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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쪽
윤동주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땅 봄바람이
호임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나고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벽을 등진 섧은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 둘이
한 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함이여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근심스럽다.
1936.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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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사월의 봄에 누구 땅인지 모르고 애들을 보고 한스러워 하면서도 지금의 작은 평화가 깨질까봐 근심이 생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롱진 사월의 태양의 햇빛이 비추는 양지쪽에서 벽에 기대어 서서 저쪽에서 황토먼지를 실은 봄바람이 회오리를 치며 돌아서 지나가는 모습을 본다. 따스한 사월의 태양빛이 벽을 등지고 서 있는 화자의 서러운 마음을 하나하나 만지며 편안하게 한다. 양지쪽에서 서로 땅을 따먹는 지도째기 놀음을 하면서도 지금 이 땅이 누구의 땅인 줄 모르는 아이들이 땅따먹기를 하면서 한뼘 손가락이 짧아서 땅을 많이 먹지 못한다고 한(恨)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화자가 이 아이들에게 이 땅이 누구의 땅인지 알려주려고 하다가 잘못되면 일제감시에 걸려서 이 양지쪽에서 사월의 태양빛을 받으며 서러운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마저 깨어지고 사라질까 근심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양지쪽>은 화자와 노는 아이들이 있는 곳으로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햇볕이 있는 장소로 희망이 아직 있는 곳 또는 절망적인 마음을 달래주는 곳의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봄바람이 / 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내고 //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화자가 양지쪽에 벽을 등지고 서서 멀리 봄바람이 황토를 빨아올리며 회오리바람처럼 돌면서 지나가는 것을 보는데 사월의 햇빛이 서러운 마음들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달래준다는 내용이다. ‘저쪽으로 황토 실은 이 봄바람이 / 호인(胡人)의 물레바퀴처럼 돌아 지내고’는 화자가 있는 곳에서 거리가 제법 있는 곳에서 흙먼지를 빨아올린 봄바람이 호인이 사용하는 물레바퀴가 돌 아가듯이 회오리를 일으키며 화자가 있는 양지쪽을 피해서 돌아서 지나갔다는 말이다. 화자가 지금 있는 ‘양지쪽’은 먼지를 담고 있는 바람도 비켜가는 안온한 평화로운 장소인 것이다.
‘아롱진 사월 태양의 손길이 / 벽을 등진 설운 가슴마다 올올이 만진다.’는 계절이 봄이고 사월이며, ‘아롱진’은 아지랑이를 일으킬 정도의 따뜻한 햇볕을 말하는 것 같다. 양지쪽에서 따뜻한 햇볕이 벽을 등지고 햇볕을 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서러움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달래준다는 말이다. 의인화된 표현이다. 따뜻한 햇볕을 쬐면 몸이 따뜻해져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를 말하면서 한편으로 ‘태양’으로 상징되는 희망이 양지쪽에 있는 ‘설운 가슴마다’ 생겼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지도째기 놀음에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들이 / 한뼘 손가락이 짧음을 한(恨)함이여 // 아서라!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 깨어질까 근심스럽다.’는 양지쪽에서 화자처럼 햇볕을 쬐는 사람들 말고 아이들은 지도째기 놀음을 하며 땅따먹기를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본 화자는 아이들이 이 땅이 누구의 땅인 줄도 모르고 손가락이 길면 더 많은 땅을 차지할 수 있는데 한 뼘을 재는 손가락이 짧다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고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를 알려주려다가 지금은 남의 땅이 된 우리 땅의 사연을 말하다가 잘못되면 겨우 봄날 햇볕을 벽을 등지며 쬘 수 있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깨어질까 걱정이 되어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도째기 놀음’은 정확하게 어떤 놀이인지 알 수 없으나 아이들이 손을 이용해서 하는 땅따먹기 놀이로 보인다.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들이’는 아이들은 이 땅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땅따먹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 ‘지도째기 놀음’을 보면서 이 땅이 우리 땅이었으나 일제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이다. 그러나 ‘아서라!’는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를 알려주고 싶은 욕구를 자제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가 / 깨어질까 근심스럽다.’이다. ‘가뜩이나 엷은 평화’는 ‘양지쪽’에 모여 벽을 등지고 사월의 ‘아롱진’ 햇볕을 쬐며 ‘설운 가슴’을 어루만지는 평화인 것이다. 이 땅을 빼앗아 가진 일제가 이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알게 되면 이 작은 평화마저 빼앗기고 일제의 탄압을 받으며 괴로운 삶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가뜩이나 엷은 평화’를 잃지 않기 위하여 이 땅이 ‘뉘 땅인 줄 모르는 애들’에게 아무 말을 못하는 것이다. 누가 주인이었는지 어떻게 빼앗겼는지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다./전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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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이상화 씨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비교해 보면 이해가 쉬울 거야.
아마 윤동주 씨는 따뜻한 봄볕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얼었던 마음을 녹이고 있는 것 같애. 시간적 배경이 낮이라는 점이 드문 일이지.
1연에서는 토속적인 것들과 이국적인 것들이 섞여서 나타나고 있어. 그만큼 윤동주 씨가 살고 있는 그 시대의 정체성이 불분명해. 그건 윤동주 씨 자신도 마찬가지고.
2연에서 따뜻한 햇살이 그의 서러움을 조금씩 녹여주고 있는데,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가 봐. 이렇게 햇살에 의해 현실에서 공상으로 이동하던 윤동주 씨의 시선은 3연에서 아이들을 발견하면서 다시 현실로 돌아 와.
이 아이들은 놀이에 빠져 현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거리에서>의 윤동주 씨의 모습과 비슷해. 즉 그들은 윤동주 씨의 과거야. 그렇다면 이 시에서 그는 <거리에서>에 비해 정신적으로 성숙했다고 볼 수 있겠지.
이 아이들은 일종의 '땅 따먹기' 놀이를 하고 있나 봐. 놀이가 끝났을 때 가장 많은 땅을 차지한 아이가 이기는 거지. 아이들은 손바닥이 찢어지도록 벌려서 자기 땅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다투는데, 이걸 바라보는 윤동주 씨는 아이들의 다툼과 상관없이 이미 조선 땅 전부가 일본의 식민지라는 사실을 떠올려. 그래서 슬퍼져.
이렇게 이 시에서 윤동주 씨는 이제 어느 정도 현실을 받아들이고 있어.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땅의 주인이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싶었나 봐. 그런데 그 안의 또 다른 목소리가 말려. 그러지 말라고. 마치 지금 자신이 짧은 햇살에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고 있듯이 잠시나마 저 아이들이 평화를 즐기도록 놔 두라고. 왜냐하면 저 아이들도 머지않아 누구의 땅인지 알게 될테니까.
'가뜩이나 엷은 평화'는 식민지 조선에서 평화란 것이 얼마나 얻기 힘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지. 그래서 마지막에는 생각을 고쳐서 다시 한 발 물러서고 있어. 그럼으로써 아이들도 윤동주 씨도 다시 처음의 평화로 돌아가게 되지.
이 시에서 윤동주 씨는 이제 현실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그런 점에서 한결 어른스러워졌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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