불에 내려앉은 격이라는 문익환의 회고처럼 그들이 편입한 광명학원은 대륙낭인 출신의 일본인이 경영하던 친일계 학교였다그럼에도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은 상급학교 진학시의 편의를 고려한 때문으로 보인다광명중학에 재학하던 2년 동안 윤동주는 동시에 더욱 몰두하여 연길에서 발행되던 월간잡지 <<카톨릭소년>>에 모두 5편의 동시를 발표하였다.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민족현실에 눈 떠발악적인 일제의 광기를 고뇌로 승화시 속에 녹여

 1938년 2월 광명중학을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하였다송몽규는 앞서 군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 1936년 4월 제남에서 체포 압송되어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석방된 전력이 있었다. 1937년 4월 대성중학교 4학년에 편입한 그는 이듬해 학교를 마치고 연희전문 문과 별과시험에 합격하여 윤동주와 다시 동문수학하는 사이가 되었다.

 

 

연희전문에서 윤동주는 최현배 교수의 조선어 강의와 손진태 교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민족문화의 소중함을 재확인했고이양하 교수의 문학 강의를 들으며 자신의 문학관을 정립해 나갔다연희전문에서의 4년간은 윤동주 나름의 시세계가 영글어간 시기였다.그런데 그것은 참담한 민족의 현실에 눈뜨는 과정이었고거기에 맞서 자신의 시 세계를 만들어가는 처절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연희전문 12학년 방학 때 고향에 들려 누이 혜원과 동생 일주에게 들려주었다는 태극기의 모양과 무궁화와 애국가기미독립만세와 광주학생운동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 무렵 그가 가진 역사의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1938년은 일제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도 적용해 한민족 전체를 전시총동원체제의 수렁으로 몰아넣던 때였다때문에 그의 고뇌와 번민은 깊어갈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연희전문의 기숙사를 나와 하숙생활을 시작한 2학년 때부터 동시 쓰기를 아예 그만두었다. 1939년 한 해 동안 그가 쓴 시는 6편에 불과했는데그나마도 9월에 가서야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이 때 쓴 <자화상>에는 전쟁에 광분한 일본 군국주의가 단말마적 발악을 하는 속에서 식민지의 지식인이 겪어야 했던 고뇌와 갈등이 짙게 배어 있고, <투르게네프의 언덕>에는 기만적인 싸구려 이웃 사랑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겨있어 당시 그의 내면풍경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후 윤동주는 1940년 12월까지 1년 이상 절필을 한다. 1940년 12월경에 쓴 <팔복>의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라는 시 구절처럼이 기간에 그는 민족의 처절한 수난에도 아무런 응답 없이 침묵을 지키는 신에게 대들었다. 1939년 가을 용정 정안구(精安區제창로(濟昌路) 1-20캐나다 선교부 경내 경치 좋은 언덕에 세워진 큰 집으로 집안이 이사하고 나서 방학 때 집을 찾은 윤동주에게 예전에 보았던 신앙의 열성을 찾을 수 없었다는 동생 윤일주의 회고처럼 이 무렵 그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었다.

 

 

이런 오랜 고뇌와 번민의 터널을 지나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반이 되는 1941년 그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키기 시작하였다.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있소”(<무서운 시간>, 1941. 2)라고 자신이 살아있음을 다시금 확인하며나라 잃어 <간판 없는 거리>의 모퉁이마다 자애로운 헌 와사등에 불을 켜놓고” 어진 사람 사람들의 손목을 잡고 보듬는 따뜻한 민족 사랑을 시로 녹여 나갔다졸업을 앞둔 그 해 11월 윤동주는 그 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었다그는 자신의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또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는데그에 대한 이 교수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에 위험도 따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던 듯하다그리하여 그의 첫 시집 출판은 해방 이후로 미루어지게 되었다.

 

 

일본유학 후 민족운동했다는 이유로 투옥일제의 정체 모를 주사 맞으며 피골 상접하여 타계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로 앞당겨진 학사일정에 따라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대학[立教大学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함께 일본 유학 길에 오른 고종사촌 단짝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사학과에 선과로 입학하였다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떨어진 채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했다윤동주가 진학한 릿쿄대학은 성공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 <쉽게 씨워진 시>(1942. 6)의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라는 구절에 나와 있듯이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다그래서인지 릿쿄대학에 진학한 지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윤동주는 단짝친구 송몽규가 있는 쿄토의 도지샤대학[同志社大學영문과로 전입학을 한다도지샤대학은 윤동주가 가장 좋아한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로일본 조합교회에서 경영하는 기독교계 학교였다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지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던 1943년 7월 윤동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에 송몽규 등과 함께 일본 특고경찰에 체포되었다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 때문에 요시찰인으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던 송몽규와 더불어 조선인 유학생을 모아놓고 조선의 독립과 민족문화의 수호를 선동했다는 죄목이었다특고경찰은 여기에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3월과 4월 쿄토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각각 징역 2년의 형을 선고 받고후쿠오카형무소로 이감되었다그리고 1년 뒤인 1945년 2월 16일 원인 불명의 사인으로 후쿠오카형무소에서 29세의 짧지만 굵은 생을 마감하였다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후쿠오카 형무소에 도착해 송몽규를 면회했을 때송몽규는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감옥에서 정체 불명의 주사를 놓아 이 모양이 되었다는 증언을 했다윤동주의 죽음이 생체실험’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갖게 하는 대목이었다그 같은 증언을 한 송몽규 또한 20일 남짓 지난 3월 7일 윤동주의 뒤를 따라 옥중 순국하였다.

