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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 시인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대(寢臺)에
가즈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올 게외다.
1941년 5월
오늘은 윤동주 시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수록되어 있는 시 한 편을
읽어 봅니다. 「새벽이 올때까지」라는 시입니다. 이 시에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가는 사람이
동시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고통 혹은 괴로움, 살아가는 데에 고통이나 괴로움 등으로 죽거나
살거나 모두가 괴롭고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죽어도 살아도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한 가닥의 희망으로 이제까지의 고통은 지나가고 새로운 날이 시작됨을 노래한
시라고 합니다. 즉, 새벽이 오고 나팔소리가 들려 옴으로서 새로운 날이 시작되고 또한 조국 광복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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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시오.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시오.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이시오
이제 새벽이 오면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
이 시는 일제강점기에 절망 속에 사는 민중들을 보살피면 광복이 왔다는 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검은 옷을 입히고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흰 옷을 입히고 한 침실(寢室)에 가지런히 잠을 재우고 이들이 다들 울거들랑 젖을 먹여라. 이제 새벽이 오면 이를 알리는 나팔소리 들려 올 것이다.
이 시를 구절별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상징으로 쓰였다. ‘새벽’은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밤’이 사라지는 때로 광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시는 광복이 올 때까지 해야할 행동을 알리는 시이다. 어조는 ‘-시오’라는 강한 의지를 담은 명령조의 행동을 지시하는 어조이다. ‘다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 검은 옷을 입히시오. // 다들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 흰 옷을 입히시오. / 그리고 한 침실(寢室)에 / 가지런히 잠을 재우시오’에서 1연과 2연은 대구를 이루고 있다. 이 구절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 ‘검은 옷’과 ‘흰 옷’이 대구를 이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색깔이 다른 옷을 입히는 지 명확하게 알 수가 없다. ‘검은 옷’의 ‘검은 색’은 ‘절망, 불길함, 암울함’을 의미하므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절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흰 옷’의 ‘흰색’은 ‘희망, 순결, 순수’를 의미하는 색이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 외에도 다른 뜻이 더 있는 것 같다. 구지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을 색으로 구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필자는 화자(시인)이 이러한 구분을 하여 일제강점기 아래에 ‘낮과 밤’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이들을 ‘한 침실(寢室)에 / 가지런히 잠을 재우’는 데에 근거한다. 이들이 ‘한 침실(寢室)에’ 있다는 것은 생활터전이 같다는 것을 말한다. 같은 생활터전에서의 ‘흰 새’과 ‘검은 색’이 질서 있게 ‘가지런히’ 있다는 것은 낮과 밤의 반복으로 생각된다. 이 시의 전체적인 시간은 ‘새벽이 올 때까지’라는 제목으로 보면 ‘밤’이다. ‘밤’은 일제강점기를 의미한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아래 사는 희망을 잃고 또는 갖고 사는 사람들의 시간의 흐름인 낮과 밤을 ‘흰 옷’과 ‘검은 옷’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잠을 재우시오’는 일제강점기인 밤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죽어가는 사람’이나 ‘살아가는 사람’이나 절망적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휴식 중에서도 ‘밤’에는 ‘잠을’ 자는 것이 제일 적합한 휴식이다.
‘다들 울거들랑 / 젖을 먹이시오’에서 ‘-시-’는 화자의 명령을 듣는 청자가 화자보다 나이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임을 알려준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볼 때에 청자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여자 어른이다. 청자는 ‘젖을 먹’일 수 있는 실제의 여자 어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젖을 먹이’는 대상이 ‘죽어가는 사람들’과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젖먹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젖을 먹’인다는 것은 실제로 ‘젖을 먹이’는 것이 아니고 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행위인 것이다. 청자는 일제강점기 아래서 살고 있는 민중들에게 휴식을 주고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고귀한 대상인 것이다. 이들에게 휴식과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이는 매우 추상적이므로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가 없다.
‘이제 새벽이 오면 / 나팔소리 들려 올 게외다.’는 ‘새벽’이 오면 승리의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는 말이다. 앞 구절의 ‘다들 울거들랑 / 젖을 먹이시오’는 ‘젖을 먹이’라는 행동지침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새벽이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윤동주 다른 시인 <아기의 새벽>에서 ‘우리 집에는 / 닭도 없단다. / 다만 / 아기가 젖 달라 울어서 / 새벽이 된다.’에 근거한다. ‘젖 달라’ 우는 것은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인 것이다. 그래서 화자는 막연하게 ‘새벽이 오면’이 아니라 ‘다들울거들랑’으로 새벽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실제로 ‘새벽’이 오면 ‘이제’ 승리를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는 새벽을 알리는 소리이면서 승리를 알리는 소리이다. 일제에 승리하여 일제강점을 물리치고 광복이 되었음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릴 것이라고 자신의 추측을 청자에게 알려주고 있다.///전한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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