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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와 정병욱 가옥
2018년 07월 24일 23시 59분  조회:2560  추천:0  작성자: 죽림
 

1. 섬진강 하구의 망덕포구에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가 보존되었던 가옥이 있다니 뜻밖이네요. 제가 알기로 윤동주 시인의 고향은 북간도 아닌가요?

 

- 예, 북간도 맞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만주 길림성 용정시에서 가까운 명동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곳에서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문익환 목사와 함께 용정의 은진중학교를 다니다가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그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의한 항의로 자퇴를 하고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서 광명중학교를 졸업했구요. 그리고 1938년에 서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습니다. 즉 윤동주는 38학번입니다.

 

2. 그러면 윤동주 시인과 광양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데, 어떻게 윤동주 시인의 원고가 광양 망덕포구에서 발견된건가요?

 

-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 3학년 때 기숙사에서 만난 후배 정병욱과의 인연 때문입니다. 정병욱의 부모님께서 살고 계신 곳이 바로 광양의 망덕포구였습니다.

 

3. 윤동주와 정병욱, 두 사람의 만남에 관해 조금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군요?

 

- 졍병욱이 쓴 윤동주에 관한 회상문 '잊지 못할 윤동주의 일들'에서, 1940년 연희전문 1학년 때 그가 윤동주와 선 후배로 만나게 되었을 무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였습니다.

"내가 동주를 알게 된 것은 연희전문학교 기숙사에서였다. 그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나의 두 학년 위인 상급생이었고, 나이는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는 나를 아우처럼 귀여워해 주었고, 나는 그를 형으로 따랐다. 신입생인 나는 모든 대학생활을 동주로 말미암아 다져갔고, 시골뜨기 때가 동주로 말미암아 차차 벗겨져 나갔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기숙사 생활을 통해 착실하게 자져졌던 두 사람의 사귐은 윤동주가 4학년, 정병욱이 2학년으로 진급했던 1941년에 들어서면서 기숙사를 떠나 같은 방에서 하숙 생활을 하면서 더욱 깊어졌습니다.

 

5. 정병욱이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런 일이 '윤동주의 시집 간행'이었다니, 대단하네요, 윤동주는 그 시집에 담긴 시를 언제 썼나요?

 

- 윤동주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시집 간행을 기획했습니다. 자기의 시작품 19편을 골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이고 세 부를 직접 필사했는데요. 그 중 한 부는 자신이 가졌고, 한 부는 이양하 지도교수님께, 그리고 나머지 한 부는 후배 정병욱에게 줬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19편의 작품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수록된 시가 '별 헤는 밤'으로 1941년 11월5일로 적혀 있고, 시집을 여는 '서시'를 쓴 것이 11월 20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는 자선 시집을 만들어 졸업 기념으로 출판하려고 계획했던 것입니다.

 

6. 윤동주는 계획대로 졸업기념 작품을 출판했나요?

 

- 출판하지 못했습니다. 윤동주의 시를 받아 본 이양하 교수는 그에게 출판 보류를 권했습니다. '십자가', '슬픈 족속', '또 다른 고향' 같은 작품들이 포함돼 있는 그의 시집은 일본 관헌의 검열에 통과되기도 어려울뿐더러, 윤동주의 신변까지 위험할 수 있으니 때를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양하 교수의 권고에 따라 그 시집의 출판은 보류되었습니다.

 

7.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어떤 활동을 했나요?

 

- 1942년,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동경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그해 가을 경도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1943년 7월에 독립 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2년 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광복을 불과 반년 앞둔 1945년 2월 16일 28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 안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8. 안타까운 얘기네요, 그러면 국내에 있던 윤동주 후배 정병욱은 어떻게 됐습니까?

 

- 정병욱은 윤동주가 체포되었을 때로부터 반년 뒤인 1944년 1월 일제의 학도병으로 끌려갔습니다. 그전에 정병욱은 선배 윤동주로부터 받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를 광양 망덕포구에 계신 집으로 가져가 어머니께 잘 간수해 주실 것을 당부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 자신과 윤동주가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조선이 독립하면 그 원고를 연희전문학교로 보내 세상에 널리 알려달라는 비장한 부탁도 했습니다.

 

9. 일제 학병으로 끌려갔던 정병욱은 어떻게 됐습니까?

 

- 다행히 일제 패망 후 정병욱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정병욱의 어머니께서는 마루청 밑에 장독을 묻고 그 속에 명주 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 두었던 윤동주의 원고를 꺼내주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윤동주의 원고가 얼마나 위험하게 취급되었는지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생생한 증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0. 윤동주 원고는 언제 시집으로 출판됐나요?

 

- 정병욱은 1948년 정음사에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판함으로써 윤동주의 시가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습니다. 윤동주가 직접 제작한 세 부의 시집 중, 윤동주 본인 보관본은 일제에 체포 투옥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이양하 교수님께 드린 것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다행히 후배 정병욱에게 준 시집이 극적으로 출판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11.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망덕의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비로소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원고가 보관되었던 집이라는 말씀이죠?

 

- 맞습니다.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 바로 진월면 망적리에 소재한 정병욱의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자택이었습니다. 후에 그 집은 정병욱의 부친 정남석 님의 외종동생 소유로 넘어갔고 현재는 그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12. 이러한 사실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언제인가요? 그 과정이 궁금합니다.

 

- 정병욱 교수가 1976년에 작성하였던 회상문에서 그 유고 보존에 대한 전말을 소개하였지만, 그 보관 장소에 대한 관심은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 가옥 소유자의 딸이 재학 중이던 광양제철고 교지편집부에서 취재를 하여 망덕리 23번지가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이라는 이야기를 2005년 '한빛' 교지에 실었습니다.

