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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모란봉에서
2018년 07월 09일 23시 25분  조회:2637  추천:0  작성자: 죽림

모란봉에서 

                          윤동주

앙당한 소나무가지에 
훈훈함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물에
한나절 해발이 미끄러진다 

허무러진 성터에서 
철 모르는 녀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 





평양 숭실학교
윤동주의 시 ‘모란봉에서’(위 사진 오른쪽) 및 ‘창구멍’의 육필원고 일부와 1930년대 윤동주가 다녔던 평양 숭실중학교(아래 사진). 유족대표 윤인석 교수 제공·숭실고등학교 제공
 
“이제 북한에서도 윤동주를 언급하기 시작했어요.” 1993년 스승 오무라 마스오 교수님(일본 와세다대)께서 복사물 몇 장을 주셨다. 어떤 일에도 흥분하지 않는 분의 약간 달뜬 표정이 낯설었다. 윤동주를 과대평가된 작가로 폄훼하고 있었던 미물이 스승의 깊은 뜻을 알 리 없었다. 종이 몇 장을 대수롭지 않은 듯 가방에 쑤셔 넣고 나왔다. 다음 해 1994년 평양에서 출판된 ‘문예상식’에 3면에 걸쳐 윤동주 시 ‘서시’ ‘슬픈 족속’ ‘쉽게 쓰여진 시’에 대한 분석이 실렸다. 북한에서 윤동주를 평가하기 시작한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할까. 

국외에서 성장한 윤동주가 국내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총독부에서 지정한 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총독부 지정학교로 인정받은 숭실중학교 4학년에 입학하려 했던 18세의 윤동주는 4학년 편입에 실패하고 3학년에 편입한다. 최초의 큰 좌절이었다. 9월에 입학한 그는 처음 자신의 글이 활자로 변하는 체험을 했다. 10월에 숭실중학교 YMCA문예부에서 낸 ‘숭실 활천’에 ‘공상’을 발표했다. 1935년 12월에는 최초의 동시 ‘조개껍질’을 썼다. 이 시 끝에는 현재 평양의 봉수동 ‘봉수리에서’ 썼다고 쓰여 있다. 

편입 실패보다 더 큰 좌절이 그에게 다가온다. 1925년 조선신궁을 세운 뒤 조용했는데, 1935년 4월 19일 조선 도지사 회의에서 이마이다 기요노리(今井田淸德) 정무총감은 신사참배를 강조한다. 1935년 9월 애써서 입학한 숭실중학교는 신사참배에 반대했다. 평남도지사는 1936년 1월 18일자로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는 숭실중 교장 맥큔의 교장 인가를 취소했고, 3월 20일 총독부가 교장을 파면한다. 곧바로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시작하고, 3월에 윤동주는 문익환 등과 숭실중학교를 떠난다. 이 무렵 3월 24일에 시 한 편을 쓴다.  


앙당한 소나무 가지에 
훈훈한 바람의 날개가 스치고,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 
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 

허물어진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 
저도 모를 이국 말로 
재질대며 뜀을 뛰고.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 


 
―윤동주, ‘모란봉에서’ 


모란봉과 대동강이라는 지명이 나오니 분명 평양에서 쓴 글이다. 작게 움츠러져 있는 ‘앙당한’ 솔나무는 윤동주나 친구들 모습일까. ‘얼음 섞인 대동강 물에,/한나절 햇발이 미끄러지다’라는 표현도 신선하지만, 2연을 더욱 주목할 수밖에 없다. 허물어진 모란봉 성터에서 ‘철모르는 여아들이/저도 모를’ 이국 말(일본말)로 노래 부르며 ‘재질대며’ 뜀 뛰며 일본 놀이를 하고 있다. 명동마을에서 이렇게 놀면 야단맞을 괴이쩍은 풍경이다. ‘난데없는 자동차가 밉다’는 단순한 푸념이 아니다.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침략해 오는 일제가 밉다는 뜻이다. 이 시는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나, 이태준 단편소설 ‘패강랭’(1938년)을 생각하게 한다. 성터와 함께 허물어지는 한 나라의 언어와 생활을 천천히 응시하게 하면서도, 윤동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동시 ‘창구멍’은 1936년 초에 창작된 시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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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부는 새벽에 장터 가시는  
우리 아빠 뒷자취 보구 싶어서  
침을 발라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아롱아롱 아침해 비치웁니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  
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혀끝으로 뚫어 논 작은 창구멍  
살랑살랑 찬바람 날아듭니다 

―윤동주, ‘창구멍’ 
 


구절구절 아빠 사랑이 간절하다. ‘눈 내리는 저녁에 나무 팔러 간/우리 아빠 오시나 기다리다가’ 침 발라 작은 창구멍을 뚫는다. 얼마나 궁하면 나무가 젖을 수밖에 없는 눈 내리는 날 나무 팔러 나갈까. 새벽도 아니고 저녁에 말이다. 새벽부터 밤늦게 고단하게 일하는 아빠를 기다리는 아이 마음, 소담한 비애가 독특한 리듬으로 반복된다. 

숭실에서 머문 7개월 동안 시 10편, 동시 5편을 썼다. 15편의 시를 쓰며 창구멍으로라도 들어오는 희망을 꿈꾸지 않았을까. 그러나 희망은 싸구려가 아니다. 희망은 ‘살랑살랑 찬바람’으로 날아든다. 마치 발터 베냐민이 나치 정권에서 잔혹한 낙관주의로 희망을 얘기했듯이, 희망은 냉혹하다. 

윤동주는 연희전문 시절 때도 평양에 가서, 서양 고전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다방 ‘세르팡’에 들르곤 했다. 원로 화가 김병기 선생은 중요한 순간을 회고했다.

“한번은 초현실주의 등 현대예술 관련 토론이 벌어졌다. 옆 테이블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청년이 불만스럽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초현실주의 같은 사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시인 윤동주, 바로 그였다. …1940년대 초 연희전문 시절에도 곧잘 평양 나들이를 했다.” 

 
고전음악을 듣던 평양은 윤동주에게 편입시험 실패라는 좌절을 안긴 곳이다. 자신의 작품이 활자로 변하는 기쁨을 체험한 평양에서 ‘조선=식민지’라는 환멸을 몸으로 체험한다. 중국에서 태어나 평양 숭실중학교, 서울의 연희전문에서 공부하고, 일본에 가서 절명했던 그의 이력은 ‘중국-북한-한국-일본’을 연결하는 아시아평화공동체에 대한 작은 창구멍이다. 중국과 일본에서 윤동주 강연을 할 때, 중국과 일본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를 볼 때마다, 나는 윤동주가 내놓은 작은 창구멍이 떠오른다. 

 
이제 북한에서 윤동주가 연구된 것을 반가워하던 오무라 교수님의 반가운 표정을 조금은 알 것 같다. 한때 남북공동 문학교과서를 만든다면 어떤 작가를 넣어야 할지 고민한 적이 있다. 북한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김소월, 이육사 등과 함께 윤동주는 통일문학을 위한 창구멍 역할을 할 수 있다. 아시아문학교과서를 만든다면 윤동주가 작은 역할을 하지 않을까. 윤동주는 우리 시대와 아시아인에게 다가오는 희망과 실천의 앙당한 상징이다. 희망은 아롱아롱 아침해, 살랑살랑 찬바람으로 희미하게 다가온다.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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