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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윤동주
쉬는 시간마다
나는 창녘으로 갑니다.
창은 산 가르침
이글이글 불을 피워 주소
이 방에 찬 것이 서립니다.
단풍잎 하나
맴도나 보니
아마도 자그마한 선풍이 인게외다.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한 무렵,
상학종이 울어만 싶습니다.
윤동주시 창 해석
암울하고 갇힌 시절에
'창은 하나의 구원의 상징이 될수도
있습니다.
가능성, 희망, 출발,미래 등등
마지막 창에 매달리고픈 심정은
어둠을 견디는 당대의 모든
지식인들의 공통된 바람이었을것입니다.
가혹한 시대에 바라보는 창과 밝고
자유로운 시대에 바라보는 창은 그만큼
투명성에서 차이가 나게 마련입니다.
/(예가)
이 시에서 비로소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는 윤동주 씨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해. 그리고 이후로 평생 그 주변을 맴돌게 되지.
우리에게 익숙한 윤동주 씨의 모습은 거울 앞에 서 있는 것이다.('창'도 거울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 여기서 거울은 두 세계의 경계야. 이쪽은 현실, 저쪽은 이상. 이전 시들에서 보이던 '현실에 대한 혐오'가 거울 속의 이상 세계를 만든 게 아닐까 싶어.(이 두 세계를 더 이해하고 싶다면 영화 [매트릭스]를 추천한다.) 이제 그에겐 거울 안의 세계가 의미 있는 세계이고 거울 밖의 세계가 허구가 돼. 마찬가지로 거울 안의 자신은 '이상적 자아'이고, 거울 밖의 자신은 '현실적 자아'이자 이상적 자아의 '그림자'가 되지.
'창'은 '문'이나 '벽'과는 달라. '벽'은 '외면'이야. 반대편의 세계가 아예 안 보여. '문'은 '통로'야. 반대편의 세계로 나갈 수 있지. 어느 쪽이든 부끄러움은 안 생길 거야. 거기에 비해 '창'은 외면할 수도 없지만 나갈 수도 없는 공간이지. 외면하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고, 뛰쳐나가기엔 용기가 부족했던 윤동주 씨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쉬는 시간만 되면 창가로 달려간다.
창밖에는 식민지 조선의 참혹한 현실이 보이는데, 창안에서는 식민지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윤동주 씨는 공부를 통해 민족적 이상에 보탬이 되려 했던 것 같애. 그런데 일본은 그에게 어떤 내용을 가르쳤을까? 조선인은 열등하다는 거? 일본이 조선을 근대화시켰다는 거? 당연히 윤동주 씨는 이런 교육에 크게 실망했던 것 같애. 그래서 그는 창 건너편이 살아있는 가르침이고, 창 안쪽은 죽은 가르침이라고 생각해. 이렇게 항상 그의 육체는 거울 이쪽에 있지만 정신은 저쪽에 괴리되어 있다. 그래서 괴롭다.
윤동주 씨는 누군가가 나서서 자기 대신 이 현실을 타파해 주기를 바라는 데, 그 누군가는 아마도 절대자겠지. 그래서 3연의 내용은 기도로 볼 수 있어.(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그야말로 윤동주 씨 다운 모습이지.)
하여튼 윤동주 씨는 절대적인 힘에 의해 자신의 상황을 깨트리고 싶어 하지만, 그의 바램은 '자그마한 선풍'으로 끝나고 말아. 아직은 때가 아닌가 봐.
기대가 깨어지면서 그는 쉬는 시간도 곧 끝날 거라고 예감해. 금방 상학종이 칠 테고, 그럼 자신은 다시 교실로 돌아가 '죽은 가르침'을 듣게 되겠지. 그래서 자괴감에 빠져. 여기서 '울어만'은 상학종이면서 동시에 화자의 심정이기도 해. 그래도 '싸늘한 유리창에 햇살이 쨍쨍'하다는 것으로 그나마 위안을 삼으려 하고 있어.
좀전에 말했듯이 만약 창밖으로 뛰쳐나간다면 윤동주 씨의 부끄러움은 해소될 거야. 그런데 만약 그에게서 부끄러움이 사라진다면? 혹시 그의 시도 함께 사라지지 않을까? 시인마다 고유의 스펙트럼이 있는데, 윤동주 씨는 '부끄러움'에 특화된 시인이야. 어쩌면 그래서 부끄러움 때문에 괴로워하면서도 평생 그걸 놓지 못한 걸지도 몰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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