 

13. 광양제철고 교지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니, 재미있네요. 그 이후 문화재로 지정되는 과정도 궁금하군요.

 

- 망덕에서의 윤동주 유고 보존 사실은 광양 지역신문의 보도로 더욱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그 보도를 접한 광양 시청이 망덕의 유고 보존 가옥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는 일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했구요. 마침내 광양시의 이성웅 시장님이 직접 찾아가면서 윤동주 유고 보존 가옥의 근대문화유산 등록 작업은 탄력이 붙었습니다. 그 결과 2007년, 망덕포구의 옛 정병욱 가옥은 '윤동주 유고 보존 정병욱 가옥'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문화재, 즉 근대문화유산 제341호로 지정됐습니다.

 

14. 윤동주 시인을 기념하는 행사도 광양 망덕에서 열리고 있나요?

 

- 예, 지난 2008년 여름에는 윤동주 시인의 고향인 만주의 조선족 학생들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중국 동북3성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윤동주 문학상'에 입상한 고등학생 20여 명이 광양 망덕포구의 '윤동주 유고 보존 졍병욱 가옥'을 직접 방문해, 이곳에서 즉석 연극대회까지 펼치는 장면을 보고 가슴 찡한 민족애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광양의 한 지역신문사에서도 '시인 윤동주와 광양의 만남'을 주제로 2008년 이후 매년 '윤동주 백일장 사생대회'를 열고 있습니다.

 

흔히 '역사는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윤동주 시인의 시와 그 유고가 보존되었던 가옥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니, 신기하고 재미있군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광양제철중 이은철 선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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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윤동주(1917~1945)가 쓴 글 124편을 모두 담은 ‘윤동주 전 시집’이 나왔다. 윤동주의 작품 전체를 한 권에 수록한 첫 책이다.

소실되지 않은 윤동주의 시와 수필뿐 아니라 윤동주를 위해 쓰여진 서문, 후기, 발문도 빠뜨리지 않았다. 

‘윤동주 전 시집’ 제1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48’은 1948년 초판본 전문이다. 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55’는 1948년 본의 시를 제외한 나머지 작품을 소개했다. 3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979’는 1948년 본과 1955년 본에 없는 시들로 이뤄졌다. 4부 ‘나중에 발굴된 시’는 기존의 윤동주 시집에서 볼 수 없는 작품 8편이다. 1~3부 시들은 당시 발간된 본문 순서대로, 4부는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를 빼고는 창작연도에 따라 실었다.

9인의 윤동주 추모문은 자체로 하나의 문학작품이라는 평이다. 1부에서는 1948년 나온 원본 그대로 정지용의 서문, 유영의 추도 시, 강처중의 발문을 읽을 수 있다. 북에서 활동했다는 이유로 사라진 정지용과 강처중의 글을 현대어로 정리해 넣었다. 2부에는 정병욱의 후기와 윤일주의 ‘선백(先伯)의 생애’, 3부에는 백철·박두진·문익환·장덕순의 후기가 들어있다. 윤동주 연보는 4부 뒤에 게재했다. 초판본의 서문과 발문 등은 1955년 이후 인쇄본에는 누락됐다. 시인 정지용은 6·25동란 때 납북됐고, 경향신문 기자 강처중은 소련에 가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가족에게 남기고 1950년 9월4일 가출한 뒤 행방이 묘연해졌다. 당시 강처중은 남로당 지하당원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전쟁이 터졌고, 서울로 침략한 인민군이 형무소를 개방하자 집에서 두 달 남짓 요양하다가 떠났다. 정지용은 1950년 9월께 동두천 부근에서 폭격에 희생됐다. 

정지용은 ‘서(序)’에 “아직 무릎을 꿇을 만한 기력이 남았기에 나는 이 붓을 들어 시인 윤동주의 유고(遺稿)에 분향하노라”고 적었다. 그리고 애도했다. “노자(老子) 오천언(五千言)에 ‘허기심 실기복 약기지 강기골(虛基心 實基腹 弱基志 强基骨)’이라는 구(句)가 있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강처중은 “그는 한 여성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이 사랑을 그 여성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끝내 고백하지 안했다. 그 여성도 모르는 친구들도 모르는 사랑을 회답도 없고 돌아오지도 않는 사랑을 제 홀로 간직한 채 고민도 하면서 희망도 하면서-쑥스럽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나 이제 와 고쳐 생각하니 이것은 하나의 여성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을 ‘또 다른 고향’에 대한 꿈이 아니었던가. 어쨌던 친구들에게 이것만은 힘써 감추었다”고 발문에 남겼다.

윤동주의 친구인 문익환은 ‘동주 형의 추억’을 전했다. “나는 동주 형이 시인이 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가 시를 쓴다고 야단스레 설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는 사상이 능금처럼 익기를 기다려서 부끄러워하면서 아무것도 아닌 양 쉽게 시를 썼다. 그렇게 자연스레 시를 쓰는 듯이 보였기 때문에 나는 그가 취미로 시를 쓴다고만 생각했었다. 한데 그는 몇 수의 시를 남기려 세상에 왔던 것이다. 그의 가장 동주다운 멋은 역시 그의 시에 나타나 있다고 나는 믿게 되었다. 그는 사상이 무르익기 전에 시를 생각하지 않았고, 시가 성숙하기 전에 붓을 들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시 한 수가 씌어지기까지 그는 남모르는 땀을 흘리기도 했으련만, 그가 시를 쓰는 것은 그렇게도 쉽게 보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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