 

 

윤동주의 유해는 3월 6일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북간도 용정 동산의 중앙장로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그 해 6월 그의 무덤 앞에는 집안 사람들의 정성으로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비석이 세워졌다윤동주의 유시는 해방 후 연희전문 시절 절친한 벗이었던 강처중이 자신이 보관하고 있던 유고와 후배 정병욱이 가지고 있던 필사본 시집 등 31편의 시를 모아 1948년 1월 정지용의 서문과 강처중의 발문을 붙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정음사에서 출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1968년 11월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윤동주 시비>가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건립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장규식 (중앙대 역사학과 교수)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네이버캐스터에서>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Total : 1570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450 한국 시인 김지하 장편 풍자 담시 - 오적 2020-01-23 0 3576
1449 [타산지석] - 리상, -"순간이지만 영원한 문화유전자 남기다"... 2019-12-22 0 2532
1448 한국 최초 녀성신문... 2019-12-16 0 2882
1447 한국 최초 문학비... 2019-12-16 0 3234
1446 한국 최초 시 전문지 2019-12-16 0 3010
1445 한국 최초 출판사... 2019-12-16 0 2970
1444 [문단소식] - 두만강 역 화룡 로과 호곡령에서 리욱시인 오다... 2019-12-10 0 2517
1443 "하늘나라 천사가 눈 뜨는 별" 2019-12-04 0 2397
1442 글쟁이들과 조선말규범... 2019-12-04 0 2529
1441 "새의 지저귐 소리를 알아 들을수 있어야?!..." 2019-11-30 0 2101
1440 반삭발을 한 윤동주... 2019-11-24 0 2734
1439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철학가 - 고자 2019-11-20 0 2898
1438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법가학파 - 한비자 2019-11-20 0 3203
1437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백가묵가 - 묵자 2019-11-20 0 3458
1436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유가 성악설 - 순자 2019-11-20 0 3256
1435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道學 - 정자 2019-11-20 0 2516
1434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고대 성선설 - 맹자 2019-11-20 0 3537
1433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儒敎의 시조 - 공자 2019-11-20 0 3810
1432 [그것이 알고싶다] - 고대 중국 道家의 시조 - 로자 2019-11-19 0 2942
1431 [그때 그 노래] - "손에 손잡고"... 2019-11-19 0 2449
1430 "그까짓 1000억, 그 사람 '시' 한줄만 못해"... 2019-11-18 0 2858
1429 최소한 윤동주에게 욕을 보이는 일이 없도록... 2019-11-14 0 3054
1428 뇌성마비 시인 김준엽 20년전에 펜을 입에 물고 쓴 시가 아직도 "떠돌이" 하다니... 2019-11-14 0 2749
1427 [바로잡습니다] - 시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은 윤동주 시가 아닙니다... 2019-11-14 0 2418
1426 한용운 시모음 2019-11-14 0 2613
1425 "님의 침묵" - 한용운 2019-11-14 0 4008
1424 독립운동가, 시인 - 한용운 2019-11-14 0 3291
1423 "배 곯게 하는 문학은 절대 안 된다"... 2019-11-14 0 3088
1422 민족저항 3대시인... 2019-11-14 0 2484
1421 264, 저항 시인 이육사... 2019-11-13 0 4500
1420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2019-11-13 0 3128
1419 활무대는 서로 다르지만 불멸은 같다... 2019-11-04 0 2674
1418 [그것이 알고싶다] - 나운규와 아리랑을 부른 가수... 2019-11-01 0 3352
1417 [그것이 알고싶다] - 나(라)운규와 영화 "아리랑" 2019-11-01 0 3128
1416 [그것이 알고싶다] - "아리랑"... 2019-11-01 0 3663
1415 [시학소사전] - "서사시"란?... 2019-10-30 0 3361
1414 한국의 최초의 서사시 ㅡ "국경의 밤"... 2019-10-30 0 2297
1413 [문학용어] - "리좀(根莖)" 2019-10-07 0 3178
1412 시와 시인과 독자와 그리고... 2019-09-18 0 3304
1411 일본 특유의 短詩 ㅡ 하이쿠 2019-09-18 0 4609
‹처음  이전 1 2 3 4 5 6 7 8 9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